역사

그림과 지도로 보는 임진왜란 (1592년~1598년)

이슈톡 2020. 3. 7.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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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길게는 수천 년 동안 형성된 대륙 지역의 정치 · 경제의 통합에서 상대적으로 독립적일 수 있었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 체제 혹은 동아시아 국제정치 질서에 대해 일으킨 도전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대항해시대의 여파로 16세기 중반부터 힘이 부쩍 커져버린 해양 세력인 일본에 조선과 명이 대응하는 사이, 만주 지역에서 누르하치의 여진족이 흥기하였고 결국 한족의 명나라가 멸망하는 100년간의 연쇄반응이 유라시아 대륙의 동부 지역에서 일어났다. 또한 임진왜란의 실패로 인해 몰락한 도요토미 정권에 이어 등장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인의 활동을 억제하고 포르투갈 · 스페인 세력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등 내향적인 정책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그때까지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일본 세력은 소멸하였으며 이 지역에서는 오로지 포르투갈 · 스페인 이후의 유럽 세력과 중국 세력만이 외부 세력으로 남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중세까지의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질서를 붕괴시킨 전쟁이었다.

 

그림과 지도로 임진왜란을 구성해 보았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부채

 

– 일본 오사카성에 전시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부채. 조선·일본·명나라 지도가 그려져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부채를 보면 조선 · 중국 · 일본 등 3국 지도가 그려져 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거쳐 명나라를 정벌하고, 인도까지 진출할 야망을 갖고 있었다.

 

1592년 7월쯤 히데요시의 구체적인 세계 정복 계획이 나온다. 히데요시가 발급한 공문서에 세계 정복 계획이 들어있다. 천황은 베이징으로 옮긴다. 히데요시 자신은 남경 근처로 간다. 한반도는 누가 가서 지배하고 남은 본토는 누가 지배한다는 내용이다.

 


◎ 나고야 성(名護屋城)

현재 사가 현 가라쓰 시에 있는 나고야 성(名護屋城)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직전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축성한 성이다. (현재의 나고야 시와는 다른 곳이다)

가토 기요마사, 데라자와 히로타카가 성의 축성을 담당했다. 규슈의 여러 다이묘를 중심으로 인부를 동원하고, 공사를 강행해 불과 8개월만인 1592년 음력 3월에 완성했다. 규모는 당시 성곽으로는 오사카 성 다음가는 것이었다.

 

 

나고야 성의 위치.

 


◎ 부산진 전투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4월 14일(음력) 부산진 첨사 정발이 지휘한 조선군이 부산진에서 왜군과 싸운 전투.

 

부산진 전투 / <부산진 순절도> / 조선 영조 36년(1760년) 제작

위의 그림은 일본군 부산 상륙 상황을 보여준다.

 

– 1872년 지도, 임진왜란 이후 부산진의 위치가 조금 변했다 함

 


◎ 동래성 전투

동래성 전투(東萊城戰鬪)는 1592년 4월 15일(음력) 부산진 전투에 이어 일어난 임진왜란 두 번째 전투로 동래 부사 송상현이 2시간을 버티며 왜군을 끝까지 막아냈으나 결국 전사하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동래성 전투 / 동래부 순절도(東萊府殉節圖), 대한민국 보물 제392호 / 18세기 제작

 

– 그림에 표현되어 있는 사건들

 


◎ 탄금대 전투

충주 탄금대 전투(忠州彈琴臺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1592년 4월 28일(음력) 충주 탄금대에서 전멸한 전투이다.

(위키 백과 : 탄금대 전투)

 

왜 신립은 조령이 아니라 탄금대를 선택한 것일까?

많은 주장들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당시 일본군의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은 조령으로, 가토 기요마사의 2군은 죽령, 구로다 나가마사의 3군은 추풍령으로 진격했다. 2군이 계획을 변경해 조령을 넘었지만, 조선군이 조령만을 지키다 포위될 우려도 있고, 일본의 다른 부대들은 계속 한양으로 진격할 수도 있으니 충주를 선택한 것이다는 주장.

 

회본태합기의 일본군이 27일 밤에 당도했다는 급보를 듣고 신립이 급히 마을로 가는 장면 삽화. 회본태합기(에혼 다이코기)는 에도시대 후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문학 작품이다.

 

회본태합기(에혼 다이코기)의 김여물 삽화. 왼쪽의 장수가 김여물이다.

– <선조실록>에는 신립처럼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 <회본태합기>에서는 용맹히 싸우다 전사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 탄금대 열두대에서 바라본 남한강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의 열두대라고 하는 절벽은 신립이 전시에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하는 곳이다. 전세가 불리하여 패하게 되자 신립은 강에 투신자살하였다.

 


◎ 선조 피난

1592년 4월 30일 일본군이 북진해 오자 조선 왕실과 조정은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하여 분노한 백성이 궁궐과 전적을 태워버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문학 회본태합기(에혼 다이코기)에 삽입된 선조 피난 행렬 삽화

 


◎ 한산도 대첩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 8일 조선군 함대가 한산도에서 일본군 함대를 대파한 전투.

 

 

– 류성룡의 <징비록>

당초 敵은 수륙 양면으로 합세하여 서쪽 방면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한번의 싸움에서 李舜臣에게 크게 패함으로써 완전히 위세가 꺾이고 말았다. 이 때문에 고니시가 비록 평양성을 점령했지만, 더 이상 전진을 못 하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가 보존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인해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킬 수 있었고, 아울러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 일대를 확보하여 군량을 조달하고, 나아가 조정의 호령이 전달되게 하여 나라의 힘을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또한 遼東의 金州·復州·海州·蓋州와 天津 등지에 敵의 사나운 발자국이 미치지 못하도록 막았기에, 明의 구원병이 육로로 나와 우리를 도와 敵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이 모든 것이 李舜臣의 한 번 싸움에 이긴 功이었으니, 아아, 이것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 누르하치의 원병 파견 제의

1592년 9월, 일본군에 밀려 의주까지 쫓겨갔던 조선은 건주여진 누르하치의 원병 제의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1592년 선조실록 30권, 선조 25년 9월 17일 갑술 4번째기사

병부(兵部)가 요동 도사(遼東都事)를 시켜 자문을 보내왔는데, 자문에,

“이번에 여진(女眞)의 건주(建州)에 사는 공이(貢夷)와 마삼비(馬三非) 등이 하는 말에 의거하건대 ‘우리들의 땅은 조선과 경계가 서로 연접해 있는데 지금 조선이 왜노(倭奴)에게 벌써 침탈되었으니, 며칠 후면 반드시 건주를 침범할 것이다. 노아합치(奴兒哈赤) 휘하에 원래 마병(馬兵) 3∼4만과 보병(步兵) 4∼5만이 있는데 모두 용맹스런 정병(精兵)으로 싸움에는 이골이 났다. 이번 조공에서 돌아가 우리의 도독(都督)에게 말씀드려 알리면 그는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좋은 사람이니 반드시 위엄찬 화를 내어 정병을 뽑아 한겨울 강(江)에 얼음이 얼기를 기다렸다 곧바로 건너가 왜노를 정벌 살륙함으로써 황조(皇朝)에 공을 바칠 것이다.’ 했습니다. 이 고마운 말과 충의가 가상하여 그들 말대로 행하도록 윤허함으로써 왜적의 환란을 물리치고자 하나 단지 오랑캐들의 속사정은 헤아릴 수가 없고 속마음과 말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저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이니 선뜻 준신하기 어렵습니다.”

하였고, 우리 나라의 자문에는,

“본인은 자문의 내용을 알았습니다. 우리 나라는, 명조(明朝)에서 우리가 왜구에게 함락된 것을 불쌍히 여겨 구제해 줄 것을 생각하여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활한 오랑캐들의 흉악한 속임수로 하는 말이라도 구환(救患)해 준다고 언급하면 또한 모두 즐겁게 듣고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랑캐의 속셈을 헤아리기 어려운 염려가 있어 선뜻 믿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요동의 무진아문(撫鎭衙門)에서 은밀히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되 아울러 걱정해야 할 별도의 흔단이 없는가를 살피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첫째로는 엄격하게 약속을 맺어 소요를 일으키지 못하게 했고, 둘째로는 조금이라도 방애되는 바가 있으면 바로 군사의 출동을 정지하게 하였으니, 이는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계책을 세우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인이 전후로 받은 은혜는 죽더라도 머리를 서쪽으로 둘 것이며 결초보은(結草報恩)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본국의 서북쪽 일대는 건주(建州) 삼위(三衛)와 국경이 연접해 있어 조상 때부터 누차 그들로 인한 환란을 받았습니다. 명조(明朝) 열성(列聖)께서 만리를 훤히 내다보는 명견(明見)에 힘입어 성화(成化) 15년118) 에 헌종 순황제(憲宗純皇帝)께서 크게 화를 내시어 군사를 출병시키면서 본국(本國)에 칙유(勅諭), 힘을 합쳐 정벌하여 그들의 두목인 이만주(李滿住)를 잡아 목베었습니다. 그로부터 저 적도의 여얼(餘孽)들은 늘 분한 생각을 품고서 매번 저희 나라 압록강 연안에 이르러 노략질을 자행하였습니다. 본국이 항상 국경의 수비에 애쓴 보람으로 겨우 막았습니다만, 이들 오랑캐가 본국에 원한을 품은 것은 한 시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어서 사나운 마음으로 틈을 엿보아 온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들 무리인 마삼비(馬三非) 등이 왜적을 토벌한다는 이름을 빌어 병부에 아뢰면서 겉으로는 양순하게 돕는 체하고 있으나 속으로는 물어뜯으려는 계책을 품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예측할 수 없는 화가 발생할 것입니다.

본인은 종묘와 사직이 폐허가 되었고 선조의 능묘를 보전하지 못하여 근심과 울분이 병이 되었으나 더욱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채 구차한 목숨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지금 적세가 사방에서 핍박하고 있으므로 중국에서 끝까지 불쌍하게 여겨 구원하여 주기만을 믿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즉시 흉도(凶徒)에게 분명한 칙서를 내려 간계를 시원하게 깨뜨려 바깥 오랑캐가 넘보려는 조짐을 막고 급히 왕사(王師)를 진발시켜 천토(天討)를 보여줌으로써 중국 정토(征討)의 위엄을 베푸신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 진주대첩

1592년 10월 제1차 진주성 공방전은 진주대첩으로서 한산대첩과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삼대 대첩 중 하나로서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좌절하게 한 전략상 중요한 승리였다.

 

– 민족 기록화

 

– 임진왜란 이후의 진주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분리되어 있다.

 


◎ 함경도와 가토 기요마사

 

–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노란색,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는 청색의 진로

조선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영토에 편입된 함경도 지역은, 일찌기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 조선인, 사민정책을 통해 한반도 남쪽에서 이주한 조선인 등이 뒤섞여 불안정한 상태였다. 게다가 각종 정치적 혼란 때마다 발생하는 유배인들까지 이 지역에 보내져 불안정성이 커졌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러한 상황이었던 함경도에 진입했다.

일찌기 누르하치의 조상 먼터무가 살았던 회령으로 피신한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가토에게 넘긴 것은 전라도 전주에서 유배온 국경인(鞠景仁)이라는 사람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행적을 전하는 중요한 문헌인 ‘기요마사 고려진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오랑캐와의 경계인 회령이라는 성에 도착했다. 제왕은 이 곳에 있었다. 기요마사는 회령에서 4리 떨어진 경성, 조선인들은 덕원이라 부르는 곳에 도착했다. 이 회령이라는 곳은 일본으로 말하자면 하치조지마(八丈が嶋)·이오가시마(いわうが嶋)와 같은 유배지로 조선국 안에 있다. 3리 사방의 들판 가운데 산이 있는데, 석벽으로 성을 쌓아 도성에서 보낸 유배인들을 둔다. 주변 들판을 개간하여 조·피를 길러 산다. 그런데 그 성에 대대로 살아온 유력한 유배인들이 한 패가 되어 ”제왕은 우리에게는 누대의 적이므로 이 때를 틈타 생포하여 일본인에게 넘겨서 평소의 원한을 풀고 영화를 누리자“라고 하여 모두 생포하였다.”

 

– 가토 기요마사가 회령에서 반군에 의하여 구금된 상태의 두 왕자를 인계받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또한, 두 왕자가 도주한 경로를 팻말에 적어둔 사람도 있었음이 조선과 일본측 기록에 보이는 등 함경도에서는 조선 정부에 대한 반민(叛民) 활동이 활발했다. “어떤 사람이 숙천부(肅川府)의 기둥에, 어가는 강계가 아니라 의주로 향하였다고 적었다. 왜적이 그 땅으로 향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왜적으로 하여금 주상이 계신 곳을 알게 하려 한 것이리라. 어떤 사람이 이 글을 적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난민의 짓일 것이다” (‘선조실록’ 1592년 6월 28일).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회령에서 조선의 두 왕자를 생포한 가토 기요마사는 두만강을 넘어 야인여진과 충돌한다. 일본측 문헌에서는 이들 야인여진을 ‘오랑카이’라고 부른다. 당시 조선에서 북방 이민족을 가리키던 ‘오랑캐’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다. 원래 오랑캐는 헤이룽장성 지역에 거주하던 몽골계 부족 우량하이(兀良哈)에서 온 말이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몽골과 여진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오랑캐라고 불렀다.

조선과 ‘오랑캐’ 여진족 세력의 접점인 회령에 도착한 가토가 두만강을 넘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경쟁상대였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에서 진격을 멈추었기 때문에 자신이 만주를 통과해 명나라로 진격하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함경도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함경도 여진족의 배후에 존재하는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을 위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회령에서 가토가 통역관을 통해 조선인과 주고받았다고 하는 대화가 ‘기요마사 고려진 비망록’에 전해진다.

“오랑캐라는 곳은 무사가 많고 매우 강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오랑캐인들과 싸워서 일본인 무사의 용맹함을 그들에게 보여줘야겠다. 여기서 얼마나 들어가면 되고, 그 수는 얼마나 되는가.”

“여기서 4리 반 정도 가면 마을이 나옵니다. 거기서 1리 정도 가면 성 13개가 있습니다. 거기서 다시 하루를 가면 오랑캐의 도성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회령인들을 앞세워 그 곳을 공격하여 일본인의 실력을 보여주어야겠다.”

그리하여 1592년 7월, 가토는 두만강을 건넌다. 여진족과 일본인이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 충돌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가토는 몰랐겠지만, 10년 전 이순신도 이 지역에서 몇 년에 걸쳐 여진족과 싸웠다. 서로 맞부딪힌 적이 없는 이순신과 가토는, 이처럼 여진 세력과 충돌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여진족에 대해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한다. 이순신은 녹둔도를 기습한 여진족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는 죄로 백의종군했고, 가토 역시 오랑캐 즉 야인여진과의 전투에 패하여 함경도로 퇴각한다. 일본측 문헌에서는 가토가 오랑캐의 도성인 엔탄을 포함하여 13개 지역을 함락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가토가 야인여진 세력에 패하였음을 감추기 위한 근거 박약한 주장일 뿐이다.

이후 가토는 함경도에서 조선인들로부터 세금을 걷고 겨울을 나는 등, 다른 지역을 점령한 일본 장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배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 사이 일본군 지배영역과 야인여진 세력 사이의 공백 지대인 함경도 북부에서는 윤탁연 · 정문부 등의 조선군이 세력을 결집하고 있었고, 이들은 1593년 초 가토 세력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 원문 발췌 : [김시덕의 임진왜란 열전] 이순신 vs 가토 기요마사

 


◎ 북관대첩

북관대첩(北關大捷)은 1592년~1593년 함경도에서 의병장 정문부가 경성과 길주 등지에서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와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과 여진족들을 모두 무찌르고 함경도를 탈환한 전투이다.

 

– 북관(지금의 함경도)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들의 업적을 그린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 중 북관대첩을 그린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

– 고려대 박물관 소장 / 17~18세기 제작 추정

 


◎ 평양성 탈환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1월 6일부터 9일까지 평양에서 조·명연합군과 왜군이 벌인 전투로 병력은 조선 10,000여명, 명나라 43,000여명, 일본군이 16,000여명이었다. 많은 병력 차이와 화포 부대의 운용으로 평양성 탈환에 성공했다.

이 평양성탈환은 이제까지 후퇴만 계속하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주요 계기가 된 전투였으며, 관서지방이 왜군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평양성 전투도 / 18세기 / 8폭 병풍 / 한남대 박물관 소장

* 임진왜란 전세 뒤바꾼 전투, 한눈에 생생 묘사

 

– 에도시대 후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문학 ‘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 에혼타이코키)’에서의 평양성 전투

평양성에서 탈출하여 후퇴하는 고니시를 따라 종군했던 선교사 프로이스는 로마교황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크리스천 영주인 甲斐 태수(黑田長政)가 주둔하고 있는 城塞(성새)에 도착하기까지 다시 사흘간 밤낮으로 쉬지 않고 계속 걸어야 했다. 더욱이 고니시 부대는 군량을 1일분밖에 준비하지 않았다. 그 사이 극심한 기아에 허덕였는데, 주위 일대에는 눈이 덮여 먹을 풀도 발견할 수 없어 눈을 삼켜 겨우 연명했다. (中略) 조선인 및 중국인이 신고 있는 두꺼운 가죽신의 사용도 알지 못해 추위와 물기에 약한 짚신을 신었던 탓에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많은 병사는 엄지발가락이 동상에 걸려 떨어져 나가…

 


◎ 벽제관 전투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1월 25일에서 27일까지 경기도 고양시 벽제관 부근에서 후퇴하던 일본군과 추격하던 명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류성룡의 <징비록>에 의하면 본대인 보병을 후방에 두고 무리하게 기병과 지휘부만 이끌고 적진 깊숙이 이끌고 들어갔다가 대패하였다고 한다.

 

명나라측 기록은 압도적인 다수인 일본군 10만 명을 패퇴시키고 무사히 후방으로 철수한 승리라고 하지만 일본측 기록은 명나라군 10만 명을 격파한 승리라고 한다.

 

– 에도시대 후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문학 ‘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 에혼타이코키)’에서 나오는 벽제관 전투도

 

– 벽제관 전투 개괄도

 


◎ 행주대첩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대파한 싸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 행주대첩도

 

또 다른 행주대첩도

 


◎ 진주성 함락

1593년 6월에 벌어진 왜군과의 혈전. 93년 4월 서울에서 철수한 왜군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동남해안에 집결했다. 왜군은 강화회담을 추진하는 한편, 1차 진주성 전투의 패전을 설욕하고 전라도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진주성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했다.

 

– 진주성을 공격하고 있는 가토 기요마사의 모습 / 晋州城合戦之図(月岡芳年画) / 1839 – 1892년

 

– 에도시대 후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문학 ‘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 에혼타이코키)’에서 나오는 진주성 전투도. 귀갑차를 사용하여 성벽을 무너뜨리고 있다.

– 국립중앙도서관의 소장자료 ‘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 1919년본

 


◎ 기근과 역병

전쟁의 여파로 전국적인 대기근 발생함. (1593년 ~ 1594년)

계갑대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은 중강개시를 열어 명의 곡물을 유입했다.

 

 

<재조번방지 /1593.2>

곧 군수를 지낸 남궁제를 진휼감독관으로 임명하여 솔잎으로 가루를 만들어서 솔잎가루 10홉에 쌀가루 1홉을 섞어 물에타서 마시도록 하였지만,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서 살아난 사람이 얼마 안 되었다.

 

<쇄미록 / 1593.7.15>

어제 오는 길에 보니 7, 8세 되는 아이가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었고, 여인 하나는 길가에 앉아서 얼굴을 가리고 역시 슬피 울고 있었다. 괴이해서 물어보니 “지금 내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같다”고 했다. “왜 버리고 갔느냐?”고 물었더니, “세 사람이 떠돌면서 구걸했는데, 이제는 더 빌어먹을 곳이 없어서 장차 굶어 죽게 되어 내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으니, 우리는 정녕 굶어죽을 수밖에 없어서 우는 것이다”고 했다.

 

<선조실록 26년(1593년) 11월 13일>

신이 이 달 15일 남쪽 진제장에 달려가 보니, 도로의 굶주린 백성이 잇달아 호소하기를 “죽이 물과 같고 겨와 쭉정이 등의 잡물을 섞었다”고 했습니다. 남은 죽을 보니 과연 호소하는 말과 같았고, 마당에서 미처 먹지 못한 사람들도 일시에 원통하다고 하기에 즉시 딴 죽을 마련하여 먹였습니다.

 

<선조실록 26년(1593년) 12월 9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근래에 서울의 진제장에서 사망하는 사람이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그 가운데 남부의 진제장에서 사망하는 사람이 더욱 많습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도로에다 끌어내어 놓는데, 다른 굶주린 백성들이 그 시체를 베어내어 가지고 갑니다. …”고 하였다.

 

<선조실록 27년(1594년) 3월 10일>

간혹 보내오는 자가 있다 해도 모두 파리하여 얼굴색이 흙빛 같으니 10리만 행군해도 쓰러지는 자가 10명에 7, 8명이나 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군병도 모두가 느릅나무 껍질이나 소나무 껍질을 가루로 만들어 군량을 삼고 있었습니다.

 

<쇄미록 / 1594.2.23>

오늘 아침엔 먹을 것이 없어서 송피와 도토리에 콩을 조금 섞어 쪄서 상하가 나누어 먹었다. 나만 홀로 7홉 쌀로 밥을 지어서 두 손자, 단녀와 함께 나누어 먹었으니 탄식한들 어찌 하겠는가.

 

<쇄미록 / 1594.4.3>

근래에는 걸인이 아주 드물다. 모두 말하기를 몇 개월 안에 이미 다 굶어죽었기 때문에 마을에서 구걸하는 자를 드물게 본다고 한다. 비록 먼 곳은 보지 못했지만, 이 고을 근처에는 길가에 굶어죽은 자가 즐비하니 사람들의 말이 헛된 것은 아니다.

 

<쇄미록 / 1594.4.10>

저녁에는 마른 회화나무 잎에 콩과 보리를 조금 섞어 쪄서 처자들이 반 그릇씩 나누어 먹고 지내니 차마 볼 수가 없다.

 

<연려실기술 선조조고사본말, 난중시사총록(亂中時事摠錄)>

갑오년(1594년) 여름에는 큰 소의 값이 쌀 서 말에 불과했고, 가는 포목 값은 조 몇 되가 되지 못했으며, 진기한 보배도 팔 수 없었다. 사람이 서로 죽여서 먹으니 여자와 어린아이는 감히 마음놓고 나다니지 못했다. 굶어죽은 사람들이 잇달았는데 굶주린 백성이 다투어 그 고기를 먹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의 뼈를 발라 즙을 내어 마시기도 했는데, 이들도 발길을 돌리기도 전에 모두 죽었다.

 


◎ 강화 결렬

석성 등 명군 강화론자들은 히데요시를 일 국왕에 책봉하면 일본이 조선에서 철수할 거라 황제에게 거짓보고를 했다. 히데요시는 책봉식이 끝난 뒤 명 황녀가 후궁으로 오고 조선이 4도를 떼어주고 무역 허용할 거란 기대도 깨지자 1597년 1월 조선을 재침략한다.

 

– 명의 신종황제(神宗皇帝)가 내린 책봉문(冊封文). 1596년 9월, 명 황제는 책봉사 양방형을 보내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했다. 황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강자로 떠오른 뒤 중국을 사모하여 내부(來附)했기 때문에 특별히 일본 국왕으로 삼는다’며 ‘향후 중국의 울타리이자 신료로서 충성의 마음을 변치 말라’고 유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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