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19세기(The long 19th century)란,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창안한 개념으로 1789년부터 1914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홉스봄은 장기 19세기를 다루는 세 권의 책을 발표하였는데 첫 번째는 혁명의 시대(The Age of Revolution)로, 1789년부터 1848년까지를 포괄한다. 두 번째는 자본의 시대(The Age of Capital)로, 1848년부터 1875년까지를 포괄한다. 마지막은 제국의 시대(The Age of Empire)로, 1875년부터 1914년까지를 포괄한다. 홉스봄(Eric Hobsbawm)은 1848년 혁명을 그의 역저『혁명의 시대』의 종점으로 삼고, 아울러 『자본의 시대』에서의 시작으로 삼고있다.
아리기(Giovanni Arrighi)는 영국이 당시의 체계의 카오스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킴으로써 세계헤게모니가 되었다 보았다.
체계 전체에 걸친 반란의 새로운 물결은 대서양을 차지하려는 투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투쟁이 일단 폭발하자, 반란은 영국-프랑스의 경합이 전적으로 새로운 지반들 위에서 재생될 조건들을 만들어 냈으며, 이런 새로운 경합이 끝난 후 반란은 3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1776 ~ 1848년 시기 전체를 놓고 볼때, 두번째 반란의 물결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와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통치자-피지배자 관계를 완전히 변형시켰고, 두번째로 그 변형에 적절하도록 국가간 체계를 완전히 재편한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세계헤게모니(영국의 자유무역 제국주의)를 수립시켰다.
우선 주로 홉스봄의 『자본의 시대』를 중심으로 1848년 혁명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 정리해 보았다.
‘공산주의라는 망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극적인 문장으로 시작되어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속박의 사슬밖에 없다. 그들은 세계를 얻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로 끝나는 『공산당선언』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1848년 2월 24일경에 간행된다. 그리고 그것이 나온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들 예언자들의 희망과 공포는 모두가 당장에라도 실현될 듯이 보였다. 반란으로 프랑스에서 군주제가 무너졌고 공화제가 선포되었다. ‘국민들의 봄'(springtime of people)이라 불리는 1848년의 유럽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1848년 혁명의 원인은 1846년부터 계속된 경제위기와 일부 연관된다. 뿌리가 마르는 감자병이 유행하여 감자 수확은 전무하였고 극심한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죽는 사태가 빈발해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긴장과 불안이 감돌았다. 산업 부문도 농업의 영향을 받아 사업 실패의 급증, 실업, 임금하락 등 불안정이 지속되었다.
1848년 혁명이 그 전과 그 후에 발생했던 다른 혁명들과 구분되는 것은, 그것이 퍼져나간 속도의 급속함과 지리적 범위의 광대함이다. 전 유럽이 1848년 혁명에 휩쓸려 들어갔고 혁명은 남미로도 퍼져나갔다. 잠재적으로 최초의 전 세계적 혁명이었다.
사실 그와 같은 전 대륙적 또는 전 세계적 규모의 폭발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1848년의 혁명은 유럽 대륙의 선진지역과 후진지역 양쪽에 모두 영향을 미쳤던 유일한 혁명이다. 그것은 가장 광범위하게 파급된 혁명이었으나, 또 가장 성공하지 못한 혁명이었다. 유럽에서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구체제는 다시 복귀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공화국의 경우에도, 새로운 체제는 그 체제 자체를 발생시킨 봉기(蜂起)와는 최대한의 거리를 두려고 애쓰고 있었다.
1848년 혁명과 더불어 옛 ‘혁명의 시대’의 정치혁명과 산업혁명의 균제성은 깨어지고 그 모습도 변한다. 정치혁명은 후퇴하고, 산업혁명이 앞으로 나선다.
1848년을 ‘유럽이 전환에 실패한 전환점’의 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과 거리가 멀다. 유럽은 (전환은 했으되) 혁명적으로 전환하지는 않았던 것 뿐이다. 유럽이 혁명적으로 전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의 해만이 홀로 덩그렇게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혁명의 해는 하나의 전주곡이기는 해도 오페라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대문(大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문을 통과하는 사람이 다음에 부딪히게 될 풍경의 성격을 짐작할 수있게 해주는 그런 건축양식으로 된 대문이 아니었다.
1848년의 ‘세계혁명’은 이데올로기의 파노라마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 전까지는 양대 이데올로기(보수주의 대 자유주의)간의 경쟁이었지만, 바야흐로 오른쪽에는 보수주의자가, 중간에는 자유주의자들이 그리고 왼쪽에는 급진주의자들이 자리잡게 됨으로써, 3대 이데올로기 사이의 투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1848년의 혁명은 구체제와 진보적 세력들의 연합군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아니라 ‘질서’와 ‘사회혁명’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베른슈타인(Bernstein)은 1848년 혁명의 감동적인 내용보다는 그것의 결과에 주목하였다. 1848년 혁명은 영웅적인 것이긴 하였지만 그것이 가져다준 결과는 전혀 영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반혁명을 유발하였고 보수반동의 강화에 기여하였을 뿐이었다. 혁명은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혁명적 노력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혁명이 신화에 불과하며 현실을 이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그것은 혁명의 신앙에 대한 그의 경고였다.
1848년 혁명은 부르주아들로 하여금 영구히 혁명세력이 아니게 만들어버렸다. 1848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했지만, 정작 부르주아들은 혁명에서 물러났다. 이와 같은 사태의 발전으로, 이후 유럽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와 반동으로 귀결되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혁명은 자유주의 시대를 만들어냈다고 홉스봄은 분석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을 수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한편으로 혁명이란 위험스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계급적 요구가 혁명 없이도 실현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대는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가 확대되었지만, 정치체제 자체는 보수화되어가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1848년 혁명이 유럽에서의 전반적 혁명으로서는 마지막이 되어버린 상황, 혁명은 패배했고 기존의 지배세력들이 그대로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이 사회를 변화시켰던 이러한 상황, 부르주아들이 결코 지배자로서 등장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질서가 점점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확대로 나아갔던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에 대해 홉스봄은 객관적인 토대의 발전양상, 즉 1850년대의 대호황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1850년대에 들어서서 영국의 면제품 수출물량은 2배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프로이센에서는 신설 주식회사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저렴한 자본과 가격상승에 힘입은 자본주의의 발전은 1853년에 나타났던 곡물가격 상승을 상쇄할 정도로 팽창했다. 유럽은 호황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호황이 야기한 정치적 결과는, 혁명에 흔들리던 정부에게는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었고 혁명가들에게서는 희망을 앗아가버렸다.
아리기는 ‘공산당선언’ 이후 지금까지 140년 가량의 자본주의 역사를 경제적 호황국면과 불황국면을 고려하면서 1848년에서 1896년, 1896년에서 1948년, 그리고 1948년에서 현재까지 대략 비슷한 기간의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 1848년 유럽의 혁명. 프랑스에서는 2월 24일에 공화제가 선포되었다. 3월 2일에는 남서 독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났고, 3월 6일에는 바이에른, 3월 11일 베를린, 3월 12일 빈, 그 직후에 헝가리, 3월 18일에는 밀라노, 즉 이탈리아(이탈리아에서는 이미 이것과 별개의 반란이 시칠리아 섬을 장악하고 있었다)에서 잇달아 혁명이 일어났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자본의 시대
– 에릭 홉스봄 / 정도영 옮김 / 한길사 / 1998.09.15 (1975)
1789년부터 1848년에 이르는 시대는 이중혁명에 지배된 시대였다. 즉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주로 영국에 한정되었던 산업의 일대 변혁, 그리고 프랑스가 관련되고 프랑스 국내에 한정되었던 정치적 변혁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혁명(산업혁명과 정치혁명)은 새로운 사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과연 승리하여 득의양양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사회, 프랑스 역사가들이 말하는 이른바 ‘제패하는 부르주아'(conquering bourgeois)의 사회가 될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 당시의 사람들은 오늘의 우리에 비해 한결 더 불확실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부르주아적 정치사상가들의 등 뒤에는 온건한 자유주의 혁명을 사회적 혁명으로 전화(轉化)시키려는 대중들이 채비를 갖추어 버티고 있었다. 자본주의 기업가의 아래와 주변에는 불만을 안고 자리에서 밀려난 ‘노동빈민’들이 성난 물결같이 들끓고 있었다. 1830년대와 1840년대는 위기의 시대였다. 낙천주의자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그 위기가 몰고올 결과가 꼭 어떤 것이라고 감히 예언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도 1789~1848년의 기간에는 혁명의 그러한 이중성이 이 시기의 역사에 통일성과 균제성(均齊性)을 부여하고 있다. 그 시기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선 쓰기도 쉽고 읽기도 쉽다. 그 까닭은 그 시대의 뚜렷한 테마와 뚜렷한 형태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이다. 또 그 연대적 범위도 우리가 인간사에서 그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뚜렷하고 명확하니 말이다.
이 책의 출발점이 되는 1848년의 혁명과 더불어 옛 균제성은 깨어지고 그 모습도 변한다. 정치혁명은 후퇴하고, 산업혁명이 앞으로 나선다. ‘국민들의 봄'(springtime of people)이라 불리는 저 유명한 1848년은 (거의) 문자 그대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럽 혁명이었다. 그것은 좌익에게는 꿈의 순식간의 실현이었고 우익에게는 악몽이었으니, 코펜하겐에서 팔레르모, 브라쇼브에서 바르셀로나에 이르는 러시아 및 터키 두 제국 서쪽의 유럽 대륙 대부분의 곳에서 낡은 체제들이 거의 때를 같이하여 무너졌다. 이것은 예상도 되었고 예언도 되었던 일이었으니, 그것은 이중혁명의 완성이자 그 논리적 소산이기도 한 듯했다.
혁명은 전 세계에서 빠르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도 – 정치 망명가들은 수년 동안 그렇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 아주 최종적인 실패였다. 이후로 세계의 ‘앞선’ 나라들에서는 1848년 이전에 구상되었던 그런 유의 전반적인 사회혁명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한 사회혁명운동의 중심, 따라서 20세기에 나타날 사회주의 체제 및 공산주의 체제를 위한 사회혁명운동의 중심은 주변적 · 후진적 지역에 자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이 다루는 시기에는 그러한 종류의 혁명운동까지도 일화적(逸話的) · 고대적(古代的), 그리고 그 자체가 ‘미개발적’인 것에 머물렀다. 그리고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급격하고도 광범위한, 언뜻 보아 끝이 없는 확장이 ‘선진국’들에게 정치적으로 (혁명 아닌)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주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프랑스의) 정치혁명을 삼켜버리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역사는 한쪽으로 기운 일방적인 시대의 역사이다. 그것은 첫째로 그리고 주로 산업자본주의적인 세계경제의 거대한 진전의 역사이며, 산업자본주의의 진전이 나타내는 사회질서의 역사,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정당화하고 승인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이념과 신조들, 즉 이성과 과학, 진보와 자유주의를 믿는 이념과 신조의 역사였다. 유럽의 부르주아지들은 그 제도, 공적(公的)인 정치적 지배에 나서는 것을 망설이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시대는 부르주아지의 승리의 시대였다. 이 정도 – 아마도 이 정도에 한하는 것이지만 – 까지는 혁명의 시대가 아주 숨을 거둔 것이 아니었다. 유럽의 중류계급들은 민중에게서 겁을 집어먹었고 계속 그 겁먹은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즉 ‘민주주의’란 여전히 그들에게는 ‘사회주의’에 이르는 확실하고도 신속한 서곡(序曲)이라고밖엔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승리하던 때 승자인 부르주아 계급의 일들을 공식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란, 다름 아닌 지극히 반동적인 프로이센 출신의 한 시골 귀족, 프랑스에서는 사이비 황제, 그리고 영국에서는 대대로 내려오는 귀족적 지주들이었다. 혁명의 공포는 현실적이었고, 그것은 뿌리 깊은 근본적인 불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세계 자본주의의 형성과 전개 – 『자본의 시대』 해제
– 김동택 / 한길사 / 1998.09.15
1948년 혁명은 유럽 전역에서 혁명이 발생한 해이자 『공산당선언』이 집필된 해였다. 1848년 혁명이 그 전과 그 후에 발생했던 다른 혁명들과 구분되는 것은, 그것이 퍼져나간 속도의 급속함과 지리적 범위의 광대함이다. 전 유럽이 1848년 혁명에 휩쓸려 들어갔고 혁명은 남미로도 퍼져나갔다.
하지만 1848년 혁명은 가장 확실하게 패배한 혁명이기도 했다. 유럽에서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구체제는 다시 복귀되었다. 홉스봄은 그러나, 혁명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이 일방적으로 패배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혁명은 분명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장했던 요구사항들은 비혁명적인 방식으로 이후 유럽 사회를 변형시켜나갔던 것이다.
1848년에 발생했던 혁명들은 여러 측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첫째 모두 성공했으나 또 모두 재빨리 실패했다는 점이며, 둘째 사회혁명을 예상케 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혁명의 특성은 이후 유럽에 두 가지 결정적인 사태발전을 낳게 했다. 전자의 경우 유럽에서는 정치혁명이 후퇴하고 산업혁명이 모든 변화의 동인이 되게끔 한 원인이기도 했는데, 후자의 경우는 부분적으로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게끔 한 원인이기도 했는데,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노동빈민 계급의 급진화가 사회혁명을 야기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구체제의 지배계급들만큼이나 겁을 먹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자들은 그 시점부터 혁명에 대한 반대자로 돌아서게 되었고, 구체제의 지배계급들과 타협하여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따라서 1848년 혁명은 부르주아들로 하여금 영구히 혁명세력이 아니게 만들어버렸다. 1848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했지만, 정작 부르주아들은 혁명에서 물러났다. 이와 같은 사태의 발전으로, 이후 유럽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와 반동으로 귀결되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혁명은 자유주의 시대를 만들어냈다고 홉스봄은 분석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을 수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한편으로 혁명이란 위험스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계급적 요구가 혁명 없이도 실현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대는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가 확대되었지만, 정치체제 자체는 보수화되어가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
홉스봄이 서술하고 있는 『자본의 시대』는 모순투성이의 사회인 것처럼 보인다. 1848년 혁명이 유럽에서의 전반적 혁명으로서는 마지막이 되어버린 상황, 혁명은 패배했고 기존의 지배세력들이 그대로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이 사회를 변화시켰던 이러한 상황, 부르주아들이 결코 지배자로서 등장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질서가 점점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확대로 나아갔던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에 대해 홉스봄은 객관적인 토대의 발전양상, 즉 1850년대의 대호황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1850년대에 들어서서 영국의 면제품 수출물량은 2배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프로이센에서는 신설 주식회사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저렴한 자본과 가격상승에 힘입은 자본주의의 발전은 1853년에 나타났던 곡물가격 상승을 상쇄할 정도로 팽창했다. 유럽은 호황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호황이 야기한 정치적 결과는, 혁명에 흔들리던 정부에게는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었고 혁명가들에게서는 희망을 앗아가버렸다.
윌러스틴의 세계체제분석
– 이매뉴얼 윌러스틴 / 당대 / 2005.03.17 (1982)
1848년의 ‘세계혁명’은 이 이데올로기의 파노라마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전까지는 양대 이데올로기(보수주의 대 자유주의)간의 경쟁이었지만, 바야흐로 오른쪽에는 보수주의자가, 중간에는 자유주의자들이 그리고 왼쪽에는 급진주의자들이 자리잡게 됨으로써, 3대 이데올로기 사이의 투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1848년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두 가지 사건의 발생이 무엇보다도 핵심적이었다. 한편으로 근대시대 최초의 진정한 ‘사회혁명’이 발생하였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도시노동자들이 지지하는 하나의 운동이 프랑스에서 일정 권력을 획득하였고 이 운동은 메아리가 되어 다른 나라들로 퍼져나갔다. 이 집단의 정치적 지배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음에도, 이 사건은 그동안 권력과 특권을 누리던 집단들을 경악시켰다. 동시에 또 다른 혁명 혹은 일련의 혁명이 발생하였다. 역사가들은 이를 ‘민족들의 봄'(the springtime of the nations)이라고 불렀다. 상당수 국가에서 민족봉기, 민족주의적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들 역시 성공적이지는 못했음에도, 마찬가지로 그동안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들을 경악케 하였다. 이 두 종류의 혁명의 조합은 세계체제가 그 다음 세기와 그 이후까지 겪어야 하는 하나의 패턴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바로 반체제운동이 핵심적인 정치적 행위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1848년 세계혁명의 불길은 갑작스럽게 타올랐지만, 그후 몇 년 동안 강력한 탄압이 뒤따르면서 결국은 진화되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전략, 곧 이데올로기에 관한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하였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분명한 교훈을 끌어낼 수 있었는데, 그들은 40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국무재상(실제로는 외무부장관 격이다)으로 있으면서 유럽의 모든 혁명운동을 질식시키기 위해 고안해 낸 신성동맹(the Holy Alliance)의 배후를 조종하여 왔던 메테르니히와 그와 입장을 같이한 사람들이 추진한 맹목적인 반동전술이 실제로는 생산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볼 때, 메테르니히 일파의 전술은 전통을 보존하거나 질서를 수호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노여움과 분노를 자극하였고 반정부세력들을 조직화시켰으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기존질서를 약화시켰다. 영국은 1848년 이전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급진적 운동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1848년 혁명을 피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국가였다. 보수주의자들은 이에 주목하였고, 마침내 이들은 영국의 이 비밀을 1820~50년에 로버트 필(Sir Robert Peel)이 설파하고 실행한 보수주의 양식으로부터 찾아내었다. 이 보수주의는 급진주의가 장기적으로 발호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시의적절한(하지만 제한된) 양보전술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그후 20여 년 동안 유럽에서는 필의 전술이 ‘계몽된 보수주의’의 형태로 뿌리를 내렸고, 이 ‘계몽된 보수주의’는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번성하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 급진주의자들 역시 1848년 혁명들의 실패로부터 전략적 교훈을 도출해 내고 있었다. 이들은 더 이상 자유주의 세력에 빌붙어 있는 존재로서의 역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1848년 이전까지 급진주의의 주요 원천이었던 자연발생성은 이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연발생적 폭력은 그저 타오르는 불에 종이뭉치를 던지는 행위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 불은 좀더 타오르는 듯하다가 이내 곧 수그러들 따름이었다. 이런 식은 폭력은 결코 오래 가는 연료가 될 수 없었다. …… 급진주의자들은 좀더 효과적인 대안전략을 추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마침내 이 대안을 조직에서 찾아내었다. 곧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조직만이 근본적인 사회변동을 위한 정치적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주의자들 역시 1848년 혁명들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전문가집단에게 의지하는 것의 장점을 설파하는 것만으로는 합리적이고 시의적절한 사회변동을 이끌어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실제로 전문가들의 손에 해결해야 할 사안이 넘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적 영역에서 훨씬 더 능동적으로 활동하여야 했다.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오랜 경쟁자였던 보수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새로이 등장한 급진주의적 경쟁자에 대해서도 동시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만약 자유주의자들 스스로가 정치적 중심으로 표상하기를 바란다면 이는 이들이 내세우는 요구를 ‘중도파적인’ 프로그램을 통해서 제시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으며, 이에 따라 이들의 일련의 전술 또한 일체의 변화에 대해서 반대하는 보수주의와 급진적인 변동을 주장하는 급진주의 사이의 중간쯤에 설정되어야 했다.
21세기 자본
– 토마 피케티 / 장경덕 외 역 / 글항아리 / 2014.09.12 (2013)
어찌되었든 간에, 1840년대에는 노동소득이 정체되는 가운데 자본은 융성했고 산업 이윤은 늘어났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했기 때문에 당시 어느 누구도 국가 전체를 보는 통계자료를 활용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 사실을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최초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들의 핵심적인 질문은 단순한 것이었다. 반세기 동안의 산업적 성장을 이룬 다음에도 대중의 상황이 여전히 그전처럼 비참하다면, 그리고 8세 미만 어린이들의 공장노동을 금지하는 것이 입법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면, 산업 발전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이 모든 기술 혁신과 이 모든 노역과 인구 이동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기존 경제와 정치 체제의 파산은 명백해 보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장기적인 체제 변화에 관해 알고 싶어했다.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스스로 설정한 과제였다. 그는 1848년 ‘민중의 봄 spring of nations'(그해 봄 전 유럽에 걸쳐 터져나온 혁명들) 직전에 『공산당선언』을 발표했는데, 이 짧고 강력한 텍스트는 그 유명한 “한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 선언은 혁명을 예언하는 서두만큼 유명한 말로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현대의 산업 발전은 부르주아지가 생산을 하고 그 생산물을 전유하는 바로 그 기반을 발밑에서부터 무너뜨린다. 따라서 부르주아지가 생산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꾼들이다. 그들의 파멸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똑같이 필연적인 것이다.
……
…… 사실 그의 주요 결론은 ‘무한 축적의 원리 principle of infinite accumulation’라고 일컬을 만한 것이다. 즉 자본은 계속 축적되면서 갈수록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움직일 수 없는 경향이 있으며, 그 과정에 아무런 자연적 제약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파멸을 예언한 근거다. 자본의 수익률이 끊임없이 감소하거나(그래서 자본축적의 엔진을 꺼뜨리고 자본가들 사이에 격렬한 투쟁을 부르거나) 국민소득 가운데 자본가의 몫이 무한히 증가해(그래서 조만간 노동자들이 단결해 폭동을 일으켜) 결국 자본주의는 최후를 맞는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안정된 사회경제적, 정치적 균형은 불가능하다.
……
이 책의 서장에서 간단히 논한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관찰된 가장 중요한 점은 의심의 여지 없이 1800년에서 1860년에 걸친 산업혁명 초기에 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이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가장 완전하고 이용 가능한 영국의 역사적 연구 자료, 특히 로버트 앨런(장기간의 임금 정체를 ‘엥겔스의 정체 Engels’ pause’라고 이름 붙였던)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35~40퍼센트에서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완성하고 『자본』을 쓰기 시작할 때인 19세기 중반에는 약 45~50퍼센트로 10퍼센트가량 증가했다. …… 그러나 19세기 전반에 국민소득의 10퍼센트가 자본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기간에 경제성장의 가장 많은 몫이 자본가의 이윤으로 돌아간 반면, (객관적으로 형편없었던) 임금은 정체되었기 때문이다. 앨런은 그 원인을 주로 기술 변화로 인한 (생산함수의 구조적 변화를 반영하는) 자본생산성의 증가와 농촌에서 도시로의 노동력의 대이동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영국이 7년전쟁(1756~1763)에서 승리하였을 때 세계우위를 놓고 프랑스와 벌인 투쟁은 끝이 났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국이 세계헤게모니가 된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세계우위를 놓고 벌인 투쟁이 끝나자, 갈등은 세번째 국면에 돌입했는데, 그 특징은 점점 더 커진 체계의 카오스였다. 17세기 초 연합주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이런 체계의 카오스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킴으로써 헤게모니가 되었다.
……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확실히 체계 전체에 걸친 반란의 새로운 물결은 대서양을 차지하려는 투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투쟁이 일단 폭발하자, 반란은 영국-프랑스의 경합이 전적으로 새로운 지반들 위에서 재생될 조건들을 만들어 냈으며, 이런 새로운 경합이 끝난 후 반란은 3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1776 ~ 1848년 시기 전체를 놓고 볼때, 두번째 반란의 물결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와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통치자-피지배자 관계를 완전히 변형시켰고, 두번째로 그 변형에 적절하도록 국가간 체계를 완전히 재편한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세계헤게모니(영국의 자유무역 제국주의)를 수립시켰다.
이런 반란 물결의 깊은 뿌리는 대서양을 차지하려는 앞선 시기의 투쟁으로 소급되는데, 왜냐하면 그 행위자들이 이 투쟁을 통해 등장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정착자, 대농장 노예들, 그리고 대도시 중간계급이 그들이었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과 함께 식민지에서 반란이 시작되어, 맨 처음 영국을 타격하였다. 프랑스 통치자들은 즉각 이 기회를 이용해 실지회복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는 곧바로 1789년 프랑스혁명의 역습으로 되돌아 왔다. 프랑스혁명으로 터져 나온 에너지는 나폴레옹 하에서 프랑스의 실지회복 노력을 배가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정착자, 노예, 그리고 중간계급의 반란을 일반화시켰다.(cf. Hobsbawm 1962; Wallerstein 1988; Blackburn 1988; Schama 1989)
이야기 세계사 2
– 구학서 / 청아출판사 / 2002.12.20
1848년은 흔히 ‘혁명의 1년’으로 불린다. 전 유럽에서 정치적인 자유를 쟁취하고 민족 감정을 고양시키기 위해 소요와 혁명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는데, 그 원인은 1846년부터 계속된 경제위기와 일부 연관된다. 뿌리가 마르는 감자병이 유행하여 감자 수확은 전무하였고 극심한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죽는 사태가 빈발해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긴장과 불안이 감돌았다. 산업 부문도 농업의 영향을 받아 사업 실패의 급증, 실업, 임금하락 등 불안정이 지속되었다.
일반 민중은 자연히 자신들이 처한 비참함과 곤궁을 정부가 제대로 배려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경제적 위기가 나타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역사가 자크 들로주는 1848년의 이런 현상을 이렇게 결론 지었다.
“경제 위기가 고조되면서 민중은 기존 지배층에 대한 불만을 넘어서 적개심까지 갖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인이 본질적으로 증오를 품고 무기를 들어 봉기하도록 한 요인은 역시 자유의 결핍이었다.”
원치 않은 혁명 1848
– 볼프강 J. 몸젠 / 최호근 옮김 / 푸른역사 / 2006.12.29
※ 한겨레 서평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83535.html
그런데 ‘원치 않은 혁명, 1848’이라니? 이 표현을 이해하려면 그 이전, 그러니까 1830년 7월 혁명까지 거슬러올라가는 18년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7월 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이 보수적 왕조들로부터 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쟁취한 것이었지만, 그 성공은 하층민중의 광범위한 지지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나 급속한 농업해체와 산업화의 물결은 무산자 계급의 열악한 처지를 극한으로 몰아넣었고, 이들의 전방위적 개혁 요구는 이미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부르주아는 급격한 변혁보다는 체제 내에서의 점진적 개혁을 원했고,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적 사태를 두려워했다. ‘신분제 의회’를 고수하려는 부르주아의 태도는 하층계급의 분노를 샀다.
1848년 2월22일, 프랑스의 반체제 지식인들은 보통선거권과 공화정을 요구하는 대중집회를 계획했다. 그러나 집회는 금지됐고, 대규모 항의시위가 겉잡을 수 없을만큼 폭발적 사태로 치달았다. 군대마저 시위대열에 합류하자 결국 ‘국민왕’ 루이 필립은 퇴위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의 승리였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도 바로 이 즈음 발표됐다. 일련의 장밋빛 개혁조치들도 가시화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새 공화정에서도 다수 대표자는 ‘혁명적 변화를 원하지 않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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