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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는 “인류가 겉으로 또는 진짜로 공통의 맥박을 치는 듯이 보이는 시대가 이따금 있기는 했다.”라고 말하면서, 그 예로 기원전 500년 전후의 종교적, 철학적 운동을 언급했다.

 

현재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원전 5세기 전후의 중요한 사상가에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중국의 공자, 인도의 부처, 아테네의 소크라테스가 있다. 또한 아직도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교와 대표적인 정치체제인 민주주의, 공화국의 탄생도 이 무렵이다.

 

야스퍼스(Karl Jaspers)는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의 시대가 인류의 역사에 기축을 형성했다고 평가하고 1949년 <역사의 기원과 목표The Origin and Goal of History>에서 ‘기축시대의 문명(Axial-Age Civiliza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에 일어난 영적 과정이 그와 같은 축을 형성하는 듯하다. 그 시기는 오늘날의 인간과 같은 인간이 출현한 시기였다. 이 시기를 ‘기축시대(차축시대, 축의 시대)’라고 부르도록 하자. 비범한 사건들이 이 시대에 몰려 있다.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가 살았다. 중국 철학의 모든 경향이 이 시기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시기는 또한 맹자와 장자, 그 밖의 많은 철학자들의 시대였다.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와 부처의 시대였다.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회의주의, 물질주의, 궤변법, 허무주의 등을 비롯하여 온갖 철학의 시류가 이 시기에 태어났다. 이란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우주의 작용이 선과 악의 투쟁이라는 도발적 주장을 펴나갔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제2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들이 활약했다.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와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등의 철학자, 비극시인 투키디데스, 아르키메데스 등이 나타났다. 고작 몇 세기에 걸쳐서 이 모든 이름들이 뜻하는 거대한 변혁이 중국, 인도, 서양에서 독립적으로, 그리고 거의 동시에 일어났던 것이다.

이 시대의 새로운 점은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존재 전체와 자신과 자신의 한계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계의 공포와 자신의 무력함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급진적 질문을 던지게 되었고 해방과 구원을 추구해나가는 길에서 깊은 심연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의식적으로 이해하면서 스스로 지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또한 자아의 깊이와 초월의 명료함에서 절대성을 경험하게 되었다.

야스퍼스에게 ‘축의 시대’는 그리스-중동-인도-중앙아시아-중국에 분포한 사회들이 비슷한 경험을 한 괄목할 만한 시기이자, 인간 역사의 등대 같은 시대였다.

 

비교종교사학자인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교수는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유교, 도교, 고대 그리스 철학, 초기 유대교에서 발전한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기원전 6세기에 출현한 정신문명이 지금까지도 줄곧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간주하고 있다.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를 인류 역사상 가장 창의적이고 경이로운 시대(축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참고로 마르크스는 세계사의 진행과정을 “원시공동사회 -> 노예사회 -> 봉건사회 -> 자본주의 사회 -> (프롤레타리아 독재) -> 사회주의 · 공산주의 사회”로 구별하며, 야스퍼스는 “선사시대 -> 고대 고도문화 -> 차축시대 -> 과학기술시대 -> 제2의 차축시대”로 나누고 있다.

 

이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차축시대라는 아이디어가 과연 실증적 증거에 충분히 기반을 두고 있는지를 의심한다. 예를 들어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인 디아메이드 맥클로흐(Diarmaid MacCulloch)는 야스퍼스의 ‘차축시대’를, 서로 다른 4개 문명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다양성을 묶어버리는 ‘헐렁한 괴물 baggy monster’이라고 불렀다. 또한 Iain Provan은 2013년 그의 저서 『Convenient Myths: The Axial Age, Dark Green Religion, and the World That Never Was』에서 포괄적인 비판을 가했다.

 

이언 모리스(Ian Morris)는 ‘축의 시대’에 실제로 관찰 가능한 유일한 통일성은 동양과 서양 사상의 다양성뿐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그는 사회가 발전하면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문화를 얻었으며 축의 사상은 사람들이 중앙집권적 국가를 탄생시키고 세계에서 마법을 제거할 때 발생하는 여러 결과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고 했다.

 

마틴 버낼(Martin Bernal)은 어떤 점에서 차축시대라는 전체 도식은 유럽 중심주의인 아리안모델의 재강화만이 아니라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즉, 거대한 청동기시대 문명의 과학적 · 철학적 · 종교적 중요성을 부정함으로써 차축시대라는 개념은 그리스 문명의 근원으로서 따라서 유럽 문명의 근원으로서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이집트를 배제한다. 그것은 또한 상고기 및 고전기 그리스를 선봉에, ‘진정한 문명’의 중심에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오다 마코토(小田実)도 야스퍼스의 ‘차축시대’라는 아이디어는 그리스를 노출시키려는 ‘숨겨진 의도’이며 이는 ‘유럽인’이 문명 세계의 출발선에 동참했다는 주장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야스퍼스 자신이 상정한 ‘논지’, 즉 차축시대에 중국, 인도, 서양에서 공통적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겉보기만의 것이 아닌지, 차축시대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 판단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러한 평행 관계에 역사적 성격은 인정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나 비판은 여전히​​ 활보할 것이다.

 

 

세계사 연표도 같이 보면서… 참, 그러고 보니 공통의 맥박이 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와도 무언가 상관이 있을 것도 같다.

– 청동기 시대의 붕괴 : http://yellow.kr/blog/?p=3567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500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중국 고대 사상의 세계

–  벤자민 슈워츠 / 나성 역 / 살림 / 2004.02.28

 

이 책의 시기가 이어지는 중국 사상사 전체에 미치는 중요성을 떠나, 나는 마땅히 칼 야스퍼스의 책, 『역사의 기원과 목표 The Origin and End of History』의 “기축(基軸) 시대(axial age)”에 관한 장에 보이는 그의 “세계 · 역사적” 관측의 유형도 중국 고대 사상에 관한 나의 흥미를 자극했다는 점을 고백해야 한다. 이 작은 책에서 야스퍼스는 근동, 그리스, 인도, 중국 등 고대의 고등 문명권에 속하는 많은 나라들에서 시간적으로 기원전 천년에 걸친 기간 동안 출현한 “창조적 소수들”이 반성적, 비판적, 심지어 초월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방법들을 통해 자신들을 그들의 모태 문명들에 연결시켰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

대부분의 역사적 변화가 그렇듯이, 물론 이러한 “돌파breakthroughs”에는 절대적 시발점이 없다. “문명에 대한 불만”은 매우 일찍 시작했음이 분명하다. 소르킬드 제이콥슨(Thorkild Jakobsen)은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문헌들에서 초월적인 종교적 태도들이 시작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집트에는 지혜의 문서가 존재한다. 중국 『시경詩經』에 보이는 의문을 가진 채 피안을 희구하는 태도들은 아마 훨씬 이른 시기에서 유래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특정 개인들과 결합된 이러한 경향들은 우리가 이 책에서 검토하려는 수세기 동안 비로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

공자가 “차안적(此岸的)”이며 “인본주의적”이라는 주장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두 주장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공자의 사상을 당시 다른 고등 문명에 속했던 다수의 주도적 인물들의 사상과 구별하지 못한다. “차안적”과 “종교적”은 결코 대립 범주가 아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아리안족의 인도, 그리스, 중국의 종교들은 모두 현저하게 차안적이다. 이집트인들은 이 세상을 다음 세상으로 옮기는 일에 열정을 바쳤지만, 나는 바로 그 열정 때문에 이집트를 여기에 포함시킨다. 이러한 모든 문명의 신과 영령들은 차안적 관심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자연과 문명의 위력을 구현하며, 주재한다. 중국에서 상(商)나라의 종교도 여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모든 문명에서 기축 시대(axial age)가 두드러지는 것은 사실상 직전 세기들의 종교에서 보이는 세계와의 절대적 연루를 거부하는 일종의 초월적인 윤리적 반응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 반응은 반드시 극도의 피안적 형식을 갖지는 않는다. 성경의 신은 초월적이다. 그러나 그가 모세에게 보이는 것은 분명한 차안적 율법이다. 플라톤의 철학은 피안적 잠재성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은 차안의 임무에 열성의 정도를 달리해 가며 전념했다. 인도에서조차, 우파니샤드의 브라흐만 종교에는 개인 금욕주의자들이 번성했음에도, 그들은 가장의 현세적 의무에 변함없는 열과 성의를 다했다. 오직 원시불교만이 승려에 뜻을 가진 사람들에게 극단적 포기를 요구했던 것 같다.

 


블랙 아테나 2

–  마틴 버낼 / 오흥식 역 / 소나무 / 2012.03.25

 

『서경』과 『죽서기년』의 연대에 관한 회의론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우리가 더 잘 안다’의 관점에서, 그리고 독일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가 가장 명백히 표현한 ‘기축시대Axial Age’라는 널리 퍼진 개념의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 도식에 따르면, 기원전 1천년기 중반에 불가사의한 삼투현상에 의해 동시적인 문화적 약진이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이란에서는 조로아스터에 의해, 인도에서는 부처에 의해, 중국에서는 공자와 도교의 창시자 노자에 의해 약진이 이루어졌다.

이 도식은 이란 · 인도 · 중국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확립되었을 때 유행했던 다른 개념들보다 덜 유럽중심적이다. 흥미롭게도, 놀라운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약진의 본질은 다소 불명확하다. 중국학 학자 벤자민 슈워츠는 기축시대라는 주제로 열린 두 학회에서 연구를 위한 ‘기축’의 정의를 성공적으로 제시하였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든 ‘기축’운동에서 공동으로 깔린 자극이 있다면, 그것은 초월을 향한 긴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내가 여기에서 언급하는 것은 그 단어의 어원적 의미에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뒤로 물러나 그 너머에 놓여 있는 것에 대한 새로운 조망을 말한다. … 이러한 초월적 약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모으면서, 우리는 예언자, 철학자, 현인의 작은 무리가 지닌 의식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이 직접 접촉하고 있는 주변에 매우 작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 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원전 3천년기와 2천년기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사제들에게 정확히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에 변형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일까? 어떤 점에서 기축시대라는 전체 도식은 아리안모델의 재강화만이 아니라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거대한 청동기시대 문명의 과학적 · 철학적 · 종교적 중요성을 부정함으로써 기축시대라는 개념은 그리스 문명의 근원으로서 따라서 유럽 문명의 근원으로서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이집트를 배제한다. 그것은 또한 상고기 및 고전기 그리스를 선봉에, ‘진정한 문명’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제1권에서 나는 기축시대라는 개념에 반대하는 견해를 제기했다(그 생각이 그리스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축시대라는 개념에 근거한 이란에 대한 언급은 매우 의심스럽다. 위대한 종교개혁가 조로아스터가 기원전 2천년기에 살았다는 강력한 주장이 나왔다. 공자는 그가 고대 문화의 전달자라고 주장했고, 기원전 550년경 자신이 출생하기 1,000년 전에 매우 ‘공자적인’ 방법으로 행동하는 엘리트 계층의 존재를 마음 속에 그리는 데 별다른 어려움도 없었던 것 같다. 『서경』의 고대성을 역설하는 주장에 대한 신뢰성이 점증하는 것으로 보건대, 기원전 2천년기 후반에 그리고 아마도 더 이르게는 중반에도 완전히 ‘공자적인’ 세계관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기축시대’의 중국이라는 ‘버팀대’는 이제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기로에 선 그리스도교 신앙

–  로이드 기링 / 이세형 역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5.03.15

 

문명화된 세계는 비교적 소수의 독립적인 문명의 유형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각각 특정한 종교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고, 또한 그 종교에 의해 구별될 수 있는 유형들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의 서구(the Christian West), 이슬람의 중동(the Islamic Middle East), 힌두교의 인도(Hindu India), 불교의 동양(the Buddhist Orient) 등이다. 중국은 토착종교인 유교와 도교가 평화롭게 공존했던 보다 다원적 상황을 견지해왔다. 물론 이들 토착종교들은 때로 외국으로부터 유입된 불교와의 쉽지않은 공존을 경험해야 했다. 종교적 전통들에 대한 이런 넓은 구분 속에는, 유대교인, 자이나교도(Jains), 파시교도(Parsis), 시크교도(Sikhs)와 같은 소 종교들뿐 아니라 여러 하부 변용(變容)들이 있었다.

……

대략 6세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구 세계는 나사렛 예수가 탄생했다는 해를 기점으로 년 수를 계수하여 왔다. 이로써 예수가 탄생한 해를 기점으로 역사를 둘로 나누었다. 이런 맥락에서 헤겔조차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로부터 와서 그리스도에게로 향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역사의 축(軸 axis)은 그리스도교적인 전제에서만 타당하기 때문에, 야스퍼스는 소위 문명세계라 일컬어지는 전체 세계에 맞는 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역사의 축은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에 일어났던 인류의 정신적인 발전 과정 가운데 기원전 500년을 전후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분명한 역사의 구분을 만나게 된다. 이때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식하는 인간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기간을 일컬어 우리는 ‘차축시대(Axial Period)’라 할 수 있다.”

아놀드 토인비(Anold Toynbee)가 고등종교(higher religions)라 일컫는 문명화된 세계의 종교들은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유교, 도교와 같이 차축시대에 그 기원을 갖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시크교와 같이 차축시대에 등장한 종교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야스퍼스가 정한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의 한정된 기간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너무 엄격하게 적용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마하비라(Mahavira, 기원전 6세기 인도인으로서 자이나교의 창시자), 고타마 붓다, 공자, 노자, 장자, 그리고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이 시기의 인물들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초기 문명들에 나타난 고대종교의 특성을 기술하지 않겠다. 이제 간략하게 검토하게 될 원시종교들의 특성들은 또한 초기 도시사회의 종교들에도 상당부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도시사회의 종교들은 보다 세련된 형태로 일어났기 때문에 도시사회의 종교들과 차축시대 이후의 종교들 사이의 차이는, 원시종교들과 차축시대 이후의 종교들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만큼 그렇게 현저한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우리가 고대종교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두 번째 이유와 연결된다. 즉 초기 문명에 나타난 고대종교들은 차축시대의 도래를 경험하면서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 고대종교들은 차축시대 이후의 종교의 초석이 되었고, 그런 점에서 차축시대 이후에 남겨졌거나, 혹은 대체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아즈텍 문명과 잉카 문명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현대세계가 도래한 시점에서 고대종교의 순수한 형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미개한 세계의 원시종교와 문명화된 세계의 차축시대 이후 종교 사이의 대조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

유대교와 힌두교, 그리고 유교는, 앞서 말한 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처럼 분명하게 차축시대 이후의 특징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들은 성격상 보다 인종적인 특징을 가지며, 세계관에 있어서는 보다 일원론적 특징을 지니고, 보다 실용적이며 비선교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유대교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출현에 모체가 된 반면, 힌두교는 불교의 모체가 되었다. 그럼에도 유대교와 힌두교, 그리고 유교를 차축시대 이후의 범주에 놓는 이유는 이들이 여전히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고, 또한 이들을 모체로 해서 나온 종교들이 이들 종교들을 대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축시대 이후 종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들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전에 만났던 차축시대 이전의 종교들을 대치하던지, 아니면 앞지르던지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대교는 그리스도교 국가와 이슬람 세계에서 견고하게 그 정체성을 견지했다. 불교는 그 발원지에서 힌두교를 대치하기보다는 오히려 힌두교에게 먹혀버리고 말았다. 불교는 중국의 유교와 도교를 결코 대치할 수 없었고, 이들 종교와 함께 공존하게 되었다.

일단 차축시대 이후의 종교들이 탄생하게 되면, 환경이 허락하는 한, 이들은 자신들의 시원지에서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차축시대 이후의 종교들은 특정한 인종적 혹은 지리적 단체의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조건의 필요에 응답함으로써 보편적인 종교가 되었다. 예를 들면, 불교와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지구적 종교가 되고자 무척 노력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최종적으로 만났던 지리적 경계선까지만 최대치의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들은 서로를 대치하지 못했고, 대신에 그리스도교의 서구, 이슬람의 중동, 불교의 동양을 만들어 내었다.

 


지연문명

–  르우안웨이 / 최형록,김혜준 역 / 심산 / 2011.05.10

 

공간적 각도에서 볼 때 이 4대 종교(기독교, 동방정교, 이슬람교, 유대교)와 이에 대응되는 문명은 모두 동일한 하나의 지연(地緣) 세계, 즉 서아시아 일대인 지중해 세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기원전 약 3000년쯤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 유역과 이와 인접한 나일 강 유역에서 문명이 탄생했다. 기원전 15세기 초기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세 3세는 서아시아에서 자주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때부터 가장 오래된 두 문명들은 밀접한 상호 작용을 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6세기 초기 페르시아인은 지리적으로 세 개의 대륙을 통합하는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여 이 두 지역을 더욱 긴밀하게 하나로 연결시켰다. 이때부터 두 지역은 심도있고 풍부한 문화적 융합 과정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말 변방지역에 위치하던 반 그리스화된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 세계를 정복했고, 이후 다시 이집트와 모든 서아시아를 정복하여 방대한 그리스 제국을 건설했다. 이는 곧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 유역과 나일 강 유역의 문화 일체화 과정을 빠르게 진행시켰고, 마지막에는 시리아와 그리스 문명의 통합 위에 세운 3개의 새로운 문명인 기독교와 이슬람교 및 동방정교 문명이 형성될 수 있었다.

……

고사 직전 단계에 있던 로마 제국 말기에, 그리스 문명은 기독교 형식의 시리아 문명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한 대문명이 다른 대문명 속으로 사라진 예로 볼 수 있지만, 단순하게 하나의 윤리 종교가 다른 윤리 종교를 대체했다고 간주할 수는 없다. 한 위대한 추축시대 문명이었던 그리스 로마 문명은 분명 추축시대적 의미에서 심오한 철학 · 과학 · 문학 · 예술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후 기독교 성분이 되는 많은 문화 요소들이 지중해 인류 집단들에게 오랫동안 유행하였고, 또한 이 집단들 속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완전한 윤리 종교가 출현했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윤리 종교의 근본적 성격은 공리주의이지만, 그리스 문명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의 정치적 통일기에도 이러한 종류의 개인주의적 정신 자질은 근본적으로 약화되지 않았다. 발전 추세로 보면 후기 스토아철학과 신플라톤주의가 모두 일종의 윤리 종교적이고 공리주의적 문화적 품격을 앞세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상류 계층에 유행하는 수준 높은 사상을 수많은 군중에게 보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 문명이 지속하지 못한 혹은 그 쇠망의 운명을 되돌릴 수 없었던 한 중요한 원인으로, 시기적절하게 윤리 종교의 문화적 품격이 그리스 문명에 확산되고 형성되지 못했다는 이러한 사실을 거론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스 문명이 더욱 공리주의적인 윤리 종교 형태인 시리아 문명으로 대체된 것은 역사적 필연이고, 또한 고대 개인주의의 실패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고대의 개인주의적 문명이 신형의 공리주의적 문명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일종의 윤리 종교가 다른 일종의 윤리 종교로 치환되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

서양 문명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시리아 문명과 그리스 로마 문명이란 두 추축시대 문명의 통합에 있다. 야만족인 게르만의 고유 자질 또한 이 통합 속에 참여했다. 그렇다면 그리스와 시리아 문명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것들은 또한 각자 여러 추축시대 문명, 예를 들면 이집트 · 수메르 · 바빌로니아 · 크레타 · 미케네 · 히타이트 문명이 혼합된 산물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서양 문명 혹은 어떠한 문명도 모두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앞서 제기한 것처럼 순수한 혈통을 가진 문명 혹은 민족은 있을 수 없다.

……

세계 차원에서 비록 전 지구화의 기세가 대단히 왕성하기는 하지만, 기원전 8세기~기원전 2세기 추축시대에 형성된 각 주요 문명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견고한 정신적 핵심들과 선명한 기호 상징들을 가지고 있다. 각 주요 문명들이 비록 사물과 제도 심지어 관념 측면에서도 이런저런 커다란 변화를 겪었지만, 본질적인 역사적 문화 규정성은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았다. 실제로 서양인에게 멸망한 두 라틴 문명을 제외하고는 근대 이후 각 주요 문명의 본질적 자질들에는 실질적 변화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문명 간에 비록 대화를 할 수도 있고 대화 속에서 상호 양해와 이해를 추구할 수도 있지만, 상당히 큰 부분에서 문명 간의 차이는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각 주요 문명은 여전히 생명 형태에서는 나누어질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  이언 모리스 / 최파일 역 / 글항아리 / 2013.05.27

 

제2차 세계대전 말 자기 시대의 도덕적 위기를 해명하려고 애쓰던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기원전 500년 무렵의 시대를 “축의 시대”라고 불렀는데 역사가 전환하는 축을 형성한 시기란 뜻이다. 야스퍼스는 축의 시대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이 출현했다”고 거창하게 선언한다. 축의 시대에 쓰인 저작들 – 동양의 유교와 도교 경전, 남아시아의 불교와 자이나교 경전, 서양의 그리스 철학 문헌과 구약성서(그리고 구약성서의 후신인 신약성서와 코란도) – 은 고전, 즉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들의 삶의 의미를 규정해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 되었다.

이것은 글을 전혀 혹은 거의 남기지 않은 부처나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위업이었다. 때로는 훨씬 후대 사람인 그들의 후계자들은 그들의 말을 기록하거나 윤색하거나 완전히 지어내기도 했다. 창시자들이 진짜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흔히 아무도 알지 못했으며 격렬하게 반목한 그들의 후계자들은 협의회를 열고 파문을 주고받으며 상대방을 더 먼 암흑의 세계로 내동댕이쳤다. 지금까지 현대 문헌학의 위대한 승리는, 이 후계자들이 갈라서고 싸우고 저주하고 서로 박해하는 틈틈이 성전을 그렇게나 여러 차례 쓰고 또 고쳐 썼기 때문에 교리의 원래 의미를 찾아 문헌을 낱낱이 걸러내는 작업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

언제나 이러한 과정은 신과 같은 왕에게 의존하지 않는, 심지어 그 문제라면 신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초월을 향한 개인적인 내면의 방향 전환, 자기 변화의 과정이었다. 사실, 초자연적인 힘이란 축의 사상에서는 흔히 핵심이 아니다. 공자와 부처는 신에 대해 논의하기를 거부했다. 소크라테스는 비록 신을 공경한다고 고백했지만 부분적으로는 아테네의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랍비는 유대인에게 신은 감히 형언할 수 없기에 그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를 과도하게 찬양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축의 사상에서 왕은 신보다 처지가 더 나빴다. 도가 사상가와 부처는 대체로 왕에게 무관심했지만 공자와 소크라테스, 예수는 왕의 윤리적 허물을 공공연하게 질타했다. 축의 비판은 사회 고위층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며 출생과 부, 성별, 인종, 사회계급에 대해 제기된 새로운 질문들은 적극적으로 반문화적인 의미를 띨 수도 있었다.

……

…… 진정한 원동력은 빙하기 말 이래로 그래왔던 것과 똑같았다. 게으름과 탐욕,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일을 하는 데 더 쉽고 더 이득이 되고 더 안전한 길을 찾았고 그 과정에서 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 더 먼 곳까지 가서 교역을 했으며 더 커다란 도시에 정착했다. 이어지는 다섯 장에서 수차례 반복될 패턴에서 사회발전지수가 올라가면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문화를 얻었다. 축의 사상은 사람들이 고가 국가(중앙집권적인)를 탄생시키고 세계에서 마법을 제거할 때 발생하는 여러 결과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기원 전후 천년사, 인간 문명의 방향을 설계하다

–  마이클 스콧 / 홍지영 역 / 사계절 / 2018.08.03

 

1949년에 독일 역사가 카를 야스퍼스의 유명한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가 출간된 이래 이 시대는 지구사(global history)의 존재 이유를 명백하게 뒷받침하는 중요한 시기로 크게 주목받았다. 야스퍼스는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를 ‘축의 시대(Axial Age)’로 정의했다. 지중해에서 중국에 걸친 고대 문화와 문명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옛 지혜를 거부하고 철학 · 과학 · 종교 · 정치 분야에서 새로운 이해와 설명을 추구했던 시대를 의미하는 용어다. 야스퍼스에게 축의 시대는 그리스-중동-인도-중앙아시아-중국에 분포한 사회들이 비슷한 경험을 한 괄목할 만한 시기이자, 인간 역사의 등대 같은 시대였다.

……

매우 다른 세 사회(아테네, 로마, 춘추시대의 노나라)에서 나란히 출현한 사회 관계가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이다. 공자는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질 중국의 교육 · 철학 · 법 · 정의 · 통치를 규정한 독보적인 인물이다. 로마 공화국의 체제와 정치사상의 영향력은 미국 의회가 위치한 워싱턴 D.C.의 ‘캐피틀힐(Capitol Hill)’이나 1999년까지 현대 이탈리아 법관의 직위 가운데 로마 공화국의 ‘법무관’에서 이름을 따온 ‘프라이토르(praetor)’라는 직위가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체로 대의제 형태인 현대 민주주의가 아테네 민회(에클레시아, ekklesia)의 직접 민주주의- 참여 자격이 제한적이었지만 -에 비해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1993년에 전 세계가 민주주의 탄생 250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고대 아테네에 진 빚과 데모크라티아(demokratia, 민중에 의한 통치)의 생명력을 잘 보여준다.

……

이 시기 아테네-로마-노나라에서는 극도로 독재적인 통치 방식으로 인해 누적된 불만, 갈등과 사회불안으로 점철된 현실보다는 더 나은 이상 사회를 향한 갈망이 변화를 촉발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혁명은 공동체의 주도로 진행되었으며 어떤 로드맵도 없이 시작되었다. 반대로 중국에서는 국가 통치 방식의 변화를 정교하게 설계했다. 그는 새로운 사상을 도입한 혁신자라기보다 옛 사상의 ‘전수자’라는 입장을 취했지만, 아마도 자신의 사상과 신조가 무엇인지 뚜렷이 밝힌 중국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세 지역에서 변화를 촉발한 원인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각 사회의 전통과 당면한 문제의 차이는 서로 다른 결과를 도출했다. 한 사람의 덕망 높은 통치자가 권력을 장악한 중국, 사회계급별 권력의 균형을 이루고자 한 로마의 ‘중도’. 그리고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사회계약과 관계 개념을 바탕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3개의 통치체제가 등장했다.

……

기원전 6세기 말이 한 국가의 고대사에서, 그리고 훨씬 더 넓은 지역의 고대사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시기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시기는 문명 발달의 전환점이자 인간이 어떤 사회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맺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의 공동체가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고 취해야 하는지 달리 보게 된 시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 등장한 논의들이 현대 인간의 삶을 인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와도 공명한다는 사실이다. 월리엄 포크너의 명언처럼 “과거는 죽지 않는다. 실은 아직 지나가지도 않았다.” 인간 사회를 운영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이고, 사회 관계를 수립하는 최선의 방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결코 멈춰서는 안된다.

 


이중톈 제국을 말하다

–  이중톈 / 심규호 역 / 에버리치홀딩스 / 2008.05.15

 

세상에 공짜는 없다. 윤리치국 또는 독존유술(獨尊儒術)의 원칙으로 제국의 제도를 유지하고 보호하면서 중국은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제일 먼저 언급할 것은 사상의 부재이다. 중국은 일찍이 사상이 상당히 풍부한 민족이었다. 유가, 도가, 법가, 묵가 등은 물론이고 그밖에 여러 학파들도 나름의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사상은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인도 불교, 히브리인들의 종교 학설과 더불어 야스퍼스(Jaspers)가 말한 ‘축의 시대(Axial Era)’를 구성하는 찬란한 성과였다. 그러나 그것은 선진先秦 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선진’이란 진나라 이전을 말하는데, ‘제국 이전’이란 뜻이기도 하다. 제국 시대로 진입하자 중국은 더 이상 사상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상을 만들어낼 수도 없었다.

동중서는 사상가가 아니며, 왕충은 단지 ‘의견을 가진 사람’일 뿐이었다. 특히 동중서는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컴퓨터를 활용할줄 아는’ 무사巫師나 정객일 뿐이다. 그는 선진 제자의 사상(유가를 위주로 하고 도가와 음양가를 겸용했다)을 다운로드하여 복사하고 자르거나 붙이기를 하여 이리저리 섞어 어정쩡한 신학神學 체계를 갖춘 다음에 유학의 상표를 붙여 제국에 판매한 것에 불과하다. 그의 공헌은 유학을 민간 사상에서 관방의 이데올로기로 성공적으로 변환하여 제국을 위해 윤리치국이라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설계한 것뿐이다.

이후 2천여 년 동안 봉황의 털이나 기린의 뿔처럼 드물고 귀한 몇명의 ‘사상가’들이 출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중량은 선진 제자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었으며, 선진 제자의 틀에서 벗어난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수준에 도달한 이들조차 한 사람도 없었다.

……

제자(諸子)들이 나름대로 학설을 세우고 백가(百家)가 쟁명하던 황금시절은 이미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제국 제도의 ‘무량공덕(無量功德)’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제국 제도의 본질은 수렴과 집권에 있다. 수렴하지 않으면 집권이 불가능하고, 집권하지 않으면 제국이 될 수 없다.

 


그리스 (유재원 교수의 그리스 그리스 신화)

–  유재원 / 리수 / 2007.03.28

 

그러나 위대한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100년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끝나고 극도의 혼란기가 시작된다. 몇몇 학자들은 몇 년에 걸친 큰 한발과 이에 따른 흉년으로 굶주리게 된 부족들의 약탈과 침략이 당시의 교통 통로를 마비시키고 이에 따라 청동기 제작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주석의 공급이 끊기면서 찬란했지만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던 청동기 문명이 일거에 무너졌으리라고 추측할 뿐이다. 하여간 청동기 문명의 끝은 갑작스럽고도 폭력적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그리스에는 발칸 반도 북쪽에서부터 새로운 그리스 부족인 도리아인들이 남하한다. 이 야만인들의 이주는 흔히 폭력적인 파괴와 약탈과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혼란스럽던 사회를 더욱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그전까지 힘겹게 일구어 놓았던 문명도 속절없이 붕괴되었다. 히타이트 제국을 지탱해 주던 ‘쐐기 문자’와 미케나이 시대에 그리스인들이 쓰던 ‘선형 문자B’를 비롯한 청동기 시대의 문자들이 잊혀졌다. 이제 문명은 사라지고 문자를 모르는 호전적인 야만인들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리스와 동부 지중해, 그리고 그 주변의 지역은 깊은 암흑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왕을 중심으로 한 궁정 문명이 사라지고 몇몇 소수 귀족들이 다스리는 귀족정이 생겨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흔히 이 시기를 ‘그리스의 중세’, 또는 ‘그리스의 암흑 시대’라고 부른다.

 

암흑 시대에 들어선 지 300년쯤 지난 기원전 800년쯤부터 그리스에는 알파벳을 사용하는 새로운 문명이 싹트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기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와 같은 작품들이 쓰여졌다. 이 시대 이후 그리스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에게 해를 비롯한 동부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그리스인들은 흑해에서 바르셀로나에 이르기까지 전 지중해에 걸쳐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또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게 되자 상인 계급들이 대두하게 되면서전통적 사회 구조에도 변화가 왔다. 귀족들이 차츰 세력을 잃고 상공인 계급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변화는 도시 국가의 출현이었다. 제한된 크기의 도시 국가는 그 자체가 완벽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었으며 그 지역 모든 주민들에게는 시민권이 주어졌다. 자유와 질서 사이에 가장 바람직스러운 조화를 가능하게 하는 도시 국가는 개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그리스의 위대한 가치관과 문명을 이루는 데에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 그러나 반대로 다른 도시 국가에 대한 배타주의, 경쟁심과 시기심,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부정적 면도 있었다.

 


축의 시대

–  카렌 암스트롱 / 정영목 역 / 교양인 / 2010.12.20

 

축의 시대의 영적 혁명은 혼란, 이주, 정복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하나의 제국이 망하고 다른 제국이 일어서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중국에서 축의 시대는 주 왕조의 붕괴와 더불어 마침내 시작되었으며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하면서 끝을 맺었다. 인도의 축의 시대는 하라파 문명(인더스 문명)이 해체된 후에 일어나 마우리아 제국과 더불어 끝을 맺었다. 그리스의 변화는 미케네 왕국과 마케도니아 제국 사이에 이루어졌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정박지에서 떨어져 나와 떠도는 사회에 살았다. …… 중동에서 제국의 모험 때문에 혹심한 고통을 겪었던 유대인마저 조국의 붕괴와 그에 뒤이은 추방이라는 트라우마로 인해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 시작해야만 하는 무시무시한 자유를 얻게 되면서 축의 시대로 밀려 들어갔다.

 


신의 역사 1

–  카렌 암스트롱 / 배국원 역 / 동연 / 1999.02.10

 

엘리야의 이야기는 유대교 문헌에서 마지막 신화적 기사를 담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고대 문명권 전체Oikumene를 통해 변화가 찾아왔다.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는 ‘기축시대Axial Age’라고 명명된 시대이다. 문명세계의 거의 모든 중요 지역에서 사람들은 앞으로 중요한 역활을 맡게 될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조했다. 새로운 종교 제도들은 달라진 경제, 사회 조건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여러 이유들에 의해, 모든 주요 문명은 전혀 상업적 접촉이 없었던 경우일지라도(가령 중국과 유럽 지역처럼) 평행을 이루며 발달했다. 새로운 번영이 구가되면서 상인 계급이 출현했다. 왕과 사제, 신전과 왕궁으로부터 시장으로 권력이 이동하고 있었다. 새로 형성된 부는 지성적, 문화적 융성으로 이어졌고 개인 양심의 발달로도 이어졌다. 도시에서 변화의 행보가 가속화됨에 따라 불평등과 착취가 더욱 두드러졌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미래 세대의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각 지역은 이러한 문제와 관심사를 해명하기 위해 독특한 사상과 가치 체계를 개발했다. 중국의 도교와 유교,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유럽의 철학적 합리주의가 그것이다. 중동 지역에서는 어떤 공통적 답안이 제시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란과 이스라엘에서 조로아스터교와 히브리 선지자들이 각각 나름대로의 유일신론을 전개시켰다.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신’이라는 개념은 당시의 다른 위대한 종교적 성찰들과 더불어 공격적 상업주의 정신의 시장경제 상황 아래에 발달된 것이었다.

 


세계의 유사신화

–  J.F.비얼레인 / 현준만 역 / 세종서적 / 2000.10.20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축의 시대(axial period)’라 일컬었다. 그가 ‘축(軸)’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일생과 사역 활동이 그들 역사의 ‘축’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만, ‘축’이라는 개념은 유럽과 아시아의 다른 문화권 구석구석까지 뻗어나갔던 모양이다.

……

야스퍼스는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을 한마디로 정신적 사유의 대대적인 진보라고 요약했다. 제사를 매개로 여러 신들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것에서 ‘보편적인 하나의 신’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사유가 ‘진화’했다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이와 함께 신화의 기능도 필연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평온하고 모든 것이 분명했던 신화의 시대는 종말을 맞았다. 예언가들의 신관(神觀)이 비신화적으로 돌아섰듯이 그리스와 인도, 중국의 철학자들도 비신화적인 직관을 견지했다. 합리성과 합리적으로 규명된 경험이 신화를 상대로 투쟁에 돌입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투쟁은 유일신의 초월성 확보를 위한 실재하지 않는 악령들과의 싸움으로 발전되었고, 급기야는 신들의 거짓 형상에 반기를 든 윤리적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종교는 윤리적인 모습을 갖추었고, 이와 함께 신의 위엄이 한결 높아졌다.

신들이 말하기를 그칠 때, 사회가 신들을 버리게 된다고 한 피에르 자네의 말을 기억하는가? 축의 시대에 일어났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관련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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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온난기는 특히 북반구에서의 퇴적물, 나이테, 아이스 코어 및 꽃가루에 대한 수많은 분석으로 충분하게 증명되었다. 또한 중국, 북아메리카, 베네수엘라, 남아프리카,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및 사르가소 해에서의 연구는 로마 온난기가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음을 보여준다. 고대 작가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책에서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 2003년의 갈리시아(Galicia)에서의 꽃가루 분석은 로마 온난기가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서 기원전 250년부터 450년까지 지속되었다고 결론 지었다.

– 알파인(Alpine) 빙하에 대한 1986년 분석에 따르면 100-400년 기간은 직전과 직후의 기간보다 상당히 더 따뜻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후퇴하는 Schnidejoch 빙하에서 회수된 유물은 청동기 시대, 로마 온난기, 중세 온난기의 증거로 여겨져왔다.

– 심해 퇴적물을 기반으로 한 1999년 해류 패턴의 재구성은 150년경에 고점으로 로마의 온난기가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 아이슬란드 포구의 연체 동물 껍질에서 발견된 산소동위원소에 대한 2010년의 분석은 아이슬란드가 기원전 230년에서 40년 사이에 매우 따뜻한시기를 경험했다고 결론지었다.

 

 

– 지난 2000년동안의 북반구 온대지방의 온도변화(Liungqvist et al. 2010). 로마온난기(200 BC – AD 200)와 중세온난기(AD 1000 – 1200), 그리고 AD 400 – 700의 한랭 건조기와 소빙하기(AD 1600 – 1900)를 잘 보여주고 있다.

 

 

로마 온난기와 관련하여 유럽 쪽의 기후대의 변화를 살펴보자. 고고학자 크럼리(Carole Crumley)는 지난 3천 년간 이 추이대의 이동을 추적했다. 그 결과 기온이 낮았던 시대에 그 경계는 지금보다 훨씬 남쪽으로 북위 36도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 해안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온이 올라가면 그 경계는 북해와 발트 해 연안까지 북상한다. 그 거리는 약 880km로, 위도 차이가 12도나 된다. 크럼리는 이러한 기후 지대의 북-남 이동이 유럽의 역사에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극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아래는 유럽의 추이대 변동(Carole L. Crumley 엮음, Historical Ecology)을 보여 준다. 로마 제국의 번영과 쇠퇴가 기후의 변동이 상당한 변수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프랑스 중남부에 추이대가 존재한단다)

<기원전 1200~기원전 300년 기단의 상대적 위치>              <기원전 300~300년 기단의 상대적 위치 – 로마 온난기>

 

<500~900년 기단의 상대적 위치>                                  <홀로세 후기 온대 지중해 추이대의 위치- 아래 위를 이동>

 

온난한 기후 조건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 내내 지속되었다. 지중해성 기후대의 북방 경계는 상당히 북쪽으로 올라갔다. 지중해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는 삶의 내용에 상당한 차이를 가져온다. 온난기를 맞아 지중해성 기후가 확대되면서 유럽 대륙은 농산물이 풍족해졌다. 이 시기에 로마는 융성했고 유럽 전역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었다. 반면 5세기에는 날씨가 추워지면서 게르만의 남하가 시작됐고 로마는 재앙을 맞는다.

 

 

기록, 고고학적, 자연과학적 증거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와 마지막 위기 기간 동안 기후가 변했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트라야누스 황제(98~117년)의 로마 제국 최대 영역의 시기는 로마 기후최적기와 일치했다. 기후 변화는 로마 제국 초기 느린 속도의 변화에서 제국의 후기 급격한 변동에 이르기까지 다른 속도로 발생했다.

 

로마 온난기는 유럽에서 중동을 거쳐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왕국의 형성을 가능케했다. 정치가 안정되면서 원거리무역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유라시아 동서 양편의 첨단 제국들인 로마와 한나라는 사회발전을 할 수 있는만큼 계속해서 끌어올리고 있었다.

 

로마 온난기에는 대제국의 번영뿐만 아니라 북방민족의 준동을 일깨웠다. 새로운 주거지의 개척으로 전체인구에서 북방민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으며, 이와 함께 이들의 세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로마 제국의 대규모 요새와 방벽, 중국의 만리장성은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지고 보강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중세 온난기에서도 볼 수 있다.

※ 중세 온난기 : http://yellow.kr/blog/?p=619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에 대한 걱정이 많다. 홀로세(현세) 기후변화의 추세를 깨고 계속 상승한다면 심각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 부분은 학자들 간의 논란이 존재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기후가 온난 다습한 시절(로마 온난기, 중세 온난기)에는 안정된 정치체제가 장기간 유지되고 장거리 교역이 번성했다. 반면 기후가 한랭했던 시절(기원전 2천500∼500년, 기원후 400∼700년, 소빙하기) 대규모 사회적 혼란과 외부세력 침입, 민족 대이동 등 격변이 발생했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  이언 모리스 / 최파일 역 / 글항아리 / 2013.05.27

 

두 가지 다소 유사한 힘이 동양과 서양의 경제성장 뒤에 버티고 있었는데, 하나는 경제를 위에서 견인하는 힘이고, 또 하나는 밑에서 경제를 추진하는 힘이다. 견인 요인은 국가의 성장이었다. 로마와 한나라의 정복자들은 방대한 지역에서 세금을 거둬들였고 세수 대부분을 변경을 따라 배치한 군대(로마에는 35만 명, 중국에는 적어도 20만 명의 군인이 있었던 것 같다)와 거대한 수도(로마 시에는 약 100만 명이, 한나라의 장안에는 약 50만 명이 거주했던 것 같다)에 사용했다. 양쪽 모두 식량과 상품, 돈을 부유하고 세금을 내는 지방에서 굶주리고 세수를 집어삼키는 인구가 집중된 지역으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었다.

……

두 번째 힘, 경제를 위로 추진하는 힘은 기후변화라는 익숙한 힘이었다. 기원전 800년 이후 지구냉각화는 저가 국가를 대혼돈 속에 내던졌고 수 세기에 걸친 팽창을 촉발했다. 기원전 200년이 되자 계속되는 궤도 변화는 기후학자들이 로마 온난기라고 부르는 시대를 알렸다. 이것은 겨울 바람을 약화시켰지만 – 지중해의 농부와 중국의 대하 유역의 농부에게는 안 좋은 소식이었다 – 부분적으로는 앞선 지구냉각화에 대한 대응으로 생성된 고가 제국은 이제 동양과 서양 사회에 기후변화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끈질긴 생명력도 안겨주었다. 힘든 시절은 다양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유인을 증가시켰다. 사람들은 물레방아와 석탄을 가지고 실험을 했고 상품을 이동시킴으로써 지역적 이점을 활용했다. 고가 국가들은 주민들이 부유해질수록 세금도 더 많이 낼 수 있다는 매우 합리적인 가정 아래 이러한 활동을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도로와 항구를 제공했고 군대와 법전은 수익의 안정성을 보장했다.

고가 제국은 옛 심장부 너머의 지역으로도 진출했는데 온난기 덕분에 농업 생산성이 높아진 이 지역은 서양의 경우, 프랑스와 루마니아, 비가 많이 내리는 잉글랜드 같은 지역이었고 동양의 경우는 만주와 한국, 중앙아시아였다. 제국들은 의식하지 못한 채 실질적으로 분산 투자를 통한 위험 감소를 시도한 셈이었는데, 온난한 지역에는 불리한 기후변화가 한랭한 지역에는 유리했기 때문이다. 지중해 덕분에 무역상이 지역 간에 상품을 이동시키기가 쉬웠던 로마에서는 기후변화의 혜택이 확실히 컸다. 커다란 강들이 이용에 덜 편리한 중국에서는 혜택이 분명 더 작았을 테지만 여전히 실질적 혜택이 존재했다.

 

온갖 전쟁과 노예화, 학살의 결과는 이 장을 연 팡글로스풍의 열광을 낳은 풍요의 시기였다. 풍요의 산물은 불균등하게 분배되었지만 – 철학자나 왕보다는 농민이 훨씬 많았다 – 이전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은 사람이 생존했고 더 큰 도시에 살았으며 전반적으로 더 오래 살고 더 잘 먹고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

 


기후의 문화사

– 볼프강 베링어 / 안병옥,이은선 역 / 공감 / 2010.09.10

 

서늘한 여름과 온화하고 비가 많은 겨울로 대변되는 서브애틀랜틱기의 습하고 서늘한 기후는, 예수가 탄생할 때까지, 다시 말해서 로마 도시왕국과 로마공화국을 아우르는 시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 지하수위는 오늘날보다 높았을 것이며, 북아프리카의 오아시스들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생활기반을 제공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북아프리카가 왜 로마제국의 곡식창고가 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로마공화국의 문화가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의 도시국가들과 함께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유리했던 기후 덕분이었다.

짐작컨대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기원전 63~기원후 14, 재위 기원전 20~기원후 14)의 통치기에는 기후가 꽤 따뜻한 편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기온은 오늘날과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알프스 북부는 지금보다 더 따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근동과 북아프리카에서는 습한 기후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서기 120년경 기후일기를 썼던 인물은 이집트의 대표적인 학자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eos, 100~160년경)이다. 그가 쓴 일기는 8월을 제외한 모든 달에 내린 비에 관한 정보와 함께, 당시의 기후가 오늘날의 기후와는 확연하게 달랐음을 보여준다. 4세기에 들어와 북아프리카는 메마른 땅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많은 주거지들은 훗날 시리아와 요르단의 사막에 의해 잠식되었다. 예수의 탄생 시기에 세계 인구는 3억명가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절반가량은 아시아의 양대 고대문명에서 살고 있었다. 중국과 인도의 인구는 각각 8천만 명과 7천5백만 명에 달했던 반면, 서아시아와 유럽에서는 3천5백만 명가량이 살았고 북아프리카의 인구는 1천5백만 명 수준이었다. 이로써 로마의 기후최적기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구상에 살게되었다. 이렇듯 인류의 생활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해주었던 기후는, 1000년이 흐른 뒤 중세중기의 온난기에 나타나게 된다.

 

 

로마가 이탈리아 도시국가 중 하나에서 세계권력으로 등장한 세계사적인 사건은 당연히 기후변화의 결과만은 아니다. 로마의 부흥을 기후변화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기후변화는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둘째 로마부흥에 영향을 미친 많은 다른 요인들이 있으며, 셋째 로마의 발전은 실질적으로 같은 기후조건에서 살았던 에트루리아인, 그리스인, 페니키아인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마와 카르타고의 비교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지중해 이남에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던 카르타고는 상대적으로 추운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반면 로마는 유럽 정치의 중심이 지중해의 북쪽으로 이동했던 온난기 이후에야 번영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는 서기 146년 카르타고가 멸망한 후에도 수백 년 동안 로마제국의 경제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활을 했던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처음에는 로마제국의 영토가 남쪽으로 확장되었지만, 기후가 점차 따뜻해지면서 그 방향을 북쪽으로 선회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아우구스투스 황제(Caesar Augustus)로 등극하면서 로마는 군주제를 실현하게 되었다. 이는 권력구조의 광범위한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로마는 통일법률을 제정함으로서 정복국가들을 통치시스템에 체계적으로 편입시키고 계획적인 대외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로마는 트라이아누스 황제(Traianus 53~117, wodnl 98~117) 시대에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할 수 있었다. 당시 로마제국의 영토는 스코틀랜드의 국경에서 카스피해와 페르시아만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지역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이렇듯 로마제국의 영토확장이 온난하면서도 너무 건조하지 않았던 기후조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후사에서는 이 시기를 로마의 기후최적기(Roman Climate Optimum)라 부른다. 기원후 1세기에서 400년경까지 빙하의 해빙과 해수면의 상승을 야기했던 온난화는, 지중해북부의 대제국 로마를 결속시키고 북쪽으로 진행되는 영토 확장에 기여했을 것이다. 알프스의 횡단이 일 년 내내 가능하게 되면서 갈리아(Gallia)와 벨기카(Belgica), 게르마니아(Germania), 라이티아(Raetia), 노리쿰(Noricum)의 정복과 통치가 용이해졌다.

로마시대 알프스 고산지대에서는 수많은 광산이 운영되었다. 이 곳은 먼 훗날인 20세기 말에는 영구동토층으로 덮여있던 지역이다.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가 남겼던 문헌으로 보면, 포도와 올리브는 이탈리아를 기준으로 이전보다 훨씬 북쪽에서 재배되었을 것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Domitianus 51~96, 재위 81~96)는 알프스 북부에서 포도재배를 금지한다는 내용을 담은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는 당시의 기후조건이 알프스보다 훨씬 북쪽에서도 포도재배가 가능했으리만큼 따뜻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포도재배의 금지는 서기 280년에 내려진 프로부스 황제(Probus 232~282, 재위 276~282)의 칙명으로 철회되었다. 이후 독일과 영국에서의 포도재배는 서기 300년경부터 남쪽에서 와인을 수입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성공적인 것이었다.

 

 

고대의 기후최적기는 유럽에서 중동을 거쳐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왕국의 형성을 가능케했다. 정치가 안정되면서 원거리무역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대제국이 건설되었던 것은 전제군주 진시황제(재위 기원전 246~210)의 시대였다. 진시황제는 무덤에서 실물 크기의 수많은 호위병 모형이 발굴된 병마용갱(兵馬俑坑)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진시황제의 제국은 얼마 안가 백성들의 봉기에 의해 무너졌다. 중국은 이후 들어선 새 왕조가 실용적인 정책을 펴나가면서부터 점차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한(漢) 왕조(기원전 202~서기 220)의 중국과 로마제국이 거의 같은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대문명기 중국은 서양처럼 제국을 형성해가는 과정에 있었다. 오늘날에도 중국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족(漢族)은 중국민족을 대표하고 있다. 한 왕조의 중국은 과다한 군비지출로 초래된 재정위기에도 불구하고 유례없는 경제적 융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서기 2년경 중국 인구는 약 6천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후는 대제국의 번영뿐만 아니라 북방민족의 준동을 일깨웠다. 새로운 주거지의 개척으로 전체인구에서 북방민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으며, 이와 함께 이들의 세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기원후 2세기와 3세기에는 카르파티아(Carpathian) 지역과 러시아 남부를 침입했던 고트족, 게피다이족, 반달족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이로서 북부 유럽은 격변기를 맞게 되었다. 게르마니아의 리메스(Limes)와 브리타니아의 하드리아누스 성벽(Hadrian’s Wall)에서 확인되듯이, 로마제국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대규모 요새 건설로 막으려 했다.

오늘날의 몽골지역에서는 흉노족이 중국을 넘보기 시작했다.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만리장성이 축조되기 시작했으며, 2세기에 들어서 흉노족은 결국 서방으로 진격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흉노족은 인도를 침입했으며 마침내 흑해지역까지 진출했다. 유럽에서 흉노족을 처음으로 언급한 이는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였다. 그는 흉노족을 ‘청뇌(Chunnoi)’로 불렀다.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  브라이언 페이건 / 남경태 역 / 예지 / 2007.08.25

 

켈트족은 이탈리아에 눌러앉을 심산이었지만 기후 변동의 가차없는 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기원전 300년경 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 사이의 추이대가 이동하기 시작해 지금의 부르고뉴까지 북상했다. 그 결과 켈트 지역의 남쪽에 온난건조한 여름과 습한 겨울의 지중해성 기후가 자리를 잡았다. 많은 도시 인구를 위해 밀과 기장 같은 몇 가지 작물을 광범위하게 재배하는 로마식 농경은 건조한 남유럽 환경에 매우 적합했다. 추이대가 북상함에 따라 로마의 힘이 급격히 증대했다. 기원전 2세기에 로마는 그때까지 그리스 식민지들이 장악하고 있던 지중해 서부의 해로를 지배했다. 로마는 해운의 강적인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제국의 힘을 키웠다. 로마 본토와 남유럽의 우호적인 기후 조건은 이제 그들의 손 안에서 큰 역활을 하게 되었다. ‘로마의 평화’는 북상하는 추이대를 따라가며 꾸준히 켈트족의 땅을 잠식했다. 기원전 2세기 중반 현재 프랑스 남부에 해당하는 켈트족의 땅은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

온난한 기후 조건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 내내 지속되었다. 지중해성 기후대의 북방 경계는 상당히 북쪽으로 올라갔다. 곡식의 성장기가 길어지자 로마의 주둔군과 도시들의 사정이 나아졌고, 새로 제국에 편입된 지역도 혜택을 입었다. 갈리아 북부가 로마화된 결과는 무엇보다도 농경 방식이 단지 자급을 위한 것에 머물지 않고 군대와 도시를 위한 식량의 대량생산으로 변했다는 데 있었다. 또한 농부들은 할당된 세금을 내기 위해 자신에게 필요한 양 이상으로 많은 식량을 재배했다. 농업 생산물은 현금처럼 취급되었으며, 토지를 매년 재분배하던 예전 켈트 시대의 토지소유 제도 대신 사적 토지소유 제도가 자리를 잡았다.

 


유라시아 농경사 3

–  ユーラシア農耕史〈3〉 砂漠・牧場の農耕と風土 . 佐藤 洋一郎 (監修), 鞍田 崇 (編集)

 

중앙 유라시아의 기후 · 수자원과 그 변천

– 쿠보타 쥰페이​

 

…… 게다가 약간 시대는 뒤이지만,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도 기온의 복원 결과와 오아시스의 유적조사로부터 오아시스의 형성 시기가 약 2200년 전 한나라 시대와 약 1400~1200년 전의 당나라 시대에 집중되며, 그것이 기온이 고온이었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 또한 16세기의 한랭으로 건조했던 시기에 오아시스 도시가 쇠퇴했다는 지적이 있다(Takamura 2005). 이와 같이 오아시스 도시의 성쇠와 수자원의 변동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 앞으로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시그널

–  벤저민 리버만 / 은종환 역 / 진성북스 / 2018.12.05

 

로마 제국과 한나라는 최고 전성기에 인류가 자연환경을 이용하는 전반적인 방식에 있어 새로운 이정표를 보여주었다. 인류 역사상 그 전까지는 그렇게 대규모로 밭을 갈고, 그렇게 많은 양의 곡식을 재배하거나, 그렇게 많은 가축을 길러본 적이 없었다. 농경지 개간으로 산림이 차츰 황폐해지면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도 증가했다. 또한 2,000년 전부터 대기 중 메탄 농도의 상승이 관찰되는데, 벼농사를 위해 논에 물을 대기 시작한 것이 그 주된 이유라 할 수 있으며 가축의 증가 역시 메탄가스 배출을 증가시켰다.

……

 

기원전 400년경부터 서기 200년경까지 기후가 비교적 온난하고 안정적이었던 시기를 우리는 ‘로마 기후(Roman climate)’ 또는 ‘기후 최적기(climate optimum)’라고 표현해왔다. 이런 표현들은 복합사회들과 고전시기의 강력한 제국들이 그 시대의 기후로부터 혜택을 받았다는 생각에서 유래한다.

……

 

로마 기후 최적기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먼저 수목과 올리브, 포도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로마시대 저술가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기후 최적기 동안 밤나무류를 비롯한 수목들의 서식지와 올리브 및 포도 재배지의 범위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1세기의 작가 콜로멜라(Columella)는 “과거에 그 지역은 계속되는 혹독한 추위 때문에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를 키우기에 불안했으나, 지금은 추위가 가시고 기후가 온화해짐에 따라 올리브가 열리고 좋은 포도주가 풍부하게 생산된다”라고 적었다. 올리브는 새로운 지역에서도 재배되었다. 실제로 로마의 통치 하에 갈리아 혹은 현재의 프랑스 지역에서 올리브 재배가 확대되었다. 또한 로마는 포도 재배를 늘리기 위해 북쪽으로 땅을 넓혀나갔다. 정복한 지역으로 로마인이 이주하고 정복지의 식민지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농작물에 대한 수요가 계속 창출되었는데, 다행히 기후 최적기는 그 농작물의 재배지 확대를 수월하게 해주었다.

 

기후 최적기 동안 로마의 인구와 경작지 또한 늘어났다. 로마의 인구에 대해서는 전 지역을 일제히 조사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추정하기가 어렵지만, 대체로 서기 2세기경까지 내내 증가해 최대 5,000만에서 7,000만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기후에 관한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로마 공화정 말기에는 전반적인 온난화 추세가 지속되었다. 이런 온난화는 지중해성 기후를 북쪽으로 확장시켰다. 포강 삼각주(Po River Delta), 아드리아 해(Adriatic Sea), 알프스 산맥에서 수집된 증거들은 이탈리아의 기온이 상승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복수의 기후 표본을 통해, 당시는 비록 20세기와 21세기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따뜻한 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따뜻한 시기는 농사짓기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고 인구 증가를 위한 다른 요인들도 강화해주었다.

……

 

로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시 기후 최적기의 안정적 기후 여건은 농업 생산량 증대에 도움이 되었다. 한나라시대의 농부들은 다양한 형태의 기구와 기술을 이용해 농업 생산성을 높였고, 국가는 관개(灌漑)사업을 지원했다. 농업 전문가들은 향상된 농업 기술에 관한 개괄적인 기록을 남겼다. 서기 1세기 초반 심각한 홍수가 발생해 인구가 급격히 줄어든 적은 있지만, 당시 인구는 2,000만 명대에서 한나라 중기까지 6,000만 명 정도로 늘어났다.

 

한나라의 경계를 결정짓는 데도 로마 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후가 영향을 미쳤다. 한무제와 같은 야심찬 통치자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며 중국의 경계를 서쪽으로 확장했다. 한나라는 중국의 농경지를 안정적으로 지배했지만, 서쪽과 북쪽의 건조하고 추운 지역에서는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했다. 한나라는 북부에 요새화된 도시를 건설했다. 북쪽 국경지대에서는 흉노족으로 알려진 유목민을 다스리는 데 특히 집중했다. 몽골과 독일 지역의 환경은 매우 달랐지만, 중국인들이 흉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은 로마인들이 독일에 대해 지녔던 인식과 같았다. 한무제에게 가혹한 벌을 받은 역사가 사마천은 흉노의 땅을 ‘굴종적인 황무지’로 묘사했다.

 


기후와 문명

–  노의근 / APEC기후센터 / 기후정책연구 2015-01

 

제6장. 200 BC € AD 200 : 로마온난기 (Roman Warming)

 

온난한 기후가 지속되었던 이 시기에 서양에는 로마제국, 동양에는 한(漢)제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번성을 누렸다. 온난한 기후 아래서의 장기간에 걸친 안정적인 농업생산량의 공급은 이 거대한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기독교가 탄생한 것도 이 시기이다.

 

로마정복의 전반기에는 카르타고와 싸운 포에니전쟁(264 € 113 BC)을 포함 지중해 남쪽으로 치우치던 제국의 확장이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케사르의 갈리아 원정(51 BC) 등 점점 지중해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로마시대 초기에는 북아프리카는 곡창지대였다. 이는 로마시대 초기에는 북아프리카가 온난다습한 기후를 유지해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기후가 조금씩 한랭건조해짐에 따라, 지중해남쪽보다는 지중해북쪽 유럽지역이 경제적으로 더 중요해지고, 따라서 로마인들에게는 북아프리카보다는 유럽의 땅이 더 탐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로마의 북방한계선은 대체로 겨울 평균온도 0℃와 일치한다. 아마도 따뜻한 햇살아래 살아오던 로마인들에게는 춥고, 음산한 북유럽의 게르만인의 영토는 그다지 끌리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장기간에 걸친 온난다습한 기후는 고대제국의 번영을 유지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풍성해진 문물과 여행의 용이함이 장거리 교역을 번성하게 하였다. 중국에서는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부터 서역(西域)의 경영에 관심이 많아, 후한에 들어와서 로마와 장안(長安)을 잇는 교역로를 정비했다. 교역로가 활발화된 것은 동서 양대국의 물자수송이 확대되었던 이유 이외에도, 배경으로 중앙아시아의 강수량이 증가하여, 유목민의 생활이 향상되고, 중계지점이었던 각지의 오아시스 도시가 발전된 점이 있다. 실크로드는 BC 150부터 AD 300까지 400년 이상을 번성하였다.

 


< 관련 그림 >

 

아래는 2012년 자연기후변화저널(Nature Climate Change)의 자료인데, 스칸디나비아 북부의 여름(6~8월) 데이터를 분석한 것이다. 로마 온난기, 중세 온난기 모두 현재 보다 높았던 것으로 나온다.

– Figure 1. The summer (June-July-August) temperature reconstruction of Esper et al. (2012), adapted from their paper.

 http://www.co2science.org/articles/V15/N30/EDIT.php

 

 

– 영거 드라이아이스기 이후 홀로세(Holocene Epoch), 즉 현세(現世)는 기후최적기, 건조화기, 한랭건조기, 로마온난기, 다시 한랭건조기와 중세온난기, 소빙하기로 지구의 기후가 변화해왔다.

 

 

–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에 있는 로마시대 때의 다리. 지금은 모두 말라 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 튀니지의 마제리우스(Magerius) 모자이크에 등장하는 표범. 북아프리카 지역의 수많은 로마 모자이크는 현재 열대 아프리카에서만 발견되는 동물군을 묘사하지만 기후 변화가 그 원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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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漢代) 초기에는 군현제와 봉건제가 혼합된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하였으나 한무제 시기에 이르면 사실상 유명무실화되고 군현제가 자리잡았다.

후한의 행정 구역은 중국 전역을 13개의 주(州)로 나누고 각 주에 자사(刺史)를 파견하여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의 감찰을 맡게 했다. 주 밑에 군(郡)과 국(國)을 두었다. 군태수(太守)는 지방 행정의 중추를 구성하는 군의 통치자였는데, 관리를 천거하고 범죄를 단속하며 전시에는 군대의 지휘권도 주어졌으므로 태수를 하다 자립한 장수가 많았다. 주자사(州刺史)가 군태수를 관리하는 입장이었으나 태수보다 지위도 낮고 군사 기반도 없었다. 그러나 황건의 난 등으로 혼란에 빠지자 군사력을 동원하는 등 자사의 권한을 강화한 주목(州牧)이 등장했다. 위 · 오 · 촉한 모두 자사 혹은 목을 두었다.

군 밑의 현(縣)에는 현령(縣令) 혹은 현장이라는 행정관이 배치되었다.

 

 

 

 

1. 사례(司隸)

◎ 사예교위부(司隸校尉部)는 한나라 당시 사예교위(司隸校尉)가 관장하며 행정을 감독하는 지역을 일컫는다. 삼국 시대 이후에는 사주(司州)라고 불렸으며, 경조윤(京兆尹)과 하남윤(河南尹)이 각각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다스렸다. 7개 군윤 106개 현.

◎ 낙양(洛陽) : 허난 성 뤄양 시

 

2. 예주(豫州)

◎ 예주는 중국 역사상의 옛 행정 구역이며, 중심지는 초현(譙縣, 패군)이다. 6개 군국 99개 현. 현재의  안후이성, 허난성 일대. 허창이 여기 있었다. 조조를 비롯한 조씨, 하후씨 일족의 출신지인 초 또한 이곳. 연주와 같은 하남 일대의 핵심. 특히 소속 고을인 ‘영천군'(허창은 이 영천의 속현)은 재사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던 터전(고향)이었다. 유비가 예주목 지위를 가지고는 있었으나 실권은 없는 명예직. 213년 하남윤이 예주로 편입되고 하남군이 된다.

◎ 초현(譙縣) : 현재의 안후이 성 보저우 시

초현은 예주의 주도이다. 위 · 서진에서도 예주의 중심도시가 됐다. 조조의 출신지로 당연히 하후일족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적벽의 패전후, 조조는 오에 대한 공격지점을 형주에서 동방의 유수구, 합포방면으로 옮기는데, 초는 그 원정시의 출발점, 위의 수군 근거지가 됐다.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초는 위의 오도중 하나가 됐다.

 

3. 기주(冀州)

◎ 기주는 현재의 허베이 성 중남부와 산둥 성 서부, 허난 성 북부에 존재한 후한 13주 중 한 지역이며, 9개 군국 100개 현. 중심지는 고읍(高邑, 상산국)이다. 조위말엽 중심지가 안평군 신도현으로 옮겨졌다. 이후 수나라부터 주현제가 실시될때는 안평군이 기주로 대체되었다.

기주목  한복이  공손찬과  원소의 공격으로 몰락한 다음에는  공손찬과  원소가 패권을 놓고 대립하다가  원소가 공손찬을 물리치고 주요 거점으로 삼는다.

◎ 고읍(高邑) : 현재의 허베이 성 스자좡 시 가오이 현

 

4. 연주(兖州)

◎ 연주는 현재의 산둥 성 서남부와 허난 성 동부에 존재하였고 8개 군국 80개 현. 중심지는 창읍(昌邑, 산양군)이다. 순욱이 “천하의 중심”이라며 극찬한 곳. 연주목으로 추대된 뒤에는  조조의 거점이다.

◎ 창읍(昌邑) : 현재의 산둥 성 지닝 시 진샹 현

 

5. 서주(徐州)

◎ 서주는 현재의 산둥 성 동남부와 창 강 북부의 장쑤 성 일대에 존재하였고 5개 군국 63개 현. 중심지는 담현(郯縣, 동해국)이다. 도겸이 차지하고 있다가 잠시  유비가 차지하고 그 뒤에는 여포가 먹었다가 조조에게 빼앗긴다. 잠시 또 유비가 차지하지만 다시 조조에게 빼앗기고 그 뒤로는 쭉 조조의 영토가 된다.

◎ 담현(郯縣) :  현재의 산둥 성 린이 시 탄청 현

 

6. 청주(青州)

◎ 청주는 동남부를 제외한 현재의 산둥 성 일대에 존재하였고 6개 군국 65개 현. 중심지는 임치(臨淄, 제국)이다. 공손찬의 지배하에 있을 때는  공융과  전해가 다스렸으며, 원소의 지배하에 있을 때는 원담의 영토였다. 조조의 2대 특수부대 중 하나 청주병은 여기서 발호한 황건적에서 차출되어 시작되었다.

◎ 임치(臨淄) : 현재의 산둥성 쯔보시 린쯔구

 

7. 형주(荊州)

◎ 형주는 장강(양쯔강)의 중류에 위치하여 풍부한 수자원과 수운 활동으로 경제가 번성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형주의 중심지는 한수(漢壽, 무릉군) · 양양(襄陽, 남군)이다. 7개 군 117개 현.

삼국지시대의 화약고인 형주를 두고 여러 세력의 형주 공방전이 벌어졌다. 현재 형주라는 이름은 과거에 강릉이었던 도시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 한수(漢壽) : 현재의 후난 성 창더 시 한서우 현 -> 양양(襄陽) : 현재의 후베이 성 샹양 시

190년(초평 원년) 형주자사 왕예가 장사태수 손견에게 살해당하여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소대(蘇代)가 장사에서 일어나 패우(貝羽)를 화용현장(華容―)으로 삼는 등 장강 이남의 토호들이 할거하는 바람에 장강 이남에 있는 본래 형주의 주도(州都) 무릉군 한수현(漢壽縣)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홀로 남군 의성현(宜城縣)으로 들어갔다. 남군 지역의 유력 호족인 채모, 괴월, 괴량의 조력을 얻어 궐기한 토호들의 우두머리를 유인하여 처단하고 그 휘하 무리들을 흡수했다. 오직 장호(張虎)와 진생만이 양양(襄陽)성을 점거하고 버텼는데 괴월과 방계(龐季)로 하여금 설득하니 항복하여 마침내 강남 일대를 평정하였다. 양양을 주도로 정해 통치하고 반동탁 연합군에 합류하였다. 208년 유표의 후계자인 유종의 항복으로 양양은 조조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남북조때의 쟁탈전, 원과 남송의 공방 등 옛부터 여러번 남북세력의 대결장이 됐다.

삼국시대 말 강릉이 중심지가 되면서 형주성 = 강릉성이 되었다.

 

8. 양주(揚州)

◎ 양주는 현재의 장쑤 성 남부, 안후이 성 남부, 저장성, 장시 성 그리고 푸젠 성 지역에 해당한다. 6개 군 93개 현.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까지 초기에는 호족들이 난립했으나  손책에 의해 장악된 이후 손씨 오나라의 근거지가 되었다. 후한 때 치소는 역양歷陽, 말년에는 수춘壽春, 합비合肥로 옮겼다.

◎ 역양(歷陽) : 현재 안후이 성 차오후 시 허 현 -> 수춘(壽春) : 현재 안후이 성 화이난 시 서우 현 -> 합비(合肥) : 현재 안후이 성 허페이 시 서북쪽

 

유요가 회포에서 난을 피하고 있을 때 조정으로부터 양주자사로 임명한다는 조서가 내려왔는데, 원술이 이미 전임 양주자사  진온이 죽은 후 스스로 양주자사를 임명하고 양주의 치소가 있는 수춘 등 회남 일대를 점거했기에 이를 두려워해서 유요는 감히 부임하지 못하고 있었다.

건안 5년(200년), 손책이 임명한 여강태수 이술이 조정에서 파견한 양주자사 엄상을 죽이자, 원래 엄상이 관할하여 아직 손책이 장악하지 못한 양주 일대에 행정력 공백이 발생했고 여강의 매건, 뇌서, 진란 등이 이 틈에 양주의 각 군현을 공략했다. 당시 조조는 원소와 맞서고 있었으므로 표를 올려 유복을 양주자사로 삼아 그 방면의 모든 일을 맡겼다. 유복은 조조에게 별도의 지원 없이 단기로 부임했으나, 합비의 빈 성을 주 치소로 삼고 매건, 뇌서, 진란을 설득해 항복시켜 기반을 잡았다.

 

9.익주(益州)

◎ 익주는 현재의 쓰촨 분지와 한중 분지 일대에 존재한 중국 역사상의 옛 행정 구역이며, 중심지는 낙현(雒縣, 광한군) · 면죽(綿竹, 광한군) · 성도(成都, 촉군)이다. 12개 군국 118개 현.

산지로 둘러싸인 내륙 분지라서 방어가 쉬운 지형이다. 게다가 토질도 좋아서 생산력도 좋은 지역이다.

 

◎ 낙현(雒縣) : 현재의 쓰촨 성 더양 시광한 시 -> 면죽(綿竹) :  현재의 쓰촨 성 더양 시 몐주 시 -> 성도(成都) : 현재의 쓰촨 성 청두 시

188년 극검이 살해당한 후에 익주목으로 들어온 유언이 익주자사의 치소를 낙현雒縣에서 면죽綿竹으로 옮겼다. 194년(흥평 원년), 유언은 유범과 정서장군(征西將軍) 마등을 도와 이각·곽사·번조 연립 정권을 몰아내려 했으나 패하고 유범과 유탄이 목숨을 잃었으며 주도(州都)엔 엄청난 화재까지 덮쳐 광한군 면죽현(綿竹縣)에서 촉군 성도현(成都縣)으로 옮겨야 했다. 이 충격으로 유언이 병사했다.

 

10. 량주(涼州)

◎ 량주는 현재의 간쑤 성과 닝샤 후이족 자치구, 칭하이 성 동북부, 신장 위구르 자치구 동남부, 내몽골 자치구 아라산 맹 일대에 존재한 중국 역사상의 옛 행정 구역이며, 중심지는 농현(隴縣, 한양군)이다. 12개 군국 98개 현.

옹주와 분리와 합체를 자주 반복했다. 전통적으로 진(秦)나라의 근거지. 동탁, 마등 세력의 본거지였으며 서역 지배의 중심지였으며, 오나라의 양주와 구별하기 위해 흔히 서량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 농현(隴縣) : 현재의 산시성 바오지시 룽현

 

11. 병주(并州)

◎ 병주는 현재의 산서성 일대를 중심으로 섬서성 북부와 내몽골 자치구의 접경지역 일부를 포함하는 중국 역사상의 옛 행정 구역이며, 중심지는 진양(晉陽, 태원군)이다. 9개 군 98개 현.

흉노족의 침범이 많아 만들어진 준 군사주였다. 그래서 이곳 출신들은 하나같이 무예가 뛰어났다. 병주 태원은 후대 당나라의 건국 세력인 농서 이씨의 근거지가 된다.

 

원소의 조카 고간의 지배지역이었다. 여포와 장료, 왕윤의 고향이다. 정원이 자사를 지내기도 했는데, 가끔씩 형주자사로 알려지는 경우도 있다. 동탁은 병주의 목 신분으로 소제를 위협해 제위를 박탈시키고 헌제를 등극시킨 후 스스로 상국(相國)에 취임했다.

◎ 진양(晉陽) : 현재의 산시성 타이위안시

 

12. 유주(幽州)

◎ 유주는 현재의 베이징시와 톈진시 일대, 허베이성의 일부 북부 지역, 랴오닝성, 지린성 서남부, 북한 일부에 존재하였고, 중심지는 계현(薊縣, 광양군)이다. 옛날 연국(燕國)의 도읍이었다. 11개 군국 90개 현.

◎ 계현(薊縣) : 지금의 베이징 근처

 

13. 교주(交州)

◎ 교주는 현재의 베트남 북부와 중부, 중국 광시 좡족 자치구 일대 (경우에 따라서는 현재의 광둥 성 일대와 하이난 성 또한 포함)에 존재한 중국 역사상의 옛 행정 구역이다. 원래는 교지자사부(交趾刺史部 ,交阯刺史部)라 했는데, 후한 말에 교주자사부(交州刺史部)로 이름을 고쳐 다른 주와 같이 -주 꼴의 이름이 됐다. 중심지는 용편(龍編, 교지군)이다. 7개 군 56개 현.

삼국 시기 손오孫吳가 치소를 반우番禺(광둥성 광저우廣州)로 옮겼다.

◎ 용편(龍編) : 현재의 베트남 하노이 북쪽

 


<관련 사진>

 

– 189년 후한 13주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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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년부터 180년까지 지속된 안토니우스 역병(Antonine Plague)은, 그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그리스 의사의 이름을 따 갈레노스 역병(Plague of Galen)이라고도 부른다. 안토니우스 역병은 파르티아를 상대로 한 원정에서 돌아온 군대에 의해 로마 제국으로 전파된 전염병의 대유행이었다. 학자들은 그 고대의 질병을 천연두 또는 홍역으로 의심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역병은 169년에 로마 황제 루시우스 베루스(Lucius Verus)의 목숨과 180년에 베루스와 공동 황제였고 5현제이며 이 역병의 이름과 관련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의 목숨을 앗았다.

 

 

중국의 문헌은 161~162년 서북부 변경에서 유목민과 싸우는 군대에 정체 모를 역병이 터져 병사 3분의 1이 죽었다고 기록한다. 역병은 171년과 185년 사이에 다섯 차례 더 중국을 찾아오며 그 기간 동안 로마 제국도 그만큼 자주 역병에 시달린다.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이집트에서는 유행성 전염병이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죽였던 것 같다.

 

로마제국 멸망에 대한 논의는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의 《로마제국 쇠망사》로 시작된다. 기번은 역사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정확성과 엄밀성을 갖고 책을 저술했음을 보여 주었고, 이것이 현재에도 《로마제국 쇠망사》가 세계인들이 선호하는 고전으로 손꼽히는 이유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 이유로 전염병 발생의 영향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안토니우스 역병에 대해서는 주요한 요인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아서 에드워드 로밀리 보크(Author. E. R. Boak, 1888-1962)과 같은 연구자, 역사가들은 안토니우스 역병이, 계속되는 일련의 역병 발발과 같이, 로마제국 쇠퇴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Manpower Shortage and the Fall of the Roman Empire》에서 보크는 166년의 역병의 발발로 인구가 감소하여 모자라는 군인을 농부와 지역 공무원으로 충당하였기 때문에 식량 생산량이 떨어지고 도시와 촌락 행정의 지원이 부족해져 전체적으로 야만인 침략을 막는 로마제국의 역량을 약화시켰다고 말한다.

 

《The Route to Crisis: Cities, Trade and Epidemics of the Roman Empire》에서 Eriny Hanna는 “로마 문화, 도시화  및 도시와 지방의 상호 의존성”이 전염병의 확산을 촉진하여 제국 붕괴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Hanna, 1). 인구 밀집 도시, 부족한 식량으로 인한 영양 실조, 공중 위생의 조치 부족으로 로마의 도시들은 질병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전염병은 도시를 중심으로 연결된 육로와 해상 무역로를 통해 외곽 지역으로 쉽게 전파되었다.

 

 

최근에 카일 하퍼(Kyle Harper, 1979- )는 “사회 발전의 역설과 자연의 예측 불가능성이 로마의 붕괴를 위해 같이 작동했다”고 제안한다 (Harper, 2). 다시 말해, 기후변화가 새롭고 치명적인 질병의 발생에 대한 환경적 맥락을 제공했는데, 안토니우스 역병은 로마 기후최적기의 끝 무렵에 나타나 세계에 천연두를 소개하였다. 하퍼는 치명적인 세계적 전염병, 즉 안토니우스 역병을 시작으로 키프리아누스 역병(249-262), 유스티니아누스 역병(541-542)이 높은 사망률로 로마제국의 토대를 크게 흔들었다고 주장한다. 로마제국의 강점으로 많이 인용되는 강력한 로마 군대, 넓은 제국의 영역,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 로마 도시의 수와 규모가 오히려 궁극적으로 로마제국의 몰락으로 이끄는 치명적인 질병 전파의 기초를 제공했다.

 

갈홍(Ge Hong, 284~363)이 중국에서 천연두의 증상을 정확하게 묘사한 최초의 사람이었지만, 역사학자 Rafe de Crespigny는 후한 황제 환제(146-168)와 영제(168-189)의 통치 기간 동안 중국을 괴롭히는 재앙, 즉 151, 161, 171, 173, 179, 182 및 185 년에 발생한 역병이 아마도 안토니우스 역병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며, 이 재앙이 장각(Jian Jue, 184)가 이끄는 신앙인 태평도를 일으켰으며, 황건의 난(184-205)을 촉발시켰다고 말했다.

 

 

고대의 기후최적기는 유럽에서 중동을 거쳐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왕국의 형성을 가능케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비슷한 시기에 쇠락하기 시작했다.

※ 로마 온난기(로마 기후최적기) : http://yellow.kr/blog/?p=3970

 

이언 모리스의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서는, 기원전 1년과 서기 1년 부근에서 정점을 찍은 뒤 사회발전지수가 동양과 서양에서 모두 떨어진다고 한다.

 

Figure 6.1. An Old World–wide depression: the peak, decline, and fall of the ancient empires, 100 BCE–500 CE

 

이번 하락은 완전히 새로운 규모의 붕괴였다. 유라시아 양단에 영향을 미치며 이전 어느 때보다 폭넓을 뿐만 아니라 더 길게 지속되었고 더 심각하기도 했다. 몇 세기가 지나도록 사회발전지수 그래프 선은 바닥을 기면서 400년까지 동양의 사회발전지수는 10퍼센트, 500년까지 서양의 사회발전지수는 20퍼센트 감소시킨다.

 

 

정주 사회가 출현한 이후 최초의 도시가 발달하는 것과 함께 인구 규모가 커지고 인구밀도도 높아지면서 인간은 동물에게서 오는 질병에 더욱 대규모로 노출되기 시작했다. 또한 교역과 여행의 증가로 질병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좀 더 빨리 전파될 수 있게 되었다. 초기 문명들도 상호 간 교역을 했지만,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후 200년 사이의 기간에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지중해와 중국을 연결하는 두 개의 주요 노선, 즉 비단길(실크로드) 및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해상무역로가 확립되면서 질병은 대륙 전체로 퍼졌다. 한 지역에 국한하지 않은 ‘국제화된 전염병’의 첫 사례가 안토니우스 역병이었다.

 

로마온난기 이후의 진행이 중세온난기가 끝날 무렵인 13~14세기에 찾아온 흑사병의 대유행, 그리고 17세기 소빙하기로의 진행과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 14세기의 위기 – 기근과 흑사병 : http://yellow.kr/blog/?p=1376

※ 17세기 위기 – 소빙하기 절정 : http://yellow.kr/blog/?p=939

 

한랭화가 시작되는 200년 전후의 세계를 살펴보면 로마제국과 한나라의 쇠락 뿐만 아니라 중동의 파르티아가 멸망하고 인도의 사타바하나 왕조의 멸망, 쿠샨제국의 쇠락, 그리고 마야 문명의 단절(전 고전기 마야문명과 고전기 마야문명) 등이 눈에 띈다. 186년(?)의 화산폭발지수(VEI) 7인 하테페 화산 폭발(233년이라는 설도 있다)이 있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  이언 모리스 / 최파일 역 / 글항아리 / 2013.05.27

 

유사하지만 더 균형 잡힌 ‘구세계 교환’이 서기 2세기에 일어났던 것 같다. 서양과 남아시아, 동양 핵심부는 수천 년 전 농경이 시작된 이래로 각자 독자적인 치명적 질병 조합을 진화시켜왔고 기원전 200년이 되자 이 질병들은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러나 갈수록 많은 상인과 유목민이 핵심부를 연결하는 사슬을 따라 이동하면서 질병 풀도 서로 합쳐지면서 모두에게 참혹한 결과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중국의 문헌은 161~162년 서북부 변경에서 유목민과 싸우는 군대에 정체 모를 역병이 터져 병사 3분의 1이 죽었다고 기록한다. 165년에 고대 문헌은 다시금 병영에서의 발병을 언급하지만, 이번에는 로마 쪽 기록이며 파르티아를 상대로 한 원정중, 중국의 발생지로부터 6500킬로미터 떨어진 시리아에 있는 군사 기지에서의 역병을 묘사하고 있다. 역병은 171년과 185년 사이에 다섯 차례 더 중국을 찾아오며 그 기간 동안 로마 제국도 그만큼 자주 역병에 시달린다.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이집트에서는 유행성 전염병이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죽였던 것 같다.

 

이 고대의 질병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기는 어려운데, 지난 2000년에 걸쳐 바이러스가 계속 진화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대의 저자들이 전염병을 답답할 정도로 모호하게 묘사한 이유가 크다.

……

이러한 불확실성의 안개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중국의 문헌은 2세기에 역병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인도의 문헌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역병에 대한 언급의 부재는 그저 수백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처럼 일상적인 사건에 대한 교양 계급의 관심 부재를 반영할지도 모르지만, 역병이 실제로 인도를 비켜갔을 가능성이 더 크며, 이는 구세계 교환이 인도양 교역로보다는 주로 비단길과 초원길을 따라 퍼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확실히 전염병이 중국과 로마에서 시작된 정황, 즉 변경 지대 병영에서 발생한 정황과도 일치한다.

미생물 교환의 메커니즘이 어떤 식이었든 끔찍한 전염병은 180년대 이후 계속해서 세대마다 재발했다. 서양에서 최악의 시기는 한동안 로마 시에서 매일 5000명이 죽어나간 251~266년이다. 동양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는 310년과 322년 사이인데 이번에도 서북부에서 시작되었고 (보고에 따르면) 서북부 주민 거의 모두가 사망했다. 살아남은 의사의 묘사를 보면 이 역병은 홍역이나 천연두처럼 보인다.

최근에 머리와 얼굴, 몸통에 부스럼이 나는 역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부스럼은 단기간에 온몸으로 퍼진다. 하얀 고름 같은 것이 들어 있는 종기처럼 생겼다. 이 고름 물집이 사라지면서 다시 새 종기가 생기기도 한다. 초기에 치료하지 않으면 환자는 보통 죽는다. 회복된 사람에게는 자줏빛 흉터가 남는다.

구세계 교환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도시가 축소되고 교역은 쇠퇴하고 세수가 감소하고 땅은 버려졌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듯 각종 증거는 -토탄 늪지, 호수 퇴적물, 얼음 코어, 나무 나이테, 산호초 내 스트론튬 대 칼슘 비율, 심지어 조류의 화학적 성질까지- 로마 온난기가 끝나면서 기후마저 인류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평균기온은 200년과 500년 사이에 섭씨 1.1도만큼 떨어졌고, 기후학자들이 중세 한랭기라고 부르는 서늘해진 여름이 대양에서 수증기 증발을 감소시켜 몬순 계절풍을 약화시키면서 강우량도 덩달아 감소했다.

다른 상황에서라면 번영하던 동양과 서양 핵심부는 기원전 2세기 로마 온난기가 시작되었을 때처럼 기후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질병과 기후변화 -제4장에서 그렇게 두드러지게 등장한 묵시록의 다섯 기수 가운데 둘- 가 함께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기아와 이민, 국가실패라는 다른 세 기수가 두 기수에 합류하게 될지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

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로마는 여전히 튼튼했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열정의 대상, 즉 철학을 추구할 앞날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 대신 구세계 교환에 맞닥뜨렸다. 최초의 심각한 전염병은 그가 제위에 오른 해에 중국 서북쪽 변경 지대의 병영에서 발생했고, 바로 그해 파르티아가 시리아를 침공해 아우렐리우스는 군대를 그곳에 집결해야 했다. 병사들이 북적이는 병영은 질병이 퍼져나가기 안성맞춤이어서 165년 역병(천연두? 홍역? 문헌의 기록은 언제나처럼 막연하다)이 그곳을 휩쓸었다. 역병은 167년, 멀리 북쪽과 동쪽의 인구가 도나우 강 너머로 밀고 들어오면서 새롭고 강력한 게르만 연맹을 형성하던 바로 그 시점에 로마에 도달했다. 아우렐리우스는 나머지 인생-13년-을 그들과 싸우며 보냈다.

중국과 달리 로마는 2세기 변경 전쟁에서 승리했다. 만약 패배했다면 로마도 -한나라처럼- 180년대에 위기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렇긴해도 아우렐리우스의 승리는 변화의 결과가 아니라 변화의 속도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이며, 결국 군대만으로는 붕괴를 저지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전염병의 무지막지한 사망률은 경제를 대혼란에 빠트렸다. 식량 가격과 농업 임금이 급등했고 덕분에 전염병은 살아남은 농부들, 생산성이 떨어지는 경지를 버리고 옥토에 집중할 수 있는 농부들에게는 이득을 가져왔다. 그러나 농경이 축소되고 세금과 임대 수입이 감소하자 더 큰 차원에서 경제 지표는 폭락하기 시작했다.

 


Antonine Plague

–  위키백과 : https://en.wikipedia.org/wiki/Antonine_Plague

 

서기 165년부터 180년까지 지속된 안토니우스 역병은, 그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그리스 의사의 이름을 따 갈레노스 역병(Plague of Galen)이라고도 부른다. 안토니우스 역병은 서아시아 원정에서 돌아온 군대에 의해 로마 제국으로 전파된 고대 전염병의 대유행이었다. 학자들은 그 고대의 질병을 천연두 또는 홍역으로 의심하고 있지만, 확실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역병은 169년 로마 황제 루시우스 베루스(Lucius Verus)의 목숨과 180년에 베루스와 공동 황제였고 이 역병의 이름과 관련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의 목숨을 앗았다. 로마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155-235)에 따르면 이 역병은 9년 후인 189년에 다시 발병하여 로마에서 하루에 2,000명이 사망했으며, 약 25%의 사망률을 보였다. 총 사망자는 5백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죽였고 로마 군대를 쇠퇴시켰다.

 

 

고대의 기록은 165~166년 겨울에 있었던 로마의 셀레우키아(현재의 이라크 중부에 있었던 고대 도시) 공성전에서 역병이 최초로 나타났다고 전하고 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Ammianus Marcellinus)는 역병이 갈리아와 라인강을 따라 퍼졌다고 보고하고 있다. 에우트로피오(Eutropius)는 많은 사람들이 제국 전역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Rafe de Crespigny(Zhang Leifu, 張磊夫)는 중국 기록에 역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166년 전에 한나라에서 역병이 발병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역병은 로마의 문화와 문학에 영향을 미쳤으며, 인도양을 통한 인도-로마 무역 관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 역학 (Epidemiology)

전염병이 유행하던 166년, 그리스의 의사이자 작가인 갈레노스(Aelius Galenus)는 로마에서 소아시아(아나톨리아)의 집으로 여행했다. 갈레노스는 공동 황제였던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가 불러 168년에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168/69년의 겨울에 아드리아 해 북단에 있던 고대 로마의 도시 아퀼레이아(Aquileia)에 주둔한 부대들 사이에서 발생한 역병에 대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갈레노스의 관찰과 기록은 그의 논문 <Methodus Medendi>에 간략히 쓰였으며 관련된 다른 서술들도 그의 방대한 저작들에 분산되어 있다. 장기간에 걸칠 대역병으로 묘사한 그 병은 발열, 설사, 인두염과 더불어 발병 9일째 되는 날, 때로는 건조하고 때로는 고름이 나기도 하는 발진이 있었다 한다. 갈레노스가 제공한 정보로는 병의 성격을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천연두로 본다.

 

역사 학자 윌리엄 맥닐(William McNeill)은 안토니우스 역병과 이후에 발생한 키프리아누스 역병(249-262)이 순서와 관계없이 하나는 천연두, 하나는 홍역의 발병일 거라고 주장했다.  그 두 역병으로 인한 유럽 인구의 심각한 감소는, 사람들이 이전에 천연두와 홍역에 노출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면역력이 없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역사가들은 이 두 가지의 역병이 모두 천연두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분자 추정치로 본 홍역은 500년 이후에나 진화를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영향 (Impact)
1) Culture, literature, the arts

망연자실한 대중들은 마법과 주술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2세기 그리스의 소도시 아보누타이쿠스의 신비종교의 예언자 알렉산더(Alexander of Abonoteichus)는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가 육체화한 뱀의 신 글리콘(Glycon)을 만들었다. 글리콘은 아폴론의 아들로 기적적인 출생과 함께 신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세상에 왔으며 글리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언과 방언,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준다 주장하며 자신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아들이며 기적을 베푸는 의사 포달레이리오스(Podalirius)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역병의 기간동안 알렉산더의 신탁 한 구절이 부적으로 사용되어 집 문에 새겨졌다.

그리스 작가 루키아노스(Lucian of Samosata)는 자신의 작품 “거짓 예언자 알렉산더(Alexander the False Prophet)를 통해 이 사기꾼을 고발하고 있다. 그는 이 인물이 “거짓과 사기, 거짓말, 악의에 가득찬 인물로 (그는) 손쉽게 대담하고 무모하게 그리고 또 열심히 자신의 음모를 그럴듯하게, 납득할 만 하게, 선의로 위장하여 자신의 목적과는 정반대로 선전 선동하고 있다.”

 

 

안토니우스 역병은 로마 제국 전역에 엄청난 사회적,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니부어(Barthold Georg Niebuhr, 1776–1831)는 “이 시기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재임 중 많은 부문에서 전환점이 되었고, 이 위기가 그 역병의 재앙에 의해 초래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고대 세계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 기간에 발생한 전염병에 의한 타격에서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마르코마니 전쟁(Marcomannic Wars) 중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썼다. 구절 9장 2절에서 주위의 역병조차도 거짓, 악한 행동, 진정한 이해의 부족보다 덜 치명적이라고 말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역병으로 죽어가면서 “나를 위해 울지마라. 역병과 수많은 다른 이들의 죽음을 생각하라”라고 말했다.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과 Michael Rostovtzeff(1870-1952)는 안토니우스 역병이 당시의 정치와 경제적 상황보다는 영향력이 적다고 지적하였다.

 

2) Military concerns

전염의 직접적인 영향이 두드러진다. 파르티아의 Vologases 4세가 아르메니아를 침략한 후 베루스 황제의 지휘 아래 로마제국의 군대가 동쪽으로 이동했을 때, 많은 병력이 병에 걸려 동부 지역의 방어에 문제가 생겼다. 5세기의 스페인 작가 파울루스 오로시우스(Paulus Orosius)에 따르면 이탈리아 반도와 유럽 지방의 많은 도시와 마을은 주민을 모두 잃었다. 이 병이 북쪽으로 라인 강을 따라 휩쓸면서 로마제국 국경 밖의 게르만인들과 갈리아인들도 감염되었다. 수년 간, 로마제국 밖의 북부지역 사람들은 인구증가로 인해 남쪽으로의 이주로 로마제국을 압박하였지만 역병으로 인한 로마제국 병력의 감소로 이들을 다시 뒤로 밀 수가 없었다. 16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뉴브 강을 건너는 게르만족의 전진을 통제하기 위하여 진두지휘를 하는 노력을 했지만 부분적인 성공만을 거두었을 뿐이다.

 

3) 인도양 무역과 중국 한나라

갈홍(Ge Hong, 284~363)이 중국에서 천연두의 증상을 정확하게 묘사한 최초의 사람이었지만, 역사학자 Rafe de Crespigny는 후한 황제 환제(146-168)와 영제(168-189)의 통치 기간 동안 중국을 괴롭히는 재앙, 즉 151, 161, 171, 173, 179, 182 및 185 년에 발생한 역병이 아마도 안토니우스 역병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며, 이 재앙이 장각(Jian Jue, 184)가 이끄는 신앙인 태평도를 일으켰으며, 황건의 난(184-205)을 촉발시켰다고 말했다. (태평도(太平道)에서는 병든 이가 찾아오면 부적을 태운 물로 치료하고 잘못을 뉘우치면서 절하도록 했다. 병이 낫는 경우가 생기자 장각의 명성이 점점 높아져 장각을 신처럼 여기며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윽고 장각의 명성이 중국 북부지역에 널리 퍼지자 당시의 정치에 실망해 있던 백성들 중에서 태평도에 귀의하는 사람이 많아져 신도 수가 수십만에 달했다.)

 

Raoul McLaughlin은 역병의 기원이 중앙아시아의 알려지지 않은 고립된 인구 집단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중국과 로마 세계로 퍼졌다고 가정한다. 이 역병은 로마 인구의 약 10%를 죽이고, McLaughlin에 의하면 로마의 인도양에서의 해양 무역을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주었다. 이집트에서 인도에 이르는 고고학적 기록에 의하면 동남아시아에서 로마의 상업적인 활동이 크게 감소되었다. 물론 3세기에 쓰인 작자 미상의 책 《에뤼드라해 주항기(The 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와 6세기 코스마( Cosmas Indicopleustes)의 《그리스도교적 지형학(Christian Topography)》은 로마의 인도양에서의 해양 무역, 특히 비단과 향신료 무역은 중단되지 않고 이슬람(Rashidun Caliphate)에 의해 이집트를 잃어버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기후의 문화사

–  볼프강 베링어 / 안병옥, 이은선 역 / 공감IN / 2010.09.10

 

외부의 침입, 병영화(兵營化) 압력, 증가하는 세금 등의 요인들이 없었더라면, 로마제국과 중국 한나라의 위기를 기후변화와의 연관 속에서 살펴보는 것은 매력적인 일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로마제국의 구조적 위기에서 발생했지만 나중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121~180, wpdnl 161~180)와 같은 유능한 통치자에 의해 극복되었던 위기요인들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 콤모두스 황제(Commodus 161~192, 제위 180~192)의 통치기는 기근과 전염병, 폭동과 모반으로 얼룩진 시대였다. 콤모두스 황제는 189년 굶주림으로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이후 약 100년간 최소한 40명의 황제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병영(兵營)황제(Barracks emperor, 235~285)들이 집권했던 시기에 로마제국은 나락의 끝으로 빠져들었다.

 


총,균,쇠

–  재레드 다이아몬드 / 김진준 역 / 문학사상 / 2005.12.19

 

이렇게 농경의 발생이 세균들에게 큰 행운이었다면 도시의 발생은 더 큰 행운이었다. 전보다 더욱 조밀한 인구가 전보다 더욱 열악한 위생 환경 속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도시인구는 20세기 초에 들어와서야 마침내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대중성 질병으로 끊임없이 죽어가는 도시 거주자들을 보충하기 위해 시골의 건강한 농부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어와야 했다. 세균들에게 또 하나의 행운은 세계 교역로의 발달이었다. 그로 인해 로마시대에는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가 효과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세균 번식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에 드디어 천연두가 ‘안토니우스 병’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도달했고, 그 결과 AD 165~180년에는 수백만 명의 로마 시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클라이브 폰팅의 녹색 세계사

–  클라이브 폰팅 / 이진아 역 / 인음사 / 2019.10.11

 

정주 사회가 출현한 이후 최초의 도시가 발달하는 것과 함께 인구 규모가 커지고 인구밀도도 높아지면서 인간은 동물에게서 오는 질병에 더욱 대규모로 노출되기 시작했다. 천연두와 홍역 등의 감염성 질병은 물이나 다른 숙주 없이도 전염될 수 있으며, 일정 수 이상의 인간 숙주가 있어야만 발호할 수 있다. 도서 지방을 대상으로 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인구가 25만 명 이하일 경우 홍역은 저절로 수그러든다고 한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큰 도시들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이런 감염성 질병이 나타났다고 해도 단기적이거나 지역적으로만 나타났을 것이다. 기원전 500년 이전에는 이런 정도의 규모를 가진 도시가 없었고, 그로부터 500년이 지나야 로마, 그리고 중국의 수도 낙양(뤄양)이 이 규모에 도달했다. 천연두나 홍역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혹은 얼마나 많이 발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질병 발생에 관해 남아 있는 기록은 정확성이 떨어져 구체적으로 어떤 질병이었는지 알기 어렵고, 또한 일부 질병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특성이 변화해 왔기 때문이다. 질병들이 미치는 영향은 질병의 역사상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에 의해 변해 왔다. 교역과 여행의 증가로 질병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좀 더 빨리 전파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초기 문명들도 상호 간 교역을 했지만,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후 200년 사이의 기간에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지중해와 중국을 연결하는 두 개의 주요 노선, 즉 비단길(실크로드) 및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해상무역로가 확립되면서 질병은 대륙 전체로 퍼졌다. 천연두는 유라시아 대륙 동부 어딘가에서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165년에 ‘안토니우스 병’이라는 이름으로 지중해 세계에 알려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안토니우스 병은 로마 제국이 경험한 두 개의 대질병 중 첫 번째였다. 메소포타미아에 출정했던 군대가 이 질병을 옮겨 왔는데, 그 후 15년 동안이나 천연두가 유행했다. 감염 지역 인구의 2분의 1에서 3분의 1이 사망할 정도로 치사율이 높았다. 161년에서 162년 사이의 중국에서도 천연두가 크게 유행했다.(로마 제국에 유행했던 천연두는 중국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310년에서 312년 사이에도 천연두가 다시 유행했는데, 이때는 치사율이 40퍼센트에 달하는 지역도 많았다. 251년에서 256년 사이에는 로마에서 처음으로 홍역이 발생했는데, 정점에 달했을 때는 하루에 로마의 시민 5000명이 죽기도 했다. 이때부터 천연두와 홍역은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서 풍토병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홍역이 북서유럽에 자리잡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는데, 이는 인구가 적고 인구밀도가 낮았기 때문이었다.

 


콜레라는 어떻게 문명을 구했나

–  존 퀘이조 / 황상익,최은경,최규진 역 / 메디치미디어 / 2012.10.15

 

두창(천연두)이 크게 유행한 것을 최초로 기록한 ‘안토니우스 역병’은 서기 165년부터 180년까지 지속되어 인류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안토니우스 역병’은 300만 명에서 70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로마 제국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몇 세기가 흘러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고 이슬람 세계가 팽창하자 바리올라 바이러스는 이와 더불어 세계를 향해 죽음의 행진을 이어나가 1500년대 무렵에는 전 세계 인류에게 위협을 가하게 된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정복자들에 의해 신대륙(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두창은 아스테카 원주민 35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갔으며, 아스테카 제국과 잉카 제국의 멸망을 이끌었다. 18세기에 이르면서 두창은 풍토병 또는 전염병으로써 주요 유럽 도시들에서 해마다 40만 명의 목숨을 앗았다. 당시 유럽을 통치하던 5명의 군주도 두창으로 인해 목숨을 거두었으며, 당시 모든 실명의 3분의 1이 두창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짐승이다 (동물,인간,질병)

–  E. 풀러 토리, 로버트 H. 욜켄 / 박종윤 역 / 이음 / 2010.07.23

 

…… 중국에서는 “한나라 시대의 기록에 유례 없는 질병의 발발에 대한 언급이 많다. 그중 일부는 전염병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홍역과 수두도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BC 200년에서 AD 200년 사이에는 새로운 역병으로 인해 중국 인구가 격감했다.” 310~312년에는 역병이 돌기 전에 “메뚜기 떼가 덮치고 기근이 들어 중국 북서부 지역에서는 100명 중 한두 사람이 목숨을 건졌을 정도였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322년, 또 다시 역병이 돌아 이전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 열 명 중 두세 사람이 죽어나갔다.” 이러한 역병의 유행으로 인해 한나라는 “돌풍 앞의 썩은 나무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전염병과 몰락의 관계가 가장 분명하게 기록된 곳은 누가 뭐라 해도 로마 제국이다. 역사가 리비(Livy)는 “공화정 시대에만 최소 11건의 대규모 역병이 있었고, 최초로 발생한 해는 BC 387년이라는 이른 시기였다”고 기록했다. 그중 가장 심했던 것이 “안토니우스 역병”(plague of Antoninus)으로서 165년에 시작된 것이 180년까지도 기승을 부렸다. 시리아에서 로마로 귀환한 병사가 처음 퍼트렸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를 포함해 로마 인구의 1/4 ~ 1/3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부 역사가는 이 역병을 “로마 제국의 쇠퇴가 시작된 전환점”으로 꼽기도 한다.

 


모기 : 인류 역사를 결정지은 치명적인 살인자

–  티모시 C. 와인가드 / 서종민 역 / 커넥팅 / 2019.10.30

 

새천년에 접어들 무렵 활동했던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로마 공화정 기간 동안 유행했던 역병을 최소 열한 가지 이상 기록했다. 이제는 악명 높아진 역병 두 가지가 제국의 심장부를 강타했다. 기원후 165년부터 180년까지 유행했던 첫 번째 역병은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이들의 이름을 따 안토니우스 역병 또는 갈레노스 역병이라 부른다. 메소포타미아 원정에서 모기에 시달리다 패배한 로마군과 함께 유입된 이 역병은 우선 로마시를 강타한 뒤 이탈리아 전역에 들불처럼 번졌다. 역병의 발발과 관련있는 안토니누스(Antoninus) 왕조의 두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Lucius Verus)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도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역병은 계속해서 퍼져나가 북쪽으로 라인강, 서쪽으로 대서양 해안, 동쪽으로 인도와 중국에까지 이르렀다. 당대 기록을 보면 역병이 절정일 때 로마에서만 하루에 2,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의 기록들과 갈레노스의 글에는 치사율이 25퍼센트에 달했다고 쓰여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로마 제국 전역에 걸친 사망자 수를 최대 500만 명으로 추산할 수 있다. 피해 정도가 매우 극심한 것으로 보아 이전까지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던 병원체였던 듯하다. 갈레노스는 증상에 관한 글을 남기기는 했으나 그 묘사가 별다른 특징이 없고 모호하다. 역병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나 가장 유력한 후보는 천연두이며, 홍역이 그 다음 유력 후보로 꼽힌다.

키프리아누스 역병으로 알려진 두 번째 역병은 기원후 249년부터 266년까지 유행했으며, 에티오피아에서 발생한 뒤 북아프리카를 건너 로마 제국 동부를 거쳐 북쪽으로 스코틀랜드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퍼졌다. 역병의 이름은 카르타고의 가톨릭 주교이자 이 비극을 목격하고 해석하여 기록으로 남긴 성 키프리아누스(Saint Cyprian)에서 따왔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치사율은 25퍼센트에서 30퍼센트 정도였으며, 로마에서 발생한 사망자만 매일 5,000명에 달했다. 사망자 중에는 호스틸리아누스(Hostilian) 황제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Claudius Gothicus) 황제도 있었다. 총 사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략 500~600만 명, 혹은 제국 총 인구의 3분의 1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염병학자들은 안토니우스 역병과 키프리아누스 역병 모두 천연두와 홍역이 동물 숙주에서 인간에게 전염된 최초의 인수공통전염병 발병 사례였을 것으로 본다. 안토니우스 역병이 천연두 혹은 홍역이었거나 둘 다였을 것으로 보는 이도 있고, 키프리아누스 전염병이 황열과 유사한 모기 매개 출혈열 혹은 무시무시한 에볼라 바이러스(이 바이러스는 모기를 매개로 전염되지 않는다)와 유사한 출혈열 바이러스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도 있다.

 

말라리아와 더불어 역병들이 남긴 상처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었다. 로마 제국이라는 초강대국은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으며 구원받을 수도 없었다. 광할한 제국이 허물어지는 가운데 살아남은 주민들은 몸을 옹송그렸으며, 농업에서는 물론 로마 군단에서도 인력이 부족했던 탓에 주민들에 대한 로마의 통제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한 데 더하여,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위기의 3세기(Crisis of the Third Century)’는 광범위한 폭동과 내전, 악한 군사령관이 사주한 황제 및 정치인 암살 그리고 기독교인 희생양에 대한 걷잡을 수 없고 가학적인 박해로 물들었다. 이처럼 아무도 말리지 않던 쾌락 본위의 폭력은 경제 침체, 지진과 자연재해 그리고 350년경 시작된 ‘이주 시대(Era of Migration)’에 제국 내 재배치된 민족들과 국경 너머 교전 집단 사이에 계속되는 긴장감 등이 더해지면서 한층 더 복잡해졌다.

 


<관련 사진>

 

– The angel of death striking a door during the plague of Rome; engraving by Levasseur after Jules-Elie Delaun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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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고고학 저널리스트인 데이비드 키즈(David Keys)는 세계 각국의 사료를 조사해서 쓴 저서 ‘대(大)재해(Catastrophe, 2000년)’에서 서기 535, 536년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대기가 혼탁해지면서 태양을 가려 큰 기근과 홍수가 나고 전염병이 창궐해 구시대가 몰락하고 새 문명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서 그는, 아마 인도네시아의 거대한 화산이 초래한 535년, 536년의 글로벌 기후 대재앙이 고대에서 중세 세계로 변형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말한다. 고대 연대기 작가들은 그 당시의 재난을 기록했는데, 먼지 등으로 가려진 태양으로 초래된 기근, 가뭄, 홍수, 폭풍 및 전염병 등을 말하고 있다. 이 재난으로 그는 황폐화된 고향 땅에서 이동한 아바르, 슬라브, 몽골과 페르시아의 공격으로 비잔틴 제국의 붕괴가 촉발되었고, 6세기에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문명이 붕괴되고 이슬람이 출현할 수 있는 종교적 종말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또한 멕시코에서는 테오티오아칸의 붕괴를 촉발하였지만 반면에 중국에서는 반세기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에서 통일된 국가로 나아가게 하였단다.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의 『신의 용광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유대인들은 유대력으로 4291년, 기독교력으로 531~532년 사이의 어떤 날에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단정했다(필요에 따라 수정을 했다). 유대인들 중 학식있는 사람들은 경고했다. “왕국들이 서로 싸울 때 당신은 메시아의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전쟁, 기근, 전염병이 중동 지역을 휩쓸자 종말론에 대한 확신도 커졌다. 6세기는 후대의 10세기 처럼 천년왕국설의 조짐, 궁극적 기대 등으로 가득 찬 시대였다.

 

당시의 이러한 분위기가 이슬람의 출현 배경 중의 한 요소로서 볼 수 있겠다.

 

다음은 이 극단적인 기후 사건과 당시의 한랭화와 관련있을 듯한(?) 역사적 사건들을 나열해 보았다.

◎ 엘살바도로의 일로팡고(Ilopango)에서의 분화(?), 인도네시아의 크라카타우 화산, 파푸아뉴기니의 라바울 화산,

◎ 530년 핼리 혜성의 근접

◎ 532년 『삼국사기』와 중국의 『양서』에 “별이 비 오듯이 떨어졌다”는 표현이 있음

◎ 536년 동로마 제국이 비잔틴 대성당(현재는 아야 소피아)을 만들다.

◎ 541~542년 :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유행

◎ 동로마 제국의 쇠락 :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이주

◎ 사산조 페르시아의 말기

◎ 아바르의 쇠퇴 -> 서쪽으로 이동

◎ 인도의 굽타 왕조 멸망

◎ 중국의 혼란

◎ 돌궐의 팽창

◎ 테오티오아칸의 몰락

◎ 고구려의 쇠약

◎ 535년 신라 법흥왕 불교공인 / 536년 신라 법흥왕 23년에 처음으로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 (?)

◎ 538년의 백제 웅진에서 사비로의 천도와 불교의 일본 전래 (?)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날씨와 역사

–  랜디 체르베니 / 김정은 역 / 반디출판사 / 2011.05.11

 

536년 무렵에 대단히 기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대부분 확실하게 알려져 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특히 지중해 인근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단히 소름끼치는 방식으로 죽었다. 536년 직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해 내가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대신, 토머스 쇼트(Thomas Short) 목사라는 역사가가 1749년에 쓴 『이곳저곳과 이 시대 저 시대의 날씨와 계절과 기상 현상 따위에 관한 연대사(A General Chronological History of the Air, Weather, Seasons, Meteors, etc. in Sundary Places and Different Times』라는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된 내용을 소개하겠다. 쇼트 목사는 로마 시대에 살던 비잔틴 제국의 역사학자 프로코피우스(Procopius)의 글을 읽기 쉽게 바꿔 썼다.

때 : 536년

곳 : 유럽 이탈리아의 로마

 

3월 초하루가 되기 14일 전, 아침부터 숨어 있던 태양이 오후 3시가 될 때까지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 땅은 작년부터 농사를 짓지 않고 버려져서 대기근이 찾아왔다. 에밀리아Emilia에 살던 사람들은 땅과 재산을 버리고 피체눔Picenum으로 들어갔고, 심지어 굶어죽은 사람이 5만 명이 넘었다. 굶주린 사람들은 인간성을 내던지고 서로를 죽이고 인육을 먹었다. 배고픔에 제정신이 아닌 어머니는 자신의 어린 아기를 잡아먹었다. 어떤 두 여자는 17명을 죽여서 인육을 먹었다. 밀라노에 살던 한 여자는 자신의 죽은 아들을 먹었다. 사람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풀을 뜯어먹었고 배고픔에 쓰러져 죽어갔지만 누구도 묻어주지 않았다. 또, 어떤 이들은 개, 쥐, 고양이는 물론, 가장 더러운 동물까지 닥치지 않고 먹었다.

질병이 거대한 소떼처럼 퍼졌다. 신경은 날카로웠고 몸에는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뼈에 착 달라붙은 거친 살갗은 가죽처럼 건조해져서 검게 변했다. 사람들은 숯덩이 같았고 얼굴은 아무 표정도 없이 무덤덤했다. 어디서나 사람들이 죽어갔다. 어떤 사람은 굶어죽었고, 어떤 사람은 배가 불러서 죽었다. 너무 굶주렸기 때문에 마음껏 먹을 기회가 와도 음식을 소화할 수 없어서 훨씬 빨리 죽었다.

 

이런 끔찍한 기근과 역병이 생긴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536년 이후 처음 몇 년 동안 죽은 사람의 수는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여러 자료로 볼 때, 훗날 유스티니아누스 역병(Justinian Plague)이라고 불린 이 역병은 이집트에서 시작된 그 유명한 흑사병이 지중해를 거쳐 마침내 유럽까지 휩쓴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태는 훨씬 악화되었다. 이 역병을 시작으로 542~565년까지 수십 년 동안 유럽은 몇 가지 다른 타격을 입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유럽 전체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수백만 명이 이 역병과 관련해서 목숨을 잃었다.

……

화산학자인 R.B.스토더스(Stothers)는 536년의 역사 기록을 조사해 네 개의 흥미로운 직접 증언을 찾아냈다. 먼저, 스토더스 박사도 앞서 나왔던 쇼트 목사처럼 프로코피우스의 말을 인용했다. “올해 내내 태양은 빛을 냈지만 밝기가 달과 같았고, 일식이 일어난 것 같았다. 예전처럼 태양빛이 깨끗하게 비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터키 콘스탄티노플에 살던 어떤 편년사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인딕티오indictio(15년 간격의 징세 주기)의 열네 번째 해를 지나면서 거의 1년 내내 태양빛이 희미해서 과일들이 맺지 못하고 시들었다. 때는 벨리사리우스Belisarius가 가장 명성을 떨칠 때였다.” 콘스탄티노플에 살던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썼다. “그해 3월 24일부터 이듬해 6월 24일까지… 낮에는 태양이, 밤에는 달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에 살던 또 다른 사람은 다음과 같이 썼다. “태양은 어두웠고, 그 어둠은 18개월 동안 이어졌다. 날마다 네 시간 정도만 비추었고, 지금도 여전히 희미하다…. 과일은 익지 않았고포도주는 신 포도 같은 맛이 났다.”

이 네 자료가 모두 암시하는 내용은, 뭔지 모를 일이 벌어져 약 14개월 동안 태양빛이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전문 용어로 마른 안개(dry fog)라고 한다. 마른 안개란 물방울보다 작은 먼지 입자가 떠다니는 안개를 말한다. 마른 안개는 삽시간에 발생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

1990년대 이전에 그린란드 얼음 코어를 분석한 결과에서는 536년의 얼음 코어 부분에 황산 농도가 대단히 높다는 징후가 확인되었다. 앞서 토바 초화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황산 농도가 높다는 것은 화산에 의한 한랭화와 뚜렷한 연관이 있다는 의미다. 결론은 확실해 보였다. 모든 증거로 볼 때, 엄청난 화산 폭발이 일어나 몇 년 동안 기후가 급격히 추워질 정도의 화산재가 공기 중으로 뿜어져 나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몇 년 전에 일어났던 피나투보 화산 폭발이 전 세계 기후에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말이다. 한 저명한 과학자는 1984년에 과학 잡지인 『네이처』에 기고한 기사에서, 536년의 마른 안개는 거대한 화산 폭발의 결과라고 정확히 지적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화산이 폭발했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폭발한 화산이 무엇인지 밝히는 사소한 일만 빼면 이 미스터리는 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의문의 소지는 남아 있었다. 1980년대 중반, 빙하 연구 학자들은 그린란드 얼음 코어 자료를 철저히 재분석했다. 그리고 분석을 마친 후, 얼음 코어에서 나온 화산재의 연대가 536년이 아니라 50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506년은 유스티니아누스 역병과 연관된 심각한 기후 문제의 원인이 되기에는 너무 일렀다. 그린란드 얼음 코어에 대한 후속 연구가 이어지면서 이 분석은 재확인되었다. 결국 1990년대 중반이 되자 얼음 코어 과학자들은 536년에 큰 화산 폭발이 없었다고 명확하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나이테 분석과 역사 기록 모두 536년 무렵에 정말 뭔가 끔찍하고 큰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는 것을 기억하자. 만약 화산 폭발이 확실히 아니라면, 이 큰일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1980년대 중반, 나이테를 연구하던 베일리는 대격변 비슷한 개념을 내놓았다. 그는 공룡을 멸종시킨 것보다는 규모가 작은 혜성이나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그의 추측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은 대격변을 이용한 설명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증명하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한두 번 밖에 일어나지 않는 사건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에 비해 일치하는 증거를 찾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

천문학자들은 모형을 활용한 연구를 통해, 536년 수준의 기온 하강을 일으킬 만한 양의 먼지를 형성하려면 혜성의 크기가 600미터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축구장 여섯 개보다 약간 더 큰 크기다. 또 확률로 따졌을 때, 이 정도 크기의 혜성이 지구에 떨어질 확률은 수천 년에 한 번꼴이라고 한다. 확실히 역사 시대의 범위 안에 들어간다.

536년의 끔찍한 날씨와 그 후 이어진 기근과 질병의 원인은 혜성이었을까? 확실한 답을 내놓기에 앞서, 기후 과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끊임없이 새롭게 고쳐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어제까지 믿었던 것이 내일의 관점에서는 아닐 수도 있다.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그 사건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이 미스터리의 경우에는 2008년에 그린란드 얼음 코어가 새롭게 분석되면서, 베일리는 혜성의 충돌로 536년의 태양빛 약화가 일어났다는 학설을 포기하게 되었다. 얼음 코어 과학자들은 새로운 그린란드 얼음 코어 자료를 면밀히 분석해 534년의 얼음 코어 기록에서 거대한 화산 폭발이 있었다는 징후를 찾아냈다. 특히 지구 냉각을 일으키는 결정적 원소인 황의 농도가 대단히 높았다는 것이 얼음 코어 분석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534년에 태양빛이 흐려질 정도로 규모가 크고 고농도의 황을 포함한 화산 폭발이 일어나 ‘지구 밖의 천체를 끌어들여 설명할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다.

 

여전히 바뀌고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흥미로운 증거들이 무수히 많다. 536년 무렵에 뭔가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단기간 동안(약 10년 정도) 추위가 이어졌다는 증거가 나이테와 역사 기록에 남아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희귀한 현상, 이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혜성의 충돌 따위로 이 사건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얼음 코어 기록을 재분석하자, 이 사건이 설명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풍부한 황을 포함하는 화산 폭발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다시 대두되었다. 이 순간 어떤 학설이 더 호응을 얻고 있는지에 관계없이, 새로운 과학적 증거는 계속 밝혀질 것이고 이 논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  브라이언 페이건 / 남경태 역 / 예지 / 2007.08.25

 

6세기에 추이대가 이동한 것은 대규모 자연재해와 시기를 같이했다. 535년에 일어난 대규모 화산 폭발은 유럽, 서남아시아, 중국에 역사상 가장 심하고 가장 오래 지속된 건무(乾霧)를 가져왔다. 전년도의 수확물을 다 소비한 뒤에는 기근, 굶주림, 전염병이 덮쳤다.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카르타고에서 이렇게 썼다. “1년 내내 태양은 마치 달처럼 희미한 빛을 발할 뿐 열기를 주지 않았다. 일식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태양에서 빛줄기라는 것을 도통 볼 수 없었다.” 메소포타미아에 눈이 내렸다. 이탈리아와 이라크 남부에서 흉작이 잇달았고, 브리타니아의 날씨는 그 세기에 최악이었다. 중국은 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하늘에서 노란 먼지가 눈처럼 쏟아졌다.” 눈은 8월에도 내려 농작물을 망쳤다. 스칸디나비아와 서유럽의 나이테는 536~545년에 나무의 성장이 갑자기 느려진 것을 보여주며, 북아메리카 서부에서도 536년과 542/3년에 가뭄이 기록되었다. 안데스 산지의 얼음층은 페루 북부 해안의 모체 문명권도 심각한 건조화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535/6년의 사태는 지난 2천 년 동안 가장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였다. 그것은 아마 1816년 탐보라 화산 폭발보다 더 큰 강도의 화산 폭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린란드와 남극의 얼음층에는 6세기에 화산 폭발로 발생한 황산층이 남아 있는데, 화산이 폭발한 뒤에도 오랫동안 그 후유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황산층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연대가 정확하지는 않다. 황산이 발생하는 경우는 대규모 화산 폭발로 수백만 톤의 미세한 화산재가 대기 중에 방출되었을 때-헤클라나 탐보라 화산처럼-혹은 일부 과학자들이 생각하듯이 혜성이 바다로 떨어지거나 지구가 성간가스층을 통과할 때뿐이다. 현재의 과학적 견해로는 대규모 화산 폭발설이 우세하지만, 아직 정확한 원인은 밝혀내지 못했다. 화산 폭발의 후보지는 멕시코의 치아파스에 있는 엘치촌 화산이다. 또 다른 후보는 태평양과 동남아시아, 즉 사모아와 수마트라 사이에 기다랗게 이어진 화산지대의 어느 곳이다.

갑작스런 추위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유럽과 유라시아에서 나무의 성장이 크게 느려진 증거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기온이 낮아진 것은 그린란드 일대에 고기압이 형성되고 대서양 한복판 아조레스 제도에 저기압이 발달한 시기와 일치한다. 그 때문에 편서풍이 느려졌고 유럽이 건조해졌다. 그 결과로 유라시아 깊은 곳까지 광범위한 가뭄이 발생했다.

심한 가뭄은 536~538년에 북중국을 공격하고, 몽골과 시베리아로 번졌다. 이 지역의 나이테는 그 무렵에 지난 1500년 동안 보기드문 추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후의 문화사

–  볼프강 베링어 / 안병옥, 이은선 역 / 공감IN / 2010.09.10

 

로마 비잔티움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Procopius of Caesarea, 500~562)는, 유스티아누스 황제(482~565, 재위 527~565)의 통치년 10년째에 태양빛이 일 년 내내 어두웠으며 태양이 마치 달처럼 보이기도 했다고 썼다. 콘스탄티노플의 역사가 리두스(Lydus)는,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장군의 명성의 최고조에 달했던 해에 태양이 계속 흐린 상태로 있었고 농작물의 생장은 비정상적이었다고 기록했다. 자카리아스(Zacharias of Mytilene)가 썼던 기록도 있다. 이 기록에는 536년 3월 24일부터 다음해 6월 24일까지 태양이 어두운 색깔을 띠고 밤에는 달빛이 어두워졌다는 언급이 나온다. 에페소스의 요한(John of Ephesus)은, 소아시아에서 어두운 상태가 18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태양은 낮에 최대 4시간 정도만 볼 수 있었다고라고 기록했다. 여기에는 과일이 잘 익지 않고 포도주가 시게 된 것도 이러한 비정상적인 현상 때문이었다는 설명까지 곁들여진다. 요한은 자신이 서술한 교회사에서 536~537년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으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엄청난 양의 눈이 내렸다고 썼다. 이처럼 당시의 근동과 유럽은 매우 특이한 기후조건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기록들은 화산학자들로 하여금 기후아카이브에서 그 원인을 찾게끔 동기를 부여했다. 실제로 그린란드의 빙심들은 강한 산성반응을 나타낸다. 이 반응은 두 개의 시추에서 각각 540년(+,- 10년)과 535년쯤에 화산폭발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변 지역에서는 화산낙진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린란드 빙심의 산성반응은 프로콥(Prokop) 화산의 분출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리처드 스토더스(Richard B. Stothers)는 기묘한 안개의 원인이 파푸아뉴기니의 화산 라바울(Rabaul)의 폭발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현지에서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을 적용한 결과, 이 화산은 540년경(+,- 90년)에 폭발했으며 이 때와 가까운 시기에 전 세계적으로 어떤 화산분출도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만일 라바울 화산폭발에 의해 화산재 구름과 에어로졸이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의 경우와 유사한 수준으로 확산되었다면, 이 화산은 536년 3월 초에 분출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린란드 얼음 속에서 라바울 화산폭발과 연관되어 관찰된 산성반응이 1815년에 있었던 탐보라 화산폭발에 비해 2배가량 강하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화산폭발의 영향도 그만큼 더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530년대 후반의 기근들과 유스티아누스 시대의 흑사병은, 이렇듯 화산폭발로 하늘이 암흑으로 변했던 당시의 상황과 관련있음이 분명하다.

 


신의 용광로

–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 / 이종인 역 / 책과함께 / 2010.04.23

 

현대의 한 권위있는 학자가 말한 것처럼, “이슬람은 메카의 상업적 번영에서 불거진 문제들에 대한 답변으로 발전했다”라고 하면 지나친 단순화가 되겠지만, 그 안에는 상당한 진실이 들어있다. 사회계층 사이에 생긴 균열은 하지즈와 다른 지역(가령 야트리브와 타이프)의 상당수 카라반 도시들에 심각한 불안정을 가져왔다. 또한 메카의 사회적 불안정도 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전례없는 상업적 번영은 일상적인 가난을 더욱 잔인하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번영과 가난은 역사적으로 전쟁과 참사를 일으키는 특별메뉴였다. 그리하여 6세기에는 ‘세상의 종말’이라는 습속이 널리 퍼졌다. 설교자들(하니프)과 예언자들(카힌)이 아랍인들 사이에서 번성했다. 유대인들은 유대력으로 4291년, 기독교력으로 531~532년 사이의 어떤 날에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단정했다(필요에 따라 수정을 했다). 유대인들 중 학식있는 사람들은 경고했다. “왕국들이 서로 싸울 때 당신은 메시아의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전쟁, 기근, 전염병이 중동 지역을 휩쓸자 종말론에 대한 확신도 커졌다. 6세기는 후대의 10세기 처럼 천년왕국설의 조짐, 궁극적 기대 등으로 가득 찬 시대였다.

 


지구의 물음에 과학이 답하다

–  악셀 보야노프스키 / 송명희 역 / 이랑 / 2013.02.05

 

한창 꽃피우던 로마문화는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불안과 두려움, 미신과 무지가 시대를 지배했다. 4세기가 지나면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날씨가 추워지고 빙하가 늘어났다.

536년부터 546년까지 유럽은 최대 위기를 겪었다. 여름 기온이 기록적으로 떨어진 것이다. 울프 뷘트겐은 “우리가 작성한 데이타를 보면 이 시기는 매우 우울한 10년이었다”라고 보고한다. 차가운 바람과 우중충한 날씨는 경작지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536년에는 오랫동안 하늘이 어둡고 붉은 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중해조차도 차가웠다. ‘536년의 불가사의한 구름’이 기록에 등장하기도 한다. 당대 역사학자인 프로코피우스(Procopius)는 “일년 내내 태양이 달빛만큼 희미하게 비추었다.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불행은 전쟁도 전염병도 아닌, 창백한 태양이었다”라고 썼다. 정오에도 그림자가 지지 않는 창백한 태양이 일년 내내 하늘에 떳다고 한다.

 

학자들은 중세 초기의 이러한 기후 재앙은 그 시대에 세계적인 정책 변화를 일으켰다고 말하다. 인도네시아와 페르시아, 그리고 남미의 고도 문화가 스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도시가 몰락하고 536년 비잔틴제국에서 반달리즘(Vandalismus, 다른 문화나 종교 예술 등에 대한 무지로 그것들을 파괴하는 행위)이 시작되었다. 뉴욕 컬럼비아 대학의 지질학 교수인 댈러스 애봇Dallas Abbot과 엘파소 텍사스 대학의 크리스티나 섭트Cristina Subt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해변에서 당시 해가 뜨지 않았던 냉각의 원인을 찾아냈다. 그들은 그곳에서 약 600미터 두께의 운석 분화구를 발견했다.

그들은 운석의 충격으로 불가사의한 구름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퀸스 대학Queen’s University of Belfast의 해양학 교수인 마이크 베일리Mike Baillie는 두 가지 자연 재해가 있었다고 분석한다. 운석에 의한 커다란 화산 폭발이 그중 하나였다. 그로 인해 10년 동안 세상이 짙은 안개에 뒤덮였다는 것이다. 현대에도 이러한 재앙이 반복된다면 세계 핵전쟁과 유사한 결과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지구과학 산책

–  반기성 / 네이버 지식백과 / 2017.11.03

 

 

“마을은 황폐해진 모습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었다. 묻어줄 사람 하나 없는 시체들은 쩍 갈라져 길거리에 방치된 채 썩어갔다. 그 어디를 돌아봐도 온통 썩어 들어가고 있는 시체들뿐이었다.”

에페수스의 존이 기록한 이 끔찍한 상황은 서기 541년에 발생한 전염병인 선(線)페스트로부터 시작되었다. 선페스트는 흑사병(黑死病)이라고도 불린다. 이때 발생한 흑사병이 역사를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흑사병으로 영국 본토에서 벌어졌던 켈트족과 앵글로색슨족의 전쟁이 끝나고 영국 전역을 장악했던 켈트 문명이 몰락한 것이다.

현재 영국의 브리튼에 살았던 원주민은 켈트족이었다. 켈트족은 449년 영국 본토를 침략해온 앵글로색슨족 때문에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몇십 년에 걸친 앵글로색슨족의 공격에 켈트족은 산악지역인 서쪽의 웨일스와 북쪽의 스코틀랜드로 밀려났다. 물자가 부족했던 켈트족은 살아남기 위해 프랑스와 스페인, 지중해 사람들을 교역 상대로 택했다. 그런데 그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서기 540년에 흑사병은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주민 중 40%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 동로마제국의 멸망은 선페스트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흑사병의 강도는 점차 약해졌지만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어 오랫동안 영향을 주면서 켈트족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콘스탄티노플을 폐허로 만들고 서북진하던 흑사병이 교역로를 따라 영국의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에 상륙한 것이다.

……

 

켈트 문명을 몰락시킴으로써 대영제국을 이루게 했던 흑사병의 유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날씨였다. 535~536년에 역사상 가장 큰 자연재해 중 하나가 일어났다. 역사가이자 주교였던 에페수스의 존은 무려 18개월 동안 계속해서 태양이 어두워진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식은 매일 몇 시간 동안 나타났다. 그런데 그 빛은 마치 창백한 그림자 같았다.”

많은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 태양이 창백한 그림자처럼 비쳤고, 때로는 흐리고 어두웠으며, 때로는 달처럼 어슴푸레했고, 햇볕의 따뜻함까지도 약해졌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화산 폭발이나 혹은 소행성과의 충돌로 인해 대기 상공에 엄청난 먼지층이 존재할 때 나타난다. 그리고 강력한 기상재해가 발생하는 특징을 보인다.

 

고기후의 기록에 의하면 이 재해로 동아프리카에서는 극심한 가뭄이 발생했다. 농작물이 말라죽으면서, 곡식의 낟알을 먹고 살던 쥐들이 죽어갔다. 다음으로 그러한 설치류를 먹고 살던 조금 더 큰 동물들이 죽었다. 그러나 기상의 급격한 변화로 가뭄이 끝나고 많은 양의 비가 내리면서 식물들이 급속도로 자라기 시작했다. 성장과 번식이 빠른 쥐는 금방 개체수를 회복했다.

그러나 쥐를 먹고 사는 조그만 육식동물들이 개체수를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쥐들의 포식자가 서서히 개체수를 늘려가는 사이 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최적의 환경에서 동아프리카의 쥐는 한 쌍이 1년에 1,000마리의 새끼를 낳을 수 있다. 결국 아주 짧은 기간에 동아프리카는 쥐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쥐는 전염병균에 대한 면역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쥐의 몸에 기생하는 벼룩은 면역성이 없었다. 전염병에 감염된 쥐의 피를 빤 벼룩들이 병에 걸리면서 무차별적으로 다른 동물의 피를 빨았다.

흑사병을 전달하는 벼룩은 기온이 20~32℃ 범위로 온난할 때 급속히 번식한다. 또한 벼룩의 수명은 상대습도가 30% 이하일 때가 90% 이상일 때에 비해 1/4로 감소한다.

즉 기온이 높고 습도가 높을수록 흑사병을 옮기는 벼룩은 더 맹위를 떨친다. 당시의 기후는 벼룩이 급속히 번식하고 맹위를 떨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대가뭄과 열파, 그리고 간헐적인 대규모 폭풍이 지배하는 날씨를 보인 것이다.

쥐의 벼룩이 다른 동물의 피를 빠는 과정을 통해 무역선의 화물칸에 살고 있던 곰쥐에게 전염병이 퍼졌다. 곰쥐들은 무역선을 타고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상륙했고 흑사병이 켈트족 기사들을 쓰러트렸다. 켈트 문명을 몰락하게 만든 원인은 기후였던 것이다.

 


동로마 제국의 몰락과 아랍 제국의 성장이 기후 변화와 연관있다?

 

 

기후 변화는 현재도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전적으로 농업과 목축에 의존해서 살았던 근대 이전에는 인류 문명에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잉여 농산물도 많지 않았고 지금처럼 발달된 농업 기술도 없었던 시절이라 사실 기후 변화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기후를 연구하는 국제 과학 연구인 international Past Global Changes (PAGES) 프로젝트의 과학자들은 1500년 전의 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기후 변화를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이 시기 발생한 기온 하강이 화산 폭발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당시 기후 변화는 후기 앤티크 소빙하기(“Late Antique Little Ice Age”)라고 불리는데 기원후 536년, 540년, 547년 있었던 대규모 화산 폭발의 결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소빙하기가 진행된 시기는 짧았지만, 이 시기에 발생한 기온 하강으로 인해 당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하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한 동로마 제국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연구의 주저자인 스위스 연방 연구소의 울프 뷔트겐 (Ulf Büntgen from the Swiss Federal Research Institute)에 의하면 이 기후변화는 2000년간 가장 극적인 변화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의 기온 하강으로 인해 기근이 발생했고 이는 동로마 제국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습니다. 특히 당시 기록을 보면 기근 후 찾아온 전염병이 수많은 인명피해를 냈는데, 이는 굶주림으로 면역이 약해진 사람들에게 매우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 같습니다. 실제로 당시 기록에는 북아프리카 지역을 비롯해서 여러 지역에서 기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영토를 크게 팽창했지만, 결국 동로마 제국은 내부적으로는 매우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다음세기에 발생한 아랍 제국의 팽창에 중요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물론 동로마 제국의 영토 상실과 아랍 제국의 팽창을 이것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동로마 제국 내부의 종교적 분열과 정치적 갈등 역시 붕괴의 중요한 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고기후를 복원할 수 있게 되면서 이제 우리는 실제로 기근이 발생할수 있는 조건이었고 이것이 동로마 제국의 쇠락을 일으킨 중요한 이유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를 변화시킨 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중요할 것입니다.

 


 

엘살바도르의 수도인 산살바도르 근처에 있는호수 일로팡고(Ilopango)는 보트, 다이빙, 그리고 칼데라 호수를 둘러싼 바위투성이의, 경치가 좋은 100 미터 높이 절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1500 년 전, 그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무서웠던 자연 재해의 장소였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텍사스 대학교 Robert A. Dull 박사의 보고에 따르면, 오랫동안 찾았던 서기 535-536년의 극단적인 기후 냉각 및 작물 흉작의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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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교과서나 백과사전 등을 보면 551년의 백제 한강유역 재점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538년 사비로의 천도 후 백제 성왕은 한강 유역 회복작전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자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신라·가야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는 서북으로부터 돌궐(突厥)의 남하에 따른 압력을 받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외척들이 싸움을 벌이는 등 내분에 처해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신라·가야군과 연합한 백제군은 551년에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여 마침내 백제는 한강 하류를 차지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성왕(聖王, 490년경? ~ 554년, 재위: 523년 ~ 554년 음력 12월)은 백제의 제26대 국왕이며, 성은 부여(扶餘), 이름은 명농(明襛)이고, 중국 측 기록인 양서(梁書)에는 이름이 명(明)으로 기록되었다. 무령왕의 아들로 결단성이 있고 지혜와 식견이 빼어났다. 무령왕이 죽자 왕위를 이은 명농을 백성들은 성명왕이라 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성명왕(聖明王) 또는 명왕(明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475년 장수왕이 한성을 공략한 후 한강유역의 주인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551년 백제 성왕이 한강유역을 되찾는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한성 수복 관련기사는 백제본기에서는 보이지 않고, 고구려본기와 신라본기에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다.

 

4세기 후반부터 삼국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4세기 후반 ~ 433년 : 고구려 + 신라 ↔ 백제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후견기)

– 433 ~ 551년 : 백제 + 신라 ↔ 고구려 (나제동맹기, 성립을 455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553년 : 신라 + 고구려 ↔ 백제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

– 554년 이후 : 고구려 + 백제 ↔ 신라 (이후 동아시아 국제전쟁과 삼국통일)

 

그리고 당시의 대외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혼란과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왜의 충돌은 무관하지 않다.

– 534년 북위의 분열

– 548년 남조의 양, 후경의 반란

– 550년 북제의 성립

– 551년 남조의 양, 후경이 황제에 오르지만 552년에 전투 중 사망

– 551년 돌궐의 독립

– 556년 북주의 성립

* 옐로우의 세계사 연대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550

 

※ 관련글

–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다 – 553년 : http://yellow.kr/blog/?p=2400

– 관산성 전투, 백제 성왕의 전사 – 554년 : http://yellow.kr/blog/?p=2414

 

– 535 – 536년의 극단적인 기후 사건 : http://yellow.kr/blog/?p=1436

 

그 당시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 보았다. 아래에 언급한 『일본서기』는 720년에 완성되었으며 <동북아 역사재단>의 번역본을 참조하였고, 삼국사기는 1145년에 완성되었으며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를 참조하였다.

 


548년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진흥왕

9년(서기 548) 봄 2월,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청하였다. 임금은 장군 주령(朱玲)을 보내었다. 주령은 굳센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九年 春二月 高句麗與穢人攻百濟獨山城 百濟請救 王遣將軍朱玲 領勁卒三千擊之 殺獲甚衆

 

※ 삼국사기 제19권 고구려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十九 高句麗本紀 第七) – 양원왕

4년(서기 548) 봄 정월, 예(濊)의 병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주진(朱珍)이 와서 백제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가을 9월, 환도(丸都)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동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四年 春正月 以濊兵六千 攻百濟獨山城 新羅將軍朱珍來援 故不克而退 秋九月 丸都進嘉禾 遣使入東魏朝貢

◎ 한강 북쪽의 독산성(漢北獨山城)이라는 말은 551년 한강 유역의 회복이라는 사실과 맞지않다.  백제본기가 전하는 475~551년 사이의 영역 관련기사는 그대로 신뢰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 독산성의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으나 충주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16412&cid=4395&categoryId=4395

 http://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326502

 

※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 성왕

26년(서기 548) 봄 정월, 고구려왕 평성(平成, 양원왕)이 예(濊)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해오자, 임금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朱珍)을 시켜 갑옷을 입은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출발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병사들과 일전을 벌여 크게 이겼다.
二十六年 春正月 高句麗王平成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朱珍 領甲卒三千 發之 朱珍日夜兼程 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

◎ 독산성 전투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53845&cid=4395&categoryId=4395

 

생포된 병사들이 이번 침공은 백제를 공격해 달라는 안라와 일본부의 부탁을 받고 감행했다는 사실을 털어 놓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550년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진흥왕

11년(서기 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 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百濟拔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伊飡異斯夫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甲士一千戍之

◎ 도살성은 충북 괴산군 도안면(민덕식), 충남 아산(이병도)

◎ 금현성은 현재의 충북 진천군 진천읍으로 비정하는 견해와 충남 연기군 전의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http://www.mediapen.com/news/view/289863

 

※ 삼국사기 제19권 고구려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十九 高句麗本紀 第七) – 양원왕

6년(서기 550) 봄 정월, 백제가 침입하여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이 기회를 틈타 두 성을 빼앗았다.
여름 6월,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북제가 임금을 사지절시중표기대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책봉하였다.
六年 春正月 百濟來侵 陷道薩城 三月 攻百濟金峴城 新羅人乘間取二城 夏六月 遣使入北齊朝貢 秋九月 北齊封王 爲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 성왕

28년(서기 550) 봄 정월, 임금이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게 하여 빼앗았다.
3월, 고구려 병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
二十八年 春正月 王遣將軍達己 領兵一萬 攻取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兵圍金峴城

 

 

551년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진흥왕

12년(서기 551) 봄 정월,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
3월, 임금이 지방을 돌아보다가 낭성(娘城)에 묵으며,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특별히 불렀다. 임금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기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 가실왕(嘉悉王)이 열두 달의 음률을 본떠 십이현금(十二弦琴)을 만들고, 우륵에게 명하여 악곡을 만들게 했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순하였기에,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加耶琴)이라 하였다.
임금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는데, 승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
十二年 春正月 改元開國 三月 王巡守次娘城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 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先是 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 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 操樂器投我 其樂名加耶琴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

 

※ 삼국사기 제19권 고구려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十九 高句麗本紀 第七) – 양원왕

7년(서기 551) 여름 5월, 북제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돌궐(突厥)이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임금이 장군 고흘(高紇)에게 병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신라가 침공하여 10개의 군을 빼앗았다.
七年 夏五月 遣使入北齊朝貢 秋九月 突厥來圍新城 不克 移攻白巖城 王遣將軍高紇 領兵一萬 拒克之 殺獲一千餘級 新羅來攻 取十郡

◎ 고구려는 유연이라는 우방을 잃고 돌궐이라는 강적을 만났다.

◎ 돌궐이 551년에 고구려와 전쟁을 한 것에 대해 의문이 있다. 돌궐은 552년에 유연을 격파한다.

 

※ 삼국사기 제44권 열전 제4(三國史記 卷第四十四 列傳 第四) – 거칠부

진흥대왕(眞興大王) 6년(서기 554) 을축에 그는 왕명을 받들어 여러 문사(文士)들을 소집하여 신라의 국사를 편찬하였고, 벼슬이 파진찬으로 올라갔다.

진흥왕 12년(서기 560)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ㆍ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을 시켜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이때 혜량법사가 무리를 이끌고 길가에 나와 있었다.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로써 인사하고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옛날 유학할 때 법사님의 은혜를 입어 목숨을 보전하였는데, 지금 뜻밖에 만나게 되니 어떻게 보답하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머지않았으니, 귀국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라오.”

이에 거칠부가 같이 수레에 타고 돌아와서 왕에게 배알시켰다. 왕이 그를 승통(僧統, 승려의 가장 높은 지위)으로 삼고 처음으로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법회(八關法會)를 열었다.

(眞智王) 원년(서기 576) 병신에 거칠부가 상대등이 되어 군국사무를 자임(自任)하다가 늙어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78세였다진지왕.

眞興大王六年乙丑 承朝旨 集諸文士 修撰國史 加官波珍飡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飡比台角飡耽知迊飡非西迊飡奴夫波珍飡西力夫波珍飡比次夫大阿飡未珍夫阿飡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 乘勝取竹嶺以外 高峴以內十郡 至是 惠亮法師 領其徒 出路上 居柒夫下馬 以軍禮揖拜 進曰 昔 遊學之日 蒙法師之恩 得保性命 今 邂逅相遇 不知何以爲報 對曰 今 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於是 居柒夫同載以歸 見之於王 王以爲僧統 始置百座講會及八關之法 眞智王元年丙申 居柒夫爲上大等 以軍國事務自任 至老終於家 享年七十八

◎ 위에서 말한 평양(平壤)은 남평양(南平壤)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있다.  남평양은 위례성의 다른 이름, 경기도 양주, 황해도 재령 등 다양한 주장이 있다.

 

※ 일본서기 권 제19 / 흠명천황(킨메이 천황) 12년

12년 봄 3월에 보리 씨앗 1천 곡(斛)을 백제왕에 주었다.

이 해에 백제 성명왕이 친히 백제의 군사[衆]와 두 나라[두 나라는 신라와 임나를 말한다.]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한성(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한 진군하여 평양(平壤)을 쳤다. 모두 6군(郡)의 땅은 고지를 회복한 것이다.

◎ 1斛은 10斗이다.

 


※ 일본서기 권 제19 / 흠명천황(킨메이 천황) 23년(562년)

8월에 천황이 대장군 대반련협수언(大伴連狹手彦 ; 오호토모노무라지사데히코)을 파견하여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협수언은 백제의 계책을 써서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그 왕은 담을 넘어 도망하였다. 협수언은 드디어 승세를 타고 왕궁으로 들어가 갖가지 진귀한 보물, 칠직장(七織帳), 철옥(鐵屋)을 모두 빼앗아 돌아왔다[옛 책(舊本)에는 철옥은 고구려 서쪽의 높은 누각 위에 있었으며, 직장은 고구려왕의 내전 침실에 쳐 있었다고 한다.]. 칠직장은 천황에게 바치고 갑옷 두 벌, 금으로 장식한 칼 두 자루, 구리종 세 개, 오색 번(五色幡) 두 간(竿), 미녀 원(媛)[원은 이름이다]과 그의 시녀 오전자(吾田子)는 소아도목숙녜(蘇我稻目宿禰) 대신(大臣)에게 보냈다. 이때 대신은 두 여자를 처로 삼고 경(輕 ; 카루)의 곡전(曲殿)에 살도록 하였다[철옥은 장안사(長安寺)에 있다. 이 절이 어느 국(國)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책(一本)에서는 “11년에 대반협수언련이 백제국과 함께 고구려와 양향(陽香)을 비진류도(比津留都)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흠명천황 23년은 562년이고, 어떤 책(一本)에서 말한 흠명천황 11년은 550년이다.

삼국사기에는 562년을 전후로 하여 고구려에 어떠한 왜군의 공격도 없다. 더구나 백제군이 신라나 고구려를 성공적으로 공격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562년의 기록이 아니라 550년 전후의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진위여부나 과장되었는 지는 논란이다.

 


고구려의 상황

–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고구려 중에서

 

6세기가 진전되면서 고구려는 정치적 안정이 흔들리고, 귀족들 간의 갈등이 격화되는 모습을 나타냈다. 531년 안장왕(安藏王)이 피살되고 그 동생인 안원왕(安原王)이 즉위하였다. 귀족 간의 갈등은 안원왕 대에도 지속되었다. 안원왕 말년인 544년 12월 마침내 그것은 대규모 정란(政亂)으로 분출되었다. 안원왕은 세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첫째 왕비는 소생이 없었고, 둘째 왕비와 셋째 왕비가 각각 아들을 두었다. 당시 귀족들이 각각 이 두 왕자를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하여, 이를 추군(麤群)과 세군(細群)으로 불리웠다. 왕의 병이 위중해지자, 추군과 세군은 서로 먼저 왕궁을 장악하여 우세한 지위를 선점하려 하였다. 마침내 양측 간의 무력충돌이 궁문 앞에서 벌어졌다. 이후 3일간 수도에서 양측 간의 격렬한 대결이 벌어졌고, 추군이 승리하여 정국을 장악하였는데, 이듬해 초 8세의 어린 왕자가 즉위하니, 이가 양원왕(陽原王)이다. 패배한 세군 측의 피살자가 2천여 명에 달하였다. 수도에서의 전투는 일단락되었지만, 분쟁은 여파는 지방 각지에서 이어졌다. 그래서 551년 당시 한강 상류의, 아마도 충주지역의 사찰에 머물고 있던 승려 혜량(惠亮)이 진격해온 신라군에 투항하면서 “우리나라는 정란으로 언제 망할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던 것은 그런 측면을 잘 말해준다.

 

이렇게 고구려 내정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백제와 신라가 551년 북진을 단행하였다. 백제는 한강 하류 6개 군을 차지하였으며 신라는 한강 상류 10개 군을 공취하였다.

 

 

그런데 이무렵 고구려는 서북방면에서부터 또 다른 위협에 직면하였다.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가 552년과 553년에 걸쳐 요하 상류 지역의 해(奚)와 거란에 대한 대규모 토벌전을 전개하고, 창려성을 직접 순시하여 요하 선을 압박하였다. 이와 함께 552년에는 외교적 압박을 가해 북위 말기인 520년대에 고구려로 넘어온 북위 유민(流民) 5천 호를 다시 쇄환해갔다. 거란의 일부를 휘하에 두고 있던 고구려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한편 이 시기 몽골고원에서 새로운 변동이 일어났다. 그간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에 있던 유연이 멸망하였다. 유연의 피복속민으로서 야철업(冶鐵業)에 종사하며 알타이 산맥 서남록 준가르 초원에서 세력을 키워왔던 돌궐(突闕)이 흥기하여, 552년 옛 상전국인 유연을 격파하였다. 이 활기찬 신흥 유목제국은 조만간 흥안령을 넘어 요하 유역으로 그 세력을 확대할 기세였다. 초원에서의 세력교체에 따른 파장은 급속히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신흥 돌궐의 영향력이 고구려 휘하의 거란과 말갈에 뻗쳐오고 나아가 고구려 본토에까지 밀려들어 온다면 심각한 위기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게 된 바이다.

 

550년대 초에 진행된 이러한 일련의 내우외환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 귀족들은 방안을 모색하였다. 먼저 귀족들 간의 내홍을 중단하고 그들 간의 갈들을 수습하기 위해 실권자의 직인 대대로(大對盧)를 귀족들 간에서 선임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리고 방어력이 크게 강화된 평산성(平山城) 형태의 새로운 수도 건설을 제기하였다. 기존의 궁성은 동평양(東平壤)의 안학궁(安鶴宮)터 자리에 있었고, 궁성 외곽에 시가지가 조영되어 있었다. 새로운 수도는 지금의 평양 중심부에 위치하며 궁성과 시가지 전체를 나성(羅城)으로 둘러싸는 그러한 형태였다. 실제 신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으로 천도가 이루어진 것은 30여 년이 흐른 뒤인 586년이었다.

 


한국 고대사 1

–  송호정, 여호규, 임기환, 김창석, 김종복 / 푸른역사 / 2016.11.15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해 군사 동맹을 결성한 중부 지역과 정반대로, 남부 지역에서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분할하며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 갔던 것이다. 그렇지만 가야의 여러 나라는 백제와 신라의 분할 점령을 저지할 만한 충분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가령 백제의 군사적 위협에 시달리던 탁순국은 538년 신라에 투항하는 길을 선택했다. 또한 나머지 가야의 나라들은 541년과 544년 백제에 의탁해 신라의 진격을 막으려 시도했지만, 오히려 백제의 부용국으로 전락했다. 결국 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연맹체 단계에 머물렀던 가야는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삼국의 치열한 각축전 속에서 소멸의 위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551년, 백제의 성왕聖王과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백제와 가야의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한성을 공파하여 한강 하류의 6군을 차지했고, 신라군은 죽령을 넘어 고현高峴까지 진출하여 한강 상류의 10군을 확보했다. 이때 빼앗은 6군과 10군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6군은 지금의 천안에서 임진강 이남 지역으로, 10군은 지금의 충주 · 제천에서 철원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즉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한강 유역 전체를 변변한 저항도 없이 무기력하게 잃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고구려 안팎의 어려운 상황 때문이었다. 우선 내부적으로 왕위 계승전이 이어지고 귀족 세력 간의 분열이 거듭되면서 정국이 불안정했다. 여기에 요동 지역에서 돌궐의 동진으로 대외적 위기가 겹치면서 남변南邊의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백제 · 신라 연합군의 한강 유역 공격은 고구려가 처한 국내외적 정세를 잘 파악하여 적절한 기회를 포착한 군사 행동이었다. 반대로 고구려는 왕위 계승전을 비롯한 중앙 정계에서 벌어진 분란으로 한강 유역의 상실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5세기 후반~6세기 중엽 高句麗와 百濟의 국경 변천

–  여호규 / 학술논문 : 백제문화  2013 48권, 48호 / 공주대학교백제문화연구소 2013년

 

본고는 5세기 후반∼6세기 중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을 고찰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475∼551년에 마치 백제가 한강유역을 영유한 것처럼 기술한 사료가 많이 나오지만, 이들은 대부분 475년 이전 기사와 지명뿐 아니라 표현방식도 유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 사료를 제외하고 475∼550년대 양국의 각축전과 관련된 사료를 검토한 결과, 양국은 대체로 차령산맥 북방의 천안-아산 일대 및 금강 지류인 미호천 유역에서 접경하였던 것으로 확인하였다. 한편 551년 나제연합군이 한강유역을 점령한 이후, 고구려가 곧바로 퇴각했다고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여러 사료를 검토한 결과, 고구려가 552년 신라와의 밀약을 통해 나제연합군의 북상을 저지한 다음, 오히려 신라와 합세하여 백제에 대한 역공에 나섰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서해안을 따라 안성천 일대까지 진격했지만, 백제군에 의해 저지당하였다. 이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는 더 이상 국경을 접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475년 이후 551년까지 고구려와 백제는 차령산맥 북방과 금강 지류인 미호천 일대에서 대치하며 국경을 접했다고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475∼550년 백제의 한강유역 영유기사는 실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고 보기 어렵다.

 


고구려의 한강유역 지배방식에 대한 검토

–  양시은 / 학술논문 : 고고학 2010 9권, 1호 / 중부고고학회 2010년

 

475년 고구려는 당시 백제의 도성이었던 한성을 점령하고 이후 남진하여 금강유역까지 진출하였다. 551년 신로아 백제의 연합군이 북상하자 고구려는 한강 유역에서 후퇴하였다. 고구려가 한강 이남으로의 남진한 시기 내지는 점유 방식 등과 관련하여 학계에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그렇지만 최근 한강 이남 지역에서 고구려 고분과 생활 유구 등 여러 고구려 유적들이 조사되기 시작하면서, 475년부터 551년까지 약 80년간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거의 줄곧 점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구려는 풍납토성을 점령한 뒤 몽촌토성에 남진을 위한 사령부를 축조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한강 이북의 아치산 보루군에서 출토되는 것들보다 시기가 이른 5세기 중후반에 해당된다. 또한 몽촌토성 내에서 확인되는 유구의 축조 방식이나 고구려 고분에서 주로 확인되는 의례용 용기인 사이장경옹의 출토, 과거 백제의 도성이었다는 점 등은 몽촌토성이 고구려 군의 남진사령부로서의 기능하였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또한 최근 판교, 용인, 청계, 충주 등 한강 이남에서 확인되고 있는 5세기 중후반대 고구려 고분군들은 고구려가 당시 한강 유역을 안정적으로 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역 지배를 실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다만 금강 유역의 경우에는 유적 분포 양상과 역사적인 상황들을 감안해볼 때 영역지배보다는 거점지배와 같은 군사적 점유의 성격이 보다 강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6세기가 되면 백제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남쪽 전선이 불안정해지면서 몽촌토성 내 고구려 유적의 기능이 상실되게 되고 이후에는 아차산 보루군이 한강 유역 지배와 관련된 중심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아차산 보루군은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시루봉 등의 각 봉우리에 성을 축조하여 보루가 여러 개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들 보루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아차산 보루군 자체가 마치 하나의 중대형 성처럼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아차산 보루군의 중심은 기와 건물지가 축조된 홍련봉 1보루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명문토기 등 주변 유적에서 확인된 여러 유물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고구려는 475년부터 551년까지 한강유역을 안정적으로 점유 및 지배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5세기 중엽에는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한강유역 전역을, 6세기에는 아차산 보루군 자체가 중심이 되어 한강 이북을 경영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475~551년 한강 유역 영역변천사 연구동향

–  장창은 / 학술논문 : 역사와교육  2015 20권, 20호 / 역사교과서연구소 2015년

 

한국 고대사에서 한강 유역의 영유권은 475년까지는 백제, 475~551년까지는 고구려, 551년 이후는 신라가 차지했었다는 것이 광복 이후 학계의 통설이었다. 통설은 475년 9월 고구려가 백제 漢城을 차지한 후 백제가 수도를 웅진[충남 공주시]으로 천도했고, 日本書紀 欽明天皇 12年(551)조의 ‘백제 성왕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마침내 한성과 平壤[南平壤 : 경기도 양주]의 옛 땅을 되찾았다’는 기록을 조합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동성왕(479~501)~무령왕대(501~523)에 麗‧濟 간 전쟁과 백제의 축성‧순행이 한강 유역은 물론 그 북쪽 너머의 황해도 일대에서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분명하게 남아 있다. 이는 통설과 배치되는 부분으로 백제가 475년에 고구려에게 한성을 함락당했고 수도를 남쪽으로 천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강 유역을 점유한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통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은 백제본기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475~551년의 백제본기가 조작되었거나, 한성시대의 지명을 웅진시대로 옮겨왔다는 지명이동설, 사서 편찬과정에서 4세기대의 기록이 5~6세기대로 착간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1990년대 이후 백제본기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 475~551년까지 백제가 한강 유역을 회복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백제의 한강 유역 회복시기에 대해 동성왕대인가 무령왕대인가, 또는 차지한 한강 유역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이해는 연구자마다 차이가 있지만, 신설의 연구 성과도 통설 못지않게 축적되었다. 한편 1990년대 이후 최근까지 한강 이남의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일대에서 고구려 유물‧유적이 지속적으로 발굴되었다. 이를 둘러싸고 통설은 그에 근거해 논리를 보강하는 추세이고, 신설은 고고학 자료의 확대 해석을 경계하면서 유동적이었던 고구려와 백제 간 영역변천의 양상을 추적하고 있다. 결국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통설과 긍정적으로 보는 신설은 475~551년 한강 유역의 영유권 주체에 대해서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  장창은 / 학술논문 : 진단학보 제111호 / 2011.04

 

신라는 6세기 중반에 들어서 기존의 수세적 방어체계를 공세적 공격루트로 전환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압박해 나갔다. 신라는 550년에 고구려와 백제가 장악하고 있던 道薩城[괴산군 증평]과 金峴城[연기군 전의]을 장악함으로써 고구려의 國原[충주]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신라 眞興王(540~576)이 이듬해 娘城[청주]으로 巡狩를 온 것은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은 사후조처이자 한강 중상류로 나아가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신라의 국원 진출은 추풍령·화령로와 죽령로의 양쪽에서 협공하는 전략 하에 550년 3월~551년 3월 사이에 이루어졌다. 신라는 국원을 차지한 후 곧바로 백제와 함께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략하였다. 백제가 먼저 漢城과 平壤을 쳐서 깨뜨려 한강 하류의 6郡을 차지했고, 신라는 居柒夫를 주축으로 한강 중상류를 공략함으로써 竹嶺과 高峴 사이의 10郡을 차지하였다. 고구려는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北齊와 돌궐의 압박이 심해지는 위기 속에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말았다. 신라가 진출한 한강 중상류의 10군은 朔州 관내의 ① 奈城郡[奈生郡], ② 奈제郡[奈吐郡], ③ 北原[平原郡], ④ 嘉平郡[斤平郡], ⑤ 朔州[牛頭州], ⑥ 狼川郡[猩川郡], ⑦ 楊麓郡[楊口郡], ⑧ 益城郡[母城郡], ⑨ 大楊郡[大楊菅郡], ⑩連城郡[各連城郡]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의 6군은 임진강 이남의 ① 漢陽郡[北漢山郡: 平壤], ② 來蘇郡[買省郡], ③ 交河郡[泉井口縣], ④ 堅城郡[臂城郡], ⑤ 鐵城郡[鐵圓郡], ⑥ 富平郡[夫如郡]으로 추정하였다.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유역은 6군에다가 한강 이남의 한성 일대를 포함해 경기 남부 일대를 망라했다.

 


麗羅戰爭史의 再檢討

–  박경철 / 한국사학보 제26호 / 2007.02

 

삼국 간 전쟁의 최고 동원전력 수준은 3~5만 명이라는통시적 균등성을 보이고 있다. 이 점은 고구려의 수 · 당 전쟁 당시 양측의 동원 양상, 규모와 비교할 때 질 · 양 면에서 현격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 점에 비추어 당시 고구려의 군가적 운명을 건 주전장이 한반도 남부 지역이 아닌 서북전선에서 형성되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관련 그림>

 

– 나제연합군의 한강 유역 점령 추정 지역 / 출처 : KBS1 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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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이 551년 한강유역을 재점령(http://yellow.kr/blog/?p=2395)했지만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여 553년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백제가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기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신라의 기습 공격설이 대표적이지만 백제의 포기설도 있다. 백제의 한성 포기는 『일본서기』의 552년 부분에 “이 해에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다. 그래서 신라가 한성으로 들어갔다. 현재 신라의 우두방(牛頭方), 니미방(尼彌方)이다[지명이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한강유역 점령 이후 신라와 고구려의 동맹은 가야지역의 동향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유역과 가야지역 가운데 어느 곳에 우선순위를 두는가의 문제를 고민해야만 했다. 이에 백제는 가야지역을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서 한강유역을 일시적으로 포기하면서, 대고구려전 보다는 대신라전에 매달리게 되었다. (김수태, 백제연구, 2006, 44권, 44호)

 

당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에서 대해서는 동맹이었지만 가야에 대해서는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면 553년부터 신라는 한강유역을 완전히 장악했을까? 일반적인 삼국의 역사지도에는 이즈음부터 신라의 영역으로 한강하류까지 그려져 있다. 그렇지만 한강하류지역은 신라의 최북단으로 고구려 · 백제와 군사적 긴장관계를 유지했다고 봐야한다. 이는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이후 정세에 따라 수시로 州의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는 과정에서도 알 수 있다. 신라의 한강유역 州는 진흥왕 14년(553) 신주(新州) 설치 이후 진흥왕 18년(557) 북한산주(北漢山州) 설치, 진흥왕 29년(568) 남천주(南川州) 설치, 진평왕 26년(604) 북한산주 재설치, 문무왕 2년(662) 남천주 이동, 문무왕 4년(664) 한산주(漢山州) 개칭, 문무왕 10년(670) 남한산주(南漢山州) 설치, 경덕왕 16년(757) 한주(漢州) 개칭에 이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양원왕 편에 “10년(서기 554) 겨울, 백제의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라고 나온다. 신라가 한강하류를 장악하고 있는데 고구려가 어떻게 백제의 웅천을 공격할 수 있을까? 또한 진흥왕순수비 4개중 3개는 당시 군사 · 경제 · 정치적으로 공백지대인 산악에 있어, 진흥왕순수비도 신라의 판도를 추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람이 활동하는 평지에 세워진 순수비는 가야땅의 창령비(昌寧碑)가 유일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의 한강하류의 진출은 북한산주(北漢山州)의 설치와 연관시키면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당시의 왕인 진흥왕에 대해 위키백과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진흥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548년 정월에 고구려 양원왕이 예(濊)와 모의하여 백제의 한강 북쪽(한북, 漢北)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은 백제의 성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551년) .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는 6개의 군을 얻었다. 신라는 함경남도, 함경 북도에 진출하여 순수비을 세웠는데, 고구려는 돌궐과의 전쟁으로 신라의 영토 확장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이때 백제는 신라에게 연합하여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자고 제의하였고, 고구려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등 진흥왕이 새로 개척한 땅을 신라 땅으로 용인해 주는 대신 고구려 수도 평양성으로 진군하지 말것을 제의하였다. 진흥왕은 백제의 제의을 거절하고 고구려의 제의을 받아들였다. 신라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로 영토을 확장하고 백제로 진군하였으나, 백제가 화해을 시도하여 진군을 멈추었다. 553년 7월, 진흥왕은 백제의 한강 유역을 침략하여 여러 성을 빼았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이로써 신라는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하류 지역을 탈취하여 백제를 포위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같은해, 음력 10월에 백제의 왕녀가 진흥왕에게 시집 왔다.  한편, 이듬해 백제 성왕은 한강을 빼앗긴 것을 분하게 여겨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신라가 이를 크게 격파하였고, 백제 성왕은 신라 병사에게 죽임을 당하였다.(554년).  백제는 남하하여 충청남도 부여로 후퇴하였다. 562년, 가을 7월에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침략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같은 해, 사다함의 공으로 대가야를 복속하였고 군대를 강화하였다. 또한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4개의 순수비(창녕 · 북한산 · 황초령 · 마운령)가 전해진다.

 

4세기 후반부터 삼국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4세기 후반 ~ 433년 : 고구려 + 신라 ↔ 백제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후견기)

– 433 ~ 551년 : 백제 + 신라 ↔ 고구려 (나제동맹기, 성립을 455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553년 : 신라 + 고구려 ↔ 백제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

– 554년 이후 : 고구려 + 백제 ↔ 신라 (이후 동아시아 국제전쟁과 삼국통일)

 

그리고 당시의 대외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혼란과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왜의 충돌은 무관하지 않다.

– 534년 북위의 분열

– 548년 남조의 양, 후경의 반란

– 550년 북제의 성립

– 551년 남조의 양, 후경이 황제에 오르지만 552년에 전투 중 사망

– 551년 돌궐의 독립

– 556년 북주의 성립

* yellow의 세계사 연대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550

 

※ 관련글

– 백제 성왕, 한강 유역 재점령 – 551년 : http://yellow.kr/blog/?p=2395

– 관산성 전투, 백제 성왕의 전사 – 554년 : http://yellow.kr/blog/?p=2414

 

 

그 당시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 보았다. 아래에 언급한 『일본서기』는 720년에 완성되었으며 <동북아 역사재단>의 번역본을 참조하였고, 삼국사기는 1145년에 완성되었으며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를 참조하였다.

 


552년

※ 삼국사기 제19권 고구려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十九 高句麗本紀 第七) – 양원왕

8년(서기 552),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
八年 築長安城

–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장안성

 

 

※ 일본서기 권 제19 / 흠명천황(킨메이 천황) 13년

13년 여름 4월에 전전주승대형(箭田珠勝大兄 ; 야타노타마카츠노오호에)이 죽었다(薨).

5월 무진삭 을해(8일)에 백제, 가야, 안라가 중부(中部) 덕솔(德率) 목리금돈(木刕今敦)과 하내부(河內部) 아사비다(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삼가 원병을 요청하여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칙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조를 내려 “지금 백제왕, 안라왕, 가라왕과 일본부의 신 등이 함께 사신을 보내 상주한 상황은 잘 들었다. 또한 임나와 함께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하여라. 그렇게 하면 반드시 하늘이 지켜주는 복을 받을 것이며 또한 황공하신 천황의 영위에 의한 가호가 있을 것이다.”라고 명하였다.

……

이 해에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다. 그래서 신라가 한성으로 들어갔다. 현재 신라의 우두방(牛頭方), 니미방(尼彌方)이다[지명이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

– 백제의 성왕은 왜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중요한 이유로 신라와 고구려가 화통한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의 우호관계는 464년경에 결렬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왕이 왜의 원병을 끌어들이기 위해 고구려를 들먹였던 것에 불과한 것인지, 실제로 이 기간에 고구려와 신라의 내통이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이에 대해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이 552년이나 553년 초에 성립되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 『일본서기』의 기사를 신빙하여 552년5월 이전에 백제가 양국의 내통을 알고 있었다는 견해, 551년 고구려 혜량법사와 거칠부의 관계, 그리고 혜량법사의 신라투항을 밀약의 계기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553년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진흥왕

14년(서기 553) 봄 2월, 임금이 담당관에게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누런 빛 용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임금이 기이하다 여기고 절로 고쳐 짓고서 황룡(皇龍)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十四年 春二月 王命所司 築新宮於月城東 黃龍見其地 王疑之 改爲佛寺 賜號曰皇龍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飡武力爲軍主 冬十月 娶百濟王女 爲小妃

–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신주(新州)

 

 

※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 성왕

31년(서기 553) 가을 7월,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의 딸이 신라로 시집 갔다.
三十一年 秋七月 新羅取東北鄙 置新州 冬十月 王女歸于新羅

 

 

※ 일본서기 권 제19 – 흠명천황(킨메이 천황) 14년

14년 봄 정월 갑자삭 을해(12일)에 백제가 상부(上部) 덕솔(德率) 과야차주(科野次酒)와 간솔(杆率) 예색돈(禮塞敦) 등을 보내 군병을 청하였다.

무인(15일)에 백제의 사신 중부 간솔 목리금돈과 하내부 아사비다 등이 돌아갔다.

……

6월에 내신(內臣 ; 우치노오미)[이름이 빠졌다.]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리고 양마 2필, 동선(同船) 2척, 활 50장(張), 화살 50구(具)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칙을 내려 “요청한 군대는 왕이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따로 칙을 내려 “의박사(醫博士), 역박사(易博士), 역박사(曆博士) 등은 순번에 따라 교대시켜라. 지금 위에 열거한 직종의 사람들은 바야흐로 교대할 시기가 되었다.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 교대시키도록 하라. 또한 복서(卜書), 역본(曆本)과 여러 가지 약물(藥物)도 함께 보내라.”고 명하였다.

……

8월 신묘삭 정유(7일)에 백제가 상부(上部) 나솔(奈率) 과야신라(科野新羅)와 하부(下部) 고덕(固德) 문휴대산(汶休帶山)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지난해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내신(內臣) 덕솔 차주(德率次酒)와 임나의 대부(任那大夫) 등을 보내 바다 밖 여러 미이거(彌爾居)의 일을 아뢰고, 엎드려 은조를 기다리기를 봄에 돋은 풀이 단비를 기다리듯 하였습니다. 올해 문득 듣자니 신라와 박국(狛國)이 통모하여 ‘백제와 임나가 자주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고 있다. 생각컨대 이것은 군사를 청하여 우리나라를 치려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나라의 패망을 발꿈치를 들고 기다리는 꼴이 된다. 일본의 군사가 출발하기 전에 안라를 공격해 빼앗고 일본에서 오는 길을 막자.’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 계략이 이와 같습니다. 신 등이 이를 듣고 매우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빠른 배로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아뢰는 것입니다. 천황께서 자애로운 마음으로 속히 전군과 후군을 계속 파견하여 구원해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가을까지는 해외[海表] 미이거(彌爾居)를 굳게 지키겠습니다. 만약 지체하여 늦는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파견군이 신의 나라에 도착하면 옷과 식량 비용은 신이 충당할 것입니다. 임나에 도착하여도 역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만일 (임나가) 지급할 수 없다면 신이 반드시 충당하여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편 적신(的臣)이 삼가 천칙을 받고 와서 신의 나라[臣蕃]를 위무하고 있습니다. 주야로 태만하지 아니하고 정사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해외[海表]의 여러 번(蕃)들은 모두 그의 선정을 칭송하여 영원히 해표의 여러 나라에 선정을 베풀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죽었다 하니 깊이 추도하는 바입니다. 이제 임나의 일을 누가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천황의 자애로운 마음으로 속히 그를 대신할 사람을 보내 임나를 다스리시길 엎드려 바랍니다. 또한 바다 밖의 여러 나라들은 활과 말이 매우 부족합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천황에게 지급받아 강한 적을 막았습니다. 천황께서 자애로운 마음으로 활과 말을 많이 내려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라고 말하였다.

겨울 10월 경인삭 기유(20일)에 백제 왕자 여창(餘昌)[명왕의 아들 위덕왕(威德王)이다.]이 나라 안의 군대를 모두 징발하여 고구려로 향하였다. 그는 백합(百合)의 들판에 요새를 쌓고 군사들과 함께 먹고 잤다. 그런데 이 날 저녁 바라보니 넓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의 자취는 거의 없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북과 피리 소리가 들렸다. 여창이 크게 놀라 북을 쳐서 맞대응하면서 밤새 굳게 지켰다. 새벽녘에 일어나 넓은 들판을 보니 마치 푸른 산과 같이 군기가 가득하게 덮고 있었다. 날이 밝자 목에 경개(頸鎧)를 입은 자 1기(騎), 작은 징[뇨(鐃)자는 잘 알 수 없다.]을 꼽은 자 2기, 표범 꼬리로 장식한 자 2기 등 모두 합해 5기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어린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와 있다.’고 말하였다. 어찌 예를 갖춰 맞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속히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알고 싶다.”라고 말하였다. 여창이 “성은 동성(同姓)이고 관위는 간솔(杆率)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백제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군기[標]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고 머리를 창끝에 꽂아 들고 돌아와서 군사들에게 보였다. 고구려군 장수들은 격노하였다. 이때 백제의 환호하는 소리가 천지를 가르는 듯하였다. 또 부장이 북을 치며 속공하여 고구려왕을 동성산(東聖山) 위에까지 쫓아버렸다.

– 내신(內臣) : 『일본서기』에서는주로 왕의 측근으로 집정관적인 성격을 가진 자에게 붙는 직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 동선(同船) : 많은 목재를 조립하여 만든 큰 배를 일컫는다.

– 이 시기 『삼국사기』,『삼국유사』에 고구려왕이 백제와의 전투에 출장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아 전쟁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 동성산(東聖山) : 평양 동북쪽에 있는 大聖山을 가리킨다.

 


 

※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 진흥왕

제24대 진흥왕은 왕위에 올랐을 당시 나이가 15세였으므로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태후는 곧 법흥왕(法興王)의 딸이자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왕비였다. 왕은 임종할 때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 돌아가셨다.

승성(承聖) 3년(서기 554) 9월에 백제의 병사가 진성(珍城)에 쳐들어와서 남녀 3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 이에 앞서 백제는 신라와 군사를 합쳐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지만, 진흥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랄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였다.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서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서 이렇게 침범한 것이다.

第二十四 眞興王卽位 時年十五歲 太后攝政 太后乃法興王之女子 立宗葛文王之妃 終時削髮 被法衣而逝
承聖三年九月 百濟兵來侵於珍城 掠取人男女三萬九千 馬八千匹而去 先是 百濟欲與新羅合兵 謀伐高麗 眞興曰 國之興亡在天 若天未厭高麗 則我何敢望焉 乃以此言通高麗 高麗感其言 與羅通好 而百濟怨之 故來爾

 


한국 고대사 1

–  송호정, 여호규, 임기환, 김창석, 김종복 / 푸른역사 / 2016.11.15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해 군사 동맹을 결성한 중부 지역과 정반대로, 남부 지역에서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분할하며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 갔던 것이다. 그렇지만 가야의 여러 나라는 백제와 신라의 분할 점령을 저지할 만한 충분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가령 백제의 군사적 위협에 시달리던 탁순국은 538년 신라에 투항하는 길을 선택했다. 또한 나머지 가야의 나라들은 541년과 544년 백제에 의탁해 신라의 진격을 막으려 시도했지만, 오히려 백제의 부용국으로 전락했다. 결국 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연맹체 단계에 머물렀던 가야는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삼국의 치열한 각축전 속에서 소멸의 위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553년 신라는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백제가 탈환한 한강 하류 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차지하고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격분한 백제의 성왕은 대가야와 연합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이듬해에 관산성管山城(충북 옥천)에서 신라와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도리어 성왕이 전사하고 3만 명에 달하는 군사가 전몰하는 치명적 패배를 당했다. 이로써 나제 동맹은 완전히 깨졌고, 이후 백제와 신라 사이에 백제 왕실의 원한을 풀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지속되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한강 유역 상실 등 대외적 위기 속에서 왕권을 안정시키고 귀족 연립 정권을 수립하면서 혼란한 정국을 수습해 갔다. 이어 고구려는 다시 세력권의 재건을 꾀하면서 한강 유역을 탈환하기 위해 신라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삼국사기』「온달전」에 잘 나타나 있다. 온달은 영양왕嬰陽王대(590~618)에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출전했다가 전사했는데, 비록 설화적 성격이 강하지만 이러한 온달의 행적에서 당시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한 고구려의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644년(보장왕 3)에 신라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로 강화를 맺으러 갔을 당시 “마목현麻木峴(조령)과 죽령은 본래 우리의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신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보장왕寶臧王의 말에서도 한강 유역에 대한 고구려의 집착을 엿볼 수 있다.

 

신라 역시 고구려의 공세를 물리치면서 한강 유역을 안정적 영역으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555년에는 진흥왕이 직접 북한산군에 순행을 가서 <북한산 순수비>를 세우고 한강 유역을 신라의 영역으로 확고히 하려는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557년에는 최전선인 한강 하류 지역에 북한산주를 설치했고, 한강 유역 진출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국원성(충주)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그리고 아차산성, 이성산성, 행주산성, 호암산성 등 한강 유역의 중요한 거점에 산성을 쌓고 방어망을 구축했다. 또한 남양만에는 당항성을 쌓아 이를 거점으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했다.

신라는 성곽만 축조한 것이 아니라 주민을 이주시켜 본격적인 영역화 작업에 나섰다. 신라는 국원성을 차지한 후, 왕경인을 이주시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력히 추진했다. 충주의 루암리 신라 고분군은 그러한 주민의 이주를 잘 보여 주는 유적이다. 또한 서울 가락동, 방이동 일대에 남아있는 석실분은 6세기 중엽 이후에 축조된 신라계 고분으로, 신라계 주민들이 이주한 결과이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나타난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신라가 황해를 횡단하는 중국 교통로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신라는 중국 남조 진陳이나 수隋, 당唐과의 직접적인 교섭을 활발하게 추진해 동아시아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장차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변동시키는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  장창은 / 학술논문 : 진단학보 제111호 / 2011.04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 하류 유역은 553년 7월에 신라에게 귀속되었지만 이에 대한 백제의 대응은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다. 551년 후반~552년 전반에 고구려와 신라 간에 맺어진 “麗·羅密約“이 백제로 하여금 고구려의 군사개입을 우려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聖王(523~554)은 신라에 반격을 가할 시간을 벌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나제동맹을 유지하면서 은밀하게 倭에 사신을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小妃로 보내는 위장전술을 사용해 신라의 경계심을 느슨하게 하면서 관산성 전투를 준비하였다. 554년 5월에 이르러 倭로부터 군사 1천 명 등을 지원받은 백제는 가야군까지 규합하여 554년 7월에 신라로 쳐들어갔다. 전투는 餘昌이 총책임을 맡아 주도하였다. 백제는 먼저 사비에서 관산성으로 나아가는 요충지에 있었던 珍城[금산군 진산]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백제의 승세는 관산성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12월 9일에 관산성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성왕이 여창을 위로하고자 군사 50명만을 거느리고 관산성으로 나아갔다. 이 무렵 신라는 관산성 전투의 패전을 만회하고자 新州 軍主 金武力을 필두로 전군을 동원하였다. 신라는 성왕이 관산성으로 온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여 관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였다. 성왕은 결국 신라의 복병에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성왕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인해 관산성 전투의 전세는 급속히 신라에게 기울어 갔다. 마침내 신라는 관산성을 포위하였고, 여창은 이에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와 퇴각하였다. 결국 관산성 전투는 성왕과 좌평 4명을 잃고 백제군 3만 여 명이 전사하는 백제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麗羅戰爭史의 再檢討

–  박경철 / 한국사학보 제26호 / 2007.02

 

나제동맹의 파탄은 5세기 중반 한강 유역 지배권을 신라가 독점함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여라통호론(麗羅通好論)이 당시 삼국이 처한 상황을 감안하여 매우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논자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나지만, 이 논의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담보물 삼아 신라와 제휴함으로써 나제동맹을 결렬시켰다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시기 고구려가 처한 객관적 상황의 절박성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견해가 아닐 수 없다. 당시 고구려 승려인 혜량법사의 “今 我國政亂 滅亡無日”라는 시국 인식은 이를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는 셈이다.

한편 이 문제와 관련, 고구려와 당과의 전운이 감도는 시점인 642년에도 도움을 청하는 신라에 대해 “竹嶺西北之地”의 반환을 강변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고구려가 자기 영토를 매개로 신라와 외교적 뒷거래를 하였다는 인식에 대한 보다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그러나 필자는 사료상 고구려-신라 밀약 내지 고구려-신라 연합의 가능성이 명시적으로 간취될 수 있음이 인정된다면, 한강 유역을 둘러싼 관련국들 사이의 일시적이며 한정적인 담합과 제휴는 충분히 상정될 수 있다고 본다.

551년 나제동맹의 파괴력을 절감한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 방면에서 가해오는 신라=백제의 군사적 압력을 완화시킬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는 백제의 한성기의 구영역 수복이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을 두려워하였다. 또한 신라는 가야 문제 등 나제 간의 현안을 감안할 때 나제동맹의 실효성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신라는 한강 하류 지역을 영유함을 통하여 독자적 대중교통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신라 측 복안의 실현을 담보할 제휴 상대는 고구려 밖에 없었다. 이러한 고구려-신라 간의 전술적 제휴는 551년 9월에서 552년 5월 사이에 맺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麗羅通好’의 효과는 553년 여나의 공동 출병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고구려는 평양 지역을, 신라는 한성 지역을 점유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백제의 반격은 553년 10월 고구려와의 ‘百合野 전투’로 시작된다. 이에 대해 고구려는 554년 겨울 웅천성(熊川城) 공위전(攻圍戰)으로 응수하게 된다. 한편 나제 간의 대결은 553년  12월 函山城戰과 잇따른 554년 7~9월의 久陀牟羅~관산성(管山城) 전투로 치닫게 된다.

 


552년 백제의 한강유역 포기[棄]와 신라ㆍ고구려의 밀약설(密約說)

–  강민식 / 학술논문 : 선사와 고대 2014 40호 / 한국고대학회 2014년

 

백제 성왕은 고구려의 공세를 막아내고, 가야세력의 이탈을 막아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안고있었다. 이러한위기를극복하기위해성왕은공동의적을 구체화하여신라혹은가야와왜세력을끌어들여연합전선을형성해나갔던것이다. 이탈과배반을 막고전쟁을통해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성왕은 541년 신라와의 동맹 이후 가야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대가야를 영향력 아래에 둘 수 있었고, 신라와 함께 고구려에 대한 적극적인공세에 나서게 되었다. 그것은 고구려내부에 사정을 적극 활용한 것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신라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러한 백제의 한계를 간파한 신라는 백제에게 참전에 따른대가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백제는 550~551년 전역(戰役)의 결과로 얻은 상당 부분의 영토를 할양하게 된 것이다. 한편 544년 이래 성왕이 끊임없이 고구려와 신라의 공모를 언급한 것은 가야와 왜 세력을영향권 아래 두려는 시도였다. 실제 551년까지 대고구려전에신라가 포함된 연합군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이후 관산성 전투에도 가야와 왜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강유역회복 후 백제가 한성 평양지역을 포기하고 왕녀를 시집보낸 일 등이 단순히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에 따른 후퇴라기보다는 동맹의 실체였던 것이다. 결국 관산성 전투는 주변 정세에 따라 신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공략하고 가야지역에대한 우위를 차지한 후 신라에 대해 공세로 전환한 사건이었다. 그동안의 외교활동을 통해대가야와 왜 연합군을 이루어 마침내 신라에 대한 총공세를 단행한 것이다.

 


고대로부터의 통신

–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 푸른역사 / 2004.01.05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에 대한 대반격에 나선 것은 6세기 중반이었다. 군사 동맹을 맺은 두 나라는 551년 동시에 고구려 공격을 감행하였다. 백제는 한강 하류 방면으로, 신라는 죽령을 넘어 철령 방면으로 진군한 것이다. 고구려는 어느 한쪽도 막아내지 못하고 백제와 신라에게 한강 하류 지역과 철령 이남의 땅을 모두 빼앗겼다. 공포의 대상이던 절대무적 고구려가 쇠퇴의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뚜렷이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한편 이때 고구려한테서 철령 이남 땅을 탈취한 신라의 진흥왕은 554년에는 동맹국 백제로 진격하여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전사시키고, 557년에는 백제한테서 한강 하류 지역마저 빼앗았다. 또한 ‘남천주’ 지역에 있던 군사기지를 한강 하류의 ‘북한산주’ 지역으로 전진 배치하고 군주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산주’ 지역의 군사기지는 이미 556년 동해안 방면에서 ‘비열홀주’ 지역까지 진출하여 이곳에 전진 배치한 군사기지와 함께 고구려를 위협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신라의 추가 군사 진출을 저지하고자 하였지만, 나라 안팎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 북진하는 신라를 막을 길이 막막하였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신라 역시 그에 못지않은 부담을 안고 있었다. 성왕이 전사하고 한강 하류 지역마저 빼앗긴 백제가 즉각 보복전에 나섰고, 적대국이던 고구려와 제휴도 불사할 기세였기 때문이다. 국경을 맞닿게 된 신라와 고구려는 일단 현상 유지와 안정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공동의 필요성에서 고구려는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탈취해간 영토를 모두 공인해주고, 신라는 고구려를 향해 배치한 최전방 군사기지를 후방으로 옮김으로써 더 진군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즉, 568년(진흥왕 29) 진흥왕이 직접 두 방면에 있는 세 지역을 순수하여 순수비 세 개(북한산비, 마운령비, 황초령비)를 건립한 것은 고구려의 공인 하에 그 이남의 땅이 신라 영토임을 내외에 선언한 의식이었고, 군사기지를 ‘북한산주’ 지역에서 ‘남천주’ 지역으로, 그리고 ‘비열홀주’ 지역에서 ‘달홀주’ 지역으로 후퇴시킨 것은 고구려를 추가 공격하지 않겠다는 반대급부 성격을 띤 의사 표시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북한산비> · <마운령비> · <황초령비>는 진흥왕이 정복한 땅을 고구려한테 공인받은 일종의 ‘영토 보증서’라 할 만 하다. <마운령비>와 <황초령비>에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널리 백성과 토지를 획득하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해를 요청하는 사신이 서로 통하여 오도다”라고 기록한 구절은 신라와 고구려가 일종의 ‘상호불가침 협약’을 체결하였음을 시사한다.

 


이야기 한국고대사

–  조법종 / 청아출판사 / 2007.01.25

 

관산성 전투 이후 신라는 가야 지방에까지 손을 뻗쳤다. 즉 진흥왕 16년(555)에 비사벌(창녕)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였으며, 아라가야 또한 신라에 투항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진흥왕은 북한산을 순수하여 북방에 대한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17년(556)에는 비열홀주(안변)를 설치하여 동북방면에 대한 수비를 강화하였다. 또 진흥왕 18년(557)에 신주(新州)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두었으며, 29년(568)에는 북한산주를 폐하고 다시 남천주(이천)를 두었다가, 진평왕 26년(604)에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당시 주(州)라는 용어는 예하의 여러 군(郡)을 포괄하는 영역으로, 실질적으로는 오늘날의 1개 군 정도를 가리킨다. 상주 · 하주 · 신주 등의 주는 군사적 관할 구역 성격의 광역을, 사벌주 · 비자벌주 · 한성주는 군주의 행정 · 통치 중심지인 협의의 주를 의미한다. 군에 파견된 지방관이 당주이며, 당주는 군주와 마찬가지로 지방관이면서 동시에 군관이었다. 이처럼 자주 주를 설치했다가 폐지한 것은 신라가 그만큼 해당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거듭 고심했음을 뜻한다.

 


한국 미의 재발견 – 고분미술

–  이영훈,신광섭 / 솔출판사 / 2005.01.10

 

당시 국제 정세를 살펴보면, 우선 고구려는 귀족사회의 내분으로 힘이 약화되고 서북부 국경에서 돌궐(突厥) 등의 압박으로 힘이 분산되어 있었다. 서기 551년,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신라와 가야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취하는 데 성공한다. 이어 신라를 무너뜨릴 의도로 552년 백제, 대가야(고령), 안라국(함안) 등의 명의로 왜에 사신을 보내 대규모 병력을 요청하였다.

553년, 신라는 백제의 계략이 실효를 거두기도 전에 한강 유역을 기습적으로 빼앗는 데 성공하고, 다급해진 백제는 속히 왜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554년 왜의 원군이 도착하였다. 이리하여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은 554년 7월에 관산성(옥천)에서 신라와 운명을 건 일전을 벌였다.

 

연합군의 수는 2만 6백 명이었으며 이 전투는 한강 하류와 가야에 대한 지배권을 다투는 일전이었다. 그러나 관산성에서 신라가 승리함으로써 가야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백제는 가야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어 신라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된다.

곧이어 신라는 555년 비사벌(창녕)에 주(州)를 설치하여 백제와 가야의 연합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성왕의 죽음 이후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었으며, 가야 또한 비슷한 상황에 처했으리라 생각된다. 신라는 점령 지역에 주를 설치해가며 안정적인 지배권을 구축하였다. 한편 함안의 안라국은 급속한 신라세력의 확대에 대하여 외교적 수단으로 존속을 꾀하였다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안정시킨 6세기 중반 이후, 안라국은 별다른 저항 없이 신라에게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

–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 역사비평사 / 2009.09.24

 

앞에서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여러 학설들을 설명했는데, 대부분의 학설들은 임나, 즉 경남 일대의 가야 지역이 상당히 오랫동안 다른 세력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 기마민족 정복왕조설 및 위왜 자치집단설 등은 가야 지역이 오랫동안 왜의 지배를 받았거나 그 영향 아래 있었다고 말하며, 백제군 사령부설은 가야 지역이 오랫동안 백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최근의 연구동향 중에도 가야의 비독립성을 전제로 한 설명들이 있다.

과연 가야 지역은 그처럼 남의 지배만 받다가 신라에 의해 멸망당했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이제 임나일본부설의 여러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의 하나로 가야사의 재정립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  박영규 / 웅진닷컴 / 2004.11.18

 

신라의 강성으로 삼국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무렵 또 하나의 세력이 고구려의 서북쪽 변방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북위의 멸망 이후 꾸준히 성장하고 있던 돌궐이 어느덧 거란을 뒤로하고 고구려의 국경을 위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551년 가을에 그들은 고구려 국경을 넘어 침입해 왔으며, 9월에는 평양성 북쪽의 신성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신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략하였다. 이에 양원왕은 장군 고흘에게 군사 1만을 내주어 그들과 대적하게 하였고, 고흘은 뛰어난 용병술로 군대를 인솔하며 돌궐군 1천을 죽이고 승리하였다.

그런데 신라가 이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한반도 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신라의 진흥왕은 거칠부를 수장으로 내세워 고구려 공략에 나섰고, 돌궐군과의 싸움으로 전력이 대폭 약화된 고구려군은 신라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10개의 성을 빼앗겼다. 이로써 고구려의 한반도 쪽 영토는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함경북도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이처럼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양원왕은 만일의 사태를 위해 더 안전한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여 552년에 장안성을 축성한다. 이 무렵 신라는 백제와 싸움을 벌여 신주를 차지하고 더욱 세력을 확대한다. 이에 백제의 성왕은 진흥왕에게 화친을 제의하고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후비로 시집보내 양군간에 결혼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이전 같지 않았다. 이미 신라가 백제와의 동맹을 파기했기 때문에 양국의 결혼동맹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백제의 성왕은 왜에 왕자 창을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고, 고구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백제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때에 북제의 공격을 받은 거란 백성 1만여 호가 귀순하는 바람에 백제공격계획을 미뤄야만 했다. 그 무렵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급기야 554년 7월에 백제의 성왕이 야음을 틈타 신라를 공격하려다가 되레 복병에게 살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계획을 수립하고 554년 10월에 백제의 요충지인 웅천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위덕왕(왕자 창)이 이끄는 백제군에 밀려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양원왕은 더 이상 백제 공략에 나서지 못했다.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병사들은 지쳐 있었고, 거듭된 패배로 사기는 완전히 땅에 떨어져 있었는데, 중국의 정세마저 심상치 않은 상황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관련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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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신라 사이에 벌어진 관산성(管山城)전투는 두 나라 미래의 명운을 결정짓는 한판의 승부였다. 이 전투의 중요성을 보면 작지가 않은데, 백제는 중흥의 기틀을 빼앗기고 신라는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그런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이를 전문적으로 다룬 논문이 적지 않게 나왔음은 그를 방증한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聖王)이 사망한 후 그 설욕을 위해 부심했다. 6세기 중엽까지 성왕을 추모하면서 군사력을 재정비하고, 567년부터 대외적인 외교ㆍ군사 활동을 다시 벌이기 시작했다. 북조(北朝)와 교섭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면서 신라의 상주(上州) 지역을 공격했다.

무왕(武王)이 즉위하면서 신라에 대한 공세를 본격화 한다. 하주(下州)와 신주(新州)를 번갈아 공략하여 신라와의 전선을 확대했고, 624년에는 드디어 소백산맥을 돌파하여 그 동쪽으로 진격했다. 무왕 말년부터는 하주(下州)에 공격을 집중하여, 신라의 방어선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642년에 대야성(大耶城)을 점령했다.

대야성이 있는 합천 지역은 하주의 치소가 설치되어 대가야의 故地를 다스리던 정치ㆍ군사적 요충지였다. 백제군은 김춘추 사위인 성주(城主) 김품석(金品釋)과 그 부인을 처단하여 관산성 패전의 치욕을 철저히 씻었다. 신라로서는 대야성의 함락으로 경주까지 위험에 처했으며, 이를 수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외교 활동을 벌이고 군사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백제의 방어는 견고했으며, 백제 멸망 후인 661년에야 대야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대야성 전투의 결과, 일시적으로 백제가 신라를 압도했지만, 이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신라가 대야성 전투의 패배로 몰리게 된 위기상황을 타개하는 과정에서 군권(軍權)을 장악한 김유신과 외교권을 장악한 김춘추가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이후 양자가 연합해 새로운 중대(中代) 왕실의 핵심세력을 형성했으며, 바로 이들의 주도 하에 삼국통일(三國統一)이 성취된 것이다.

 

관산성전투의 결과 패전의 당사자는 백제뿐만 아니라 백제편을 들었던 대가야(大加耶)도 마찬가지였다. 대가야는 관산성전투 당시 약 1만명의 병력을 참가시켰었는데  백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을 병력을 잃게 되었다. 그 충격이 너무도 엄청나서 백제와는 달리 가야는 회복을 못하고 8년뒤 신라의 보복 공격을 받고 망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왜왕 ‘흠명천황(킨메이 천황)’이 절규하던 내용이 일본서기에 적나라하게 전하고 있다.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와 더불어 가야와 함게 동맹을 형성하고 약 1천여명의 병력을 파병했던 고대일본 ‘왜’였다.  이런 ‘왜’이다 보니 신라에 대한 감정이 좋을리가 없었다. 대가야 멸망 소식을 들은 ‘킨메이(欽明)천황’은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한마디로 뼈에 사무친 원한의 절규 그 자체이다.

 

 

신라는 6세기 중반 이전에 소백산맥 서쪽 지역에 쌓은 산성을 중심으로 서북지역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는데, 그것의 중심은 삼년산성(보은군 보은읍)에서 사벌지역(상주시)에 이르는 루트와 관산성(옥천군 옥천읍)에서 감문지역(김천시 개령면)에 이르는 루트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었다.

근래 학계의 대세는 관산성이 삼성산이며 성왕이 사망한 구천(拘川)은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군전마을을 싸고 도는 협곡을 가리킨다는 설이 세를 얻어가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또 삼성산의 위치는 어디를 말하는가. <동국여지승람>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옥천군 산천 조에는 “삼성산 재군서오리 유고성유지(三城山 在郡西五里 有古城遺址)”라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삼성산은 옥천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속칭 재건산이 될 것이다. 삼성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해발 303m).

 

554년의 관산성 전투와 관련한 기록 가운데 풀리지 않은 채 궁금증은 싸움이 마무리될 즈음에 일어난 백제 성왕(聖王)의 마지막 처형 장면이다. 거기에는 사로잡은 성왕의 목을 치려는 신라의 전사(戰士)가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성왕(聖王)과 나누는 대화 속에 신라의 국법(國法)을 운위(云謂)하고 있다. 이제 전사(戰士)는 성왕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로서 신라의 국법을 어겼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전사가 포로로 잡은 백제 성왕의 목을 베려 하면서 굳이 신라의 국법을 어겼다는 이유를 명분으로 내세우는가, 이것은 지금까지 풀지 못하고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대상이다.

 

※ 백제 왕 계보는 여기를 참조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44&contents_id=6980

 

※ 관산성 전투 전후의 관련된 연표를 다음과 같이 작성해 보았다:

552년 5월 : 백제, 왜에 원병을 요청하며 고구려와 신라의 화친을 언급함

552년 후반 : 백제, 한성과 평양 포기 -> 신라가 한성을 차지

553년 7월 : 신라, 신주(新州, 경기도 광주)) 설치

553년 10월 : 백제-고구려 백합야 전투 / 백제 성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감

554년 5월 : 왜, 백제에 파병

554년 7월 : 백제-신라의 관산성 전투 시작, 초반 신라의 고전

554년 9월 : 백제, 신라의 진성(珍城, 충남 금산?) 공격

554년 겨울 : 고구려, 백제 웅천 공격

554년 12월 : 관산성 전투, 성왕 사망, 백제 · 대가야 · 왜 연합군 신라에 궤멸

555년 2월 : 백제, 성왕의 사망을 천황에게 보고

 

그리고 당시의 대외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혼란과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왜의 충돌은 무관하지 않다.

– 534년 북위의 분열

– 548년 남조의 양, 후경의 반란

– 550년 북제의 성립

– 551년 남조의 양, 후경이 황제에 오르지만 552년에 전투 중 사망

– 551년 돌궐의 독립

– 556년 북주의 성립

* yellow의 세계사 연대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550

 

※ 관련글

– 백제 성왕, 한강 유역 재점령 – 551년 : http://yellow.kr/blog/?p=2395

–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다 – 553년 : http://yellow.kr/blog/?p=2400

 

 

그 당시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 보았다. 아래에 언급한 『일본서기』는 720년에 완성되었으며 <동북아 역사재단>의 번역본을 참조하였고, 삼국사기는 1145년에 완성되었으며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를 참조하였다.

 


554년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진흥왕

15년(서기 554) 가을 7월, 명활성(明活城)1을 보수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明穠, 성왕)이 가량(加良)2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3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4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9천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穠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飡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 명활성(1) :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알 수 있다.

– 가량(2) : 가야(伽倻)의 다른 이름.

– 김무력(3) : 김유신(金庾信)의 조부이고 금관가야(金官伽倻)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셋째 아들로 532년(법흥왕 19)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자 부왕과 왕모 및 형 김노종(金奴宗), 김무덕(金武德) 등과 함께 신라에 투항하였다. 553년(진흥왕 14) 진흥왕이 백제와 연합으로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이어 백제의 영토까지 점령하여 한성(漢城)을 중심으로 신주(新州)를 설치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아찬(阿湌)의 관등으로 신라의 경기도 지역을 통치하는 신주(新州: 廣州)의 책임자인 군주(軍主)가 되었다.

– 삼년산군(4) : 신라의 상주(尙州) 삼년군(三年郡)이다. 현재 충북 보은군 보은읍 대야리(大也里)와 어암리(漁岩里) 사이에 있다.

 

※ 삼국사기 제19권 고구려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十九 高句麗本紀 第七) – 양원왕

10년(서기 554) 겨울, 백제의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12월 그믐날, 일식이 있었다. 물이 얼지 않았다.

十年 冬 攻百濟熊川城 不克 十二月晦 日有食之 無氷

 

※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 성왕

32년(서기 554) 가을 7월, 임금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혼전 중에 임금이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 일본서기 권 제19 – 흠명천황(킨메이 천황)

15년 봄 정월 무자삭 갑오(7일)에 황자 정중창태주부존(渟中倉太珠敷尊 ; 누나쿠라노후토타마시키노미코토)을 황태자로 삼았다.

 

병신(9일)에 백제가 중부 목리 시덕 문차(木刕施德文次)1와 전부 시덕 왈좌 분옥(施德曰佐分屋)2 등을 축자(筑紫 ; 츠쿠시)에 보내 내신(內臣)3과 좌백련(佐伯連 ; 사에키노무라지) 등에게 “덕술 차주와 간솔 색돈 등이 지난해 윤달 4일에 와서 ‘신(臣) 등[신 등은 내신을 말한다.]은 내년 정월에 도착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말은 하였지만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또한 군대의 수는 얼마입니까. 대강이나마 듣고 미리 군영의 성벽을 쌓고자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별도로 “이제 듣자니 황공하신 천황의 조서를 받들어 축자에 가서 보내 줄 군대를 환송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올해의 싸움은 전에 없이 매우 위태로우니 보내주실 군사를 정월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내신이 명령을 받들어 “바로 구원군 1천, 말 1백 필, 배 40척을 보내도록 하겠다.”라고 대답하였다.

 

2월에 백제가 하부 간솔 장군 삼귀(杆率將軍三貴)와 상부 나솔 물부오(奈率物部烏)4 등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덕솔(德率) 동성자막고(東城子莫古)를 바치면서 이전의 번(番)인 나솔(奈率) 동성자언(東城子言)과 교대시키고, 오경박사 왕류귀(王柳貴)를 고덕(固德) 마정안(馬丁安)과 교대하도록 하였다. 승려 담혜(曇慧) 등 9인은 승려 도침(道深) 등 7인과 교대시켰다. 그리고 따로 칙을 받들어 역박사(易博士) 시덕(施德) 왕도량(王道良), 역박사(曆博士) 고덕(固德) 왕보손(王保孫), 의박사(醫博士) 나솔(奈率) 왕유릉타(王有㥄陀), 채약사(採藥師) 시덕(施德) 반량풍(潘量豊), 고덕(固德) 정유타(丁有陀), 악인(樂人) 시덕(施德) 삼근(三斤), 계덕(季德) 기마차(己麻次), 계덕 진노(進奴), 대덕(對德) 진타(進陀)를 바쳤다. 모두 요청에 따라 교대시켰다.

 

3월 정해삭(1일)에 백제의 사신 중부 목리 시덕 문차(木刕施德文次) 등이 돌아갔다.

 

여름 5월 병술삭 무자(3일)에 내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로 갔다.

 

겨울 12월에 백제가 하부 간솔(杆率) 문사간노(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 신(臣) 명(明)과 안라의 여러 왜신들, 임나의 여러 나라의 한기들이 아룁니다. 사라(斯羅)5가 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박(狛)6과 마음을 같이하여 바다 북쪽의 미이거(彌爾居)7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유지신(有至臣 ; 우치노오미)8 등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여 신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천황이 보낸 유지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도착하였습니다. 신들이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12월 9일에 신라를 공격하도록 보냈습니다. 신이 먼저 동방령(東方領) 물부막가무련(物部莫哥武連 ; 모모노베노마카루노무라지야)을 보내 그 방(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函山城)을 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유지신이 거느리고 온 죽사물부막기위사기(竹斯物部莫奇委沙奇)는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위령(威靈)으로 이 달 9일 유시(酉時)에 성을 빼앗아 불태워버렸습니다. 단촐한 사신을 배로 급히 파견하여 아룁니다.”라고 말하였다. 별도로 “만약 신라 뿐이라면 유지신이 데리고 온 군사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박(狛)과 신라가 함께 힘을 합하였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죽사도(竹斯島 ; 츠쿠시노시마)9 근처에 있는 여러 군사들을 보내 신의 나라를 도와주시기를 엎드려 청합니다. 또한 임나를 도울 수 있다면 일은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주상하였다. 그리고 “신이 따로 군사 만 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은 정말 급해서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는 것입니다. 좋은 비단[錦] 2필, 탑등() 1령, 도끼 3백 구, 사로잡은 성의 백성 남자 2명과 여자 5명을 바칩니다. 변변치 않아서 죄송할 따름입니다.”라고 주상하였다.

 

여창이 신라를 정벌할 것을 모의하니 기로(耆老)10가 하늘이 아직 우리와 함께하고 있지 않습니다.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언하였다. 여창이 “늙었구려, 무엇을 겁내는가. 우리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는데 어찌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11에 성책을 쌓았다. 그 아버지 명왕은 여창이 계속된 전쟁에 오랫동안 쉬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고생하는 것을 걱정하였다.어버이의 자애로움도 펼치지 못하고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도 효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몸소 가서 그 노고를 위로하고자 하였다. 신라는 몀왕이 친히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징발하여 길을 차단하고 격파하였다. 또한 이때 신라에서는 좌지촌(佐知村)의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12[다른 이름은 곡지(谷智)이다.]에게 “고도는 천한 놈”이다. 명왕은 유명한 군주이다. 이제 비천한 노비에게 유명한 군주를 죽이게 하자.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명왕은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건네줄 수 없다.”고 말하였다. 고도는 “우리나라 법에는 맹약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할지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말하였다[어떤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에 허리를 기대고 앉아 곡지(谷智)에게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주며 베도록 하였다.”고 한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까지 사무쳤다. 돌이켜 헤아려 보아도 구차하게 살 수는 없다.”고 하면서 머리를 내밀어 베도록 하였다. 고도는 목을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서 묻었다[어떤 책에는 “신라는 명왕의 두골을 남겨 매장하고 나머지 뼈는 예를 갖춰 백제에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다. 이름하여 그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한다.”고 한다.]. 여창은 마침내 포위당하여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사졸들은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축자국조(筑紫國造 ;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13라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 활시위를 당겨 신라의 기병 중 가장 용감한 자를 쏘아 떨어뜨렸다. 쏜 화살은 예리하여 말안장 앞의 전륜(前輪)과 후륜(後輪)을 관통하여 갑옷의 옷깃까지 다다랐다. 계속해서 쏜 화살은 비 오듯이 줄기차게 이어져 포위한 군대를 퇴각시켰다. 여창과 여러 장수들은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갈 수 있었다. 여창은 국조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며 안교군(鞍橋君 ; 쿠라지노키미)이라 높여 불렀다[안교는 여기서는 구라니(矩羅膩 ; 쿠라지)라고 한다.]. 이때 신라 장수들은 백제가 피로하고 지쳤음을 알고 드디어 전멸시키고자 하였다. 그러자 한 장수가 “안 된다. 일본 천황이 임나 문제 때문에 여러 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 관가를 멸망시킨다면 반드시 후환이 따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만 중지하였다.

– 시덕문차(1) : 중부 목리 시덕 문차(木刕施德文次), 목리는 백제의 복성이고 문차가 이름이다. 『일본서기』 흠명천황 15년(543) 3월에 귀국한다. 『일본서기』에서는 ‘부+성+관등+이름’의 표기와 ‘부+관등+성+이름’의 두 계열의 백제인명 표기를 확인할 수 있다.

 

– 전부 시덕 왈좌 분옥(前部施德曰佐分屋) (2) : 왈좌를 백제의 성으로 보고 前部施德曰佐分屋을 백제인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으나, 왈좌씨는 도래계 씨족으로서 왜국에도 있었으므로 그는 왜계 백제관료였을 가능성이 높다.

– 내신(3) : 『일본서기』에서는주로 왕의 측근으로 집정관적인 성격을 가진 자에게 붙는 직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 나솔물부오(4) : 물부씨계 왜계 백제관료로 이름은 烏이다.

– 5 : 사라(斯羅)란 신라의 비칭이다. 『양직공도』백제국사조에서는 백제사신이 양(梁)나라에 가서 백제 주변에 있는 작은 나라들을 열거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기록에서도 신라를 斯羅라 칭하고 있다.

– 6 : 박(狛)은 고구려를 뜻한다.

– 7 : 미이거(彌爾居)는 관가(官家, 궁궐)를 뜻한다.

– 8 : 내신(內臣)과 동일인물

– 9 : 현재 일본 규슈(九州)를 가리킨다.

– 10 : 기로(耆老)는 당시 백제 조정의 원로 대신들을 가리킨다.

– 11 : 구타모라(久陀牟羅)는 현재 충북 옥천군 군서면의 한 촌으로 추정된다. 牟羅는 村의 의미이다.

– 12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군 裨將인 삼년산군의 고간도도(高干都刀)의 습격으로 백제성왕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苦都는 都刀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高干은 신라 외위 11등 가운데 제3등에 해당하는 高干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에 천민인 사마노(飼馬奴)와 신분상 큰 차이를 보인다.

 

– 13 : 축자국조(筑紫國造)는『일본서기』 흠명천황 15년 5월조에 內臣이 이끌고 온 수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 진흥왕

문무왕 8년 (668년)

제24대 진흥왕은 왕위에 올랐을 당시 나이가 15세였으므로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태후는 곧 법흥왕(法興王)의 딸이자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왕비였다. 왕은 임종할 때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 돌아가셨다.

 

승성(承聖) 3년(서기 554) 9월에 백제의 병사가 진성(珍城)1에 쳐들어와서 남녀 3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 이에 앞서 백제는 신라와 군사를 합쳐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지만, 진흥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랄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였다.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서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서 이렇게 침범한 것이다.

 

第二十四 眞興王卽位 時年十五歲 太后攝政 太后乃法興王之女子 立宗葛文王之妃 終時削髮 被法衣而逝
承聖三年九月 百濟兵來侵於珍城 掠取人男女三萬九千 馬八千匹而去 先是 百濟欲與新羅合兵 謀伐高麗 眞興曰 國之興亡在天 若天未厭高麗 則我何敢望焉 乃以此言通高麗 高麗感其言 與羅通好 而百濟怨之 故來爾

진성(1) : 충남 금산?

 

※ 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三國史記 卷第四十三 列傳 第三) – 김유신

문무왕 8년 (668년)

문무대왕이 영공과 함께 평양(平壤)을 격파한 다음 남한주(南漢州)에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옛날 백제의 명농왕(明穠王, 백제 성왕)이 고리산(古利山)1에서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했을 때 유신의 조부 각간 무력(武力)이 장수가 되어 그들을 맞받아쳐 이겼으며, 승세를 타고 그 왕과 재상 네 명과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세력을 꺾었다. 또한 유신의 부친 서현(舒玄)은 양주(良州) 총관이 되어 여러 차례 백제와 싸워서 예봉을 꺾음으로써 그들이 우리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변경의 백성들은 편안히 농사와 양잠에 종사하였고, 임금과 신하는 나라에 돌보는 데1) 근심이 없게 되었다. 지금은 유신이 조부와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여 나라의 안위를 맡은 중신이 되었다. 그는 나가서는 장수의 일을 하였고, 들어오면 정승의 일을 하였으니 그 공적이 매우 크다. 만일 공의 가문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직위와 상을 어떻게 하여야 옳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말했다.
“저희들의 생각이 참으로 대왕의 뜻과 같습니다.”

 

이에 유신에게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직위를 제수하고, 식읍을 5백 호로 하였다. 또한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대전에 오를 때도 추창(趨蹌, 예법에 맞게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걷는 것)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를 보좌하는 이들에게도 각각 직위를 한 급씩 올려 주었다.

 

文武大王旣與英公 破平壤 還到南漢州 謂群臣曰 昔者 百濟明穠王在古利山 謀侵我國 庾信之祖武力角干 爲將逆擊之 乘勝俘其王及宰相四人與士卒 以折其衝 又其父舒玄 爲良州摠管 屢與百濟戰 挫其銳 使不得犯境 故邊民安農桑之業 君臣無宵旰之憂 今 庾信承祖考之業 爲社稷之臣 出將入相 功績茂焉 若不倚賴公之一門 國之興亡 未可知也 其於職賞 宜如何也 群臣曰 誠如王旨 於是 授太大舒發翰之職 食邑五百戶 仍賜輿杖 上殿不趨 其諸寮佐 各賜位一級

1 : 고리산은 환산(環山)이므로 『일본서기』의 함산성(函山城)이 있던 곳과 같을 듯

 


한국 고대사 1

–  송호정, 여호규, 임기환, 김창석, 김종복 / 푸른역사 / 2016.11.15

 

신라는 관산성 전투(554) 이후 가야 지역으로의 진출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미 법흥왕 때 금관가야를 복속시켰지만, 오히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대가야를 맹주로 하여 백제의 세력권으로 들어가 독자적인 생존 방식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비화가야, 아라가야들을 차례로 굴복시키면서 대가야를 압박했다. 559년 진흥왕은 사방 군주를 창녕 지역으로 불러 모아 한차례 무력시위를 하고, 이듬해에 결국 가야 연맹의 본거지인 대가야를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이로써 신라는 가야 연맹 지역을 완전히 차지하면서 세력을 확장했고, 반대로 백제는 한강 하류 지역을 상실한 데다가, 그동안 주도권을 행사해왔던 가야 지역마저 신라에 빼앗기게 되는 열세를 면치 못했다.

 

관산성 전투의 패배 이후 이 전쟁을 주도했던 백제 왕권은 패전으로 인해 상당히 위축되었으며 대성팔족大姓八族으로 대표되는 유력 가문의 귀족들이 정국 운영을 주도했다. 그러다가 무왕武王대(600~641)에 이르러 다시 왕권의 위상을 회복하여 국왕 중심의 정치 체제를 운영하게 되었다. 웅진 천도(475) 이후 등장한 대성팔족 세력은 좌평佐平이라는 최고위 관직을 독점하면서 정국을 주도했는데, 무왕은 제2위의 관등인 달솔達率을 널리 등용하여 이들을 견제했다. 이러한 무왕대의 왕권 강화는 왕실이 주도해 대규모 사찰인 익산 미륵사를 조영하고 이 일대를 부도副都로 운영한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麗羅戰爭史의 再檢討

–  박경철 / 한국사학보 제26호 / 2007.02

 

나제동맹의 파탄은 5세기 중반 한강 유역 지배권을 신라가 독점함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여라통호론(麗羅通好論)이 당시 삼국이 처한 상황을 감안하여 매우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논자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나지만, 이 논의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담보물 삼아 신라와 제휴함으로써 나제동맹을 결렬시켰다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시기 고구려가 처한 객관적 상황의 절박성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견해가 아닐 수 없다. 당시 고구려 승려인 혜량법사의 “今 我國政亂 滅亡無日”라는 시국 인식은 이를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는 셈이다.

한편 이 문제와 관련, 고구려와 당과의 전운이 감도는 시점인 642년에도 도움을 청하는 신라에 대해 “竹嶺西北之地”의 반환을 강변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고구려가 자기 영토를 매개로 신라와 외교적 뒷거래를 하였다는 인식에 대한 보다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그러나 필자는 사료상 고구려-신라 밀약 내지 고구려-신라 연합의 가능성이 명시적으로 간취될 수 있음이 인정된다면, 한강 유역을 둘러싼 관련국들 사이의 일시적이며 한정적인 담합과 제휴는 충분히 상정될 수 있다고 본다.

551년 나제동맹의 파괴력을 절감한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 방면에서 가해오는 신라=백제의 군사적 압력을 완화시킬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는 백제의 한성기의 구영역 수복이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을 두려워하였다. 또한 신라는 가야 문제 등 나제 간의 현안을 감안할 때 나제동맹의 실효성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신라는 한강 하류 지역을 영유함을 통하여 독자적 대중교통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신라 측 복안의 실현을 담보할 제휴 상대는 고구려 밖에 없었다. 이러한 고구려-신라 간의 전술적 제휴는 551년 9월에서 552년 5월 사이에 맺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麗羅通好’의 효과는 553년 여나의 공동 출병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고구려는 평양 지역을, 신라는 한성 지역을 점유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백제의 반격은 553년 10월 고구려와의 ‘百合野 전투’로 시작된다. 이에 대해 고구려는 554년 겨울 웅천성(熊川城) 공위전(攻圍戰)으로 응수하게 된다. 한편 나제 간의 대결은 553년  12월 函山城戰과 잇따른 554년 7~9월의 久陀牟羅~관산성(管山城) 전투로 치닫게 된다.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  장창은 / 학술논문 : 진단학보 제111호 / 2011.04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 하류 유역은 553년 7월에 신라에게 귀속되었지만 이에 대한 백제의 대응은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다. 551년 후반~552년 전반에 고구려와 신라 간에 맺어진 “麗·羅密約“이 백제로 하여금 고구려의 군사개입을 우려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聖王(523~554)은 신라에 반격을 가할 시간을 벌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나제동맹을 유지하면서 은밀하게 倭에 사신을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小妃로 보내는 위장전술을 사용해 신라의 경계심을 느슨하게 하면서 관산성 전투를 준비하였다. 554년 5월에 이르러 倭로부터 군사 1천 명 등을 지원받은 백제는 가야군까지 규합하여 554년 7월에 신라로 쳐들어갔다. 전투는 餘昌이 총책임을 맡아 주도하였다. 백제는 먼저 사비에서 관산성으로 나아가는 요충지에 있었던 珍城[금산군 진산]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백제의 승세는 관산성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12월 9일에 관산성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성왕이 여창을 위로하고자 군사 50명만을 거느리고 관산성으로 나아갔다. 이 무렵 신라는 관산성 전투의 패전을 만회하고자 新州 軍主 金武力을 필두로 전군을 동원하였다. 신라는 성왕이 관산성으로 온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여 관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였다. 성왕은 결국 신라의 복병에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성왕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인해 관산성 전투의 전세는 급속히 신라에게 기울어 갔다. 마침내 신라는 관산성을 포위하였고, 여창은 이에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와 퇴각하였다. 결국 관산성 전투는 성왕과 좌평 4명을 잃고 백제군 3만 여 명이 전사하는 백제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552년 백제의 한강유역 포기[棄]와 신라ㆍ고구려의 밀약설(密約說)

–  강민식 / 학술논문 : 선사와 고대 2014 40호 / 한국고대학회 2014년

 

백제 성왕은 고구려의 공세를 막아내고, 가야세력의 이탈을 막아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안고있었다. 이러한위기를극복하기위해성왕은공동의적을 구체화하여신라혹은가야와왜세력을끌어들여연합전선을형성해나갔던것이다. 이탈과배반을 막고전쟁을통해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성왕은 541년 신라와의 동맹 이후 가야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대가야를 영향력 아래에 둘 수 있었고, 신라와 함께 고구려에 대한 적극적인공세에 나서게 되었다. 그것은 고구려내부에 사정을 적극 활용한 것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신라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러한 백제의 한계를 간파한 신라는 백제에게 참전에 따른대가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백제는 550~551년 전역(戰役)의 결과로 얻은 상당 부분의 영토를 할양하게 된 것이다. 한편 544년 이래 성왕이 끊임없이 고구려와 신라의 공모를 언급한 것은 가야와 왜 세력을영향권 아래 두려는 시도였다. 실제 551년까지 대고구려전에신라가 포함된 연합군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이후 관산성 전투에도 가야와 왜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강유역회복 후 백제가 한성 평양지역을 포기하고 왕녀를 시집보낸 일 등이 단순히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에 따른 후퇴라기보다는 동맹의 실체였던 것이다. 결국 관산성 전투는 주변 정세에 따라 신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공략하고 가야지역에대한 우위를 차지한 후 신라에 대해 공세로 전환한 사건이었다. 그동안의 외교활동을 통해대가야와 왜 연합군을 이루어 마침내 신라에 대한 총공세를 단행한 것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한국인

–  김병훈 / 반디출판사 / 2006.05.20

 

유랴쿠천황 23년(479)에는 일본에서 귀국해 즉위하는 곤지의 아들 동성왕을 5백 명의 군사로 호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같은 해 5백 명의 수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내용도 있는데 동성왕을 호위한 군사들의 활약을 기록한 듯하다.

일본에 머물던 동성왕의 즉위는 백제의 친왜노선에 따른 선택이라는 평가다. 왜의 군사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한편 왜는 중국 남조와의 교류가 끊어져 선진문물의 수입 창구로 백제와의 관계를 중요시 했다. 지방세력들을 거느리며 권력집중을 꾀하기 위해서는 생산력의 발전에 필요한 선진문물의 입수가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백제 무령왕은 504년 왕자 사아군(斯我君)을 파견한다. 이때 백제는 고구려와 전쟁상태에 있었고, 신라와는 가야지역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다시 왜와의 외교가 절실한 시점이다. 말 많은 칠지도(七支刀)와 거울 등을 보낸 것도 이 즈음이다. 일본에서는 512년 게이타이천황이 말 40필을 보낸 기록이 있다. 백제는 513, 516년 오경박사 단양이와 고안무를 파견하는 등 왜와의 교류에 열을 올린다.

 

신라와 손잡고 고구려를 압박하던 백제 성왕(재위 523~554)대에는 왜와의 군사외교가 더욱 활발해진다. 백제가 547년 군사를 요청하고 548년에도 고구려와의 마진성(馬津城)전투에 지원병을 요청하자, 왜국은 370명의 축성인부를 보낸다. 550년에는 화살과 배 3척을 보내고, 551년 백제요청에 따라 1천 석의 종자벼를, 553년 병마와 함선, 활과 화살 등을 보낸다.

백제는 의(醫)박사, 역(易)박사 등 학자들과 복서(卜書), 역본(歷本) 등 책과 다양한 약물을 왜국에 보내고, 554년에도 병사 1천 명, 말 1백 필, 배 30척에 대한 답례로 승려와 여러 박사를 파견한다.

백제 성왕이 554년 신라와의 관산성전투에서 사망하자 왕자 혜가 왜에 건너가 지원을 요청한다. 왜는 557년 병사 1천 명과 많은 말과 무기를 보낸다. 백제와 왜의 관계는 선진문물과 군사지원을 교환하는 물적, 인적교류가 축적되면서 왕실 간의 혼인관계로까지 발전해 나간 듯하다.

……

긴메이(欽明)천황 16년(555) 봄 2월 백제의 왕자 여창(餘昌:위덕왕)이 왕자 혜(惠:위덕왕의 아우로 혜왕이 됨)를 보내 주상하여 “성명왕(『삼국사기』에는 성왕)이 적에게 살해되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이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곧 사자를 나루에 보내 마중하여 위문하였다. 이에 고세노오미(許勢臣)가 왕자 혜에게 “여기에 머무를 것인가, 또는 본국으로 갈 것인가.”라고 물었다. 혜가 대답하여 “천황의 덕에 의하여 부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합니다. 만일 가련하게 여기시어 많은 병기를 주시면 설치보구(雪恥報仇:치욕을 씻고 복수함)하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신의 가고 머무르는 것은 오로지 명에 따를 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성명왕(성왕)의 사망소식에 ‘천황이 듣고 아파하고 한탄했다’고 적었다. 일본 대신은 백제 왕자에게 ‘머물 것인가, 돌아갈 것인가’ 묻는다. 『삼국사기』에서 전지 태자 등을 인질로 기록한 것과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백제 왕자가 일본에 와서 살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니 어떻게 하겠냐고 묻는 것이다.

긴메이(欽明)천황 17년 봄 정월 백제의 왕자 혜가 돌아가려고 청하였다. 그래서 무기와 양마를 많이 하사하였다. 또 여러 가지 물건을 주어서, 여러 사람이 부러워하고 감탄하였다. 아베노오미(阿部臣) 사에키노무라지(佐伯連) 하리마노아타히를 보내 쓰쿠시국의 수군 1천 명을 거느리고, 호송하여 나라에 돌아가게 하였다.

 


<관련 그림>

 


– 구세관음상.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을 그리며 만든 불상으로 성왕의 형상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녹나무를 깎아 조각한 뒤 금박을 입혀 만든 구세관음상의 키는 178.8cm, 사람의 신체와 같은 크기로 만든 등신상이다.

<일본 법룡사 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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