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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에서 중국인들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왕조는 당唐이다. 원이나 청에 비해 “한족의 왕조”라는 정체성이 있고, 송나라 못지않은 문물을 이룩한 데다 명나라 이상의 국위를 떨쳐, 당시 이슬람제국과 함께 세계 2대 초강대국으로 군림했던 왕조가 당이기 때문이다. 그런 당나라를 만든 주인공이 다름 아닌 태종 이세민(李世民, 재위 626년~649년)이다. 그의 연호인 ‘정관(貞觀)’에서 딴 “정관의 치”는 오랫동안 신화적인 이상정치의 시대인 “삼대(三代)” 다음 가는 최고의 태평성대로 일컬어졌다.

 

중앙유라시아 초원에서 552년 돌궐(突厥,투르크)이라는 알타이 산맥의 유목민 부족이 국가를 만들고, 이전의 흉노를 능가하는 대유목 제국으로 성장했다.

6세기 후반,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자 수나라는 서돌궐이 동돌궐을 공격하도록 부추겨 동돌궐을 굴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동돌궐은 수나라에 신속하고 둘 사이는 군신관계가 성립되었다. 수나라와 돌궐 사이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수나라는 멸망하고, 새롭게 당나라가 건국되는데, 당나라가 건국될 당시, 돌궐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돌궐의 막강한 군사력에 눌린 당나라는 돌궐에게 신하로서 복종하고 양국의 군신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중국의 혼란에 편승한 돌궐의 우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동돌궐의 새로운 카간인 힐리 카간(頡利 可汗, 620~630년 재위)은 이제 막 건국한 당을 자주 침략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즉 그는 내부 문제와 철륵鐵勒(투르크)계 부족들의 반란, 고르지 못한 기후로 인한 가축의 손실이 겹치면서 오히려 궁지에 몰렸다. 당태종은 돌궐의 분열을 최대한 유도한 끝에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공격, 힐리가한을 포로로 잡아버렸다. 이로써 630년 동돌궐은 종말을 고한다.

 

당태종은 서방의 토욕혼(635년), 서남의 토번 역시 무찔렀고, 멀리 서역의 고창(640년), 구자까지 정복했다. 사실 당태종 본인도  선비족과의 혼혈(당나라 황실이 선비족 출신이라 볼 수도 있다)이므로 북방민족다운 성격이 없지 않았지만, 실로 수백 년 동안 이민족의 침략 앞에 수세를 면치 못한 한족 왕조가 공세로 돌아섰던 것이다. 당태종은 귀순한 북방민족에게서 ‘천가한 (天可汗)’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한족의 황제인 동시에, 북방민족의 맹주로 군림한다는 의미였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무대가 이제까지는 중국뿐이었지만 여기서 비로소 중앙유라시아도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역사적 사례로 17세기 몽골인들이 청조淸朝 황제를 칸, 18세기 카자흐인들이 러시아의 차르를 차간 칸(白王)이라 부르며 그들의 지배를 수용한 것이 있다.

 

당인唐人이라는 이름을 낳고, 그 당인들의 국가 당이 세계제국으로 거듭나고 무너지기까지. 당은 한인들의 국가가 아니었다. 유목민과 한족, 즉 胡와 漢이 결합한 국가였다. 당인들은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민족을 배경으로 등장한 사람들이었다. 640년경의 정황으로서 8000인 이상의 외국인 유학생이 장안의 국자학(國子學)에서 배우고 있었다고 한다. 당인들에게 문명과 야만, 화하와 이적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차별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개념이 아니었다. 당이 성장하고 강성해진 배경에는 유목민 역시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돌궐은 630년부터 약 50년간 당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하여 증흥을 꾀했으나 744년에 철륵의 일파인 위구르에게 멸망하였다. 서돌궐은 일시 위세를 떨치다가 결국 당에게 복속되었다.

고구려는 동돌궐이 멸망한 630년 다음 해에 곧바로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한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630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 김호동 / 돌베개 / 2010.08.20

 

……이렇게 해서 소위 오호십육국과 남북조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화북 지방은 3세기 이상 북방 유목민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그동안 그들이 ‘한화’漢化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한인들도 ‘호화’胡化되었다.

혼란기를 종식시키고 수당제국을 건설한 장본인들도 바로 이들 ‘한화漢化된 호인胡人’ 혹은 ‘호화胡化된 한인漢人’이었으니, 학계에서는 그들을 ‘관롱집단’關隴集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당 황실의 시조로 여겨지는 이초고발李初古拔 · 이매득李買得 부자는 한인의 성과 선비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한인인데 선비식 이름을 사여받았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원래 선비인데 한인의 성을 사여받았을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간에 유목민의 습속이 깊이 배여있던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또한 이매득의 손자인 이호李虎는 서위의 우문태宇文泰에게서 대야大野라는 선비족 성을 받았다. 그의 아들 이병李丙은 선비족 부인을 맞아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당나라의 고조 이연李淵이었다. 이연의 부인도 선비족이었고 그 아들이 태종 이세민이었으며, 당태종과 선비족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고종이었다. 당나라 황실이 선비족 출신이라 말한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니, 일부 학자들은 당왕조를 아예 ‘탁발 국가’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대漢代의 위정자와 지식인들에게 중화와 이적은 분명히 구별되고 섞이기 힘든 이질적인 두 세계였다면, 수당의 건국자들의 눈으로 볼 때 그 두 세계는 상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혼효되어 하나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당나라 태종이 630년 경 북방의 돌궐을 복속시킨 뒤 ‘호한胡漢이 일가一家가 되었다’고 호언한 것은 그러한 새로운 세계관을 한마디로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따라서 그들이 ‘원래의 중국’의 범위를 넘어서 북방의 유목민들이 사는 초원지대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바로 유목민 출신이었거나 혹은 유목민과 농경민의 혼혈아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목민과 다름없는 막강한 기마군단을 보유하여 전쟁에 투입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목민의 멘탈리티를 잘 이해하고 또 그와 유사한 사고 패턴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

–  서영교 / 글항아리 / 2015.07.23

 

600년대 초반 돌궐의 국력은 당나라를 압도했지만, 627년 돌궐에 혹한으로 인한 대규모 자연재해인 조드dzud가 발생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

629년 11월 23일 피지배 부족들과 조카 돌리의 반란으로 힐리 칸의 세력이 현저히 약해지자 태종은 초원으로 10만 대군을 파견했다. 630년 정월, 총사령관 이정李靖의 기병부대 3000명이 정양定襄(지금의 내몽골 허린거얼和林格爾 서북)에서 힐리 칸의 군대를 급습했고, 음산陰山까지 추격해 격파했다.

10만 명을 참수했고, 힐리를 따르던 추장들과 그 수하 50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가축 수십만 마리를 노획했다. 옛날에 돌궐로 시집가 살았던 수나라 의성공주를 죽이고 그 아들 아사나첩라시阿史那疊羅施를 잡아 포박했다.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에게 사로잡힌 힐리가 5만 명의 포로와 함께 장안으로 들어왔다.

……

630년 3월 3일 당 태종은 항복한 돌궐의 군장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그들은 태종에게 왕 중의 왕이라는 의미로 ‘하늘의 칸(天可汗,텡그리칸)’이라는 칭호를 올렸다. 태종은 겸양의 뜻을 보였다. “나는 당나라의 천자인데 어찌 초원의 칸이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군장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태종에게 깊은 경외심을 갖고 있었고, 진정 자신들의 칸이라 여겼다. 군장들과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의 칸이여 영원하라!”하고 만세를 여러 번 복창했다. 그것은 문서에서 공식화됐다. 이후 돌궐 군장들에게 보낼 때에는, 황제의 도장이 찍힌 편지인 새서璽書에 ‘하늘의 칸’이란 명칭이 사용됐다.

 

황제 자리를 뺏기고 뒷방 노인으로 있던 상황上皇 고조도 아들 태종의 경이로운 공적에 감탄했다. “800년 전 한 고조 유방은 유목민인 흉노에게 포위돼 곤욕을 치렀지만 보복할 수 없었다. 내 아들 세민은 힐리 칸을 사로잡고 돌궐을 붕괴시켰다.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

신하들 대부분은 돌궐인의 부락 조직을 해체시켜 하남의 주와 현에 흩어 정착시켜야 한다고 했다. 유목민인 그들에게 농사와 방직을 가르쳐서 농민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온언박溫彦博이 여기에 반대했다. 농민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고유한 물성物性을 어기는 것이다. 기동성있고 용감한 전사인 그들의 장점을 사장시킬 필요가 있는가. 부락을 보존하고, 그들이 살았던 땅과 비슷한 만리장성 이남에 정착시켜 중국의 북방을 방어하는 역활을 맡기는 것이 상책이다. 좋은 횟감을 굳이 삶아 먹겠다니, 말도 안된다.

위징魏徵은 온언박과 생각이 달랐다. 돌궐은 대대로 중국을 노략질한 원수다. 그러나 지금 패하고 망해서 항복해오는 바람에 차마 다 죽이지 못한 것이다. 그들을 중국에 머물게 할 수는 없다. 몽골 초원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들은 사람의 얼굴을 했지만 짐승과 다르지 않다. 약하면 항복을 청하고 강하면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이다. 항복해온 10만 명의 무리가 시간이 지나 수가 늘어나면 중국에 우환이 될 것이다.

 

 

신하들의 견해를 들은 태종은 만리장성 이남에 돌궐인들의 부락을 온전히 정착시키자는 온언박의 안을 채택했다. 태종은 유목민의 습성을 숙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탁월한 전투력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당나라 기병으로 부리기로 했다.

태종은 돌궐인 부락들을 동쪽의 요서 유주幽州(지금의 베이징)에서 서쪽 오르도스 부근의 영주靈州(지금의 닝샤후이족자치구 링우靈武)까지 나란히 배치했다. 그곳은 몽골의 초원과 중국을 나누는 자연 경계인 고비사막의 남쪽이다. 왕족인 아사나씨는 각 관할 지역들을 다스리는 도독으로 임명했고, 추장들은 장군으로 임명했다. 당 조정에 5품 이상의 돌궐인들이 100명으로 신료의 절반을 차지했다. 장안에 들어와 사는 그들의 가족 · 식솔들이 1만 가구에 가까웠다.

거대한 예산이 소요됐다. 한 사람마다 사물賜物 5필, 포袍 1령이 지급됐다. 재정이 풍족해서 정착지원금을 준 것은 아니었다. 군사적 목적을 위해 어려움을 감수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을 당나라에 옭아매는 포획장치였다. 태종은 전쟁이 전력의 감소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승리 후 항복한 자들을 자신의 군대로 만들어 전력을 배가시켰다.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들뢰즈는 그의 저서 『천의 고원』 12장 ‘유목론’에서 전쟁기계(유목민) ‘포획장치’에 대해 말했다.

“전쟁기계가 국가에 의해 포획될 우려는 항상 상존한다. 역사적으로 국가는 전쟁기계를 포획해 자신의 군대로 편성해왔고, 포획된 군대는 더 이상 전쟁기계가 아니며, 오히려 국가를 위협하는 모든 전쟁기계에 대항하는 수단, 혹은 한 국가가 배타적으로 다른 국가를 파괴하는 수단이 됐다.”

여기서 ‘포획장치’란 자신에게 칼을 겨누던 적의 힘을 역전시켜,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정교한 구조물이다.

 

태종은 적대적인 인물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중국 동란기의 최후 승자가 된 인물이었다. 그들이 패배했다 해도 능력이 있으면 등용했다. 태종의 충직한 신하로서 당 제국 건설에 이바지한 자들은 한때 적의 수하였던 사람들이 많았다. 돌궐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작전을 총지휘한 이정, 현무문의 정변에서 최고의 공을 세운 울지경덕, 후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주역을 담당한 이세적, 유목민을 만리장성 이남에 정착시키는 데 가장 반대한 위징도 그러했다.

……

태종은 항복해온 유목민 군장들을 자신의 경호원으로 채용했고, 모두 완전무장한 상태로 자신의 잠자리를 지키게 했다. 일단 굴복한 자에게는 원망이나 시의심으로 접하는 일이 없었다. 태종은 군장들 그리고 그들의 부하들과 함께 몰이사냥을 즐기기도 했다. 군장들은 그 도량에 감격해 태종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태종은 나아가 돌궐 군장인 글필하력契苾何力,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 아사나사마阿史那思摩 등과 인척관계를 맺었다. 황제와 군장이 결합된 새로운 씨족이 탄생했다. 씨족 의식은 당 제국을 공동재산으로 생각하게 했고, 제국의 팽창은 씨족 공동재산의 확대를 의미했다. 태종은 이후 유목민 군장들이 이끄는 부락민들을 동원해 투르키스탄과 사막의 인도-유럽계 오아시스들을 정복했다. 고구려 영류왕은 태종의 행보에 경악했고 다만 미증유의 영웅적 성취를 바라볼 뿐이었다.

 

태종이 돌궐 기병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해올 것이 확실해졌다. “(631년) 봄 2월 영류왕은 많은 사람을 동원해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동북쪽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러 천여 리나 됐다. 무려 16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삼국사기』)

 


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

–  류펑 / 김문주 역 / 시그마북스 / 2009.11.05

 

황제가 된 이세민은 돌궐의 위협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그는 군대를 양성하고 힘을 비축함으로써 또 한 번의 반격을 준비했다. 때마침 동돌궐에 연이은 정벌전과 천재지변이 벌어졌고 설연타 등의 부족이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게다가 돌리까지 당조로 귀순하는 바람에 국력이 급격히 쇠퇴해버렸다. 반면, 당나라는 내부 안정을 찾으면서 경제가 점차 회복되었고 동돌궐 진격에 필요한 군사요지인 항안(오늘날의 산서 대동 경내), 삭방(오늘날의 내몽고 조심기 남쪽 벽성자) 등을 얻게 되었다. 당태종은 이윽고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서기 630년 정월, 이세민은 대장군 이정에게 힐리가한의 군대를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돌궐 정벌에 나선 이정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그야말로 전설 속의 명장으로 등극했다.

용맹한 기병 3000명을 이끌고 과감히 가한의 심장부를 공격했고 이 소식을 들은 힐리가한은 대경실색하여 고함쳤다. “당나라 놈들, 정작 멸망하고 싶은 게로구나. 감히 이곳까지 발을 들이다니!”

하지만 이정은 힐리가한이 탄식을 내지를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으로 정양에 맹공을 퍼부었다. 힐리는 미처 손을 쓰지도 못한 채 황망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고작 기병 3000명으로 정양을 손에 넣은 이정의 기세는 온 하늘을 찌를 듯했다.

때는 엄동설한인지라, 철산(오늘날 내몽고 경내에 있는 양산의 북쪽)으로 도피한 힐리가한은 지독히도 곤궁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특사를 보내어 이세민에게 강화를 청했다. 사실 이것은 단지 시간을 벌고자 했던 힐리의 계략일 뿐, 이듬해 봄이 되어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한 번 당나라와 대대적인 전투를 벌일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세민은 힐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홍려경(외교사신) 당검을 철산으로 파견함으로써 돌궐부족에 위로의 뜻을 전했다.

 

당시 백도(오늘날 내몽고 후허하오터 서북)에 주둔하고 있던 이정은 당검을 배웅해준 뒤,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힐리는 비록 패했지만 그 무리는 매우 용맹했다. 혹시라도 그들이 대막(고비사막) 이북으로 도망쳐 회흘, 설연타 등과 연합한다면 완전히 멸망케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늘 황상께서 특사를 보내셨으니 힐리는 필시 경계를 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때 정예군 1만과 20일 어치의 식량을 마련해 재빨리 습격한다면 힐리가한을 생포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정의 말을 들은 부하 장군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표했다. “황상께서 이미 힐리와의 강화를 받아들이고 사절 당검까지 파견했는데 이 시점에 돌발습격을 행한다면 황상의 뜻에 거스르는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당검이 이미 돌궐 진영에 가 있는 터에 힐리를 습격한다면 당검의 목숨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이정은 “황상께서 잠시 진격을 멈추라고 직접적으로 명하신 적은 없네. 난 대장군으로서 현재의 전황을 보아 진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일 뿐이네. 돌궐을 철저히 멸하고자 하는데 당검까지 다 돌볼 수는 없네” 라고 설명했다.

이윽고 이정은 정예군 1만 명을 이끌고 당검의 뒤를 좇아 북진했다. 그리고 양산에 이르러 돌궐의 순찰기병을 모조리 섬멸한 뒤 쥐도 새도 모르게 힐리가한의 막사로 접근해갔다. 당시, 이세민과의 조약으로 득의양양했던 힐리가한은 순식간에 덮쳐오는 당군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그는 병력을 모을 틈도 없이 천리마를 잡아타고 도망쳤다.

며칠 후, 고립무원의 신세가 된 힐리가한은 당나라군에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돌발습격을 감행한 당군의 전술은 한신이 제나라를 습격할 때의 상황과 비슷했다. 적군에게 반격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일거에 적을 섬멸한 것이다. 이로써 당군은 돌궐 부족민 15만 명, 가축 수십만 마리 등을 손에 넣었고 음산에서 대막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당조로 편입시켰다.

 


우리역사, 세계와 통하다

–  KBS역사스페셜 제작팀 / 가디언 / 2011.04.07

 

서기 642년, 연개소문은 고구려 정계에 피바람을 일으키며 전면에 등장했다. 그리고 영류왕과 그 수하 100여 명을 죽이며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또 영류왕을 시해한 후 시신을 토막 내 구덩이에 던져 넣는 잔인함을 보인다. 그 후 연개소문은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에 올라 전권을 장악했다.

서울대 국사학과 노태돈 교수는 대당 전략에 있어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폭발한 것이 바로 연개소문의 쿠데타였다고 설명한다. 영류왕은 대당 온건파였다. 당고조 이연은 고구려 수나라 전쟁에서 발생한 전쟁포로를 교환하자고 하며 고구려에 유화 제스처를 취했다. 고구려도 이에 화답해 1만 명에 달하는 포로를 돌려보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당고조에 이어 황제에 등극한 당태종 이세민은 내치가 안정되자 고구려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 국가에 대한 침략을 준비했다. 630년 당태종은 북방을 장악하고 있던 동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는데 이는 고구려에게는 큰 손실이었다. 그런데 영류왕은 당태종이 힐리가한을 생포한 것을 축하하며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를 당에 바쳤다.

……

이렇듯 고구려는 돌궐을 비롯한 북방 유목제국과 정치, 군사, 문화 모든 면에서 활발히 교류하였다. 630년, 당태종이 동돌궐의 힐리가한을 생포하여 동돌궐을 복속시키자 고구려는 다음 해에 곧바로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한다. 북방 민족의 약화가 곧바로 고구려에 위협이 되는, 순망치한의 관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련 그림>

 

– 630년의 돌궐과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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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강 전투(白江戰鬪)는 663년 백제 부흥군이 왜(倭)의 지원군과 함께 나당(羅唐) 연합군과 백강(白江)지금의 금강(錦江) 하구(동진강 설도 상당하다)에서 벌인 전투로서, 일본에서는 백촌강 전투(白村江戰鬪, 白村江の戦い), 중국에서는 백강구 전투(白江口戰鬪)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백강 전투가 있었던 백제 부흥 운동 부분을 서술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중의 하나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멸망(660) 이후, 각지에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복신, 도침, 흑치상지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나 · 당 연합군이 진압에 나서자 왜의 수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패하여 쫓겨 갔다(백강 전투). 백제 부흥 군은 4년간 저항했지만, 결국 나 · 당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좌절되었다.

 

663년 백제 부흥운동을 도와주려던 왜국의 참전과 ‘백강 전투’에 대한 국사 교과서의 기록은 단 한 줄로 처리되어 있다. 박노자 교수는 “약 4만 2000명의 왜인이 참전하고 1만여 명이 전사한, 고대사를 통틀어 왜국이 외부에서 당한 가장 큰 규모의 패배였는데 우리 국사 교과서는 이에 대해 침묵한다. ‘숙적’ 왜국이 ‘침략’이 아닌 동맹국 백제에 대한 원조를 단행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통상적 일본관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삼국사기』의 기록도 매우 간략하다. 김부식을 비롯한 당대 역사가들은 백강 전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교과서에 반영된 것인지 모른다. 백제부흥운동과 관련한 이때의 상황은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상세히 나와 있으며 일본이 적극적으로 백제부흥운동에 나서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다.(사실 백강 전투가 일본사 전개에 한 단락을 짓는 계기가 된다.)

 

고대 한반도의 역사는 이처럼 일본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특히 가야, 백제에 대한 역사기록은 『삼국사기』,『삼국유사』같은 국내 역사책보다 『일본서기』등 일본 역사책에 더 많이 남아있다. 또 일본이 한반도 역사에 개입한 주요 사건은 백강 전투만이 아니다. 저 유명한 광개토왕비에도 ‘왜倭’가 중요한 전쟁 상대로 선명히 적혀있고,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왜倭’가 수없이 등장한다.

 

노태돈은 백강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강구 전투의 의의를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판가름하는 결정적 회전이었다고 보는 시각은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다. 즉 이 전투의 주력이 당군과 왜군이었음을 강하게 의식하여, 마치 임진왜란이나 청일전쟁과 대비하여 고대 중국세력과 일본 세력이 한반도에서 자웅을 겨룬 전투인 것처럼 인식하려는 것은 전투의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물론 이 전투는 백제 부흥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를 고비로 왜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완전 물러나게 되니 고대 한일관계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백강 전투는 당에게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투는 아니었으며 신라에도 주된 전장은 아니었다. 전투 규모도 양측 모두 실제 동원한 병력이 만 수천 명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정도였다. 무엇보다 백강구 전투에 관한 과도한 강조는 그 해에 벌어진 백제 부흥전쟁의 주전장이 주류성 공략전이었음과 신라군의 존재를 홀시하게 하고, 신라는 피동적 존재로 파악하는 역사인식을 낳게 하는 면이 있다. 이는 백강구 전투의 실상이나 그 뒤의 역사 전개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김현구는 ‘백강 전투는 당시 가장 많은 국가와 군사가 참전해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동북아 최초의 대전이었다’고 평했다.

 

 

수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김용운 전 한양대 교수는 『풍수화(風水火)-원형사관(原型史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라는 책에서 663년 백강(白江·지금의 금강 하구)에서 신라-당(唐) 연합군과 백제-왜(倭) 연합군이 맞붙은 ‘백강 전투’가 오늘날 한중일 관계의 틀을 만든 핵심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풍수화’는 주변국을 흡수하는 중국은 물(水)로, 섬에서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일본은 불(火)로, 그 원형을 파악하고 바람의 원형을 지닌 한국을 풍(風)에 빗댄 표현이다.

 

일본 고고학회 회장을 지낸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규슈대 명예교수는 “백제 멸망과 유민의 대규모 이주는 일본 역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됐다”며 “백강 전투를 치른 7년 뒤인 670년에 왜는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새롭게 태어난다”고 전했다.

 

일본 방위대防衛大 총장을 지낸 이오키베 마코토 전 고베대 교수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을 2차대전에서의 패배와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 그리고 왜군이 나 · 당 연합군에 참패한 663년의 백강 전투에 비겼다. 역사상 일본의 큰 위기 중 하나로 ‘백강 전투’를 꼽은 것이다.

 

660년 당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듬해 평양을 포위하자 왜국은 극도의 위기의식에 휩싸인다.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면 다음은 왜국이라 생각했다. 당시 당 수군 전력에 혁명이 있었다. 수로가 닿는 곳이라면 적국의 수도가 어디라도 기습 포위할 수 있을 정도였다.

 

7세기 중반, 고구려(642년, 연개소문) · 백제(642년, 의자왕) · 일본(645년, 덴지 천황) · 신라(647년, 김춘추·김유신)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쿠데타가 있었는데, 이 총결산이 663년의 백강 전투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의 참전 배경으로 한국에서는 백제가 일본의 조국이므로 조국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나타나고, 일본에서는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었으므로 속국을 구원하기 위해서 출병했다는 식으로 분석하고 있다. 사실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에서 일본이 바라보는 시각은 백제를 일본의 속국 내지 조공국으로 보는 것이 대세라 한다. 이러한 시각은 『일본서기』가 논리를 제공했으며 칠지도, 광개토대왕 비문, 『송서』<왜국전> 등의 사료가 이를 바쳐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사강목』의 예처럼 일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의자왕의 뒤를 이은 풍왕을 백제 마지막 왕(32대)으로 보았고, 백강 전투가 있던 663년 9월까지 백제사에 포함시킨 바 있다. 일본의 역사가들 일부도 백제의 멸망 연대를 백강 전투로 보고 있다.

 

 

‘백강구 전투’ 또는 ‘백촌강 전투’라고도 하는 ‘백강 전투’의 역사적 비중이나 의의에 대한 학자의 태도는 다양하다. 일본에게 더욱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이 전투의 성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과 일본의 군대가 충돌하여 전쟁을 벌인 전투

◎ 백제 부흥운동이 사실상 끝나, 신라의 삼국통일 계기를 마련하였다.

◎ 많은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망명

◎ 고대 일본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다.

◎ 이후 일본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인 이른바 율령체제를 형성하였다.

◎ 일본이라는 국호의 성립

◎ 일본의 대외 관계는 폐쇄적이면서 자위적인 방향으로 전환된다.

◎ 일본은 대륙으로의 출병이 백해무익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 일본 입장에서는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이 왜국을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다.

 

당시의 세계사 연표는 :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mhistory.jsp?sub=1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보았다. 아래에 언급한 『일본서기』는 720년에 완성되었으며 <동북아 역사재단>의 번역본을 참조하였고, 삼국사기는 1145년에 완성되었으며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를 참조하였다.

 


삼국사기, 일본서기, 구당서

 

※ 삼국사기 제28권 백제본기 제6(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 의자왕

당 용삭 2년(서기 662) 7월, 유인원과 유인궤 등이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병사를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 대산(大山), 사정(沙井) 등의 목책을 함락시켰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으며 병사들을 나누어 그곳을 계속하여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을 끼고 있으며 높고 험준하여 요충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병사를 보태어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유인궤가 밤에 신라 병사를 독려하여 성곽에 가까이 접근해 날이 밝을 무렵에 성 안으로 들어가 8백 명을 베어 죽이니, 마침내 신라에서 오는 군량 수송로가 통하게 되었다. 유인원이 증원병을 요청하니 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치(淄)ㆍ청(靑)ㆍ내(萊)ㆍ해(海)의 병사 7천 명을 징발하고,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보내 병사를 통솔해 바다를 건너 인원의 병사를 도와주게 하였다.

 

二年七月 仁願仁軌等 大破福信餘衆於熊津之東 拔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 殺獲甚衆 仍令分兵以鎭守之 福信等 以眞峴城臨江高嶮 當衝要 加兵守之 仁軌夜督新羅兵 薄城板堞 比明而入城 斬殺八百人 遂通新羅饟道 仁願奏請益兵 詔發淄靑萊海之兵七千人 遣左威衛將軍孫仁師 統衆浮海 以益仁願之衆

 

이때 복신은 이미 권력을 독차지하여 부여풍과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였다. 복신은 병이 들었다는 것을 핑계로 굴 속에 누워 부여풍이 문병하러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부여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였다. 부여풍이 고구려와 왜국에 사신을 보내 병사를 요청하여 당나라 병사를 막았다. 손인사가 도중에 이들을 맞아 쳐부수고, 마침내 인원의 무리와 합세하니 병사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공격의 방향을 의논하였다. 어떤 자가 말하였다.
“가림성(加林城)이 수륙의 요충이므로 먼저 이곳을 쳐야 합니다.”
유인궤가 말하였다.
“병법에는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가림성은 험하고 튼튼하므로 공격하면 병사들이 다칠 것이요, 밖에서 지키면 시일이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周留城)은 백제의 소굴로써 무리들이 이곳에 모여 있으니, 만약 이곳을 쳐서 이기게 되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손인사와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金法敏)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別帥) 두상(杜爽)과 부여융(扶餘隆)은 수군과 군량을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병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덮고 바닷물도 붉게 되었다.

 

왕 부여풍은 몸을 피해 도주하였는데,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말하였다. 당나라 병사가 그의 보검을 노획하였다.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과 더불어 항복하였는데, 오직 지수신(遲受信)만이 혼자 남아 임존성에서 버티며 항복하지 않았다.

 

時 福信旣專權 與扶餘豊 寖相猜忌 福信稱疾 臥於窟室 欲俟豊問疾 執殺之 豊知之 帥親信 掩殺福信 遣使高句麗倭國 乞師以拒唐兵 孫仁師中路迎擊破之 遂與仁願之衆相合 士氣大振 於是 諸將議所向 或曰 加林城水陸之衝 合先擊之 仁軌曰 兵法 避實擊虛加林嶮而固 攻則傷士 守則曠日 周留城 百濟巢穴 群聚焉 若克之 諸城自下 於是 仁師仁願及羅王金法敏 帥陸軍進 劉仁軌及別帥杜爽扶餘隆 帥水軍及粮船 自熊津江往白江 以會陸軍 同趍周留城 遇倭人白江口 四戰皆克 焚其舟四百艘 煙炎灼天 海水爲丹 王扶餘豊脫身而走 不知所在 或云奔高句麗 獲其寶劒 王子扶餘忠勝忠志等 帥其衆 與倭人並降 獨遲受信據任存城 未下

 

처음에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열흘 사이에 따르는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정방이 병사를 보내 이들을 공격했으나 상지가 이들과 싸워서 승리하였다. 상지가 다시 2백여 성을 빼앗으니 소정방이 당해낼 수가 없었다. 흑치상지는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吒相如)와 함께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복신과 호응하다가 이때에 와서 모두 항복하였다.

 

유인궤가 그들에게 진심을 보이며, 그들에게 임존성을 빼앗아 스스로 공을 세워 보이라고 하고 갑옷과 병기, 군량 등을 주었다. 손인사가 말하였다.
“야심이 있는 자는 믿기 어렵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무기와 곡식을 제공한다면 도적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인궤가 말하였다.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니 그들에게는 충성심과 꾀가 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면 공을 세울 것이니 오히려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그들 두 사람이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려두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잔당들도 모두 평정되었다. 손인사 등이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갔다.

 

初 嘯聚亡散 旬日間 歸附者三萬餘人 定方遣兵攻之 常之拒戰敗之 復取二百餘城 定方不能克 常之與別部將沙吒相如據嶮 以應福信 至是皆降 仁軌以赤心示之 俾取任存自效 卽給鎧仗粮糒 仁師曰 野心難信 若受甲濟粟 資寇便也 仁軌曰 吾觀相如常之 忠而謀 因機立功 尙何疑 二人訖取其城 遲受信委妻子 奔高句麗 餘黨悉平 仁師等振旅還

 

당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유인궤로 하여금 백제 땅에 주둔하며 병사를 거느리고 지키게 하였다. 전쟁의 여파로 집집마다 파괴되고 시체가 풀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유인궤가 비로소 해골을 묻게 하고 호구를 등록하고 촌락을 정리하고 관리들을 임명하였다. 또 도로를 개통하고 교량을 세우고 제방을 수리하고 저수지를 복구하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리고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고아와 노인을 보살피게 하였다. 당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정삭(正朔)과 묘휘(廟諱)를 반포하니, 백성들이 기뻐하며 각기 자기 집에 안주하게 되었다.

 

당나라 황제가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신라와의 오래된 감정을 풀고 백제의 유민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詔留仁軌 統兵鎭守 兵火之餘 比屋凋殘 殭屍如莽 仁軌始命 瘞骸骨 籍戶口 理村聚 署官長 通道塗 立橋梁 補堤堰 復坡塘 課農桑 賑貧乏 養孤老 立唐社稷 頒正朔及廟諱 民皆悅 各安其所 帝以扶餘隆爲熊津都督 俾歸國 平新羅古憾 招還遺人

 

 

※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 문무왕 3년

3년(서기 663) 봄 정월, 남산신성(南山新城)에 길다란 창고를 지었다.
부산성(富山城)을 쌓았다.
2월, 흠순과 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쳐서 빼앗고,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쳐서 항복시키고, 덕안성(德安城)을 쳐서 1천7십 명의 목을 베었다.

 

여름 4월, 당나라가 우리나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고, 임금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삼았다.
5월, 영묘사 문에 벼락이 떨어졌다.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옛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 왕으로 세우고, 주둔하고 있는 낭장 유인원(劉仁願)을 웅진성(熊津城, 충남 공주)에서 포위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조칙으로 유인궤(劉仁軌)에게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를 겸직하게 하여 이전의 도독 왕문도(王文度)의 군사를 통솔하고 우리 병사와 함께 백제의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이 군대는 매번 싸울 때마다 적진을 함락시키니 가는 곳마다 앞을 가로막는 자가 없었다. 복신 등이 유인원의 포위를 풀고 물러가 임존성(任存城)을 지켰다.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인 다음 그의 무리를 자기 군대에 합치고, 아울러 배반하고 도망쳤던 무리들을 불러 모아서 커다란 세력을 이루었다. 유인궤는 유인원과 병사를 합하여 잠시 무장을 풀고 군대를 쉬게 하면서 병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당 황제가 조칙을 내려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에게 병사 40만을 거느리고 출병하게 하였다. 그는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으로 진군하였다.

 

임금은 김유신 등 28명[혹은 30명이라고도 한다.]의 장수를 거느리고 그와 합세하여 두릉윤성(豆陵[혹은 ‘량(良)’이라고도 한다]尹城)과 주류성(周留城) 등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조리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나고 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무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는데, 오직 지수신(遲受信)만은 임존성에 자리를 잡고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다가 11월 4일에 군사를 돌려 설리정(舌[혹은 ‘후(后)’라고도 한다]利停)에 이르렀다. 전공을 따져서 상을 차등있게 주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의복을 만들어 진에 남아있는 당나라 군사들에게 주었다.

 

三年春正月 作長倉於南山新城 築富山城 二月 欽純天存領兵 攻取百濟居列城 斬首七百餘級 又攻居勿城沙平城降之 又攻德安城 斬首一千七十級 夏四月 大唐 以我國爲鷄林大都督府 以王爲鷄林州大都督 五月 震靈廟寺門 百濟故將福信及浮圖道琛迎故王子扶餘豊 立之 圍留鎭郞將劉仁願於熊津城 唐皇帝詔仁軌檢校帶方州刺史 統前都督王文度之衆 與我兵向百濟營 轉鬪陷陳 所向無前 信等釋仁願圍 退保任存城 旣而福信殺道琛 幷其衆 招還叛亡 勢甚張 仁軌與仁願合 解甲休士 乃請益兵 詔遣右威衛將軍孫仁師率兵四十萬 至德物島 就熊津府城 王領金庾信等二十八[一云三十]將軍 與之合攻豆陵[一作良]尹城周留城等諸城 皆下之 扶餘豊脫身走 王子忠勝忠志等 率其衆降 獨遲受信據任存城 不下 自冬十月二十一日 攻之 不克 至十一月四日 班師 至舌[一作后]利停 論功行賞有差 大赦 製衣裳 給留鎭唐軍

 

 

※ 삼국사기 제42권 열전 제2(三國史記 卷第四十二 列傳 第二) – 김유신

용삭 3년(서기 663) 계해에 백제의 여러 성에서 비밀리에 부흥을 도모하였다. 그 두목은 두솔성(豆率城)에 웅거하면서 왜(倭)에게 군사를 요청하여 지원을 삼으려고 하였다. 대왕이 직접 유신ㆍ인문ㆍ천존ㆍ죽지 등 장군들을 거느리고 7월 17일에 토벌 길에 올랐다. 그들은 웅진주(熊津州)에 가서 진수관(鎭守官) 유인원의 군사와 합세하여 8월 13일 두솔성에 이르렀다. 백제인들은 왜인과 함께 나와 진을 쳤는데 우리 군사들이 힘껏 싸워 크게 깨뜨리니 그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대왕이 왜인들에게 말했다.

 

“우리와 너희 나라가 바다를 경계로 하여 일찍이 서로 다툰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우호관계를 맺고 서로 예방하며 교유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늘날 백제와 악행을 함께 하여 우리나라를 치려 하는가? 이제 너희 군졸들의 생명이 나의 손아귀에 있으나 차마 죽이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돌아가서 너희 왕에게 이 말을 고하라!”

 

그리고 왕은 그들을 마음대로 가게 하고, 군사를 나누어 여러 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오직 임존성(任存城) 만은 지세가 험하고 성이 견고한 데다 군량마저 풍족했기 때문에 공격한 지 30일이 되어도 무너뜨리지 못했다. 따라서 군사들이 너무 지치고 피곤해져 싸울 뜻이 없자 대왕이 말했다.

“지금 성 하나가 아직 함락되지 않았으나 나머지 여러 성이 모두 항복하였으니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는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다.

 

겨울 11월 20일, 서울에 당도하여 유신에게 밭 5백 결을 하사하고 기타 장졸들에게는 공의 정도에 따라 상을 주었다.

 

龍朔三年癸亥 百濟諸城 潛圖興復 其渠帥據豆率城 乞師於倭爲援助 大王親率庾信仁問天存竹旨等將軍 以七月十七日 征討 次熊津州 與鎭守劉仁願合兵 八月十三日 至于豆率城 百濟人與倭人出陣 我軍力戰大敗之 百濟與倭人皆降 大王謂倭人曰 惟我與爾國 隔海分疆 未嘗交構 但結好講和 聘問交通 何故今日與百濟同惡 以謀我國 今爾軍卒在我掌握之中 不忍殺之 爾其歸告爾王 任其所之 分兵擊諸城降之 唯任存城 地險城固 而又粮多 是以攻之三旬 不能下 士卒疲困厭兵 大王曰 今雖一城未下 而諸餘城保皆降 不可謂無功 乃振旅而還 冬十一月二十日 至京 賜庾信田五百結 其餘將卒賞賜有差

 

 

※ 일본서기 권 제27 – 천지천황 2년

2년 봄 2월 을유삭 병술(2일)에 백제가 달솔 김수(金受)들을 보내 조(調)를 올렸다. 신라인이 백제 남부의 사주(四州)를 불태우고1, 아울러 안덕(安德) 등의 요지를 빼앗았다. 피성(避城)은 적에게 너무 가까워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으므로, 도로 주유로 돌아갔다. 전래진이 생각한 바와 같다.

이 달에 좌평 복신이 당의 포로 속수언(續守言) 등을 바쳤다.

 

3월에 전장군 상모야군치자(上毛野君稚子 ; 카미츠케노노키미와카코)와 간인련대개(間人連大蓋 ; 하시히토노무라지오호후타), 중장군(中將軍) 거세신전신역어(巨勢神前臣驛語 ; 코세노카무사키노오미오사)와 삼륜군근마려(三輪君根麻呂 ; 미와노키미네마로), 후군 장군 아배인전신비라부(阿倍引田臣比邏夫)와 대택신겸병(大宅臣鎌柄 ; 오호야케노오미카마츠카)을 보내 2만 7천 인을 거느리고 신라를 치게 하였다2.

 

여름 5월 계축삭(1일)에 견상군(犬上君 ; 이누카미노키미)[이름이 빠졌다.]이 달려가, 출병한 사실을 고구려에 고하고 돌아왔다3. 그리고 규해(糺解)4를 석성(石城)에서 만났다. 규해는 복신(福信)의 죄를 말하였다.

 

6월에 전군(前軍) 장군 상모야군치자(上毛野君稚子) 등이 신라의 사비(沙鼻), 기노강(岐奴江)5 두 성을 빼앗았다. 백제왕(百濟王) 풍장은 복신이 모반할 생각이 있다고 의심하고, 손바닥을 뚫어 가죽으로 묶었다. 그러나 혼자서 결정하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복신의 죄는 이와 같은데, 참수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때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이 극악한 사람을 방면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복신은 집득에게 침을 뱉고, “썩은 개, 미친 놈”이라고 말하였다. 왕은 힘센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참수하여 그 머리로 젓을 담갔다6.

 

가을 8월 임오삭 갑오(13일)에 백제왕이 자기의 훌륭한 장수를 죽였으므로, 신라는 곧바로 백제로 쳐들어가 먼저 주유를 빼앗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백제왕이 적의 계략을 알고 장군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들으니 대일본국(大日本國)의 구원군 장수 노원군신(盧原君臣 ; 이호하라노기미오미)이 건아(健兒)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오고 있다. 장군들은 미리 준비하도록 하라. 나는 백촌(白村)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접대하리라.”라고 말하였다.

무술(17일)에 적장(賊將)이 주유에 이르러 그 왕성을 에워쌌다. 대당(大唐)의 장군이 전선(戰船)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白村江)에 진을 쳤다.

무신(27일)에 일본의 수군 중 처음에 온 사람들이 대당(大唐)의 수군과 싸웠다. 그러나 일본이 져서 물러났다. 대당은 진열을 굳게하여 지켰다.

기유(28일)에 일본의 장군들과 백제왕이 기상을 살피지 않고, “우리가 선수를 친다면 저쪽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대오가 흔들린 일본 중군(中軍)의 병졸을 이끌고 다시 나아가 진열을 굳건히 하고 있는 대당의 군사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대당이 곧 좌우에서 배를 둘러싸고 싸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관군(官軍)이 패배하였다. 이때 물속으로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또한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가 없었다. 박시전래진은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고 이를 갈며 분노하면서 수십 인을 죽이고 마침내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왕 풍장은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망갔다7.

 

9월 신해삭 정사(7일)에 백제의 주유성(州柔城)이 마침내 당에 항복하였다8. 이때 국인(國人)들이 “주유가 항복하였다. 사태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이제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테례성(弖禮城 ; 테레사시)9에 가서 일본 장군들과 만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하자.”고 말하였다. 그리고 먼저 침복기성(枕服岐城)10에 가 있던 처와 아이들에게 나라를 떠나가려 한다는 마음을 알렸다. 신유(11일)에 모테(牟弖)를 출발하였다. 계해(13일)에 테례(弖禮)에 이르렀다. 갑술(24일)에 일본의 수군 및 좌평 여자신(余自信),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곡나진수(谷那晋首), 억례복류(憶禮福留)와 국민(國民)들이 테례성(弖禮城)에 이르렀다. 이튿날에 비로소 배가 출항하여 일본으로 향하였다.

– 1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663) 2월조에 흠순과 천존이 병사를 이끌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7백여 명을 참수하였으며, 거물성,사평성,덕안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고 했는데, 백제 남부의 4주는 바로 이 네 성을 가리킨다고 보는 설이 있다. 거열성은 경상남도 거창, 거물성은 전남 남원 부근이다. 안덕은 덕안의 오기로 보고, 덕안은 백제의 5방 중의 하나인 東方의 치소가 있었던, 충남 恩津으로 추정한다. 한편 ‘百濟南畔四州’를 ‘百濟南 畔四州’의 오기로 보고, 이를 웅진도독부 관할하의 7주 중의 하나로 보아 영광과 함평, 고창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2 : 백제부흥운동을 도운 왜국군은 지방 호족들이 동원한 國造軍의 집합체였다. 국조군은 국조의 일족과 그 지배하의 민중과 노비로 구성되었다.

– 3 : 백제 부흥군은 석 달 뒤 백촌강 전투로 이어지는 왜군의 참전과 관련된 군사적 협의를 고구려와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 4 : 풍장(豊璋)을 가리킨다.

– 5 : 사비는 경남 양산, 기노강은 경남 의령으로 추정된다.

– 6 : 『구당서』 백제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즉 복신이 병권을 독점하여 부여풍과 점차 시기하고 갈라지게 되었다. 복신은 병을 칭하고 동굴의 방에 누워서 장차 부여풍이 병문안을 오면 공격하여 죽이려고 꾸몄는데, 부여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가서 복신을 공격하여 죽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이 기록이 가장 자세하다.

– 7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왕 부여풍이 탈주하였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혹은 고구려로 도망갔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구당서』 유인궤전에서는 “여풍은 북에 있고 여용은 남에 있다.”고 적고 있다. 여용은 禪廣을 가리키며, 남에 있다는 것은 왜국에 있다는 뜻이다. 『자치통감』 고종 총장원년 12월 정미조에 의하면 부여풍은 668년 10월 이적(李勣)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 포로로 잡혀 당으로 끌려가서 12월 嶺南에 유배되었다.

 

– 8 : 『자치통감』 唐紀에서는 주유성(周留城)이 항복한 날을 9월 무오(8일)라고 하였다. 『일본서기』에서 백제부흥운동 기사는 이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신당서』, 『자치통감』에 의하면 이후 신라군과 당군은 지수신이 지휘하고 있던 임존성의 백제부흥운동군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당에 투항한 사택상여와 흑치상지를 이용하여 이 해 11월경 임존성을 함락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64년 3월에 사비산성의 백제부흥운동군이 당군과 신라군에 의해 진압되었다고 하는데, 이로써 백제부흥운동은 끝나게 되었다.

– 9 : 이를 冬老縣(전남 보성군 烏城)이라는 설과 경남 남해로 보는 설이 있다.

– 10 : 현재 전남 강진지역으로 추정된다.

 

 

※ 구당서(舊唐書) 권199 동이열전(東夷列傳) 백제(百濟)

11)○ [용삭(龍朔)] 2년(A.D.662; 신라 文武王 2) 7월에 인원(仁願)‧ 인궤(仁軌) 등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를 이끌고, 웅진(熊津) 동쪽에서 복신(福信)의 무리들을 크게 무찔러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 대산(大山)‧ 사정(沙井) 등의 책(柵)을 빼앗고, 많은 무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어서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복신(福信)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에 바짝 닿아 있는 데다 높고 험하며, 또 요충(要衝)의 위치라 하여 군사를 증원시켜 지켰다.

인궤(仁軌)는 신라(新羅)의 군사를 이끌고 야음(夜陰)을 타 성(城)밑에 바짝 다가가서 사면에서 성첩(城堞)을 더위잡고 기어 올라 갔다. 날이 밝을 무렵 그 성(城)을 점거하여 8백명의 머리를 베어 마침내 신라(新羅)의 군량운송로를 텄다.

인원(仁願)이 이에 증병(增兵)을 주청(奏請)하니, 조서(詔書)를 내려 치(淄)[주(州)]‧ 청(靑)[주(州)]‧ 내(萊)[주(州)]‧ 해(海)[주(州)][註@057]의 군사 7천명을 징발하여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웅진(熊津)으로 가서 인원(仁願)의 무리를 도와주게 하였다.

이때 복신(福信)은 벌써 병권(兵權)을 모두 장악하여 부여풍(扶餘豊)과 점점 서로 시기하여 사이가 나빠지고 있었다.

복신(福信)은 병을 핑계로 굴방(窟房)에 누워서 부여풍(扶餘豊)이 문병오기를 기다려 덮쳐 죽일 것을 꾀하였다. 부여풍(扶餘豊)은 [그러한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그의 심복들을 거느리고 가서 복신(福信)을 덮쳐 죽이고, 또 고려(高[구,句]麗)와 왜국(倭國)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여 관군(官軍)을 막았다.

손인사(孫仁師)가 중도(中道)에서 [부여풍(扶餘豊)의 군대를] 맞아 쳐 무너뜨리고 드디어 인원(仁願)의 무리와 합세하니, 병세(兵勢)가 크게 떨쳤다.

이에 인사(仁師)‧ 인원(仁願) 및 신라왕(新羅王) 김법민(金法敏)은 육군(陸軍)을 이끌고 진군하고, 유인궤(劉仁軌) 및 별수(別帥) 사상(社爽)‧ 부여융(扶餘隆)은 수군(水軍) 및 군량선(軍糧船)을 이끌고 웅진강(熊津江)에서 백강(白江)으로 가서 육군(陸軍)과 회합하여 함께 주류성(周留城)으로 진군하였다.

인궤(仁軌)가 백강(白江)어귀에서 부여풍(扶餘豊) 의 무리를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척을 불사르니, 적들은 크게 붕괴되고, 부여풍(扶餘豊)은 몸만 빠져 달아났다.

위왕자(僞王子) 부여충승(扶餘忠勝)‧ 충지(忠志) 등이 사녀(士女) 및 왜(倭)의 무리를 이끌고 함께 항복하니, 백제(百濟)의 모든 성(城)이 다시 귀순하였다. 손인사(孫仁師)‧ 유인원(劉仁願) 등이 철군을 하여 돌아왔다.

조서(詔書)를 내려 [유(劉)]인원(仁願) 대신 유인궤(劉仁軌)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이에 부여융(扶餘隆)에게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제수(除授)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내어, 신라(新羅)와 화친(和親)을 맺고 남은 무리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二年七月,仁願、仁軌等率留鎮之兵,大破福信餘衆於熊津之東,拔其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殺獲甚衆,仍令分兵以鎮守之。福信等以真峴城臨江高險,又當衝要,加兵守之。仁軌引新羅之兵乘夜薄城,四面攀堞而上,比明而入據其城,斬首八百級,遂通新羅運糧之路。仁願乃奏請益兵,詔發淄、青、萊、海之兵七千人,遣左威衛將軍孫仁師統衆浮海赴熊津,以益仁願之衆。時福信旣專其兵權,與扶餘豐漸相猜貳。福信稱疾,卧於窟室,將候扶餘豐問疾,謀襲殺之。扶餘豐覺而率其親信掩殺福信,又遣使往高麗及倭國請兵以拒官軍。孫仁師中路迎擊,破之,遂與仁願之衆相合,兵勢大振。於是仁師、仁願及新羅王金法敏帥陸軍進,劉仁軌及別帥杜爽、扶餘隆率水軍及糧船,自熊津江往白江以會陸軍,同趨周留城。仁軌遇扶餘豐之衆於白江之口,四戰皆捷,焚其舟四百艘,賊衆大潰,扶餘豐脫身而走。偽王子扶餘忠勝、忠志等率士女及倭衆並降,百濟諸城皆復歸順,孫仁師與劉仁願等振旅而還。詔劉仁軌代仁願率兵鎮守。乃授扶餘隆熊津都督,遣還本國,共新羅和親,以招輯其餘衆。

 

 


삼국통일전쟁사

–  노태돈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9.02.25

 

여기서 말하는 백강이 어느 강인지는 금강 하류설과 동진강설이 그간 평행선을 그어왔다. 이 문제는 주류성의 위치 비정과 직결된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도 한산 건지산성설, 홍성설, 부안의 우금산성설, 연기 당산성설 등이 있다.

……

그런데 백강구 전투를 묘사하여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海水皆赤)”라 하였으므로 전투는 바다에서 벌어졌다. 금강 하구는 바다로 이어지며, 금강 하구와 동진강 · 만경강 하구는 바다 쪽에서 볼 때 같은 해역에 속하는 근접 지역이다. 당시 신라 · 당 해군과 왜의 해군이 이 지역에서 진을 쳤을 것이니, 진을 친 구체적인 지점에서 약간의 다름이 있을지라도 넓게 보면 금강 하구 해역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한편 8월 17일 신 · 당군이 주류성을 포위하였으며, 170여 척의 당 수군은 백강구에 이르러 육군에 공급할 군량을 하역한 후 진을 치고 바다로부터 주류성을 구원하러 진입하려는 적병, 즉 왜병을 대기하였다. 27일 왜 수군이 백강구에 도달하여 주류성에서 온 일부 왜군 및 부흥군과 합세하였다. 백제의 기병이 강어귀 언덕에 포진하여 왜선을 엄호하였다. 이어 왜 선단이 당 수군에게 선공하였으나 ‘불리하여 물러섰다’. 당 수군은 진을 지키며 추격하지 않았다. 일종의 탐색전인 셈이었다. 양측 수군의 군세를 보면, 당군의 병선이 170척 왜군은 400척이었다. 당의 병선은 대형인 듯하고, 왜선은 상대적으로 소형이었다.

다음날 본격적으로 접전이 벌어졌다. 신라 기병이 백제 기병을 공격하였으며, 왜의 해군이 당 해군에 돌진하였다. 구체적으로 이 날의 해전을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일본 장수들과 백제왕은 기상을 살피지 않고 서로 일러 말하기를 “우리들이 앞다투어 싸우면 저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고 하면서, 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대오가 어지럽게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당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일본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많고 배가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에치노다쿠쓰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왕 풍장이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런 기록을 통해 백강구 전투에서 왜군이 패배한 원인을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당군은 8월 17일 백강구에 도착하여 대기하면서 주변 환경을 숙지하고 전술을 준비한 데 비해, 뒤늦게 도착한 왜의 수군은 기상조건이나 조수 등에 관한 고려 없이 전투에 들어간 전술적 실책이 지적된다. 이 전투에 대해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그득하였고” “바닷물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라고 하였는데(구당서, 유인궤전) 이는 왜선이 화공(火攻)에 큰 타격을 입었음을 말한다. 화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풍향이다. 바람의 힘을 업지 않은 화공은 큰 효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기상을 살피지 않고’ 근접전을 벌였다는 것은 곧 화공 대비책을 고려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둘째, 당군은 진을 형성하고 일정한 전술에 따라 절도 있는 움직임을 전개한 데 비해 왜군은 용감히 돌격해 단병접전(短兵接戰)으로 승부를 결정지으려 하였다. 이는 당일 개개 병사나 장수의 취향에 따른 결과로 볼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양측의 군대 편성과 훈련 과정의 차이도 연관되는 문제이다. 당시 왜군은 기본적으로는 국조(國造) 등 지방 세력가 휘하의 군대를 연합한 것인데, 이들 부대는 각 지역 유력가와의 동족적 결합과 인격적 예속관계를 내포한 공동체적 유제가 강하게 작용하고 그에 비례하여 엄격한 상하지휘체계가 약한 군대였던 데 비해, 당군이나 신라군은 국가가 징발 편성하여 훈련한 군대이다. 그에 따라 후자는 일원적인 지휘체계에 바탕을 둔 군령에 따라 지휘되었고, 엄격한 군율에 따른 집단적 진퇴 훈련이 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전자는 그런 면이 부족하였다고 여겨진다. 그에 따라 전자는 개병 전투에선 강하나 진형(陳形)을 형성하는 대규모 집단 전투에선 약함을 노출하게 되었다.

……

당시 왜군 부대의 성격을 지방 유력자 휘하 부대들의 임시적 연합이라 보는 그간의 설은 백강구 전투에 관한 구체적 기사에 입각한 것이 아니고, 이 무렵까지 왜국의 군대 동원 형태와 성격 이해를 토대로 설명한 것으로서, 결과론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논리적 비약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겠다. 그러나 당시 왜국은 율령제 정착 전이다. 아직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왜국의 군대가 지닐 약점 지적은 그것이 왜군이 패전한 이유의 전부일 수는 없지만, 이유의 한 부분임은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셋째, 앞서 보았듯이 부흥군 내부에선 복신의 처형에 따른 분열과 갈등이 있었다. 게다가 왜군과 부흥군 사이의 갈등과 불협화도 상정할 수 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전투력 저상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 당군과 신라군은 오랜 전란을 치르면서 단련된 군대인 점 또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이다.

 

넷째, 함선의 차이를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당시 당은 견고한 대형 군선을 건조하여 수전에 사용하였다. 이 시기 당의 주력함은 루선(樓船), 몽충(蒙衝), 주가(走舸), 유정(遊艇), 해골선(海鶻船) 등이다. …… 위의 『일본서기』 기사에서 “배가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고 한 상황에서, 당군이 화공과 함께 우수한 군선으로 당파작전을 수행하여 왜선을 격파하였던 것 같다.(해골선이 백강구 전투에 투입되었는지는 전하는 바 없으나, 宋代에 편찬된 『武經總要』戰略考에서 백강구 전투를 상세히 다루고 있어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이때 당의 함선이 170척인 데 비해 왜는 400여 척에 달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왜의 군선이 상대적으로 소형이었던 것 같다. 이 또한 당파작전을 효율적으로 전개할 수 있게 한 요소였다.

 

그 다음 백강구 전투에 한번쯤 고려할 점은 이 전투가 지닌 비중과 의의에 관한 이해이다. 백강구 전투의 의의를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판가름하는 결정적 회전이었다고 보는 시각은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다. 즉 이 전투의 주력이 당군과 왜군이었음을 강하게 의식하여, 마치 임진왜란이나 청일전쟁과 대비하여 고대 중국세력과 일본 세력이 한반도에서 자웅을 겨룬 전투인 것처럼 인식하려는 것은 전투의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물론 이 전투는 백제 부흥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를 고비로 왜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완전 물러나게 되니 고대 한일관계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 전투 패배 이후 일본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인 이른바 율령체제를 형성하였던 만큼, 이 전투가 일본사 전개에 한 단락을 짓는 계기인 것은 사실이다. 역사적 사건은 그것이 미친 영향에 따라 평가되는 면을 지닌 만큼 백강구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중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전투는 당에게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투는 아니었으며 신라에도 주된 전장은 아니었다. 전투 규모도 양측 모두 실제 동원한 병력이 만 수천 명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정도였다. 무엇보다 백강구 전투에 관한 과도한 강조는 그 해에 벌어진 백제 부흥전쟁의 주전장이 주류성 공략전이었음과 신라군의 존재를 홀시하게 하고, 신라는 피동적 존재로 파악하는 역사인식을 낳게 하는 면이 있다. 이는 백강구 전투의 실상이나 그 뒤의 역사 전개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백강구 전투 이후 많은 수의 백제인이 왜로 망명하였다. 백제 지배층뿐 아니라 일반 민중도 상당수 바다를 건너갔다.

……

백강구 전투 이후 망명한 그들의 일본에서의 삶은 비록 전문인으로서의 능력에 대한 높은 평가가 큰 힘이 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일본 조정의 배려에 의지하여 이루어졌다. 일본 황실에 기생하여 내일을 꾸려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이 지닌 숙명이었다. 그들은 백제 부흥과 고국 복귀를 바랐지만, 자력으로 구체화할 역량은 없었다. 그들이 이를 열망할수록 실현 가능성을 일본세력의 한반도 개입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일본 조정이 한반도에 관심을 유지하게 깊은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고, 이를 위해 한반도가 이른 시기부터 일본 천황가에 종속되었다는 역사상 구축에 적극 나섰다. 그들이 돌이켜 백제 존립 당시의 백제와 왜, 그리고 왜와 가야나 신라와의 관계사를 정리 기술할 때 취하였을 입장의 큰 틀은 짐작할 수 있다. 이른바 백제삼서(百濟三書)는 이들의 저술이거나 그들의 손을 거쳐 수정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런 저술은 『일본서기』의 내용 구성에 크게 작용하였다. 또한 『일본서기』는 그 뒤 일본인들의 대외의식, 특히 대한국 인식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백강구 전투에서 흘린 백제인과 왜인의 피의 저주는 천수백 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작용하여 한 · 일 양국인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  박노자 / 한겨레출판 / 2010.09.27

 

민족주의 사학에 있어 ‘우리’ 영토에서 이뤄지는 외국군과의 싸움은 늘 의미심장하다. ‘무장한 타자’에게 저항하다가 짓밟혔다면 ‘국치’를 중심으로 하여 ‘피해자들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고, 외국군을 이겼다면 ‘국민적 자랑’을 구심점으로 삼으면 된다.

……

 

교과서에 딱 한 줄 언급된 ‘백강 전투’

……

우리로 하여금 ‘튼튼히 뭉치게끔’ 만드는 ‘성공적’ 외침의 수치나 격퇴된 외침의 자랑이면 일단 교과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외침’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외국군의 한반도 진입은 비교적 소홀히 다뤄진다. 식민화가 입힌 상처 때문인지 특히 고대 · 중세의 왜국(일본)과의 각종 군사적 관계들은 무시된다. 예컨대 663년 백제 부흥운동을 도와주려던 왜국의 시도 그리고 그 시도로 촉발된 663년 8월 27~28일의 ‘백강 전투’에 대한 국사 교과서의 기록은 단 한 줄로 처리된다. 신라-당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의 대대적인 싸움이었는데도 왜 수군이 금강(백강) 입구까지 왔다가 패하여 쫓겨갔다는 간단한 서술로 끝난다. 약 4만 2000명의 왜인이 참전하고 1만여 명이 전사한, 고대사를 통틀어 왜국이 외부에서 당한 가장 큰 규모의 패배였는데 우리 국사 교과서는 이에 대해 침묵한다. ‘숙적’ 왜국이 ‘침략’이 아닌 동맹국 백제에 대한 원조를 단행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통상적 일본관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일본은 무엇 때문에 동아시아 최대 강자인 당나라와의 일전까지 불사하면서 백제 부흥운동을 도우려 했던가? 650년대부터 660년대 초까지 백제와 왜국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했기에 당나라의 일본 열도 침략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까지 무릅쓰고 백제 구원에 나섰던가?

 

6세기 초부터 일본 열도로의 선진 문물 수입 통로가 된 백제는 왜국의 ‘으뜸가는 대륙 파트너’로서 자리를 굳혔지만 양쪽 지배층들의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왜국과 백제의 우정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6세기 말에 수나라의 천하통일로 위기에 빠진 고구려는 왜국과의 관계 강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해 승려 혜자를 성덕태자(聖德太子,쇼토쿠 태자, 573~621)의 스승으로 파견하는 등 ‘대왜 관계 관리’에 열심이었는데, 왜국 지배층은 이 움직임에 관심있는 태도를 보였다. 또 645년에 쿠데타로 집권한 급진개혁 세력은 당나라와 당나라의 동맹국인 신라를 중앙집권화 지향의 개혁 모델로 삼아 신라 지배자들과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대일 관계라면 일단 소홀히 다루는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일본서기』[효덕천황(고토쿠천황) 3년]에 따르면 647년에 신라의 실세인 김춘추가 직접 도일해 일본 귀족들에게 ‘아름답고 쾌할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백제를 없애려는 김춘추, 김유신 일파로서는 백제의 오랜 동맹국인 왜국을 백제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백제를 고립시키려는 신라의 적극적인 대왜 외교가 결국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본적으로는 왜국의 내부 사정이 크게 작용했다. 나중에 천지천황으로 등극하는 나가노 오에(中大兄, 626~672) 황자는 백제 계통으로 추정되는 유수의 호족인 소가(蘇我)씨와 긴밀한 통혼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런 그가 649년부터 왜국의 실권을 잡게 되어 친백제 경향이 친신라 경향보다 훨씬 우세해졌던 것이다. 나가노 오에 뒤에 있는 소가씨 등의 호족들에게 백제란 ‘우리 조상의 땅’이었을 것이란 점을 잊으면 안된다. 거기에다 신라와 당나라의 너무나 빠른 ‘친해지기’는 왜국 지배자들에게 불안을 심어주었다. 649~651년에 당나라 관복제도와 궁중의례 등을 빨리 받아들인 신라의 사절 사찬 지만(知萬)이 651년 왜국에 오자(『일본서기』효덕천황 백치2년) 왜국 지도자들이 이를 불쾌하게 여겨 ‘신라 침공’까지 들먹였다. 저들이 제 딴에는 왜국 중심의 국제질서의 일부분으로 파악하려 했던 신라가 이미 왜국의 국력을 무한히 능가하는 당대 동아시아의 ‘중심’ 당나라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다는 게 못마땅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구다라나이, 백제 것이 아닌 하찮은 물건

660년 9월 신라와 당나라의 공격에 백제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왜국에 전해지자 ‘공포의 무드’가 조성됐다. 한반도를 왜국·일본의 ‘피해자’로만 생각하는 데 익숙한 우리로선 다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660년대 왜국 지배자들은 당나라와 신라가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일본열도까지 침공할 것을 두려워해 각종 방어시설의 축성에 애를 많이 썼다. 일본에서 한반도 국가를 ‘잠재적 침공세력’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처럼 왜국으로선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 다음의 군사적 목표로 일본열도를 정할 것도 두려웠지만, 300여 년 동안 왜국에 온갖 선진 문물을 보내준 ‘세계로의 창’ 백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어로 백제를 ‘구다라’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일본어에서도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사소한, 별로인, 좋지 않은, 하찮은)라는 말이 있다. 속설이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지만 이 단어의 어원을 ‘백제의 것이 아닌 하찮은 물건’이라는 표현과 연결시키려는 이들도 있다. 그 진위를 알 수 없지만 그 속설이 전해온 것 자체는 ‘백제’에 대한 일본인의 특별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대우를 받아온 백제가 돌연히 국망을 맞이한 것은 일본 지배층으로서는 충격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들은 당장에 백제 부흥 운동의 지원에 나서지는 않았다. 백제 부흥 운동의 지도자인 복신(福信)이 이미 660년 10월 왜국에 ‘인질’(즉, 백제 왕실의 상주 대사)로 잡혀 있던 왕자 부여풍(扶餘豊·?∼669)의 귀환을 요청했지만, 왜 조정은 661년 9월이 되어서야 이 요청을 들어주었다. 왜국으로서는 천하 최강인 당나라에 도전장을 던지다는 것이 그만큼 내리기 힘든 결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정치적 결단이 내려진 뒤 왜국은 백제인들의 저항운동에 파격적인 원조를 해주었다. 662년 1월에 화살 10만 척과 종자용 벼 3천 석을 보냈는가 하면 같은 해 3월에 피륙 300단을 추가로 보냈다(<일본서기> 덴지 천황 원년). 왜국 외에 외부 후원을 받을 길이 없었던 백제 부흥군으로서는 귀중한 선물이었을 것이다. 왜국이 백제 지원에 나서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린 배경에는 연개소문의 군대가 660∼662년 당나라와 신라의 침입 시도를 좌절시켰다는 소식을 빠르게 접한 이유도 있었다. 동북아의 정통 ‘노(老)강대국’ 고구려와 같이 벌이는 작전이라면 크게 손해를 볼 일이 없다는 게 왜국 지배층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왜국에서는 부흥운동 내부의 각종 내홍과 모순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등 상황 전개를 신중히 예의주시했다. 당시에 수집된 정보의 일부가 『일본서기』에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없는 이야기지만, 『일본서기』에 따르면 부여풍에게 잡혀 가죽 끈으로 손바닥이 꿰여 묶인 복신은 반대파 귀족에게 침을 뱉으면서 ‘썩은 개’ ‘미친 노예’라고 크게 욕하는 등 장렬하게 고통스러운 죽임을 맞이했다. ‘좋은 장군’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복신의 죽음이 백제 부흥 운동을 크게 약화시킬 것이란 게 왜국 쪽 판단이었지만 백제 원조 계획은 바뀌지 않았다. 그만큼 왜국 지배층으로서 백제의 생존은 생사 문제로 인식됐던 것이다.

 

백제 저항운동에 파격적인 원조

663년 8월27∼28일 백강 전투에서의 패배는 왜국으로서는 ‘참패’에 가까웠다. 왜국의 전선 800여 척은 170여 척도 되지 않는 당나라 수군을 감당하지 못해 전선의 절반 정도를 잃고 말았다. 불타는 왜국 전선에서 나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환하게 하고 바닷물을 붉게 했다’는 게 『삼국사기』(28권)의 평이다. 수적으로 우세한 왜의 수군이 당나라와 신라에 이렇다 할 만한 손실을 입히지도 못한 채 궤멸되고 만 것은 선박 건조 기술이나 해군 전략, 군사 훈련 차원에서 그 당시 왜국이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더 이상 왜국의 지원 능력을 믿지 못하게 된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망갔지만, 사면초가에 빠진 고구려도 그에게 현실적 지원을 해줄 여력은 없었다. 백제 부흥운동의 가장 큰 기대는 역시 왜국의 지원이었는데, 왜 수군의 완패로 그 기대가 무너져 부흥운동의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왜국도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대륙으로의 출병이 백해무익하다는 교훈, 둘째 한반도의 새로운 패권 세력인 신라와 친해지지 않으면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이 왜국을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교훈이었다. 그리하여 백제 부흥운동 세력들이 완전히 패배하자 왜국은 서둘러 665년부터 신라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그 뒤로는 신라의 실력자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 등 8세기 초까지 당나라와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지만 신라와는 적극적으로 교류를 이어나갔다. 원효, 경흥(憬興)과 같은 신라 승려들이 나중에 본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질 수 있었던 정치·외교사적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사에서 ‘외침’이 잦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무장해서 한반도에 들어오는 모든 ‘타자’들이 꼭 ‘침입자’만은 아니었다. 이미 고대부터는 한반도의 여러 정치세력들이 외부의 군사적 지원 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이런 지원에 엄청난 기대를 걸었다가 파산을 당한 경우가 바로 663년의 백강 전투다. 나중에 식민 모국이 된 일본의 전신인 왜국이 참전한 전투라고 해서 그 의미를 과소평가해야 하는가. 사실 백강 전투야말로 일본의 대륙 간섭 중지와 신라의 한반도 지배 등 이후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확정되는 데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역사 스페셜 3

–  KBS 역사스페셜 / 효형출판 / 2001-08-20

 

『삼국사기』「백제본기」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당시 왜(倭)는 400척의 배에 27,000명의 군대를 보냈다. 『일본서기』는 663년 8월 17일 하루 동안의 전투를 이렇게 전한다.

당唐의 장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백강)에 진을 쳤다. 일본 수군 중 처음 온 자와 당의 수군이 교전을 벌였다. 일본이 불리해 물러나자 당은 진을 굳게 지켰다.

……

그러나 663년, 부흥군을 이끌던 부여풍과 복신 사이에 내분이 일어난다. 「백제본기」에는 “복신은 부여풍과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게 되었다. 복신은 병을 핑계로 굴 속에 누워서 풍이 문병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죽이려고 했다. 풍이 이를 알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부여풍이 수하 장수를 죽인 것을 안 신라가 곧바로 주류성을 빼앗으려 했고, 이에 27,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지원군을 보내 신라를 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왜군은 출병한 지 보름 만에 나 · 당 연합군에 대패한다.

「백제본기」는 당시 상황을 “(신라가) 왜군과 맞닥뜨려 4번 모두 이기고 배 400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띠었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는 이 싸움에서 패한 부여풍이 고구려로 망명한 것으로 전한다. 백강구 전투에서 구심점을 잃은 백제는 이후 힘없이 무너졌다. 부흥 운동의 거점이던 주류성도 백강구에서 패한 지 불과 열흘 뒤 나 · 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된다. 663년의 백강구 전투는 백제 최후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3년 동안 지속된 부흥운동이 막을 내린 뒤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는 큰 변화를 맞는다. 당과 신라가 주도권을 쥐게 되고 668년 결국 고구려까지 멸망하면서 한반도엔 신라의 시대가 도래한다.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바꿔 놓은 백강구 전투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왜의 참전이다. 당시 백제는 이미 멸망한 상태였고 부흥군만이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신라와 맞서고 있었다. 왜는 그런 백제를 적극 지원하는데, 이를 두고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백제가 왜의 속국이 아니라면 멸망한 나라에 그만한 지원군을 보낼 리 없다고 주장한다.

……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백강구 전투에서 패배하고 2년 뒤인 665년, “달솔(達率) 답발춘초(答㶱春初) 등을 보내 오오노 성을 쌓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달솔’은 백제의 지방 행정관이다.

백제의 몰락은 일본 열도에 군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런 상황에서 왜는 백제 기술자를 동원해 나 · 당 연합군이 침략해 올 곳으로 예상되는 쓰시마에서 북큐슈 · 세토 내해와 왕도에 이르는 요충지에 10여 개의 성을 쌓는다. 시가현 오오츠시(大津市)의 주택가 한켠,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패한 직후 천황마저 아스카에서 이 오오츠 궁으로 옮긴다. 침략에 대비해 수도를 내륙 깊숙이 옮긴 것인데 당시 왜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 지를 알 수 있다.

백제가 멸망하자 그 다음 단계는 왜가 아니냐는 두려움 때문에 왜의 대외 관계는 폐쇄적이면서 자위적인 방향으로 전환된다. 그 영향으로 왜는 국제 사회에 당분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체 개혁을 추진한다.

……

백강구 전투 이후 폐쇄적인 외교 정책을 펴던 왜는 오히려 율령 체제를 확립하고 국가적인 기틀을 다진다. 그것은 백제와 왜 사이의 친밀한 외교 관계의 결실이자 백제 멸망 이후에도 일본에서 선진 문화를 꽃피운 백제인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혹자는 백제 문화의 정수를 보려면 일본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에 있었던 백강 전투를 주목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한국인

–  김병훈 / 반디출판사 / 2006-05-20

 

서기 663년 8월 27일, 28일 우리나라 금강하구에서 왜의 수군과 당 수군이 대격전을 벌였다.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왜군이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함락시킨 당군과 회심의 일전을 벌인 것이다. 육지에서는 백제부흥군이 왜군의 승리를 기원하고, 신라군은 당군을 응원하고 있었다.

이틀 동안의 격전에서 왜군은 패했다. 대군이 거의 전멸하는 참패였다. 이로써 백제부흥운동의 기세는 꺾이고 왜-백제 연합군과 당-신라 연합군이 맞선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전은 당-신라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9월 7일 주요 거점인 주류성이 항복하면서 백제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1천3백여 년 전 백제가 멸망할 때 벌어진 극적인 사건이다. 교과서에는 이 이야기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에 “이 때, 왜의 수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패하여 쫓겨갔다.”고만 적혀있다.

『한국사신론』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660년 의자왕이 항복한 후 백제지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을 설명하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백촌강 전투’를 언급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백제부흥을 위해 일본의 대군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삼국사기』의 기록도 매우 간략하다.

……

『삼국사기』의 집필자 김부식을 비롯한 당대 역사가들은 백촌강 전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교과서에 반영된 것인지 모른다. 백제부흥운동과 관련한 이때의 상황은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상세히 나와 있으며 일본이 적극적으로 백제부흥운동에 나서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다.

……

『일본서기』에 상당히 자세한 내용이 담겨있다. 이 기록이 없다면 백제 멸망 뒤에 일어난 백제부흥운동을 알기 어렵다.

대전투가 정확히 어디서 벌어졌는지 모르나 금강이 서해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하구 일대로 생각된다. 흔히 ‘백촌강 전투’로 부르는 것도 내용이 풍부한 『일본서기』의 영향이다. ‘백강구 전투’라고도 한다.

일본은 왜 전력을 다해 백제부흥운동에 뛰어들었을까.

파견 병력만도 3만2천 명이 넘는다고 하고 천황이 사망한 마당에 즉위식도 치르지 않고 오로지 남의 나라 전쟁에 매달렸다. 당시 일본이 거의 모든 국력을 쏟아 부었으며 무리한 전쟁으로 ‘진신(壬申)의 난'(672)을 초래해 덴지(天智) 천황 정권이 붕괴했다는 역사적인 평가를 보면 더욱 아리송해진다. 일본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지 ‘역사의 미스터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한국 쪽에서는 당시 일본이 백제의 핏줄을 이은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로 모국을 구하는 전쟁에 물불을 가릴 수 없는 처지였다고 말한다. 사이메이 천황이 백제 의자왕의 누이동생이라는 근거가 빈약한 이야기까지 나온다.

일본에서는 반대로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어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나섰다고 설명한다.

어느 쪽 설명이 진실일까.

이렇게 물으면 둘 중 하나는 진실이라는 착각이 성립한다. 양쪽 다 명확한 근거없는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어쨌든 당-신라 연합군과 이에 맞선 왜-백제 연합군의 대전투라니 고대 동아시아 역사는 우리가 배웠던 것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긴박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이겼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덴지 천황이 풍을 백제왕으로 명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 됐을 지도 모른다.

고대 한반도의 역사는 이처럼 일본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특히 가야, 백제에 대한 역사기록은 『삼국사기』,『삼국유사』같은 국내 역사책보다 『일본서기』등 일본 역사책에 더 많이 남아있다. 또 일본이 한반도 역사에 개입한 주요 사건은 백촌강 전투만이 아니다. 저 유명한 광개토왕비에도 ‘왜(倭)’가 중요한 전쟁 상대로 선명히 적혀있고,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왜’가 수없이 등장한다.

 


역사를 통한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

–  김기봉 / 푸른역사 / 2006.02.28

 

국가와 민족의 기원을 말할 때 중요한 것이 국호다. 그래서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을 표상하는 국호가 언제 어떻게 성립했는지를 교과서는 밝혀야 한다. 일본 역사 교과서에는 <일본이라는 국호의 성립>이라는 독립된 장이 있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나타나는 결정적인 계기는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의 패배다. 3백 년간 친교관계에 있었던 백제와의 단절은 당시 일본 열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당과 신라의 내습에 대한 위기의식은 거국적인 방위를 위한 천황제 율령국가를 성립시키고, 이로써 일본이라는 국호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인의 기원은 무리하게 1만 수천 년 전의 조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일본이라는 국가의 성립은 7세기 말부터라고 쓰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 국사 교과서에는 한국이라는 국호가 언제 어디서 기원하는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만들어진 나라 일본

–  마쓰오카 세이고 / 이언숙 역 / 프로네시스 / 2008.06.10

 

이렇게 일본 열도의 통일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618년에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唐나라가 들어섰는데, 신라는 바로 이 당의 세력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당나라도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를 정복하고 싶어했지만 좀처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때에 신라의 김춘추가 당나라가 빼든 공격의 칼날을 고구려에서 백제로 돌리게 하여 당을 통해 백제를 정복하는 외교 전략을 도모했다. 이 교묘한 외교 정책은 성공했다.

백제는 이러한 계획을 눈치 채고 일본에 원조를 요청했다. 일본은(아직 일본이라기보다 왜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백제와 연합하여 당 · 신라 연합군에게 대항했다. 이렇게 양측이 격돌하게 된 전투가 663년의 백촌강白村江 전투다. 68세인 여제女帝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은 두 아들, 나카노오에中大兄 왕자와 오아마大海人 왕자를 데리고 북규슈로 향했다. 그러나 당 · 신라 연합군은 백제 · 왜 동맹군을 산산조각 내듯 대파했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백제는 멸망하고, 일본(왜)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 신라는 이를 기회로 당과 더욱 강력하게 연합하여 고구려를 물리치고 한반도를 통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순간 ‘왜’는 마침내 ‘일본’으로 성장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일본을 자립하게 만든 것은 외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와 일본은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구당서舊唐書』에는 “일본은 왜국과는 다르다. 이 나라는 해가 뜨는 쪽에 있으므로 그 이름을 일본이라한다”고 나와 있고, 『신당서新唐書』에는 “왜라는 이름이 좋지 않으므로 새로이 그 이름을 일본이라 한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이 일본을 지배한 인물이 덴무 천황天武天皇(오아마 왕자)이었다.

 

조금 복잡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일본의 역사 전체도, ‘일본이라는 방법’도, 오모카게의 변천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중국 · 한반도 · 왜는 운명 공동체였기에, 신라의 통일은 일본의 자립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중국의 동아시아 경영에 나타난 변화, 이에 따른 한반도의 급격한 변화, 이로 인해 휘몰아친 7세기 초의 백촌강 전투, 이 전투에서 당 · 신라 연합군의 승리, 그리고 백제와 일본의 패전, 이로써 왜가 일본으로 성장했다는 점, 마치 현대의 태평양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은 패전을 극복하고 성장을 이룬 것이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  김시덕 / 메디치미디어 / 2015.04.05

 

…… 이에 따라 조선을 강제 병합한 20세기 전반에 일본은 임나일본부의 거점으로 그려지는 가야 지역을 발굴 혹은 도굴했으나 그 역사적 실체를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최근 들어 가야 지역이 아닌 전라남도의 영산강 지역에서 일본의 무사들이 묻힌 것으로 보이는 ‘왜계倭系’ 무덤이 발굴되고 있다. 이들은 중국의 『진서晉書』 열전에 보이는 마한馬韓의 잔존 세력 ‘신미제국新彌諸國’이 백제에 저항하기 위해 고용한 용병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20세기 전기에 일본이 만들어낸 ‘임나일본부설’과는 무관하게, 일본열도의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적 움직임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는, 마치 일본열도의 통일 정권이 이들을 주도적으로 한반도 남부에 파견한 양 후세에 정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일본서기』 등의 고대 일본 역사서에서 임나일본부의 창세기로서 존재하는 것이 ‘진구코고神功皇后의 삼한 정벌’ 전설이다. 이 전설을 간단히 설명하면, 진구코고의 남편인 주아이텐노仲哀天皇가 규슈 지역에 군사 원정을 갔다가 한반도를 정복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도 무시했다. 그 때문에 남편이 죽자, 진구코고가 이 신탁을 수행하여 신라 · 백제 · 고구려를 정복, 일본의 속국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진구코고라는 사람의 실존 여부, 과연 이 시기 일본에 이처럼 대규모의 해외 원정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단일한 중앙집권 정권이 존재했는가의 문제를 포함하여 이 전설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전근대 일본은 이 전설을 통해 한반도 남부 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했고, 국제관계를 설명해왔다.

이처럼 일본이 진구코고의 삼한정벌 전설을 통해 유라시아 동부에서의 활동을 정당화하려고 했다면, 그 활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러 온 일본의 수군이 당나라 군대와의 전쟁에서 패한 663년 8월의 백강 전투였다. 당시 신라 · 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지왕 등의 지배층을 당나라로 끌고 가자, 백제 부흥군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귀국시키고 일본 세력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그리하여 백제 부흥군이 육지에서 신라군에 맞서고, 일본 수군은 오늘날 금강 근처에서 당의 수군과 맞섰다. 육지와 바다를 피로 물들일 정도로 치열한 전투 끝에 신라 · 당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백제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됐다. 이로써 일본열도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는 사라졌고, 대륙에 거점을 확보하고자 한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시도는 유라시아 동부의 정세에 큰 영향을 주진 못했지만, 한반도의 분열 상태라는 불안정 요인이 제거돼 이후 신라 · 당 · 일본은 국내외적으로 안정을 유지했다.

 


한 중 일의 역사와 미래를 말한다

–  진순신 / 문학사상사 / 2000.06.10

 

<김용운>

1995년은 일본이 패전한 이후 5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일본에 있어서는 이 50년이라는 기간이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시대적인 하나의 매듭이라는 뜻에서의 숫자가 아닙니다. 일본 역사는 50년을 주기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일본의 불교는 백제에서 552년(538년이라는 설도 있음)에 전해졌습니다. 그 후 근 50년이 지난 602년을 전후하여 거대한 사원이 건립됩니다. 율령제가 실시되고, 고대 국가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되지요. 이때 쇼토쿠 태자의 중국(수)에 대한 망상적 외교가 시작됩니다. 그후 50년이 지나 일본은 당시의 군사대국이 되었고, 663년에는 백제를 도우려 백마강까지 출병합니다. 결과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대패했습니다만, 그후 50년이 지난 713년 전후에는 당시 세계 최대의 불상을 건립하고, 『일본서기』, 『고사기』, 『만엽집』을 편찬하는 등 완전히 고대국가로서의 난숙기를 맞이합니다.

 


‘백강전투’ 재조명 한중일 국제학술 세미나

–  전라일보 / 2016-11-03 : http://www.jeolla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96897

 

◎ 김중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장

삼국통일 전투지 기벌포, 옥산·회현면 일대 추정

 

◎ 바이건싱 섬서사범대학교 교수

백제의 멸망은 왜가 한반도 남쪽지방에서 이익을 얻을 수 없음을 뜻하며 결국 왜는 663년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전쟁(3차례 기벌포 전투) 결과 동아시아는 큰 변화를 겪는다. 당나라는 신라의 3국 통일을 인정하고 신라는 당나라 중심의 질서에 가입하는 전제하에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물러났다. 왜는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포기하고 내부 개혁과 중국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백제, 고구려 이주자들로부터 한반도 양식의 견고한 성벽을 쌓는 등 방어에 주력했다.

 

◎ 고미야 히데타카 계명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

일본사에서 백강 전투는 신라·당과 백제·왜의 전투에서 패배한 왜가 당을 모범으로 한 율령국가 형성을 급속히 추진하는 계기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

세 번째로 653년 경 왜는 백제를 견당사 파견 도움의 대상국으로 삼았고 659년에는 친백제외교를 펼쳤다. 이 때문에 사신이 당나라에서 돌아오지 못했고 백제를 공격하려는 당나라의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됐다. 결국 왜의 백강전투 참가는 균형외교의 파탄에서 빚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 박영철 군산대 교수

한반도 운명 가름한 세 차례 기벌포 전투

 


<관련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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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 나당전쟁과 토번(티베트)에서 언급했던, 신라의 삼국통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요인 중 하나인 당唐과 토번(吐蕃)의 670년 대비천(大非川) 전투에 대해서 조사했다.

 

비교적 우호적 관계였던 당 태종과 토번의 송첸캄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자 토번은 고구려와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던 당나라를 대상으로 당의 실크로드 헤게모니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향후 200년 동안 계속되는 싸움을 통해 50년 가량을 토번이 실크로드를 장악했는데, 그 중요한 싸움들 중 처음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이 대비천 전투이다.

 

670년 당 고종(高宗)은 설인귀(薛仁貴)를 나살도행군총관(邏薩道行軍總管)으로 임명하고, 토번을 공격하게 했다. 토번의 명장 가르친링은 토번군을 이끌고 칭하이 호(靑海湖) 남쪽의 대비천(大非川)에서 맞서 싸워 당군을 궤멸시키고, 설인귀 등 주요 장수들을 사로잡았다. 가르친링은 포로가 된 당나라 장수들을 훈계하고 당나라에 돌려보냈는데 이 전투를 대비천 전투라고 한다. 설인귀는 귀국 후 대비천 전투에서의 패전 책임을 지고 한때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대비천에서의 패배로 서역에서의 당나라 위상은 실추되었고, 가르친링은 여세를 몰아 670년에 당나라가 장악하고 있는 서역을 공격했다. 그 결과 당나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속한 중요한 4개 도시인 안서사진(安西四鎭), 즉 카라샤르(焉耆)ㆍ쿠차(龜玆)ㆍ호탄(于闐)ㆍ카슈가르(疏勒)등의 주요 도시들이 토번의 영토가 되어 서역이 토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국경의 완충지대였던 당의 속국 토욕혼도 사실상 멸망되어 수도 장안도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동아시아의 역학구조에도 변화가 왔는데 신라의 한반도 패권, 발해의 건국, 돌궐의 독립, 거란의 성장 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세계사 연표는 :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보았다.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

–  서영교 / 글항아리 / 2015.07.23

 

670년 4월 토번이 서역으로 진격하여 백주 등 18주를 함락시켰고, 우전과 연합하여 구자의 발환성을 함락시켰다. 당 조정은 톈산 남로의 구자 · 우전 · 언기 · 소륵 등 안서 4진을 폐지했다. 토번이 실크로드의 톄진 남로를 장악했다. 그러자 고종은 토번과의 전쟁을 수행할 장군들을 임명했다. 8월에 가서 그들은 병력을 이끌고 칭하이 호에 도착했다. 주력은 동돌궐 군대 11만이었다. 아사나충이 이끄는 동돌궐 군대의 일부는 이전에도 토번과의 전쟁에 동원된 바 있었다.

당과 토번 두 강국의 정면 승부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이 전투 결과에 따라 신라의 운명이 결정될 터였다.

 

 

670년 7월께 당나라 군대 11만이 칭하이 호 부근에 도착했다. 이 염호의 면적은 4340제곱킬로미터로 서울 면적의 일곱 배다. 북쪽에서 여러 하천이 흘러들지만 배출 하천은 없다. 당군은 토번을 이곳에서 몰아내야 서역의 실크로드를 탈환할 수 있었고, 서역의 길목인 하서회랑을 지켜낼 수 있었다. 설인귀가 총사령관이었고 그 아래에 곽대봉과 돌궐 왕족 아사나도진이 있었다. 곽대봉은 설인귀와 같은 반열에 있었는데 전쟁에 투입될 당시에는 설인귀의 부하가 됐다. 그는 설인귀의 명령을 받는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이윽고 당나라 군대는 칭하이 호 남쪽에 있는 대비천에 이르렀다. 그곳은 지금의 칭하이 성 궁허共和 현 서남쪽 체지切吉 평원으로 그 부근에서 고도가 낮은 지역이었다. 설인귀는 이보다 고도가 높은 대비령 고개에 목책을 설치하고 중간 캠프로 활용할 작정이었다. 작전목표 지역은 오해였다. 대비령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멀었다. 중장비와 군수품, 치중輜重을 모두 가져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설인귀는 넓고 평평한 대비령 위에 목책을 설치해 그 안에 물건을 남겨두고 병사 2만으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했다. 그는 경무장한 정예병을 이끌고 빠른 속도로 철야행군해 토번군이 대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습격하려 했다.

 

설인귀는 선발대를 이끌고 가서 하구(적석積石)에서 토번군을 쳤다. 당군이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던 토번군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무너져 수많은 전사자를 냈다. 살아남은 자들은 흩어져 달아났다. 설인귀는 소와 양 1만여 두를 거둬들였고, 북을 치며 서쪽으로 이동해 곧장 오해성을 점령했다. 그는 그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본대를 기다렸다. 하지만 본대는 오지 않았다.

 

전투는 타이밍이다. 곽대봉은 치중을 대비령에 있는 목책에 두지않고 병사들에게 모두 짊어지게 했다. 행군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토번군 20만과 마주쳤다. 토번군은 질서 있고 기강이 잡힌 군대였다. 병력도 많았고 고산에 적응한 데다 충분한 휴식까지 취한 상태였다. 고산지대에서 치중을 가지고 오느라 지친 당군은 토번군과의 싸움에서 제대로 대항해보지도 못하고 궤멸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치중을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

장비와 인력을 모두 상실한 설인귀의 선발대는 암울했다. 일단 오해에서 대비천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토번 군부의 수장 가르친링이 이끄는 토번의 주력군대 40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인귀는 중과부적을 실감했다. 당군은 토번군에 의해 학살당했고, 설인귀는 몸만 겨우 빠져나왔다. 『구당서』 「진자앙전 陳子昻傳」은 그 패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국가가 이전에 설인귀와 곽대봉을 토벌의 장수로 삼았으나 11만이 대비천에서 도살돼 한 명의 병사도 돌아오지 못했다.” 설인귀 등은 가르친링에게 치욕적인 화해를 청했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극소수 병사들의 목숨이라도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해를 바꿔가면서 칭하이 호(청해)에서는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병사들의 죽음이 이어졌다. 여기서 전사한 이름 없는 병사들의 슬픔을 당의 시인 두보杜甫는 이렇게 읊었다.

 

너희들은 보이지 않는가

저 청해 부근에서는 예로부터 백골을 치우는 사람도 없고

새로운 망령은 한이 맺혀 몸부림치고

오래된 망령은 울부짖으며

하늘이 구름비로 축축해질 때

그 목소리는 흑흑 울고 있다

그 목소리는 흑흑 울고 있다

 

 

패장들은 죄인이 됐다. 당 조정에서 대사헌 악언위(彦瑋)가 진상을 조사했다. 설인귀와 두 명의 패장은 결박돼 장안으로 돌아왔다. 장군들을 태운 수레가 나타나자 당나라 군대가 패배했고 실크로드가 토번의 손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고종에게 패전은 폐부를 찌르는 아픔이었다. 아버지 태종이 이뤄놓았던 실크로드 경영권을 아들이 상실했다. 정관의 치로 칭송받던 위대한 황제의 권좌가 그 같은 능력이 결여된 자식에게 계승됐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증명된 것이다. 중앙아시아는 물론 페르시아, 동로마제국의 상인과 사절들이 이 길을 거쳐서 중국을 왕래했으며, 따라서 실크로드 장악과 경영은 그야말로 당 대외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있었다. 향후 당은 주력을 서역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대비천 전투는 실크로드를 놓고 당나라와 토번 사이에 벌어진 150년 전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전쟁이 시장을 지향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나당전쟁의 개시와 그 배경

–  서영교 / 역사학보 제173집 (2002.3)

 

녹동찬祿東贊(가르통첸)은 660년에 당이 한반도 통일전쟁에 개입하자 그 이듬해 천산天山의 투르크계 궁월弓月(Kongul)을 충동하여 당에 반기를 들게 하였으며, 662년에 가서 이를 표면화했다. 토번과 궁월, 카슈가르(Kashrar) 등이 연합한 군대가 카슈가르 남쪽에서 소해정蘇海政이 이끄는 당군과 마주쳤다. 정면충돌로 가지는 않았지만 상호간의 긴장이 고조된 것은 확실하다. 이듬해인 663년에도 토번은 파미르고원의 Balur와 와칸(Wakhan)을 점령하여 그 지배하에 둠으로써 東투르키스탄에 대한 전략적 위치를 선점하게 되었다.

그래도 녹동찬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654년, 657년, 658년, 665년 4회에 걸쳐 당에 사신을 파견했으며, 양국사이의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없었다. 특히 665년의 경우 토욕혼 점령지에 대한 당의 합법적인 인정을 받기 위해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는 당의 속국을 점령하면서도 그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녹동찬이 666년 토욕혼 정벌을 완료하고 귀국한 그 이듬해 사망하자 상황은 급선회한다. 그 자제子弟 가르(喝爾)一家가 669년 9월에 타림분지에 급습을 가했던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당이 지배하던 실크로드 지역에 대한 토번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신당서』권216에도 녹동찬의 아들 4명이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과두체제가 들어서자 이때부터 당의 변경을 침범하기 시작했다고 명기하고 있다.

녹동찬의 경우 前왕의 신임을 받은 신하임이 분명하다. 녹동찬은 당과의 결혼동맹 체결에 중추적 역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보다 앞서 히말라야 산록에 있는 네팔의 공주를 손챈캄포(松贊干布)의 비妃로 맞이하는 일을 성사시킨 바 있다. 그에게는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손챈캄포의 유조를 받아 어린 왕을 보좌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Helmut Hoffman에 의하면 녹동찬의 섭정에 대해 어린 토번왕은 최소한 표면상 반감을 나타내지 않았고, 정국문제에 있어도 그에게 위임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이 과두정을 행할 당시에 토번왕은 친정親政을 할만큼 성장해 있었다. 섭정의 객관적인 필요성이 사라진 때였던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 녹동찬이 죽은 후 그들의 과두정(Oligarch)은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이 군대 장악을 지속화시킬 필요성을 절감케 했을 것이고, 군대에서 그들의 역활이 확대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국내의 관심을 외부로 돌려야 했던 것이다.

실로 669년 9월 토번의 타림분지 급습은 이러한 토번의 국내사정에 의해 비롯되었다. 토번사吐蕃史의 거장 좌등장佐藤長이 가르氏 일가를 주전파主戰派로 명명하고있는 것도 토번의 군사적 팽창정책이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이다. 가르氏의 집정執政시기에 당 · 토번의 전쟁은 지속되었다. 『자치통감』권206을 보면 가르氏가 토번군대를 장악한 후 당은 30여년 간 그 침략을 받게 되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가르氏 정권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세계최대의 강국 당나라와 전쟁을 해야 했고 그 승리의 결실을 재분배하면서 그들의 권위를 고양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당 고종은 토번의 이러한 공세를 막기 위하여 670년 4월 한반도 지역을 관할하던 안동도호부 도호 설인귀를 對토번 전선에 투입했다. 하지만 670년 7월에 그의 군대는 참패하고 말았다. 670년 7월 토번은 설인귀의 10만 대군을 청해靑海 대비천大非川에서 전멸시켰던 것이다. 백전노장 설인귀는 모든 병사들을 잃어버리고 몸만 겨우 빠져 나왔다고 한다. 그 결과 실크로드의 안서사진安西四鎭(카라샤르, 쿠차, 호탄, 카슈가르)이 토번에 떨어졌다. 토번이 당군을 격파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한 이 사건은 전세계에 퍼졌을 것이다.

당 고종, 그에게 실크로드의 상실은 폐부를 찌르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당 태종이 이루어 놓았던 실크로드 경영권은 당 고종이 한반도전쟁에 주력한 사이에 토번에게 고스란히 넘어 갔다. 정관의 치(貞觀의 治)로 칭송 받던 위대한 황제의 권좌가 그 같은 능력이 결여된 자식에게 계승되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증명된 것이다.

 

중앙아시아는 물론 페르시아, 동로마제국의 상인과 사절들이 이 길을 거쳐서 중국을 왕래했으며, 필연적으로 실크로드에 대한 장악과 경영은 그야말로 당의 대외정책의 최우선순위에 있었다. 향후 당은 주력을 서역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670년 3월 약소국 신라가 압록강을 넘어 만주에 들어가 당군을 선제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상황 아래서 이루어졌다. 670년 3월 나당전쟁 발발 시점이 당과 토번의 전쟁의 서막이 된 699년 9월과 일치하고 있다.

 


중국

–  백범흠 / 늘품플러스 / 2010.04.19

 

고구려가 멸망당한 다음해인 669년, 명장 가르첸링이 이끄는 토번군은 설인귀가 지휘한 10만의 당나라-토욕혼 연합군을 청해호 남쪽의 대비천(大非川)에서 격파하였으며, 여세를 몰아 신강의 안서 4진 즉, 카라샤르(언기), 쿠차(구자), 호탄(우전), 카슈가르(소륵)을 장악하였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영역으로 하는 발해가 독립하고, 한반도 남부의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대비천 전투에서 당나라가 토번에 대패했기 때문이었다.

678년 가르첸링의 토번군은 중서령 이경현이 이끄는 당나라 18만 대군을 청해호 부근의 승풍령에서 대파하였는데, 이로써 청해(토욕혼)의 티베트화가 공고하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

–  토머스 레어드 / 황정연 역 / 웅진지식하우스 / 2008.05.02

 

송센 감포와 문성공주의 혼인으로 상징된 양국의 비공식 평화조약은 송센 감포와 당 태종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유지되었다. 태종과 송센 감포는 649년 몇 달 차이로 죽었다. 태종의 대를 이은 고종高宗은 티베트를 공격했고, 이후 200년 동안 티베트와 중국은 여섯 차례에 걸친 서면 조약을 체결했다. 중국은 처음 두 조약을 어겼다. 두 제국은 끊임없는 화해 노력 속에서도 서로를 비롯해 아랍, 투르크, 위구르 등의 중앙아시아의 강대 세력과 계속 대치 상태에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동맹과 충성, 배반 속에 중앙아시아의 5대 강국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싸웠다. 한 티베트 공주가 투르크의 왕과 정략적으로 맺어졌고, 중국의 공주들이 위구르와 투르크의 왕들에게 보내졌다. 677년 티베트는 타림Tarim 분지 전체를 손에 넣게 되었다. 티베트 사람들은 투르크와 연합해 당을 공격했고, 동맹이 반대로 맺어지기도 했다. 그칠날 없는 전쟁과 끊이지 않고 엎어지는 동맹의 역사였다.

티베트 북쪽 국경에 걸친 방대한 타림 분지와 중가르(Jungar, 준가얼) 분지의 내아시아 사막에 있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은 실크로드 상인들의 중간 거점이었다. 주로 불교를 믿는 아리안족과 투르크족이 건설했고 주민도 대부분 아리안족과 투르크족이며 중국인과 티베트인은 거의 없었던 고립된 도시국가들을 통치하는 자는 통상로를 통한 교역을 조종할 수 있었다. 200년간에 걸친 거대한 승부가 펼쳐지는 동안 티베트는 전부 두 차례에 걸쳐 50년 동안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하지만 200년간 두 강국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경쟁이 계속되는 동안 최종 승자는 없었다.

 


나당전쟁과 토번

–  서영교 / 동양사학연구, 제79집(2002.07)

 

나당전쟁은 실로 서역의 전황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669년 9월 토번이 천산남로를 급습하자 670년 4월 설인귀가 이끄는 한반도 주둔 병력이 청해에 투입되었다. 그때 요동이나 한반도 북부지역의 당군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고, 670년 3월 신라군은 압록강 이북까지 작전 반경을 넓힐 수 있었다. 670년 7월 청해 지역에서 설인귀가 이끄는 당군이 전멸 당하자, 그 해 같은 달에 신라는 백제 대부분 지역을 장악한다.

672년 4월 토번의 사절이 장안에 도착하여 당 고종과 측천무후를 접견하면서 모종의 협상을 진행시키자, 같은 해 8월 당장 고간高侃이 이끄는 정예기병이 황해도 서흥(石門)에서 신라 중앙군단을 거의 전멸시킨다. 나아가 동년 12월에 당군은 고구려 유민이 지키고 있던 백수산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를 구원하려고 온 신라군마저 격파했으며, 그 이듬해인 673년 윤5월에 임진강 서쪽에서 고구려인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전투 상황 자료>

 

설인귀 http://www.zwbk.org/MyLemmaShow.aspx?zh=zh-tw&lid=101968 에서

전투내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원본의 진위는 알기 어렵다. 번역 부분은 http://sunheung7.blog.me/10009092209 에서 가져옴

 

 

薛仁貴任安東都護時,吐蕃漸趨強盛,擊滅了羌族建立的吐谷渾,又侵略唐西域地區。為此,唐高宗調任薛仁貴為邏婆道行軍大總官,並以阿史那道真、郭待封為副將,率軍十餘萬人,征討吐蕃。

 

薛仁貴奉命西行,軍至大非川(今青海共和縣西南切吉平原;一說今青海湖西布哈河),將趨烏海(今青海光海縣西南苦海),薛仁貴對阿史那道真和郭待封說:“烏海地險而瘴,吾人死地,可謂危道,然速則有功,遲則敗。今大非嶺寬平,可置二柵,悉內輜重,留萬人守之,吾倍道掩賊不整,滅之矣。”郭待封自願留守,薛仁貴又囑咐他千萬不可輕舉妄動。

 

薛仁貴安排好後,率部前往烏海,及至河口,遇吐蕃守軍數萬人,薛仁貴率軍一陣衝殺,斬獲殆盡。薛仁貴收其牛羊萬餘頭,鼓行而西,直逼烏海城,然後派千餘騎兵回大非川接運輜重,但這時郭待封已被吐蕃擊敗。薛仁貴因無輜重接濟,退軍大非川。至此,吐蕃調集40萬大軍前來進攻,唐軍抵敵不住,大敗。但吐善並不窮逼,以唐軍不深入為條件與唐議和,薛仁貴不得已應允,然後率敗軍東歸。戰後,他因敗績被免為庶人。

 

설인귀가 안동도호를 역임할 때 토번( 吐蕃 )이 점점 강성해져 강족( 羌族 )이 건립한 토욕혼( 吐谷渾 )을 격멸하였으며 또 당 서역( 西域 ) 지역을 침략하였다. 이 때문에, 고종은 설인귀를 전임시켜 나파도행군대총관( 邏婆道行軍大總官 )으로 삼고 아울러 아사나도진( 阿史那道真 ), 곽대봉( 郭待封 )으로써 부장을 삼아 군 10여만 인을 통솔하고 토번을 정토하게 하였다.
설인귀가 명을 받들어 서쪽으로 가니 군은 대비천( 大非川: 지금의 청해(青海) 공화현(共和縣) 서남쪽 절길(切吉) 평원, 일설에는 지금의 청해 호서포합하(湖西布哈河)에 이르러 오해( 烏海: 지금의 청해 광해현(光海縣) 서남쪽 약해(苦海))로 나아갔으며 설인귀는 아사나도진과 곽대봉을 대하고 ” 오해는 땅이 험하고 기후가 매우 나빠 우리의 사지( 死地 )로 위태로운 길이라고 할 수 있으매 그러한즉 빠르면 공적이 있으며 더디면 패하리라. 이제 대비령이 넓고 평평하니 두 울타리를 설치하고 안의 군수품에 진력하여 1만인을 머물러 수비하게 하고 나는 길을 배로 빨리가서 도적을 덮쳐 질서정연하지 못하게 하고 멸하겠다. ” 말하였다. 곽대봉이 자원하여 남아서 지켰으며 설인귀는 또 다른 경거망동은 절대 불가라고 분부하였다.
설인귀가 역할을 나눈 후, 부대를 통솔하고 오해에 나아가 강 입구에 이르러 토번 수비군 수만 인과 만나니 설인귀는 군을 통솔하여 한바탕 부딪혀 죽이고 거의 다 참획하였다. 설인귀는 그 소와 양 만 여두( 頭 )를 거둬들였으며 북을 치며 서쪽으로 이동하여 곧장 오해성( 烏海城 )을 핍박한 연후에 천여 기병을 대비천으로 돌려보내 운반하는 군수품을 접수하려 파견하였으나 이때 곽대봉이 이미 토번에게 쳐발렸다. 설인귀는 군수품 보급이 없으므로 인하여 대비천으로 퇴군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토번이 40만 대군을 이동 집결시키고 다가와서 진공하매 당군은 적에게 저항할 수 없어 대패하였다. 단 토번이 그다지 극단적으로 핍박하진 않아 당군에게 철저하지 않은 조건을 삼음으로써 당군과 강화하니 설인귀는 부득이 승락한 연후에 패군을 통솔하고 동쪽으로 귀환하였다. 전쟁 후 그는 대패로 인하여 서인( 庶人 )이 되었다.

 


관련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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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전체를 직접 지배하려는 당唐의 야욕에 맞선 신라의 투쟁 그리고 비록 대동강 이남의 지역에 한정되지만 한민족의 기본틀을 형성한 삼국통일의 마지막을 장식한 나당전쟁과 관련하여 그 당시 초강대국인 당唐 주위의 지정학적인 상황에 있어 지금의 티베트인 토번에 대해 살펴보고 자료를 수집해 보았다.

당연하겠지만 중국 · 일본 등의 외국학계에서는 나당전쟁에서 신라의 역활을 축소하고 토번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정세를 중요시하는 외부 지향적으로 설명하고 있고, 국내학계는 당시 국제정세는 고려하지 않고 과잉 민족주의적 입장으로 내부 지향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7세기의 동아시아는 무대를 중원에서 동쪽으로 옮겼을 뿐 전국시대와 다름없었다. 중국의 수 · 당, 한반도의 고구려 · 백제 · 신라, 바다 너머의 왜국, 중앙 초원의 돌궐 · 설연타 · 거란 · 토욕혼, 티베트 고산지대의 토번 등이 뒤엉켜 벌인 국제전은 그야말로 ‘유라시아판 열국지’였다.  원교근공(遠交近攻)과 합종연횡(合從連衡)이 되풀이되는 복잡다단한 시대였다.

 

당의 지원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친 신라가 어떻게 세계 최강 당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물론 신라의 성공적 방어가 기본적인 승리의 요인이지만 나당전쟁 당시는 무엇보다 서역의 강국 토번에 주목해야 한다.

 

당이 고구려와 싸울 때에는 토번에게 기회가 왔고, 당이 토번과 싸울 때에는 신라에게 한반도 통일의 기회가 왔으며 이를 놓치지 않았다. 학자에 따라 경중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토번의 강성이 나당전쟁의 승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 대해 부정하기는 힘들 것 같다.

 

당시의 세계사 연표는 :

 

 

※ 관련 글 :

대비천 전투 (670년) – 당과 토번의 전쟁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보았다.

 


나당전쟁과 토번

–  서영교 / 동양사학연구, 제79집(2002.07)

 

나당전쟁은 실로 서역의 전황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669년 9월 토번이 천산남로를 급습하자 670년 4월 설인귀가 이끄는 한반도 주둔 병력이 청해에 투입되었다. 그때 요동이나 한반도 북부지역의 당군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고, 670년 3월 신라군은 압록강 이북까지 작전 반경을 넓힐 수 있었다. 670년 7월 청해 지역에서 설인귀가 이끄는 당군이 전멸 당하자, 그 해 같은 달에 신라는 백제 대부분 지역을 장악한다.

672년 4월 토번의 사절이 장안에 도착하여 당 고종과 측천무후를 접견하면서 모종의 협상을 진행시키자, 같은 해 8월 당장 고간高侃이 이끄는 정예기병이 황해도 서흥(石門)에서 신라 중앙군단을 거의 전멸시킨다. 나아가 동년 12월에 당군은 고구려 유민이 지키고 있던 백수산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를 구원하려고 온 신라군마저 격파했으며, 그 이듬해인 673년 윤5월에 임진강 서쪽에서 고구려인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673년 겨울까지 당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673년 12월 토번이 궁월弓月 등 천산지역의 서투르크 제부족을 충동하여 천산북로를 봉쇄하려 하자, 나당전쟁은 674년 전기간과 그 이듬해 2월까지 14개월 간 소강상태에 들어간다. 670년 토번에게 천산남로를 상실한 당은 그 대안으로 천산을 북쪽으로 우회하는 천산북로를 이용했는데, 이것마저 위협 당하자 이 루트의 방어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이다. 674년의 전쟁소강은 신라가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소중한 기간이 되었다.

그러나 675년 1월에 토번의 사절이 장안에 와서 평화회담을 진행시키자, 그 해 2월에 당군은 한반도에 재침해 왔다. 유인궤가 이끄는 당군은 임진강 이남까지 남하하여 칠중성을 대파하고 그곳을 전진기지로 삼아 매소성까지 장악했다.

676년 토번의 내분을 이용하여 당 고종이 총 공세를 가하면서 나당전쟁은 무기한 휴전상태로 돌입했다. 그 해 이근행의 말갈사단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청해의 對토번전선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676년 당시 약자인 신라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당의 재침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만일 당과 토번이 평화관계를 유지한다면 그 예봉은 또 다시 신라로 돌려질 수도 있다.

적대국가가 건재해 있을 경우 전쟁종결은 항상 여진餘震을 남긴다. 양국의 국력이 현저한 차이가 있다면 전쟁재발에 대한 우려는 대개 약소국의 몫이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나당전쟁 후 당의 재침은 결코 없었다. 따라서 나당전쟁 이후를 긴장이 없는 평화기로 상정하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를 놓고 본 것이다.

 

세계 최강국 당이 신라조정에 가한 압력으로 상당시간 동안 신라 전체가 떨었고, 두려워했다. 나당전쟁 후 전쟁이 다시 재발되지 않았다고 해서 전후에 바로 평화기가 도래했다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 결과만을 보고 그것에 맞추어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렇지만 거의 25년에 걸쳐서 신라조정과 당 사이에 벌어진 신경전은 약자인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아슬아슬한 것이었다.

당 고종은 나당전쟁 이후에도 한반도에 대한 지배의지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678년 9월에 당 고종은 신라를 재침하려 했다. 하지만 토번 정벌이 시급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은 여전히 토번에 발목이 잡혀있었던 것이다. 그 이듬해인 679년에 나당전쟁의 정신적 귀의처였던 사천왕사가 신라의 왕경에 세워졌다. 이는 당의 재침에 대한 우려가 신라사회에 팽배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신라인들은 나당전쟁을 경험하면서 서역의 전황이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인식하면서, 676년 휴전 이후에도 서역의 전황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당군의 재침에 대한 두려움은 전후戰後 신라의 급진적인 군비 증강과 일본에 대한 저자세 외교로 나타났다.

 


나당전쟁 연구

–  이상훈 /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12)

 

나당전쟁은 당시 최강대국 당과 동북의 변방국인 신라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당이나 신라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하거나 패배하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일련의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당은 공세를 지속하였으나, 신라가 당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당의 보급문제를 야기시켰던 것은 분명하다. 당은 원정군의 보급문제 · 국내의 여론악화와 더불어, 토번의 서북변경 위협이라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신라원정에 실패한 이 사건은 축소되고 점차 잊혀져 갔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국사서에도 자세한 기록이 남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나당전쟁에 투입된 당군은 말갈병이 주력이었으며, 기병 위주의 부대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당전쟁기의 당군은 말갈병 중심의 번병이 아니라, 당 본토의 하남도 · 하북도 · 강남도에서 동원된 주력부대들이었다. 특히 전투 양상을 분석한 결과 말갈병은 오히려 보병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말갈족 출신 이근행은 부족을 이끄는 번장이라기보다는 당의 행정체계에 흡수된 객장으로 보아야 한다. 이근행이 토번 전선으로 이동되었다고 해서 한반도 주둔 당군 대부분이 서역으로 이동하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즉 이근행의 서역 이동에 따라 나당전쟁이 종전되었다고 보는 ‘한반도 방기론’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나당전쟁은 정확한 정세판단을 바탕으로 한 신라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당은 대규모 원정군을 투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정벌’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당전쟁은 최강대국 당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약소국’ 신라의 승리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신라는 당에 맞서 대의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해 강경책과 유화책을 적절히 구사하였다. 그리고 신라군은 당시 고유의 군사 편제단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최대 7~8만명 정도 동원할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그러므로 나당전쟁의 승리는 신라 자체의 전력이 안정되어 있었고, 신라 수뇌부의 전략전술이 주효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나당전쟁은 신라에 있어 對백제· 고구려전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전쟁이었다. 국가의 존망을 다투는 그것도 외부의 지원없이 최강대국과의 전면전이었던 것이다. 신라는 당과의 전면전에 앞서, 백제고지 일부지역과 서북상 군사 요충지인 비열홀을 장악하고, 요동으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전쟁 초기의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즉 나당전쟁은 전체적으로 볼 때 전략상의 요충지를 선점하여 당의 침략을 미연에 대비하고자 한 신라의 예방전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신라는 8년에 걸친 당과의 장기전을 치루면서 한반도를 굳건히 지켜내었다. 이러한 나당전쟁의 개전과 종전은 국제정세의 영향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신라의 역량과 주도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당전쟁에서 만약 신라가 당의 전략이 토번을 중심으로 전환되기 이전에 당에게 패배하였다면, 당은 한반도의 내지화를 강화하고 만주에 대한 장악력도 높혀 나갔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만주지역에서 발해의 건국이나 티벳지역에서 토번의 발호도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토번의 발호 때문에 나당전쟁이 종전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당군의 신라 원정 실패로 인해, 토번이 강성해질 수 있는 여유와 기회가 생기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백제와 고구려의 패망을 목도한 신라의 목표는 대의명분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으며,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최강대국에 맞서 그것을 성취하였던 것이다.

 


나당전쟁기 당의 군사전략 변화

–  이상훈 / 역사교육논집, 제37집(2006.08)

 

670년대 당의 군사전략의 중심은 서북의 토번전선과 동북의 한반도전선이었으며, 당시 토번의 전황과 한반도의 전황은 서로 맞물려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669~670년 토번의 서역로 공격으로 안동도호 설인귀가 서역전선으로 이동하였고, 이와 동시에 고구려 검모잠의 부흥운동이 일어았으며, 675년 1월 토번사신이 화친을 청하자 바로 다음달 한반도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또한 의봉년간(676~679) 당의 군사전략이 대전환되어 한반도 주둔군이 철수하자, 신라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통일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669년 토번의 서역로 공격은 토번의 토욕혼 공격과 이에 대한 당의 대응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서역로보다는 청해 일대에서 벌어진 접전으로 여겨진다. 이 접전에서 토번이 승리한 후 서역으로 눈을 돌려 이듬해 4월 안서4진을 모두 함락시키게 된다. 토번이 안서4진을 함락시키자 당은 안동도호로 있던 설인귀 주도 하에 나사도행군을 편성하였고, 곧이어 한반도에서 검모잠의 고구려 부흥운동이 발생하자 당은 별다른 모병없이 즉시 고간 · 이근행을 투입시켰다. 즉 670년 당시 당은 토번전선과 한반도전선을 동시에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두 전장을 유지하던 시기인 672년 1월에 요주의 蠻이 반란을 일으키자, 또 다른 행군을 편성하여 토벌을 실행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670년대 초반 당은 병력수급에 큰 차질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의 군사전략은 주변 민족 특히 토번의 발호로 인해 의봉년간 이후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되는데, 토번의 급성장이 주요인이었다. 토번은 660년대 이후 서역과 하서河西지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670년에는 서역의 핵심지역인 안서4진을 함락시켰고, 672년에는 완충지대인 토욕혼을 완전 점령 · 병합하였다.

이러한 토번의 발호에 대해 당은 지속적으로 견제하게 되는데, 對토번전에 670년 설인귀를 투입한데 이어 강각을 투입시켰으며, 그 이후에는 소사업으로 하여금 서역지역을 재탈환케 하였다. 결국 지속적인 서역 재탈환 시도의 결과로 675년 초 우전에 비사도독부가 설치되고, 상원(674~676) 년간에 소륵도독부도 재설치되기에 이른다. 이는 서역로의 일시 회복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당은 675년 1월까지 토번에 지속적인 압력을 가해 서역로를 재탈환해가는 한편, 674년 한 해 동안 신라 정벌을 준비하였고 결국 675년 2월에 유인궤가 한반도에 등장하게 된다. 675년 초 토번이 화친을 청하자 이를 거부하여 토번에 대해 공세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렇게 볼 때 당은 670년 이후 토번전선과 한반도전선을 동시에 유지하였으며, 675년까지 당의 대외 군사전략은 공세의 지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은 676년 윤3월 토번의 내지 공격으로 인해 감목장 상실 · 교통로 단절 · 군사력 약화는 물론 수도 장안까지 위험에 노출되자, 토번에 대해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기에 이른다. 기병의 근간을 이루는 감목장의 상실과 경제적 이윤을 보장하는 서역으로 통하는 요충지의 상실 그리고 1차 방호벽 구실을 했던 하서지역의 상실은 당에게 큰 위협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당은 677년부터 하서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수하기 시작하고, 대규모 모병을 실시하는 등 대외 군사전략을 수세로 전환하게 된다. 그러므로 당의 대외 군사전략의 구체적인 전환시기는 676년 윤3월 토번의 내지공격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통일전쟁사

–  노태돈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9.02.25

 

그 다음 신 · 당 개전의 구체적 계기로 토번의 당의 서부 지역 공격을 거론한 설을 검토해보자. 확실히 이 시기 강성해진 토번과 당의 전쟁은 일찍이 진인각(陳寅恪)이 말했듯이 당의 군사력 중심이 동에서 서로 옮기게 된 계기였고, 676년 당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게 된 원인의 하나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신 · 당 개전의 원인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토번이 당 공격을 본격적으로 감행한 것은 670년 4월이었다. 이때 토번은 당의 서역 18주를 공략하였다. 이에 당은 하서(河西) 4진을 폐지하고 설인귀를 행군대총관으로 한 10만의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설인귀는 그해 8월 청해(靑海)의 대비천(大非川)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설인귀는고구려 멸망 직후인 668년 10월 안동도호로 임명되어, 2만의 군대를 휘하에 거느리고 평양에 주둔하였다. 그런 그의 차출과 토번전 투입은 당의 군사력 중심이 서쪽으로 이동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그러나 토번의 대두가 적어도 신 · 당 개전의 동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위에서 보았듯이 설인귀가 토번전에 차출되기 전인 669년 상반기부터 신 · 당전은 시작되었다.

 

한편 이 점을 달리 보는 견해가 있다. 즉 당이 평양성에 설치하였던 안동도호부를 669년 요동의 신성(新城)으로 옮겼는데, 이를 토번의 강성에 따른 대응책으로 보아, 이미 이때부터 토번의 강성에 따른 여파가 한반도에 주둔한 당군에 영향을 미쳤고, 안동도호부를 옮김에 따른 당군의 이동으로 야기된 군사력 공백이 신라가 당에 대한 공세를 취하게 하였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토번의 당 공격이 신 · 당 전쟁 개시의 주요 동인이며, 신 · 당 전쟁의 발발 시점은 구체적인 신 · 당 전투의 기록인 위 인용문에서 전하는 670년 3월 이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토번과 당은 660년대에 들어 천산남로와 타림분지에 있던 서돌궐 여러 부족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대립하였으며, 토욕혼(吐谷渾) 또한 갈등의 요소였다. 하지만 당과 토번의 본격적 무력 충돌은 670년 4월에 들어서다. 당이 토번의 강성을 경계는 하였지만 670년 4월 이전에는 구체적으로 군사적 공격을 가하지 않았고, 토번도 그러하였다. 토번의 당 공격 사례로 드는 다음 사안도 실제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즉 669년 9월 당 고종이 토번에 쫓겨 당에 내부(來附)해 있던 토욕혼을 다시 양주(凉州)의 남산 지역으로 옮기라고 하자, 당 조정에서 의논이 분분하였다. 즉 토욕혼을 양주로 이주시키면 토번에게 다시 침탈당할 것인데, 그것을 방지하려면 먼저 토번을 공격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흉년을 이유로 군대 동원을 반대하는 견해에 부딪혀 실행되지 못하였으며, 토욕혼을 옮기자는 안도 함께 폐기되었다. 그리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긴 것을 토번과 연관하여 논하지만, 안동도호부가 평양성에 있든 신성에 있든 그 군사력을 토번 전쟁에 투입하려면 거리상 큰 차이는 없다. 또 당의 행군제도에서 설인귀가 토번전에 차출된다 하여 안동도호부 주둔군 2만이 모두 그를 따라 투입된 것은 아니었다. 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긴 것은 다른 이유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은 669년 2월 이후 옛 고구려 땅에 부·주·현(府州縣) 편제를 시도하였다. 그것을 추진하면서 예상되는 고구려 유민의 반발에 대한 근본적 대책으로, 당은 669년 4월 부강한 고구려 유민 3만여 호를 강제로 당 내지로 이주시킬 것을 결정하고 5월 시행하였다.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김도 강제 사민(徙民)과 유관한 조처였을 가능성이 크다. 신성은 요서와 요동을 연결하는 교통로 가운데 북로의 길목에 위치하며, 북으로 부여지역 및 말갈족 거주지와 통하는 요지이다. 이런 전략적 거점에 도호부를 옮기는 것은 고구려 유민 강제이주 작업에도 편리하고 아울러 당이 말갈 부족들을 제압하고 고구려 지역을 통할하는 데에 유리하였다. 그런데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김과 강제이주 정책에 대한 고구려 유민의 저항 때문에, 평양을 비롯한 서북한 지역 일대의 당 지배력이 크게 흔들렸다. 이런 상황은 신라 조정이 새로운 도전의 가능성을 확신케하는 요소가 되었다.

 


동아시아의 역사 1

–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 2011.11

 

고구려의 멸망은 신라와 당의 대립을 본격화시켰다. 사실 나당연합군은 처음부터 내부 균열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당은 백제 멸망 후 노골적인 점령 의도를 드러냈다. 백제고지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고, 나아가 663년에는 신라를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로 하고 신라왕을 계림대도독에 임명하여 형식적으로나마 신라마저 복속시킨 모양을 취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664년과 665년에 신라 문무왕으로 하여금 웅진도독 부여융扶餘隆과 동맹을 맺고 상호 침략하지 못하도록 강요하였고, 이후 노골적으로 백제 유민을 지원하며 백제지역에서 신라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였다.

그러나 668년에 당과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670년 7월경부터 신라와 당은 백제부흥군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서로 불신이 극도로 높아지면서 마침내 본격적인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고구려 중앙정권이 붕괴된 후에도 고구려 전영역에서 유민들의 대당 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이때 신라는 은근히 고구려 유민들을 지원함으로써 당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는 한편, 백제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670년 4월에는 고구려 유민 검모잠의 거병과 한성(漢城)에서의 고구려국 재건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신라는 8월에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한성의 고구려 유민세력을 지원하면서 당군의 남하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신라와 당과의 전쟁을 개시한 것도 670년 7월에 등장한 한성의 고구려국을 의식한 신라의 대당 전략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670년을 전기로 하는 신라의 당에 대한 공세는 서역의 정세 변화와 밀접히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660년부터 당의 군사력이 한반도로 집중되면서, 빈틈이 생긴 서역에서는 660년에 천산지역의 서돌궐이 반기를 들었으며, 661년에는 철륵도 서역에서 당에 도전하였다. 다급해진 당은 662년에 한반도에서 군대를 돌려 설인귀 등을 서역에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서역은 당의 통제력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는데, 그 중심은 토번吐蕃이었다. 토번은 663년 이후 토욕혼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그러나 토욕혼의 연이은 군사요청에도 당은 미처 한반도에서 군대를 쉽사리 돌리지 못하였다. 게다가 665년에는 서돌궐도 내분을 청산하고 당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요동과 한반도에서 당의 군사작전이 장기화되자, 토번은 669년 9월부터 실크로드 지역에 대한 공세를 전개하여, 670년 7월에는 설인귀의 10만 대군을 청해靑海 지역에서 괴멸시키고, 안서安西 4진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서역의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당의 주력이 서역으로 돌려지게 되자, 신라와 고구려 유민들은 대당전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공간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라는 백제지역에서 당군과 대결하여 671년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함으로써, 백제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승리의 한쪽에는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전개된 고구려 유민세력의 활동으로 육로에서 당군의 군사행동이 불가능해진 점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에 당은 671년에 안시성에서 고구려의 유민세력을 격파하고 요동일대의 통제력을 확보한 후, 한반도로의 진공을 시도하였다. 672~673년에 당군은 계속 남하하여 황해도 일대의 전선에서 연이어 고구려 유민세력과 신라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당의 전쟁의 저울추는 675년 이후 신라쪽으로 기울었다. 신라군은 675년에 이근행이 거느린 말갈군 20만 대군을 매초성전투에서 대패시키고, 676년 11월에 설인귀가 거느린 수군마저 기벌포전투에서 격파함으로써, 당의 침공을 좌절시켰다. 당은 더 이상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였고, 안동도호부는 676년에 다시 요동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이러한 나당전쟁의 종식에도 676년 이후 급박해지는 토번과의 전쟁, 토번의 동맹세력인 서돌궐의 재흥 등이 중요한 국제적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이 7세기에는 중원세력의 움직임이 동북아정세에 깊이 개입함으로써 동북아 국제관계의 독자적 운동력이 해체되고, 동아시아 전체에 걸친 세력 변동의 흐름 속으로 편입되어 갔다. 그 결과 7세기에는 고구려 및 동북아의 여러 세력과 중원세력 간의 충돌이 빈번해지고 그 강도도 격화되었다는 점이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진 면이었다.

 


중국

–  백범흠 / 늘품플러스 / 2010.04.19

 

당나라는 고종(高宗) 시대에 한반도 동남에 자리 잡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왜 연합세력을 격파하고,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돌궐과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신흥강국 토번吐蕃을 하서회랑에서 축출하고, 서돌궐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신강의 투르판 분지에 위치한 고창高昌을 정복하여 북신강北新疆마저 손아귀에 넣었다. 이후 천산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키르키즈-우즈베키스탄 지역을 흐르는 추Chu강, 탈라스Talas강과 시르 다리야Syr Dariya를 넘어 아랄해 근처까지 영유한 세계제국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수도 장안長安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

무조(측천무후)가 죽은 후 그녀의 손자인 이융기는 쿠데타를 통하여 숙부인 중종의 황후 위씨韋氏 일당을 제거했다. 그는 황제(현종)가 된 다음 적극적인 대내외 정책을 실시하였다. 당시 당나라 최대의 라이벌은 티베트 고원에서 흥기한 토번(吐蕃)이었다. 고구려가 멸망당한 다음해인 669년, 명장 가르첸링이 이끄는 토번군은 설인귀가 지휘한 10만의 당나라-토욕혼 연합군을 청해호 남쪽의 대비천(大非川)에서 격파하였으며, 여세를 몰아 신강의 안서 4진 즉, 카라샤르(언기), 쿠차(구자), 호탄(우전), 카슈가르(소륵)을 장악하였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영역으로 하는 발해가 독립하고, 한반도 남부의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대비천 전투에서 당나라가 토번에 대패했기 때문이었다.

 

678년 가르첸링의 토번군은 중서령 이경현이 이끄는 당나라 18만 대군을 청해호 부근의 승풍령에서 대파하였는데, 이로써 청해(토욕혼)의 티베트화가 공고하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

–  토머스 레어드 / 황정연 역 / 웅진지식하우스 / 2008.05.02

 

송센 감포와 문성공주의 혼인으로 상징된 양국의 비공식 평화조약은 송센 감포와 당 태종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유지되었다. 태종과 송센 감포는 649년 몇 달 차이로 죽었다. 태종의 대를 이은 고종高宗은 티베트를 공격했고, 이후 200년 동안 티베트와 중국은 여섯 차례에 걸친 서면 조약을 체결했다. 중국은 처음 두 조약을 어겼다. 두 제국은 끊임없는 화해 노력 속에서도 서로를 비롯해 아랍, 투르크, 위구르 등의 중앙아시아의 강대 세력과 계속 대치 상태에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동맹과 충성, 배반 속에 중앙아시아의 5대 강국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싸웠다. 한 티베트 공주가 투르크의 왕과 정략적으로 맺어졌고, 중국의 공주들이 위구르와 투르크의 왕들에게 보내졌다. 677년 티베트는 타림Tarim 분지 전체를 손에 넣게 되었다. 티베트 사람들은 투르크와 연합해 당을 공격했고, 동맹이 반대로 맺어지기도 했다. 그칠날 없는 전쟁과 끊이지 않고 엎어지는 동맹의 역사였다.

티베트 북쪽 국경에 걸친 방대한 타림 분지와 중가르(Jungar, 준가얼) 분지의 내아시아 사막에 있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은 실크로드 상인들의 중간 거점이었다. 주로 불교를 믿는 아리안족과 투르크족이 건설했고 주민도 대부분 아리안족과 투르크족이며 중국인과 티베트인은 거의 없었던 고립된 도시국가들을 통치하는 자는 통상로를 통한 교역을 조종할 수 있었다. 200년간에 걸친 거대한 승부가 펼쳐지는 동안 티베트는 전부 두 차례에 걸쳐 50년 동안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하지만 200년간 두 강국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경쟁이 계속되는 동안 최종 승자는 없었다.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  고마츠 히사오 외 / 이평래 역 / 소나무 / 2005.05.05

 

타림분지(Tarim Basin)와 톈산산맥(天山山脈) 일대는 8세기 중엽까지 중원의 당, 서돌궐 · 투르기스(돌기시) · 카를루크를 비롯한 투르크계 유목 세력, 남쪽의 티베트(토번) 등 세 방면의 정치 · 군사 세력 사이의 쟁탈전에 휘말렸다.

……

앞에서 언급했듯이 티베트는 이 시기에 북쪽의 타림분지 방면으로 진출했다. 티베트인들은 국지적인 관개농업과 함께 목축, 즉 야크 방목과 유목을 병행했다. 사람들은 본교(Bon-po)라는 전통 신앙을 신봉하고, 사회는 씨족별로 나뉘어 통합을 이루지 못한 상황이었다. 7세기 초기에 들어와 이러한 분열상을 극복하고 여러 종족을 통합한 통일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때부터 250년 동안 지속된 정치 통일체를 보통 토번 왕조라 부른다. 통일 왕조를 수립한 송첸감보(643~649년 재위)는 네팔의 공주 티춘을, 그리고 641년에는 당나라 태종의 딸 문성공주文成公主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 후 당과 티베트는 20년에 걸쳐 우호 관계를 유지했는데, 불교는 이들 양국에서 들어왔다고 전한다. 이와 함께 티베트인들은 당나라에서 종이, 묵, 유리, 차, 양잠을 비롯한 각종 문물과 제도를 수립하고, 인도와 네팔에서 천문학과 의학, 예술 공예를 받아들였다. 이와 함께 송첸감보 시대에는 산스크리트어를 모델로 하여 티베트 문자와 문법을 창제하는 등 티베트의 독창적인 문화가 생겨났다.

7세기 후반에 토번은 당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즉 토욕혼(Tuyuhun, 吐谷渾)으로부터 칭하이靑海, 선선, 체르첸을 빼앗아 타림분지로 팽창하기 시작하고, 수차례에 걸쳐 당의 타림분지 오아시스 지배를 위협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670년에는 쿠차에 설치되어 있던 당의 안서도호부를 우전군과 함께 투르판 분지로 철수하게 만들었으며, 돌궐의 잔존 세력과 연합하여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기도 했다. 그 후 680년대에도 토번의 타림 진출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692년 당나라는 투르기스와 연대해 쿠차를 탈환하고, 그곳에 3만 군대를 주둔시켜 안서도호부를 부활시켰다. 토번의 제5대 왕 티데축첸(704~754년 재위)은 금성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당나라와 화해했는데, 이때 티베트에 유교, 도교, 불교 경전이 전해졌다.

 


중국과 이란

– 존 W. 가버 / 박민희 역 / 알마 / 2011.12.30

 

중국의 진과 당 왕조가 먼 서역 지방에서 점유했던 지역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진(西晉) 왕조는 수백 년 동안 계속된 분열의 시기 이후 중국을 재통일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50년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진의 세력이 붕괴되고 중국은 다시 300년 동안 분열되었으며, 그에 따라 서역에서 중국의 세력도 쇠퇴했다. 서기 640년대와 650년대에 당의 세력이 다시 서쪽으로 확장되어 중국 역사상 가장 서쪽까지 미쳤다. 650년에 당의 군대는 서돌궐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지배력을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 동부까지 넓혔다. 이때까지 서돌궐 제국의 조공국으로 여겨졌던 서역의 제후국들은 당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써 당의 지배력은 서쪽으로 옥수스(아무다리야) 강 계곡과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서부까지 미치게 되었다. 동쪽으로 오늘날의 신장 지역에서는 타림분지가 중국의 보호령인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로 명명되었고, 사산조페르시아계 귀족에 의해 통치되었다. 하지만 옥수스 강 지역에서 당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665년 반란이 일어나 당의 서역 제후국들은 독립하게 된다.

 


전쟁으로 읽는 한국사

–  황원갑 / 바움 / 2011.10.15

 

한반도 지배의 주도권을 둘러싼 나당전쟁은 7년 동안 벌어졌는데, 이 전쟁 최후의 전투는 육상전이 아니라 문무왕 16년(676년) 11월에 금강 하구에서 벌어졌던 기벌포(伎伐浦)해전이었다.

이 전투는 『삼국사기』에 나오는데도 중국 학계에선 부정하고 있다. 그들에게 그토록 치욕스러운 패전이 아니었다면 그런 황당무계한 강변은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당전쟁에서 신라의 승리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대는 중국을 통일한 대제국이었고 이른바 ‘정관(貞觀)의 치(治)’로 불린 당태종의 치세 전성기 직후였다. 방패 구실을 하던 고구려마저 멸망한 뒤였다.

그러나 이 나당전쟁에서 신라에게 유리한 면도 있었다. 첫째는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군과 함께 싸웠다. 그래서 675년의 매소성전투가 있기 전부터 당군은 이미 상당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둘째는 때마침 지금의 티베트인 토번(吐蕃)이 당나라의 발목을 잡았다. 7세기 초 송첸감포에 의해 통일왕국이 수립된 토번은 662년부터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당과 본격적인 전쟁을 벌였다. 675년 매소성에서 신라에 대패한 이근행이 한반도를 재침하지 못한 것은 676년 초 토번 전선으로 차출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토번 쪽 상황이 안정되자 당나라는 676년 11월 최후의 신라 침공을 감행한다. 설인귀가 이끄는 대함대가 기벌포로 진입했던 것이다. 중국 학계는 ‘설인귀가 상원(上元) 연간(674~676)의 사건에 연루돼 유배를 갔다’는 중국 측 기록을 들어 이를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구당서』를 보면 설인귀가 676년 이후에도 여전히 처벌받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상원 연간에 유배를 간 것’이 아니라 ‘상원 연간에 있었던 사건에 연루되어 나중에 유배를 간 것’이 되는데(경북대 박사과정 이상훈), 그 사건이란 바로 기벌포해전이었다.

 


관련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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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루즈(Toulouse) 전투 (721년)는 아키텐(Aquitanian)의 오도(Odo) 대공의 기독교 군대가 툴루즈를 포위한 이슬람 우마이야(Umayyad) 왕조 알-안달루스 총독인 알-삼(Al-Samh ibn Malik al-Khawlani) 총독이 이끄는 이슬람 군대에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이슬람 세력의 나르본에서 아키텐으로의 확장을 저지하였다. 즉, 현재 프랑스 남부 지역을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등장할 유명한 전투인 ‘투르 푸아티에 전투’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 투르 푸아티에 전투 (Battle of Tours) – 732년

 

711년 이슬람 군대는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서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다. 719년에는 피레네산맥을 넘어 나르본을 점령하여 산맥 너머의 교두보를 확보한다. 그리고 721년에 아키텐을 공략한다.

 

오도 대공(Odo the Great, ? – 735년)의 출신은 모호하다. 프랑크 왕족이라는 설이 다수지만, 로마인이라는 설도 있다. 오도는 700년 무렵에는 아키텐의 실권을 장악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오도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아키텐의 독립을 기도했던 인물로, 아키텐에서는 대왕 또는 대공이라는 별칭의 the Great로 부른다. 이슬람과 손잡고 아키텐의 분리 독립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투르-푸아티에 전투를 계기로 카를 마르텔의 종속인이 되었다.

 

민족국가 형성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툴루즈 전투는 서구 기독교 세계를 무슬림의 파도로부터 구출한 사건이었다. 역사적 대결에 뛰어든 기독교 전사들은 이런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도 대공은 그보다는 아우스트라시아의 피핀 왕조와 코르도바 총독들의 몰락을 더 원했을 것이다. 대공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공국을 유지하기 위해 이슬람 군대와 싸웠다.

 

 

 

툴루즈는 프랑스의 남서쪽 가론 강 연안, 지중해와 대서양으로부터 비슷한 거리만큼 떨어져있는 도시이다. 미디피레네 레지옹과 오트가론 주의 중심지이다. 2010년 현재 인구 441,802 명으로 프랑스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며, 근교를 포함한 대도시권은 1,218,166 명으로 프랑스에서 5번째이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 721년 툴루즈 전투 당시의 역사지도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보았다.

 


신의 용광로

–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 / 이종인 역 / 책과함께 / 2010.04.23

 

알-삼은 721년 봄 북부 아랍인과 남부 아랍인으로 보강된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나타났고 이번에는 공성 기계까지 갖추었다. 그것은 강력한 요새 도시들을 함락시키려는 전면적인 지하드였고, 예언자의 종복들을 피레네에서 루아르 강에 이르는 광대한 토지에 식민하려는 계획의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아키텐은 가론 강에서 루아르 강까지 뻗어 있었다. 로마 제국이 다스리던 골 지방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아키텐은 가장 부유한 고장이었고 라틴 문화를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침략군은 나르본에서 툴루즈로 향하는 고대 로마 도로를 타고서 북서쪽으로 진격했다. 갑옷을 입은 아랍 기병과 맨발의 베르베르 보병은 로마 시대의 도로 위에서 가끔 길을 멈추고 하루 다섯 번씩 기도를 올렸다. 그들의 모습은 아키텐 농민이나 귀족이 볼 때 외계에서 온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알-삼의 군대가 툴루즈 성 앞에 나타나자, 툴루즈 시민들은 크게 동요했다. 하지만 그들 중에 아키텐의 대공은 끼어 있지 않았다. 오도(외도, 외데스) 대공은 증원군을 모집해오기 위해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갔고 툴루즈 시민들은 대공이 돌아올 때까지 성안에서 버텨냈다.

 

오도는 혈통상 프랑크족이지만 그의 가문은 대대로 아키텐에서 살았기 때문에 라틴화한 켈트족에 거의 동화된 상태였다. 알-삼이 아키텐에 쳐들어왔을 때 대공은 50대 후반의 나이였음에도 신체 강건했고 군사적 지략이 뛰어났다. 몇 년 전 사촌인 프랑크 귀족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을 때 오도는 지는 쪽을 편들었기 때문에,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도움을 청할 데가 없는 형편이었다. 툴루즈 성 포위공격이 3개월이 지나면서 성안에는 식량이 바닥나고 있었다. 오도는 성안 귀족들을 설득하여 무슬림 군대의 후방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동시에 성의 정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수천 명의 창병, 궁수, 창기병이 일제히 정면 공격을 감행하고 나섰다. 무슬림 부대를 전후에서 공격하는 기발한 전략은 총독의 부대에 참패를 안겼다. 아키텐의 중무장 기병 부대는 성벽과 후방에서 압박하는 아군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면서 적의 보병 부대를 마구 무찔렀다. 좁은 땅에 갇혀 있던 시리아인과 베르베르인들은 작전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꼼짝없이 당했다. 무슬림 군대의 절반 이상이 죽었고 그 일대의 평야는 피로 물들었다(대부분의 아랍 사료들은 알 삼의 패배를 ‘순교자의 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알-삼은 전투 중 부상을 입어 사망했고 부사령관이 남은 병력을 간신히 수습하여 포위망을 뚫고 나르본으로 퇴각했다.

 

오도 대공은 아랍 침략군을 맞아 대등하게 싸우면서 야전에서 승리를 거둔 피레네 동쪽의 최초의 기독교인 통치자였다. 툴루즈 전투는 아랍 연대기에서 잘 언급되지도 않지만 언급된다 해도 각주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것은 지하드의 길에서 부딪힌 가벼운 충돌도 되지 못했다. 안달루스 사람들은 10년의 회복과 준비를 거쳐서 피레네 동쪽으로 다시 나오게 된다. 그때에는 10년 전 툴루즈에서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퇴각했던 아브드 알-라흐만 이븐 아브드 알라 알-가피키가 사령관으로 침략군을 이끌게 된다. 오도의 승리는 역사적으로 서사시적 의미가 부여되는 추후의 전투를 위한 예행연습이었다. 그의 승리는 한번 가속도가 붙으면 멈추는 법이 없는 아랍 침략의 물길을 되돌린 중요한 사건이었다. 무슬림이 다시 정복에 나서자 갈로-로마인들과 프랑크족은 긴급한 사태의 필요에 따라 서로 협조하게 되었다.

……

11년 전인 721년, 오도 대공은 툴루즈에서 기병 부대를 통솔하여 알-삼 총독과 그의 군대에 의외의 대승을 거두었고, 총독에게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혀 전사시켰다. 그리하여 아랍 침략군은 이슬람 세력권인 셉티마니아의 해안 거점(나르본)까지 후퇴해야 했다. 유럽 대륙에서는 이슬람의 첫 패배 이후에 많은 일들이 발생했다. 피핀 왕조의 맹주권은 721년 이후 11년에 걸쳐 결정적으로 굳어졌다. 이 기간 동안에 왕조는 프랑크 왕국의 제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민족국가 형성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툴루즈 전투는 서구 기독교 세계를 무슬림의 파도로부터 구출한 사건이었다. 역사적 대결에 뛰어든 기독교 전사들은 이런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도 대공은 그보다는 아우스트라시아의 피핀 왕조와 코르도바 총독들의 몰락을 더 원했을 것이다. 대공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공국을 유지하기 위해 이슬람 군대와 싸웠다.

 


이슬람의 탄생

–  진원숙 / 살림 / 2008.02.20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아랍전사들을 손짓해 부르던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는 일은 이슬람교로 개종한 베르베르족이 맡았다. 누사이르의 부장 타리크Al-Tariq는 711년에 주로 베르베르족으로 편성된 7천여 명의 군사와 함께 지브롤터해협-지브롤터는 ‘타리크의 바위’라는 뜻이다-을 건너 타리크산에 상륙했다. 바로 이베리아반도의 정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서西고트왕국은 왕위계승을 놓고 벌어진 내분에 빠져 있었다. 거기다 서고트족의 지배에 저항하던 이베리아반도의 원주민 켈트족과 종교적 박해에 시달리던 유대인이 타리크와 베르베르 전사들을 환영했다. 타리크는 서고트 최후의 왕 로데리고의 군대를 패퇴시킨 후 북진을 계속해 그라나다, 코르도바, 톨레도 등을 점령했다. 예상밖의 성공에 고무된 북아프리카 총독 누사이르도 대군을 인솔하고 이베리아반도로 건너와 세빌라, 메리나 시도니아, 사라고사를 점령한 다음 칼리시아의 아스투리아스공국을 멸하고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차지했다. 서고트왕국 출신의 일부 호족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공납을 납부한 대신 넓은 영지를 보유할 수 있었다.

 

이슬람의 전사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크왕국으로 침공해 들어갔다. 720년에 유럽대륙과 이베리아반도를 갈라놓는 피레네산맥을 넘은 무슬림전사들은 먼저 나르본을 점령했다. 아키테느공公 외드의 저항으로 툴루스는 가론강을 따라 진격해 온 아랍군에 점령되는 것을 면했다.

 


살육과 문명

–  빅터 데이비스 핸슨 / 남경태 역 / 푸른숲 / 2002.09.30

 

이슬람의 가파른 확장은 놀라우리 만큼 눈부셨다. 마호메트가 사망한 지 불과 2년 뒤인 634년에 무슬림군은 페르시아를 정복했다. 636년에는 시리아가 함락되었고 2년 뒤에는 예루살렘도 정복되었다. 641년에는 알렉산드리아마저 무너져 그 서쪽의 서고트족 영토 전체가 이슬람의 눈앞에 들어왔다. 40년 뒤 무슬림은 콘스탄티노플의 성문 앞에 이르렀으며, 673년부터 677년까지 그 도시를 점령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 681년 아랍인들은 대서양에 도달하여 베르베르인의 옛 왕국이 이슬람에 편입되었음을 공식화했다. 카르타고는 698년에 최종적으로 멸망했고 최후의 여왕인 카히나의 머리는 다마스쿠스의 칼리프에게로 보내졌다. 이제 17마일만 더 가면 유럽 땅이었다. 715년 에스파냐의 서고트족이 정복되었으며, 그 뒤부터 남프랑스에 대한 주기적인 약탈이 여러 차례 자행되었다. 718년에 아랍인들은 대거 피레네를 넘어 나르본을 점령한 뒤 모든 성년 남자를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았다. 720년에는 아키텐을 마음대로 습격했다. 에스파냐 무어인의 총독 아브드 알 라흐만이 이끈 732년의 대규모 원정군은 푸아티에를 점령하고 투르를 약탈하기 위해 가던 도중 비외푸아티에의 촌락들과 오를레앙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있는 무셀라바타유 사이 지점에서 샤를 마르텔에게 저지되었다.

……

그러나 기병전의 장점에는 한계가 있었다.우선 기병들은 바다로 수송하기가 어려웠고, 기병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약탈과 넓은 목초지가 필요했으며, 산악지대의 고갯길을 대규모 기병대가 넘기도 쉽지 않았다. 에스파냐와 동유럽의 계곡들은 넓은 초원이나 사막이 아니었으므로 무슬림 기병대가 우회해갈 만한 여건도 되지 못했다. 게다가 중동의 군대는 국민군의 토대를 이룰 만큼 수가 많지 않았고 주로 노예 병사들에 의존했다. 중동의 맘루크Mamluk와 후대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가 모두 그런 경우다. 이슬람의 물결은 일단 서유럽과 비잔티움 제국으로 넘어오자 전진을 멈추었다. 그에 따라 고정적인 방어선이 구축되었고, 서구 문명-에스파냐,발칸,동부 지중해-은 자유민으로 구성된 보병을 바탕으로 서서히 공세로 돌아섰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  앙리 피렌 / 강일휴 역 / 삼천리 / 2010.10.28

지브롤터해협만으로는 정복자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서고트족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694년에 에르기카 왕은 유대인들이 이슬람교도와 공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박해 때문에 이슬람교도가 에스파냐를 정복하기를 바랐을 가능성이 있다. 710년에 톨레도에 있는 아길라 왕이 바이티카의 공작인 로드리고에 의해 폐위되자 모로코로 도망가서 이슬람교도에게 도움을 간청했다. 하여튼 이슬람교도는 이런 상황을 이용했다. 711년에 약 7천 명으로 추산되는 베르베르인 군대가 타리크의 지휘 아래 해협을 건넜다. 첫 교전에서 로드리고가 패했고 모든 도시가 정복자에게 성문을 열었다. 이 정복자는 712년에 두 번째로 파견된 병력으로 증원된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장악했다. 713년에 북아프리카의 총독 무싸는 서고트족 왕국의 수도 톨레도에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칼리프가 이 지역의 통치자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 멈출 리가 있었겠는가? 곧 에스파냐에서 나르본 지방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베리아반도의 정복이 완료되자마자, 720년에 이슬람교도는 나르본을 점령하고 이어서 툴루즈를 포위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프랑크왕국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력한 프랑크 왕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721년에 아키텐의 공작 외드가 이슬람교도를 아키텐에서 격퇴시켰다. 그러나 나르본은 여전히 이슬람교도의 수중에 있었다. 725년이 되자 나르본을 거점으로 한 새롭고 가공할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슬람 전사들은 카르카손을 공략하고 오툉까지 진군해서 이 도시를 725년8월22일에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관련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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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 전투(Battle of Tours),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로도 불린다.

 

732년 알 안달루시아 총독 압둘 라흐만(Abdul Rahman Al Ghafiqi)이 이끄는 이슬람군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현재 프랑스 남서부의 보르도(Bordeaux)를 함락시키고 아키텐공(公) 오도(Odothe Great)를 격파한 후 서프랑스의 투르 근방으로 육박하였다. 오도의 요청으로 프랑크과 부르군트 연합군을 이끈 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은 10월에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에서 이슬람군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었고 압둘 라흐만은 전사하였다. 이 전투는 에드워드 기번이 “세계사를 바꾸는 조우遭遇”라고 불렀던 것 처럼,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를 이슬람화의 위기에서 구출한 것으로서 중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에게 단순한 약탈행위 이상으로 유럽에 대한 영구적 정복의 의도가 있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 이슬람의 통치 기간 동안 이베리아 반도는 알 안달루시아로 불렸다.

 

푸아티에 전투가 인상적일 정도로 중요한 승리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역사의 저울 위에서 푸아티에의 진정한 무게를 잰다면 그것은 다시 반세기 이상 어느 쪽으로 대세가 기울어질지 결정하지 못한 전투였다. 왜냐하면 아랍과 베르베르 사람들이 그 후에도 계속 유럽 대륙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아랍 이슬람 세력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기독교 유럽으로 진출하려던 시도가 8세기 초반에 좌절되었던 것에 대해 서구 유럽의 전설과 역사는 기독교 세력의 군사적 성공을 찬양한다. 특히 투르 푸아티에 전투(732년)와 <롤랑의 노래>의 배경인 50년 뒤의 롱스보(론세스바예스)에서의 싸움은 신성한 전쟁의 이데올로기를 낳았고, 곧이어 이슬람의 진출을 막기 위한 민족적 자부심의 온상이 되었다. 즉, 유럽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규정한 획기적 사건으로 보았다. 그러나 좀더 객관적으로 보면 기독교 유럽을 구한 것은 프랑크족이 아니라 비잔틴 제국으로 공을 돌려야 하고 이슬람 세계의 분열, 반란, 혁명이 좀 더 큰 원인이라고 판단된다.

(이슬람 문명은 7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문화적 의미의 문명 파급은 이 지역의 구조적인 지정학적 정치의 분열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 역사적으로 이슬람 문명의 정치 통일 기간은 매우 짧았다.)

 

이슬람의 서유럽 방향으로 확장에 관한 주요 연표를 살펴보자.

  711년  – 약 7천 명으로 추산되는 베르베르인 군대가 타리크(Tariq ibn Ziyad)의 지휘 아래 해협을 건넜다.

– 과달레테 전투(Battle of Guadalete)에서 타리크는 서고트 왕 로데릭Roderic을 대파하였다.

  712년  – 북아프리카의 총독인 무사(Musa bin Nusayr)는 18,000여명의 아랍군과 해협을 건너 타리크와 합류한다.

– 무사가 메디나시도니아, 세비야, 메르톨라를 점령

  713년  – 무사는 서고트족 왕국의 수도 톨레도에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칼리프가 이 지역의 통치자라고 선언했다.

– 이슬람이 하엔, 무르시아, 그라나다, 사군토를 점령

  714년  – 이슬람이 에보라, 산타렝, 코임브라를 점령
  716년  – 앙블레브 전투. 카를 마르텔이 권력 기반 확보
  717년  – 코르도바가 안-안달루스의 수도가 된다.
  718년  – 코바동가 : 펠라요와 그 지지자들이 아랍 부대와 교전

※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 방어

  720년  – 이슬람이 바르셀로나, 나르본, 셉티메니아를 정복한다.
  721년  – 툴루즈 전투에서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의 오도는 아키텐과 프랑크 연합군으로 이슬람을 격파
  725년  – 안바사(Anbasa ibn Suhaym al-Kalbi)가 프랑크 왕국 부르고뉴 지방의 오툉을 기습
  731년  – 세르다냐에서 아키텐의 오도와 동맹을 맺은 베르베르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진압된다.
  732년  – 압둘 라흐만이 이끄는 코르도바의 군대가 가론강에서 오도의 아키텐 군대를 격파한다.

– 카를 마르텔의 프랑크군은 압둘 라흐만이 전사한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군대를 물리쳤다.

  735년  – 이슬람이 프랑스 남동부 도시 아를(Arles)을 점령
  739년  – 우크바 이븐 알 히자즈가 카를 마르텔의 프랑스 침공 (~740년)

– 베르베르인들이 북아프리카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이는 이베리아 반도로 확대된다.

– 북아프리카의 반란군은 파견된 아랍군을 격파하고 지휘관인 쿨숨(Kulthum)을 살해한다.

– 반란은 스페인 북서부의 갈리시아 지역 밖으로 이슬람군을 몰아낸다.

  740년  – 베르베르인들은 인종적으로 배타적인 아랍의 우마이야 칼리프에 대해 반항하고 세금의 징수를 거부한다.
  741년  – 쿨숨(Kulthum) 군대의 생존자 1만여명의 군대는 새로운 지도자인 Talaba ibn Salama와 이베리아에 도착한다.
  742년  – 알-안달루스에서 4년 동안 내전이 계속된다.
  750년  – 우마이야 왕조가 전복되고 아바스 왕조가 시작
  754년  – 피핀의 카롤링거 왕조 시작
  756년  – 우마이야 왕조 멸망 후 일족인 아브드 알 라흐만이 에스파냐의 코르도바에 피신하여 독립했다.
  759년  – 아랍인, 나르본 상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mhistory2.jsp

 

– 732년 투르 푸아티에 전투 당시의 역사지도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보았다.

 


신의 용광로

–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 / 이종인 역 / 책과함께 / 2010.04.23

 

푸아티에 전투는 푸아티에에서 투르에 이르는 도로의 약 3분의 1 지점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장소에 대해 여러 해 동안 잘 합의가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에드워드 기번이 “세계사를 바꾸는 조우遭遇”라고 불렀던 이 전투의 실제장소는 불분명했다. 영국이 이 전투를 집요하게 투르 전투라고 불러왔던 것은, 흑태자 에드워드가 푸아티에에서 프랑스군에게 거둔 1356년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그 전투에 푸아티에의 지명을 부여하려는 배경이 깃들어 있었다. 푸아티에 전투의 시기가 10월이었다는 사실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아랍 문헌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본 결과, 연도는 이제 733년이 아니라 732년으로 확정되었다. 사라센 군대와 프랑크-아키텐 동맹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의 정확한 위치도 20세기 후반까지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

역사의 통설은 승자가 쓴 것이다. 프레데가르 연대기 작가는 푸아티에 승리를 산문으로 썼고, 그 칭송의 문장은 세기를 거듭하여 울려 퍼졌다. “카를 대공은 용감히 그들과 맞서 전투 대형을 구축하고 전사는 그들에게 돌진했다.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그는 적의 천막을 뒤엎고, 번개처럼 빠르게 싸워 그들을 갈기갈기 도륙했다.” 카를에 대한 찬양은 그날부터 시작되었지만 마르텔(망치)이라는 별명은 9세기 초까지 공식적으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또한 무세-라-바타유에서 승리를 쟁취한 사람들은 장차 강력한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었다.

……

8세기 후반과 9세기의 기독교 연대기 저자들은 자연스럽게 무세-라-바타유(푸아티에 전투)의 결과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보았다. 하지만 ‘순교자의 길’에서 대살육이 벌어진 다음 날, 무슬림들은 다른 생각을 했다. 그들은 알라가 이스마엘의 자손을 불리한 지경으로 밀어넣고, 골로 쳐들어간 무슬림 군대 앞에 아우스트라시아 군대의 ‘막강 석벽’을 세워놓아 지하드를 중단시켰다고 믿지 않았다. 푸아티에 전투가 인상적일 정도로 중요한 승리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역사의 저울 위에서 푸아티에의 진정한 무게를 잰다면 그것은 다시 반세기 이상 어느 쪽으로 대세가 기울어질지 결정하지 못한 전투였다. 왜냐하면 아랍과 베르베르 사람들이 그 후에도 계속 유럽 대륙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

지하드의 먹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푸아티에 전투는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끝내기는 커녕 오히려 가속화했다. 무세-라-바타유의 기슭에서 살육당한 뒤, 거의 10년 동안 무슬림제국은 전략적으로 더 대담하고 점점 확대되는 공격을 감행하여 유럽 대륙의 프랑크족과 라틴족을 괴롭혔다. 732년은 최후의 종착점이 아니라 이슬람 침입 스케줄에서 중요한 중간 지점일 뿐이었다. 하지만 거듭되는 패전으로 인해 히샴 1세의 인내심은 점점 없어져갔다. 그는 아예 끝장을 내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이교도에 대한 진군을 재개하라고 코르도바에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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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9~740년의 지하드는 규모와 전략에서 푸아티에 전투와 730년대 후반의 전투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개략적 사실은 알고 있지만 세세한 사항들을 잘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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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 세계에 대한 10세기의 주목할 만한 역사서, 『황금의 들판 The Fields of Gold』에서 알-마수디는 프랑크족의 끔찍한 호전성을 기록하지만 푸아티에 전투와 그 직후의 전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패전을 기록하기 싫어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아랍 문헌이 침묵을 지키는 주된 이유가 아니다. 이런 침묵을 근거로 하여, 다마스쿠스의 칼리프가 푸아티에를 단지 제국의 변두리에서 벌어진 하찮은 작전이라고 여겼다고 짐작하는 것은 정확한 판단이 아니다. 푸아티에와 그 뒤에 벌어진 유사한 패전은 심각한 굴욕적 사건이었다. 그렇더라도, 푸아티에 패배 직후에 그리고 향후 몇십 년 동안 아랍은 알-가파키가 로마 공로에서 순교했다고 하여 지하드를 그만두어야 할 군사적 이유가 별로 없었다. 푸아티에와 뒤이은 패전은 알라가 축복해주는, 알프스 남쪽으로 내달리는 진군의 길에서 잠시 앞길을 가로막는 도로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나중에 그레이트랜드(이슬람 유럽을 뺀 기독교 유럽을 뜻한다)의 상실이 항구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알-마수디와 같은 아랍 역사가들은 푸아티에 전투를 간단하게 언급했다. 그렇게 논평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유럽 구출이 자신의 공로라고 주장하는 프랑크족들과는 다르게, 기독교 유럽이 생존할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는 무슬림 세력의 내분 때문이라는 나름대로 타당한 지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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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의 통치가 끝나가던 무렵 피핀 왕조의 프랑크란드는 기독교 세계에서 비잔틴에 뒤이어 제2의 강력한 정치 세력이 되었다. 이제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는 왕국의 단단한 핵심을 구성했고, 아키텐과 프로방스는 그 핵심과 잘 연결되어 있었다.

 


살육과 문명

–  빅터 데이비스 핸슨 / 남경태 역 / 푸른숲 / 2002.09.30

 

샤를의 병사들은 이슬람군을 상대한 서유럽 중장보병의 첫 세대였다. 푸아티에 전투를 시작으로 이후 1천 년 동안 규율과 힘, 중무장을 갖춘 서유럽의 군대와 기동성, 수, 개인 기술에서 우위를 보이는 이슬람군의 대결이 전개된다. 프랑크군은 대오를 이루고 있는 한 -그들은 전투가 끝난 뒤에도 철수하는 아랍군을 추격하기보다 대오를 유지하는 데 더 신경을 썼다- 돌파당하거나 말 발굽에 짓밟힐 우려가 없었다. 당시의 문헌에는 프랑크군의 전사자가 1천여 명이었고 이슬람군은 수십만 명이 죽었다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과장일 테고 아마 샤를의 군대가 당시로서는 상당한 대군이었던 적을 몰아내고 소수의 병력만 잃었다는 정도가 사실일 것이다. 여느 기병전처럼 푸아티에 전투 역시 일대 유혈극이었다. 상처를 입고 죽어가는 말 수천 마리가 뒹굴었고, 무기를 빼앗긴 채 죽거나 부상한 이슬람 병사들도 부지기수였다. 부상자들은 대부분 그 전에 푸아티에에서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포로가 되지 못하고 처형당했다.

……

 

사실 그 전투의 정확한 날짜는 모른다. 732년 10월의 어느 토요일로만 추정될 뿐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 사건을 투르 전투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실제 전장이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의 옛 로마식 도로 어디쯤이었기 때문이다. 샤를 마르텔이 교회 재산을 몰수한 것 때문에 그에게 적대감을 품은 후대의 그리스도교 역사가들은 그의 업적을 일부러 무시하거나 깎아내렸다. 그로 인해 이 전투는 무슬림군과 서유럽군이 최초로 벌인 충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보다는 후대의 십자군이 더 큰 조명을 받게 되었다. 이 전투를 둘러싼 당대와 현대의 신화는 쉽게 제거할 수 있다. 어느 문헌에는 그 전투에서 죽은 무슬림들이 30만 명이라고 되어 있으나 침략군 자체가 그 정도 규모가 못 되었다. 아마 양측의 병력은 2~3만 명 가량으로 서로 엇비슷했을 것이다. 인근의 농부들 수천 명에게 각자 자신의 농토와 재산을 보호하도록 한 프랑크의 조치가 성공했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유럽인의 수는 침략자보다 많았다고 봐야 한다. 비록 아랍군은 프랑크군보다 많은 전사자를 냈지만, 그것으로 완전히 소탕된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에 초기 봉건제가 어느 정도 확산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프랑크의 승리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샤를이 교회 재산을 몰수하여 휘하 영주들과 가신들에게 분배한 것은 주로 그 전투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학자들처럼 샤를의 업적이 유럽 기병대에 새로 보급된 등자 덕분이었다는 주장도 잘못이다. 등자는 사실 수십 년 전에 서유럽에 도입되었지만, 그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다가 훨씬 후대인 800~1000년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널리 사용되었다. 프랑크의 승리를 기술적 발전이나 신속한 조직적 혁신에 비중을 두어 설명하려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대 전투의 두 가지 보편적인 원칙을 알지 못하고 있다. 첫째, 중장보병은 대오를 잘 유지하고 방어 가능한 위치에만 있으면 대개 기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멀리 원정을 온 기병들이 오합지졸을 면하려면 항시적인 노력과 약탈로 확실한 보급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732년 아브드 알 라흐만의 침공은 프랑스를 정복하고 피레네 북쪽까지 이슬람권으로 만들겠다는 체계적인 시도가 아니었다. 당대의 역사가들은 그 전투에 대한 설명에서 노획물의 의미를 크게 강조했다. 즉 아랍인들은 푸아티에로 오는 도중 모든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하여 전장에 도착할 무렵에는 노획물이 상당했으나 야반도주할 때는 안전을 기하기 위해 천막에 모두 놔둔 채 달아났다. 무슬림군의 사기와 기동력은 아마 푸아티에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짐과 포로로 인해 상당히 저하되어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 전투에서 이슬람군이 승리했더라면-푸아티에는 파리에서 불과 200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와 같은 습격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을 테고, 결국에는 20년 뒤 에스파냐 남부에서와 같은 이슬람 영토가 프랑스에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프랑스 전체가 영구히 이슬람 영토로 남을 가능성은 적었다. 샤를이 이끄는 프랑크군은 무장을 잘 갖추고 사기도 높은 3만 명의 보병에다 수천 명의 기병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은 에스파냐에서 8세기 후반의 대부분을 유럽인 만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보냈다. 그래서 이슬람 세력이 어렵사리 개척한 서쪽 경계는 북아프리카를 이슬람화하는 정도에 그쳤다. 915년에 이르면 무슬림들은 모두 프랑스의 남부 국경 너머로 쫓겨난다. 9세기에는 무슬림이 프랑스를 침략하기보다 오히려 프랑크인들이 피레네를 넘어 이슬람 거주지를 습격하는 일이 더 잦았다.

 

샤를이 푸아티에에서 승리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그의 군대는 멀리 원정을 가서 약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양측의 규모는 비슷했는데, 그렇게 수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은 방어하는 측의 이점이었다. 양측은 둘 다 로마식 쇠미늘갑옷을 입고 강철로 된 칼을 사용했으나, 프랑크군의 갑옷과 무기가 더 강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카롤링거인들은 갑옷과 공격용 무기의 유출을 막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데, 이는 그만큼 설계가 우수하고 양이 많았다는 뜻이다. 샤를은 푸아티에에서 본능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찾아내고, 그곳에 밀집보병들을 배치했으므로 적이 측면으로 우회하거나 포위하는 전술을 구사할 수 없었다. 그는 군대의 대오를 유지하고 방어적인 태세만을 고수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푸아티에에서 적의 기병들을 잘 막아낸 덕분에 샤를은 이후 ‘쇠망치(Martellus)’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성서에 나오는 대장장이 유다 마카베오의 이스라엘군이 신의 도움으로 시리아의 공격을 막아낸 일을 연상시킨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  앙리 피렌 / 강일휴 역 / 삼천리 / 2010.10.28

 

지브롤터해협만으로는 정복자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서고트족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694년에 에르기카 왕은 유대인들이 이슬람교도와 공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박해 때문에 이슬람교도가 에스파냐를 정복하기를 바랐을 가능성이 있다. 710년에 톨레도에 있는 아길라 왕이 바이티카의 공작인 로드리고에 의해 폐위되자 모로코로 도망가서 이슬람교도에게 도움을 간청했다. 하여튼 이슬람교도는 이런 상황을 이용했다. 711년에 약 7천 명으로 추산되는 베르베르인 군대가 타리크의 지휘 아래 해협을 건넜다. 첫 교전에서 로드리고가 패했고 모든 도시가 정복자에게 성문을 열었다. 이 정복자는 712년에 두 번째로 파견된 병력으로 증원된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장악했다. 713년에 북아프리카의 총독 무싸는 서고트족 왕국의 수도 톨레도에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칼리프가 이 지역의 통치자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 멈출 리가 있었겠는가? 곧 에스파냐에서 나르본 지방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베리아반도의 정복이 완료되자마자, 720년에 이슬람교도는 나르본을 점령하고 이어서 툴루즈를 포위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프랑크왕국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력한 프랑크 왕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721년에 아키텐의 공작 외드가 이슬람교도를 아키텐에서 격퇴시켰다. 그러나 나르본은 여전히 이슬람교도의 수중에 있었다. 725년이 되자 나르본을 거점으로 한 새롭고 가공할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슬람 전사들은 카르카손을 공략하고 오툉까지 진군해서 이 도시를 725년8월22일에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732년이 되자 에스파냐의 총독인 아브드 에르 라만이 또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그는 팜펠루나를 출발하여 피레네산맥을 넘어 보르도로 진군했다. 패배한 외드 공작은 샤를 마르텔과 함께 피신했다. 프랑크 남부 지방은 무력했기 때문에 이슬람교도에 대한 최종 반격은 북부지방에서 이루어졌다. 샤를 마르텔은 외드와 함께 진군하여 침략자에 맞섰으며, 푸아티에 근처의 협곡(과거에 클로비스가 서고트족을 무찔렀던 곳이기도 한)에서 아브드와 조우했다. 732년 10월에 전투가 벌어졌다. 아브드가 패하고 전사했다. 그러나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 프로방스로, 다시 말하면 해안으로 위협이 가해졌다. 735년에 나르본의 아랍 총독인 유세프 이븐 아브드 에르 라만이 그 이웃 지역 공모자들의 도움을 받아 아를을 점령했다.

이윽고 737년에 아랍인들은 마우콘투스의 도움을 받아 아비뇽을 점령했고, 멀리 리옹과 아키텐 지방까지 약탈을 자행했다. 샤를 마르텔이 다시 진군하여 그들에 맞섰다. 곧 아비뇽을 탈환하고 나르본으로 진군했다. 그는 나르본 앞에서 이슬람교도의 도움을 받아 바다를 건너온 아랍 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나르본을 탈환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마귈론, 아드, 베지에, 님을 점령하여 방화하고 파괴한 뒤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아우스트라시아로 돌아갔다.

샤를 마르텔의 몇 차례에 걸친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은 739년에 또 다시 프로방스를 침공했다. 아랍인들은 이번에는 롬바르드족도 위협했다. 마르텔은 롬바르드족의 도움을 받아 또 다시 아랍인들을 격퇴했다.

 

이후에 발생한 일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랍인들이 프로방스 해안을 장악하고 몇 년 동안 지배했던 것 같다. 752년에 피핀 3세가 프로방스에서 아랍인들을 격퇴했으나 나르본 공격은 실패했다. 피핀은 나르본을 수복하지 못하다가 759년에야 수복할 수 있었다. 이 승리는 프로방스에 대한 원정의 종말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유럽 서부에서 이슬람 팽창의 종말을 의미한다. 콘스탄티노플이 718년의 대공세를 막아 냄으로써 동방을 지켰듯이, 서방에서도 카롤링거 국왕들의 가신들인 아우스트라시아의 정예군이 서방세계를 지켜 냈다.

그러는 동안 동방에서 비잔티움 함대가 이슬람을 에게 해 연안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 반면에, 서방에서는 이슬람이 티레네 해의 재해권을 장악했다.

 


프랑스사

–  김복래 / 미래엔 / 2005.08.01

 

서구 역사상 처음으로 중무장을 갖춘 기병대를 출전시켜 이슬람 군대를 격퇴시킨 마르텔의 푸아티에에서의 7일간의 전투 무용담은 환영(幻影)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신화는 카롤링거 왕조의 서유럽 지배를 정당화하고 교황권 옹호자로서의 역할을 공고히 하는 데 시의 적절하게 이용되었다. 19세기에도 ‘732년의 서사시’는 문학 작품이나 회화를 통해 찬미 대상이 되었다. 루이-필립 치세하에 알제리의 식민 정책은 ‘기독교 문명의 수호’라는 프랑스의 전통적 역할에서 그 정당성을 구했다. 즉, 알제리 식민화를 기독교 세계를 구출한 프랑스 역사의 연속선상에 위치시킨 것이다. 그래서 푸아티에 전투는 1832년부터 알제리 정복을 정당화시키는 역사적 근거로 이용되었다.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인의 집단 기억 속에 공고히 자리잡은 신화를 재확인할 수 있는 문학 작품과 이미지 표상들이 그 당시에 선을 보였다. 그러나 푸아티에 전투 승리의 결과가 실제로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샤를 마르텔은 정말 기독교 세계의 구원자인가? 피핀 2세의 사생아였던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용모가 의젓하고 무용이 뛰어났다는 것만이 전해지고, 그 밖의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성자들에게 은혜를 베푼 그의 가계에서 유별나게도 종교에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샤를 마르텔은 휘하의 무사들을 중장기병대로 조직하려 했고, 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교회 토지를 몰수하여 교회의 엄청난 원성을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교나 수도원장의 직위를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그의 일족이나 가신들에게 배당해 주었다. 그 결과, 이러한 성직자 가운데에는 『롤랑의 노래』1)에 나오는 튀르팽(Turpin)처럼 무용이 뛰어난 인물이 많았지만, 성직에 부적합한 인물들이 많아져서 골 지역 교회들의 규율은 엉망이 되었다. 그러므로 샤를 마르텔에 대한 교회측의 평판이 좋았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골에 침입한 이슬람 세력을 격퇴하고, 독일 내부 깊숙이 영토를 확장했다는 공로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탁월한 무용과 소(小) 피핀(또는 피핀 3세)이나 샤를마뉴 대제 같은 직계 후손들에 의해 카롤링거 왕조의 창시자로 추대되었다. 8세기 이후 성직자나 기독교사가들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한 기적적인 성격을 극구 강조했다. 18세기 초에 에드워드 기본(E. Gibbon)을 위시한 세속적인 역사가들 역시 전투의 거시적인 중요성, 즉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서방 세계의 승리를 실제보다 훨씬 과장해서 평가했다. “(만일 전쟁에서 우리가 패했다면) 사라센 인들에게 라인 강은 나일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보다 더 건너기 쉬운 동네 하천이 되었을 것이다. 또, 아라비아 함대는 해전 없이 템스 강의 입구를 마치 제집처럼 드나들었을 것이며,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현재 코란의 해석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또 학생들은 예언자 모하메드 계시의 신성성과 진실을 할례를 받은 유대 인들에게 증명해 보이고 있을지도 모른다.”(에드워드 기본, 『로마 제국의 흥망사』) 한편, 1869년에 프랑스 역사가이며 고위 공직자였던 기조와 그의 부인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것(푸아티에 전투)은 동양과 서양, 남과 북,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기독교 복음과 코란(Koran)2) 간의 투쟁이었다. 우리는 세계 문명이 바로 그 전투의 향방에 달려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1878년, 에르네스트 메르시에(E. Mercier)는 그의 논문에서 최초로 푸아티에 전투에 관한 객관적 평가를 제공했다. 1944년, 모리스 메르시에(M. Mercier)와 앙드레 스갱(A. Seguin)은 『샤를 마르텔과 푸아티에 전투』라는 전공 논문에서 라틴과 이슬람측의 자료를 동시에 비교, 분석하였다. 이 때, 종전의 과장된 해석에 대한 거품이 서서히 빠지고 보다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첫째, 푸아티에 전투는 이슬람 침공을 완전히 종결시킨 것은 아니었다. 이슬람 교도들은 이미 732년 이전에 골의 영토를 침범했고, 아키텐의 외드(Eudes) 공(公)이 툴루즈 근처에서 먼저 사라센 군을 격파시켰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덕분에 외드 공은 교황으로부터 극도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 군대는 759년에 완전히 물러났다. 둘째, 이슬람의 서진은 무함마드의 예언이 준 충격이나 전도열 때문에 시작되었다(한편, 인구 과잉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단순한 침략이나 약탈의 시도나 모든 기독교 왕국을 섬멸시키려는 원대한 정복 사업이 아니었다. 이슬람의 통치자 압둘 라만(Abdul-Rahman)은 많은 전리품을 쟁취하고, 아키텐의 외드 공을 생포하는 동시에 이슬람의 적들을 패주시킬 구체적인 목적으로 골 지역을 침범했다. 그러나 전투의 양상은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투쟁을 종결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강자인 프랑크 군대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전투의 승리 이후 궁재의 일인자 샤를 마르텔은 마르텔(Martel), 즉 ‘망치(marteau)’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또, 야심만만한 샤를 마르텔은 푸아티에 전투의 기회를 틈타 그가 권력을 장악한 이래 개인적으로 탐을 내오던 아키텐 지방을 수중에 넣었다.

 

 

프랑크 역사에서 푸아티에 전투가 가지는 의의를 정리한다면, 이슬람 군대의 발빠른 약진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모로코 지역에 이르기까지 이전의 기독교 지역과 비(非)아랍 지역에 이슬람 문화가 강렬히 각인되었다는 점이다. 아랍 인들은 비잔틴 제국을 제외한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프랑크 왕국과의 대립에 가장 중요한 역사적 비중을 두고 있다. 중세 아랍 문헌을 살펴보면, 16명의 프랑크 국왕 명단이나 프랑크-아랍 군대의 접촉 등 프랑크 인들에 대한 기록이 많다.

 

8세기경 아랍 어에는 ‘Franj’라는 단어가 도입되었다. 훗날,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프랑스 인을 지칭하는 프랑크인(Franks)이나 유럽 인을 의미했다. 근대 표준 아랍 어에서도 ‘Franji’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동사 ‘tafarnaja(어근=f-r-n-j)’는 유럽화되는 것, 형용사 ‘mutafarnij’는 유럽화된 것, 또 ‘al-Ifranj’는 유럽 인들을 의미했다.

 

711년, 이슬람 정복자들은 서고트 왕국을 단 한 번의 격투에 무찔러 버렸다. 그래서 이베리아의 기독교 주민들은 7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슬람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베리아 지역의 재탈환은 콜럼버스가 대서양 횡단을 위한 공식 지원을 받기 불과 몇 달 전인 1492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만일, 샤를 마르텔이 서고트 국왕 로데릭(Roderick)처럼 이슬람 군대에게 무참히 패배했다면 아마 역사의 운행은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기독교 세계의 승리를 미화하는 서구 중심 사관에는 문제점이 많다. 그러나 732년의 전투에서 압둘 라만이 승리했다면, 기독교 왕국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메로빙거의 유명무실한 무위왕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카롤링거 왕조의 역사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말이 바꾼 세계사

–  모토무라 료지 / 최영희 역 / 가람기획 / 2005.11.10

 

6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서유럽에서는 여러 민족의 이주와 정주가 반복되는 등 공권력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8세기에 접어들어서면서 이곳에도 통합의 기운이 싹트게 된다.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부채질한 것이 바로 이슬람 세력의 유럽 침공이었다.

8세기 초 이슬람군은 이베리아 반도를 건너 지중해 연안과 피레네 지방을 침략했다. 그리고 이슬람의 기마군단은 그리스도교 최대의 성지 중 하나인 프랑스의 산마루탄 수도원을 목표로 북상했다. 이에 원군을 요청받은 프랑크 왕국의 궁재(宮宰) 카를 마르텔은 스스로 연합군을 이끌고 이슬람 군대와 대치했다. 732년 양군은 투르와 푸아티에의 사이에 있는 전쟁터에서 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슬람군은 패주하였고 이후의 침략행위에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 전투가 세계사에서 큰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우선 침입할 수 있는 한계지점까지 가보려고 한 정도의 약탈행위에 불과했고, 오히려 서유럽이 입은 그 후의 충격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닐까? 이 전투에 대해서는 신빙성 있는 사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전투 날짜와 장소조차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전투를 전후로 기병은 수적인 측면에서 대규모로 발전하였고, 기병대에 대한 수요도 극적으로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기병대의 수요증가는 프랑크 왕국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방위하려는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투르-푸아티에 전투는 서유럽의 그리스도 교도가 이슬람 군대를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비록 쫓겨나기는 했지만 이슬람군의 우수한 기마대는 그리스도교 세력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만큼 기마전술 때문에 애를 먹었을 것이다.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전투력이 강한 전문적인 기사 집단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제 누가 보더라도 명확해졌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보답하는 의미로 프랑크 왕국은 전사들에게 교회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증여하였다. 전사들은 이 자본을 바탕으로 스스로 기사의 무구를 갖추고 자신을 단련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국왕의 가신이 되었다. 그들이 하사받은 토지는 은대지(恩貸地)라고 불렀는데, 군무 봉사가 없을 경우에는 반환해야 했다. 그리고 기사들은 신분에 걸맞은 행동과 예절을 익혔다. 이리하여 이른바 봉건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투르-푸아티에 전투는 기사단의 성장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래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유럽의 재발견

–  볼프강 슈말레 / 박용희 역 / 을유문화사 / 2006.02.10

 

레프가우의 아이케는 자신이 만든 『작센 법령집』에서 노아의 세 아들에 대한 성서 구절을 인용하여 그 자손들을 예속의 신분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라고 썼다.(Fischer 1957)  이미 알려져 있듯이 아이케의 자유에 대한 생각은 널리 영향을 미쳤다.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이 이야기는 적어도 식자(識者)들의 세계에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일시적으로 노아의 전설에 입각한 “야훼의 땅(Japhetien)”이란 명칭이 “유럽”이란 명칭과 경쟁하는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프랑크제국의 카롤링조朝라는 새로운 정치적 문화적 구심점이 생겨났으며, 이 제국은 다시 유럽이란 개념과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었다. 샤를마뉴 대제(카를 대제)의 제국(재위 768~814)은 로마제국의 연장이라 생각되었고, 세계제국의 반열에 올랐으며, 기독교적 구원사에 확실히 연결되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8세기 중엽 연대기(코르도바에서 나온 작자 미상의 연대기)에는 732년 투르Tour와 푸아티에Poitier의 전투에 대한 기술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개념이 나타났다. 이 연대기는 전투에 참여한 유럽 전사(戰士)들을 유럽인(europenses)이라고 명명하고 있었다. 이 명칭은 새로이 나타난 단어였으며, 분열된 유럽 종족들을 묶어내고자 하는 당시의 위기의식을 반영한 말로 보인다.

따라서 샤를마뉴 대제는 유럽의 아버지(pater Europae)라 불리게 되었고, 그가 만든 나라는 유럽왕국(regnum Europae)이 되었다. 아마도 이 이름은 새 왕국이 로마제국에 구원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 로마제국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들의 발언>

 

◎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승리의 진군은 지브롤터의 바위로부터 1천 마일이나 이어져 루아르의 강둑에까지 이르렀다. 그런 식으로 계속 갔더라면 사라센군은 폴란드의 국경지대와 스코틀랜드의 고원지대까지 파죽지세로 내달았으리라. 라인 강은 나일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만큼 건너기 어렵지 않으므로 아랍 함대는 별다른 해전도 없이 템스 강 어귀까지 항해했으리라. 그랬다면 아마 지금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코란을 강의했을 테고, 학생들은 할례를 받고 마호메트의 계시에 담긴 신성한 의무와 진리를 탐구했으리라.

◎ 19세기 프랑수아 기조(François Guizot)는 프랑크족이 끔찍한 운명으로부터 문명을 구원했다고 주장했다.

 

 

◎ 앙리 마르탱은 19권짜리 『1789년까지의 프랑스 역사』에서 “푸아티에는 프랑크족과 아랍인 사이에서 세계의 운명을 좌우했던 순간”이라고 선언했다.

 

◎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도 푸아티에 전투를, ‘모하메트주의자가 이탈리아와 갈리아를 정복하려 위협하던 8세기 벽두,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점들 가운데 한 순간'(『종교개혁의 역사』)에 있었던 일대 전환점이라고 여겼다.

 

◎ 에드워드 크리시도 푸아티에 전투를 ‘세계의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로 꼽으면서 유럽을 구한 획기적인 전투라고 보았다.

“그 이후부터는 비록 단절이 없지는 않았지만 문명의 진보, 근대 유럽의 여러 국가와 정부의 발전이 궁극적으로 확실한 길을 걷게 되었다.”(1851년 『세계의 15대 결정적인 전투The Fifteen Decisive Battles of the World』)

 

◎ 20세기 초의 역사 편찬자 에르네스트 라비스는 푸아티에가 프랑크족이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에게서 유럽을 구출했다고 반복하여 말했다.

 

◎ 독일의 전쟁 사학자 한스 델브뤼크(Hans Delbrück)는 19세기 초에 관해 저술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역사상 이보다 더 중요한 전투는 없었다.”

 

◎ 40년 전 두 명의 역사가, 장-앙리 롱와 장 드비오스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무슬림 군대가 승리했을 경우의 이득으로 천문학, 삼각법, 아라비아 숫자, 그리스 철학의 집대성 등을 열거했다.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우리 유럽은 267년의 세월을 벌었을 것이다. 종교전쟁은 일어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관련 그림>

 

 

1837년 카를 폰 슈토이벤(Steuben)이 푸아티에 전투를 낭만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얼음 덩어리’를 이룬 프랑크군의 위력을 보여준다. 이슬람 기병들은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사슬갑옷을 입은 창병들의 방벽을 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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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년의 탈라스 전투(The Battle of Talas)는 두 개의 제국, 이슬람 제국과 중국의 당唐 제국이 중앙아시아 패권을 결정지은 전투이다. 아바스 왕조의 이슬람은 뜨는 해, 당唐은 지는 해로 비유할 수 있겠다.

 

오늘날 탈라스 전투는 누구나 알정도로 유명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중국의 당唐 제국과 아바스 이슬람 제국의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군사적 충돌이었던 탈라스 전투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8세기의 중앙아시아는 여러 부족과 지역 강국들, 실크로드 장악을 위한 투쟁 그리고 정치적 권력, 종교적 헤게모니라는 여러 요소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자이크와 같았고, 수많은 전투와 동맹, 그리고 양다리를 걸치거나 배신 등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그때 현재의 키르기스스탄 탈라스강 유역에서 일어난 하나의 전투가 중앙아시아에서의 중국과 이슬람의 패권 다툼을 끝내고 불교/유교의 아시아와 이슬람의 아시아 사이의 경계선을 확정시켰다. 그리고 종이 만드는 방법이 탈라스 전투 전에 이미 중앙아시아에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 탈라스 전투로 세계사적 주요 발명품인 제지법이 중국에서 서방 세계로 전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 탈라스 전투의 배경

강력한 당 제국(618~906)은 중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대부분의 기간동안 군사적인 점령보다는 일련의 무역협정과 명목상 보호령이라는 형태의 ‘소프트 파워soft power’를 사용하였다. 640년 이후로 당唐이 마주한 가장 까다로운 적은 손챈캄포(Songtsan Gampo)가 세운 토번이라는 강력한 티베트 제국이었다.

 

현재의 신장(Xinjiang)에 해당하는 중국 서부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패권은 7~8세기 동안 중국과 토번의 뺏고 뺏기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중국은 또한 북서쪽에서는 투르크계인 위구르족, 인도-유럽어족의 투르판인들, 그리고 남쪽 국경에서는 라오스/타이족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 나당전쟁과 토번 

 

 

◎ 이슬람의 팽창과 중국과의 충돌

중국이 이러한 주위의 적들과 상대하고 있는 동안, 새로운 초강대국이 중동에서 성장했다. 아랍인들에 의한 번개같이 빠른 이슬람의 팽창은 필연적으로 중국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기득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651년 이슬람은 사산 제국(Sasanian Empire)의 야즈데게르드 3세(Yazdegerd III)가 마지막으로 도망갔지만 결국 암살당한 곳인 메르브(Merv)를 점령하는데, 위치는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의 마리(Mary) 근처이다. 이곳을 전진기지 삼아 이슬람은 부하라(Bukhara, 안국安國), 페르가나 분지(Ferghana Valley), 그리고 한때 오늘날 중국과 키르기즈(Kyrgyz)와의 국경선 근처인 카슈가르(Kashgar, 소륵疏勒)까지도 정복했다.

메르브는 한나라 반초(班超, 32~102년)가 서역원정때 점령하기도 했었다.

 

사산 제국의 멸망은 야즈데게르드 3세의 아들인 페로즈 3세(Peroz III)에 의해 당나라 장안(Xian, 長安)에 알려지게 된다. 그는 아랍군의 추격을 피해 동방으로 도피하다가 670년 중국 당나라에 도착하였다. 8년 후 파사(波斯, 페르시아) 왕으로 책봉되어 서역에 돌아가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의 타하르 지방에 머물렀다.

 

당 제국과 이슬람 제국은 715년 아프가니스탄 페르가나 분지에서 군사적으로 처음 충돌했다. 아랍인들과 티벳인들은 소그디아(Sogdia), 페르가나 분지 주변의 왕 또는 통치자인 이히시드(ikhshid)라 불리는 사람을  ‘Alutar’라 불리는 사람으로 교체했는데, ikhshid가 당唐에 개입을 요청했고 당은 10,000명의 군대를 보내 Alutar를 전복시키고 ikhshid를 다시 복귀시켰다.

 

2년후, 아랍과 티벳의 군대는 악수(Aksu)라는 현재의 신장 지역에 있는 2개의 도시를 포위하자 중국은 카를룩(Qarluq) 용병을 보내 그 포위를 풀게한다.

 

750년에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는 아바스 왕조에게 전복되어 멸망한다. 이때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 장군과 싸운 실질적인 인물이었던 호라산 총독 아부 무슬림(Abu Muslim)이 747년 메르브에서 무장 봉기하여 혁명군을 서쪽으로 진군시켜서 우마이야 군대를 격파했다. 그 공적으로 인해서 호라산 총독이 됐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부 무슬림이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지 않았다면 아바스 왕조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 아바스 왕조 이슬람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왕조의 팽창 정책을 지양하고 거대한 이슬람 제국을 견실화 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한 관심 지역의 하나가 페르가나 분지와 그 너머의 동쪽 국경 지대였다.

중앙아시아 동부에서 티베트,위구르와 동맹한 이슬람 세력은, 뛰어난 전술가인 지야드 이븐 살리흐(Ziyad ibn Salih) 장군이 이끌고 있었고 중국은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의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있었다. 그는 고구려 유민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탈라스에서의 결정적인 충돌은 페르가나의 또 다른 분쟁에 의해 촉발되었다. 750년 페르가나의 왕은 이웃인 석국(현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수도 타슈켄트Tashkent 일대)의 통치자와 국경 분쟁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군대를 지원해 달라고 중국에 호소하였고, 고선지 장군이 출병하게 된다.

 

원래 타슈켄트(석국, 石國)는 수 · 당 시대에 있던 소무(昭武) 9국 중 하나인데, 지리적으로 당과 아랍-이슬람의 양대 제국 사이에서 양쪽 세력의 눈치를 보며 강한 세력에 사대주의 정책을 펴고 있었다.

당이 고창(高昌)을 격파하고 구자(龜玆)와 토화라(吐火羅, Tokharistan, 박트리아)를 정벌하자 이들 9국은 잇따라 당에 스스로 신하라 칭하고 조공하였다. 7세기 후반부터 아랍제국이 강성해 페르시아를 공멸하고 하외지역(河外地域, 중앙아시아의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까지 육박하자, 이제는 당에 등을 돌리고 그들에게 복종하고 신하가 되기를 청하였다.

 

고선지는 타슈켄트를 포위했고 타슈켄트 왕을 속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약속과 달리 장안으로 연행된 타슈켄트 왕은 처형 당했는데, 마치 651년 이슬람이 메르브Merv 정복에서 일어났던 일과 데쟈뷰인 것처럼 타슈켄트 왕의 아들이 탈출하여 아바스 왕조의 호라산 총독 아부 무슬림(Abu Muslim)에게 사건을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아부 무슬림(Abu Muslim)은 메르브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동쪽으로 행군하여 지야드 이븐 살리흐(Ziyad ibn Salih) 장군과 합류하였다. 이슬람은 이 지역에서의 아바스 왕조 이슬람의 힘을 보여주고자 했다.

 

 

 

◎ 탈라스 전투

751년 7월, 두 개의 강력한 제국의 군대가 현재 키르기스, 카자흐스탄 국경 근처인 탈라스에서 만났다. 그리고 5일 동안 전투를 치뤘다.

 

전쟁터가 어딘지 아직 모른다. 일반적으로는 막연하게 역사상의 구(舊) 탈라스라고 지목하지만, 그 탈라스가 오늘날 구체적으로 어느 지점인지를 놓고도 탈라스성이니, 탈라스평원이니, 탈라스강이니 하는 등의 주장이 엇갈린다.

 

 

당(唐) 쪽의 기록에는 “고선지가 이끌었던 한(漢)과 번(蕃,오랑캐)의 군사가 모두 3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슬람 쪽 기록인 『이븐 아시르 연대기』에 따르면 “아바스군은 당군 5만을 죽이고, 2만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당(唐) 쪽의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이 연대기의 기술은 상당히 과장되어 있는 것 같다.

이슬람 군의 규모는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이슬람 쪽 문헌에는 권력 투쟁에서 패한 우마이야 왕조의 지지자들이 당(唐)의 힘을 빌려 아바스 왕조에 보복하려 한 것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탈라스 전투는 전쟁으로서는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구당서(舊唐書』「본기(本記)」에서는 이 전쟁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신당서(新唐書)』「본기」에 “고선지가 대식과 탈라스 성에서 전쟁을 벌였으나 패했다”고 단 한 줄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우마이야 왕조의 지지자들에게 부탁을 받고 아바스 왕조라는 새로운 이슬람 세력의 실력을 시험해 볼 요량이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

 

투르크계 카를룩(Qarluq)이 전투 시작후 며칠만에 아바스 측에 합류하자 당唐 군대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중국측 기록에서 카를룩이 원래 당의 번蕃으로 참전하였으나 전투 중에 배신하여 아바스측으로 돌아섬으로써 당군이 크게 패하고 말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슬람의 기록에 따르면, 카를룩은 이미 탈라스 전투 전에 아바스와 동맹을 맺은 것으로 암시하고 있다. 카를룩이 당 군대 진형의 배후를 갑자기 공격한 사실을 보면 이슬람의 서술이 더 신뢰가 가긴 한다.

 

전쟁에 참여한 수만의 당나라 군사 중 소수만 살아 남았다. 고선지도 병사들의 주검을 남긴 채, 부하 이사업 등과 백석령을 통해 허겁지겁 퇴각하여 생존하였다. 『신당서(新唐書)』「이사업」전에는 “험한 백석령에서 꼬챙이에 꿴 생선처럼 늘어선 적의 보병과 기병들을 몽둥이로 마구 때려 죽이며 길을 터 귀환했다”고 당시의 참상을 기록해놓았다.

 

살아남은 전쟁 포로들은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사마르칸트(Samarkand)로 보내졌다.

 

고선지 당唐 군대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탈라스 전투는 어떻게 보면 전략적 무승부와 가까웠다. 제국의 전면적인 싸움이 아닌 지방 영주의 싸움같은 성격이었는지 이슬람의 동쪽으로의 전진은 중지되었고,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혼란스러웠던 당나라는 관심을 중앙아시아에서 북부와 남부 국경에서의 반란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당 사람들이 그 싸움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긴 것도 아니었는지, 고선지는 그 패전으로 문책을 받지 않았다. 그는 뒤에 안록산의 군대와 싸우다가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755년). 아이러니하게도 탈라스 전투의 다른 주인공이었던 아부 무슬림(Abu Muslim)도 같은 해에 그의 세력신장을 두려워한 제2대 칼리프 만수르에게 암살당한다.

 

 

◎ 탈라스 전투의 결과

탈라스 전투는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중국과 이슬람이라는 두 개의 문명권이 충돌한 것이고, 오늘날까지 이 지역 주민의 대다수가 이슬람을 신봉하고 있는 것도 이 전투의 결과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탈라스전투는 세계사의 전개에서 이처럼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승리를 거둔 이슬람 측에서는 이 전투에 대해 거의 아무런 언급도 없을 뿐만 아니라, 수만 명이 몰살당한 중국 측에서도 아주 단편적인 기록만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당唐의 쇠퇴기가 시작되는 한 부분으로서 이 전투를 언급하고 있다. 같은 해에 북중국에서는 거란이 당의 군대를 격파했고, 지금의 윈난성인 중국 남쪽에서는 타이/라오스 민족이 봉기하였다.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내전 수준이었던 755~763년의 안사의 난(安史─亂)은 당 제국을 더욱더 약화시켰다. 763년에는 티베트가 중국의 수도인 장안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국 내부의 극심한 혼란으로 말미암아, 751년 이후 중국은 타림 분지 너머로 영향력을 미칠 의지도 힘도 없었다. 서역은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명(明)이 신강성 동부에 잠시 진출했던 것을 빼놓으면 18세기 중엽에 청(靑)이 진출할 때까지 중국은 서역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당연히 승자가 역사를 쓰는 것이지만, 이슬람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이 전투는 주목받지 못하였다.  탈라스 전투 이후 얼마동안은 이 전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이슬람 내부의 권력 투쟁인지는 몰라도, 이 전투의 승리자였던 아부 무슬림(Abu Muslim)의 암살(755년)과도 상관이 있을 수도 있겠다.

탈라스 전투 직후 중앙아시아를 시찰한 칼리프의 동생 만수르는 아부 무슬림의 권위에 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형에게 “그를 빨리 죽이지 않으면 왕조는 안정될 수 없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베리 호버만(Barry Hoberman)은 9세기 이슬람 역사가 타바리(al-Tabari, 839~923)가 탈라스 전투를 전혀 언급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탈라스 전투 이후 500년이 지나서야 역사가 이븐 아시르(al-Athir, 1160~1233)와 다하비(al-Dhahabi, 1274~1348)의 글에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라스 전투는 중요한 결과를 가지고 왔다. 약화된 중국 제국은 중앙아시아에 더 이상 간섭할 수 없었고, 아바스 이슬람의 영향력은 증가하였다.

 

중앙아시아는 탈라스 전투 후 250년 이내에 대부분의 불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전투이후 이슬람군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 중에는 두환(杜環, Du Huan)을 포함하여, 숙련된 중국인 장인들이 다수 있었다. 그들을 통해 처음에는 이슬람 세계에서 나중에는 유럽까지도 종이 만드는 법을 배웠다.

 

얼마되지 않아 제지 공장이 사마르칸트,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카이로, 델리 등으로 속속 만들어졌다. 그리고 1120년에 유럽 최초의 제지 공장이 지금의 스페인 사티바(Xativa, 현재의 발렌시아)에 설립되었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이 도시에서 제지 기술은 아탈리아, 독일, 그리고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이 종이 기술의 출현은, 목판 인쇄술과 이후 목활자(木活字) 인쇄술과 함께 중세 유럽의 과학, 신학, 역사의 발전에 커다란 역활을 하였다.

 

 

– 751년의 역사지도

 

 

– 현대판 실크로드도 옛날과 다르지 않다. 페르가나(Fergana)와 타슈켄트(Tashkent)가 탈라스 전투 당시 양 제국의 주요 갈등 지역이었다.

 

당시의 세계사 연표는 :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751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보았다.

 


사료 관련 자료

 

◎ 『신당서(新唐書)』「본기」

고선지가 대식과 탈라스 성에서 전쟁을 벌였으나 패했다.

 

◎ 『신당서』「고선지6」

천보 9년(750), 석국(石國)을 토벌하였다. 그 나라의 왕 거비시(車鼻施)가 항복을 청하였는데 고선지가 포로로 잡아 궁궐에 바치자 목을 베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서역(西域)이 복종하지 않게 되었다.

석국의 왕자는 대식(大食)으로 달아나 병력을 빌려 탈라스에서 고선지를 공격하여 자기들의 원한을 되갚았다.

 

 

◎ 『자치통감』권216, 「당기(唐紀)」32의 현종(玄宗) 천보(天寶) 10년(751) 4월 임오(壬午)

고선지가 석국의 왕을 사로잡을 때 왕자가 달아나 여러 오랑캐 나라로 가서 고선지가 그들을 속이고 해친 실상을 자세히 아뢰었다. 여러 오랑캐들이 모두 화가 나서 몰래 대식(大食)의 군대를 이끌고 사진(四鎭)을 함께 공격하고자 하였다. 고선지가 그 소식을 듣고 번과 당의 3만 병력을 이끌고 대식을 공격하였다. 깊숙이 700여 리를 들어가 항라사성(恒羅斯城)에 이르러 대식과 마주쳤다. 서로 5일을 대치하였는데, 갈라록(葛羅祿) 병력이 배반하여 대식과 함께 당군을 협공하였다. 고선지가 대패하여 군사들이 거의 모두 사망하고 살아남은 병력은 겨우 수천 인이었다. 우위위 장군(右威衛將軍) 이사업(李嗣業)이 고선지에게 밤을 틈타 달아날 것을 권하였다. 달아나는 길은 험하고 좁았는데, 발한나(拔汗那) 병력이 앞에서 달아나고 있어서 사람과 가축이 길을 메우고 있었다. 이사업이 앞에서 말을 몰며 큰 몽둥이를 휘둘러 치자 사람과 말들이 모두 쓰러져, 고선지가 이에 지나갈 수 있었다. 장교와 사졸들이 대오를 잃고 있었는데 별장(別將)인 병양군 출신 단수실(段秀實)이 이사업의 소리를 듣고 꾸짖었다: “적을 피해 먼저 달아나는 것은 무용(無勇)이고, 자기만 살고 부하를 버리는 것은 불인(不仁)이다. 다행히 뚫고 나가더라도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사업이 그의 손을 잡고 사과한 뒤 남아 추격병을 막으면서 흩어졌던 사졸들을 수습하여 함께 빠져나왔다. 안서로 돌아와 고선지에게 말하자 단수실을 겸도지병마사(兼都知兵馬使)로 임명하여 자신의 판관으로 삼았다.

 

◎ The earliest Arabic account for the battle itself from Al-Kamil fi al-Tarikh (1231 AD) suggests 100,000 troops (50,000 deaths and 20,000 prisoners), however Bartold considered them to be exaggerated (Xue 1998, pp. 256–7; Bartold 1992, pp. 195–6).

 


중국

–  백범흠 / 늘품플러스 / 2010.04.19

 

당나라는 고종(高宗) 시대에 한반도 동남에 자리 잡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왜 연합세력을 격파하고,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돌궐과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신흥강국 토번吐蕃을 하서회랑에서 축출하고, 서돌궐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신강의 투르판 분지에 위치한 고창高昌을 정복하여 북신강北新疆마저 손아귀에 넣었다. 이후 천산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키르키즈-우즈베키스탄 지역을 흐르는 추Chu강, 탈라스Talas강과 시르 다리야Syr Dariya를 넘어 아랄해 근처까지 영유한 세계제국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수도 장안長安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

무조(측천무후)가 죽은 후 그녀의 손자인 이융기는 쿠데타를 통하여 숙부인 중종의 황후 위씨韋氏 일당을 제거했다. 그는 황제(현종)가 된 다음 적극적인 대내외 정책을 실시하였다. 당시 당나라 최대의 라이벌은 티베트 고원에서 흥기한 토번(吐蕃)이었다. 고구려가 멸망당한 다음해인 669년, 명장 가르첸링이 이끄는 토번군은 설인귀가 지휘한 10만의 당나라-토욕혼 연합군을 청해호 남쪽의 대비천(大非川)에서 격파하였으며, 여세를 몰아 신강의 안서 4진 즉, 카라샤르(언기), 쿠차(구자), 호탄(우전), 카슈가르(소륵)을 장악하였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영역으로 하는 발해가 독립하고, 한반도 남부의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대비천 전투에서 당나라가 토번에 대패했기 때문이었다.

678년 가르첸링의 토번군은 중서령 이경현이 이끄는 당나라 18만 대군을 청해호 부근의 승풍령에서 대파하였는데, 이로써 청해(토욕혼)의 티베트화가 공고하게 되었다.

 

 

현종시대에도 당나라와 토번은 신강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놓고 전쟁을 계속했다. 당나라와 토번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오늘날 파키스탄 동북부에 위치한 훈자족의 나라 소발률(길기트)이었다. 소발률(小勃律)은 동쪽은 티베트, 서쪽은 아프가니스탄, 남쪽은 인더스강 유역, 북쪽은 신강과 연결되는 전략 요충지였다. 소발률은 사마르칸드(康國), 부하라(安國), 타슈켄트(石國), 샤흐리 샤브즈(史國) 등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이 당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목구멍과 같은 곳으로 토번이 장악하고 있었다.

747년 고구려 유민 출신인 안서도호부 부도호(副都護) 고선지는 7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방심하고 있던 토번군을 격파한데 이어 빙하로 뒤덮인 다르코트 계곡을 달려 내려가 소발률 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750년 고선지는 당나라 조정의 명령에 따라 다시 중앙아시아 원정의 길에 올랐다. 타슈켄트(石國)가 사라센(압바스 왕조)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중앙아시아에 대한 당나라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갔던 것이다. 고선지가 이끄는 당-서역 10만 연합군은 751년 1월 타슈켄트성을 포위했다. 고선지는 타쉬겐트 왕을 속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약속과 달리 장안으로 연행된 타쉬겐트 왕은 처형 당하였으며, 이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당나라에 등을 돌리고 사라센으로 넘어갔다.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지배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라센 세력은 타슈켄트와 페르가나를 넘어 키르키즈의 탈라스강까지 촉수를 뻗쳐왔다. 751년 8월 고선지가 지휘하는 당나라군은 탈라스 전투에서 사라센과 돌궐계 카를룩 연합군에게 대패하였으며, 이로써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지배도 종식되었다.

 


페이퍼 로드

–  진순신 / 조형균 역 / 예담 / 2002.03.12

 

지금 실제로 그렇게 되었지만 제지법이 전해진 경위에 대해서는 ‘탈라스 전투설’이 유력하다. 8세기 중반 탈라스에서 당(唐)과 이슬람군이 전쟁을 벌였을 때, 당군은 자군 내에 적과 내통하는 세력이 있어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때 이슬람군에 포로로 잡힌 병사 중에 제지공이 있어 사마르칸트까지 끌려가 그곳에서 제지 기법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즈베키스탄 과학 아카데미의 고고학자 아스카로프 씨와 종이에 관한 전문가인 나짐 씨는 탈라스 전쟁 이전에 이미 제지법이 전해졌다는 의견을 말한 바 있다.

……

고선지는 이 전공(戰功)으로 절도사로 승진했고, 그로부터 3년 후인 750년에는 석국(石國)을 정복했다. 석국은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있던 나라였다. 출병 이유는 석국이 속국의 예를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석국 정벌은 조정의 명령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고선지가 신청해서 허락을 받은 일이라고 한다.

그는 석국의 왕에게 잘못을 사죄하면 용서하겠다고 속이고 왕이 항복한 후에는 장안으로 압송해 와서는 죽여버렸다. 고선지는 석국의 보물인 ‘대슬슬(大瑟瑟)’을 수십 석이나 빼앗았다고 한다. ‘슬슬’이란 ‘벽주(碧珠)’라는 보석인데 에메랄드의 일종이다. 그 밖에도 황금과 명마를 비롯한 서역 지방의 여러 특산물 등 엄청나게 많은 재물을 빼앗았다.

석국의 왕자가 격노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슬람 제국에게 당(唐)을 응징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마이야 왕조에서 아바스 왕조로 정권이 교체된 지 얼마 안 된 이슬람 제국으로서는 새로운 왕조의 위엄을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런 배경하에서 벌어진 전쟁이 바로 ‘탈라스 전투’다.

 

이슬람 쪽 문헌에는 권력 투쟁에서 패한 우마이야 왕조의 지지자들이 당(唐)의 힘을 빌려 아바스 왕조에 보복하려 한 것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당(唐) 쪽의 기록에는 “고선지가 이끌었던 한(漢)과 번(蕃,오랑캐)의 군사가 모두 3만 명이었다”고 한다.

전쟁은 번의 일부인 카를루크족 부대가 아바스측으로 돌아섬으로써 당군이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슬람 쪽 기록인 『이븐 아시르 연대기』에 따르면 “아바스군은 당군 5만을 죽이고, 2만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당(唐) 쪽의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이 연대기의 기술은 상당히 과장되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당군의 총사령관 고선지는 간신히 도망쳤고, 많은 병사들이 포로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 포로 가운데 제지공이 있어 이때 처음으로 중국의 제지법이 서방으로 전해진 것이다.

탈라스 전투는 전쟁으로서는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구당서(舊唐書』「본기(本記)」에서는 이 전쟁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신당서(新唐書)』「본기」에 “고선지가 대식과 탈라스 성에서 전쟁을 벌였으나 패했다”고 단 한 줄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우마이야 왕조의 지지자들에게 부탁을 받고 새로운 이슬람 세력의 실력을 시험해 볼 요량이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당(唐)으로서는 인접 지역에 강력한 정권이 존재한다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탈라스 전투는 사서에 한 줄 정도 기록될 정도의 이를테면 2류 전쟁이었지만, 만일 이 전쟁을 통해 제지법이 서쪽으로 전해졌다면 문화사적으로는 그 어떤 전쟁보다 중요한 전쟁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탈라스 전투의 원인은 고선지 장군의 석국(石國) 공격에 있었다.

……

그러나 탈라스 전투 이후 석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전체는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불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네스트리우스파 기독교 등이 공존하고 있었던 이 지역이 이슬람교 일색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

이란계, 특히 타지크족은 우마이야 왕조에 대해 계속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슬람 사관(史觀)에 의하면 고선지 장군의 석국(石國) 공격과 탈라스 출병도 “몰락한 왕조의 잔당”이 당(唐)의 원조를 받아 일으킨 반란의 하나로 되어 있다. 아부 무슬림은 이들의 반란을 회유와 협박을 통해 모조리 진압했다. 이렇게 해서 중앙아시아에서 아바스 왕조의 지배가 확립된 것이다.

아바스 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는 아바스 가문의 칼리프가 아닌 아부 무슬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영국의 동양학자 데니슨 로스도 자신의 저서에서 그렇게 쓰고 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부 무슬림이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지 않았다면 아바스 왕조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탈라스 전투 직후 중앙아시아를 시찰한 칼리프의 형 만수르는 아부 무슬림의 권위에 강한 위기감을 느끼고 동생에게 “그를 빨리 죽이지 않으면 왕조는 안정될 수 없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

투르크계 여러 부족의 전설상의 시조는 오그스 카간이라는 무장이다. 이 오그스 카간의 정벌군에 전 투르크계 부족이 참가했는데 큰 눈이 와서 늦게 도착한 몇 가족이 있었다. 바로 이들이 후에 카를루크족이 되었다고 한다. 카를루크는 눈(雪)의 신을 의미하는데 그 기원부터가 사연이 있는 것 같다. 동서 두 돌궐 사이에 있으면서 언제나 그들의 흥망을 지켜보며 “부반(附叛)을 되풀이했다”는 『신당서』의 기록은 앞서 소개한 바 있다. 전설로 전해지는 것이지만 눈 때문에 늦었다는 것도 무엇인가 정세를 엿보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강력한 세력 사이에 끼여 있는 약소 그룹은 주변 상황을 잘 살피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어느 누구도 카를루크족의 되풀이되는 부반에 대해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상황판단의 전문가가 되어 있었을 것이므로 그들이 당군에 속해 있으면서 이슬람 쪽으로 돌아서게 되었던 것은 분명 이슬람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슬람 세력은 번성하고, 당(唐)은 몰락할 것이라는 그들의 판단은 정확했다. 당은 탈라스 전투 이후 150년 정도 더 명맥을 유지했지만 국세는 점점 기울고 있었다. 안녹산의 난은 탈라스 전투 직후에 일어났지만, 그와 같은 당(唐)의 혼란상을 카를루크족은 미리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에 비해 아바스 왕조의 이슬람 제국은 융성기를 맞고 있었다. 세계의 수도라고 불리던 바그다드가 건설된 것은 탈라스 전투가 있은 지 불과 15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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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전쟁(Crusades)에 대해 알아 보았다. 여기에서는 주로 원인과 성격, 그 영향과 결과에 촛점을 맞추고 조사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아래 <개설철학사>에서 얘기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십자군이라는 사건은 서구사(西歐史)의 내부에서 본다면, 가톨릭 ‘교권’의 신장과 그에 의거한 서구 세계의 중세적 ‘통일’에서 나타난 것이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서구 세계의 ‘반격’ 개시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까지 이슬람 세계의 ‘진격’에 의하여 지리적으로는 자기의 일부에 속하는 스페인까지도 상실했던 서구 세계는 간신히 이 시점에서 내부적인 ‘통일’을 달성하여 ‘반격’으로 전화轉化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십자군전쟁과 같은 유럽 팽창의 주요 요인 중의 하나인 ‘중세 온난기’라 불리는 기후의 변화에 대해서(로마의 번영도 당시 온난기와 상관관계가 있단다)는 다음의 글에서 알아 보았다.

* 중세 온난기

 

 

– 당시 주요 도시들과 육로, 해상로가 나타난다. (출처 : 두산백과)

 

이 당시의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연대표를 보면서 파악해야 구조적으로 해석하는데 도움이 될 듯

 

 

다음과 같은 자료들을 찾았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  리오 휴버먼 / 장상환 역 / 책벌레 / 2000.04.15

 

십자군은 상업을 크게 촉진했다. 수만 명의 유럽인들이 이슬람 교도들에게서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육로와 해로로 대륙을 건넜다. 그들은 원정 내내 물품이 필요했고, 상인들이 이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동행했다. 동방 원정에서 돌아온 십자군 전사들은 그들이 보고 즐긴 진기하고 사치스러운 음식과 옷에 대한 욕구도 함께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의 수요가 이런 상품을 위한 시장을 탄생시켰다. 게다가 10세기를 지나면서 인구가 급증했고, 인구가 늘어나자 필요한 재화도 늘어났다. 그리고 늘어난 인구 중 일부는 토지가 없었기 때문에 생활 조건을 개선할 기회를 십자군에서 찾았다. 지중해 연안의 이슬람 교도들과 동유럽의 여러 부족들을 상대로 한 영토 전쟁은 십자군이라는 존엄한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약탈과 토지를 위한 전쟁이었다. 교회는 이 약탈 원정이 복음을 전파하거나 이교도를 절멸하거나 성지를 수호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존엄을 가장했다.

성지 순례는 일찍부터 있었다.(8세기부터 10세기까지 34번 있었고, 11세기에는 117번 있었다.) 성지를 수복하고자 하는 열망은 진실했고 딴 속셈이 없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의 진정한 힘과 그것을 이끈 활력은 특정 집단이 얻을 수 있었던 이익에 주로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 집단은 첫째, 교회였다. 물론 교회는 분명한 종교적 동기가 있었다. 교회는 당시가 전쟁의 시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만약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기독교국으로 바뀔 다른 나라들로 전사들의 폭력적인 열정을 옮겨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교회는 세력 확장을 원했고, 기독교 세계가 넓어질수록 교회의 권력과 부도 커졌다.

둘째, 아시아의 이슬람 세력권 중심과 매우 가까이 있었고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둔 비잔틴 제국과 비잔틴 교회(그리스 정교회)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십자군을 세력 확장의 기회로 여겼던 한편, 그리스 정교회는 자기 영토에 이슬람 교도들이 진출하는 것을 막을 수단으로 보았다.

셋째, 전리품을 원했거나 빚을 진 귀족과 기사, 유산이 적거나 전혀 없었던 젊은 자제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십자군이 토지와 부를 얻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넷째, 이탈리아의 도시들인 베네치아 · 제노바 · 피사였다. …… 이탈리아의 무역 도시들은 십자군을 상업상의 이익을 얻을 기회로 여겼다.

……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십자군의 결과는 일시적이었다. 왜냐하면 이슬람 교도들이 결국은 예루살렘 왕국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업의 관점에서 보면 십자군의 결과는 엄청나게 중요했다. 십자군은 기도하는 사람들, 싸우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성장하는 상인 계급을 유럽 대륙 전역에 퍼지게 함으로써 침체된 서유럽 봉건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십자군은 해외 상품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 십자군은 지중해 항로를 이슬람 교도들에게서 빼앗았고, 이것을 다시 고대에 그랬던 것처럼 동방과 서방 사이의 중요한 무역 항로로 만들었다.

……

12세기 이후로 시장 없는 경제는 많은 시장이 있는 경제로 변모했다. 그리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중세 초기의 자급자족하는 장원의 자연 경제는 상업이 팽창하는 세계의 화폐 경제로 변모했다.

 


2천년 동안의 정신

–  폴 존슨 / 김주한 역 / 살림 / 2005.12.12

 

11세기 중엽의 유럽은 봄이었다. 북쪽의 바이킹족의 침입과 남쪽의 이슬람의 침략이 한풀 꺾였던 시기로, 서방 기독교 세계가 야만적인 이교도들의 독 이빨로부터 빠져나왔던 것이다. 농업 생산량도 점차로 증가되었고, 그에 따라 인구와 무역의 규모 또한 늘어났다.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들도 전파되고 있었다.

……

10~11세기에 왕권은 교회의 유력자들과의 다툼에 밀려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왕권은 본질적으로 왕이 소유한 토지의 양과 비례하였는데, 이 시기에 왕의 토지 또한 점차 줄어들었다.

 

십자군 전쟁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나?

십자군 전쟁은 다음의 세 가지 요인들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요인은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소규모로 전개되었던 ‘성전(holy war)’의 발전이었다. 십자군은 1063년에 이슬람 세력에 의해 살해된 아라곤(Aragon) 왕 라미로 1세(Ramiro)의 복수를 위해 소집된 알렉산더 2세(Alexander II)의 군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더 2세는 전장에 나갈 때에 십자가의 이름을 앞세웠으며 이 전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의무를 면제시켜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 또한 스페인을 돕는 국제적인 연합군 창설을 후원하였으며, 기사(knight)들에게 자신이 정복한 땅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해 주었다. 다시 말해 십자군 운동은 교황령을 넓히려는 욕구와 연결되어 강력한 정치 · 경제적인 동기들을 유발시켰던 것이다.

 

둘째 요인은 800년경부터 시작된 프랑크족의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카롤링거 국왕들은 스스로 예루살렘 성지와 그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보호할 의무와 권리가 있음을 주장해 왔으며, 적어도 11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이슬람 칼리프들은 이를 인정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10세기 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자 클뤼니 수도원에서는 순례지 곳곳마다 순례자들을 접대할 수 있는 수도원들을 세워나갔으며, 무슬림들의 동의 아래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호위병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1064~1066년에 7천 명의 독일인들이 중무장을 한 상태에서 예루살렘을 여행하였다. 외형적으로 보면 십자군은 대규모의 순례단처럼 보여 그들 사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1세기 말에 이교도들의 땅을 정복하려는 스페인 사람들과 대규모로 무장한 순례자들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결합되면서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구의 지도자들이 십자군 전쟁을 감행하게 된 실제적인 동기는 11~12세기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의 증가와 그에 따라 발생한 토지의 부족에 있었다.이것이 십자군 전쟁을 발발하게 한 세 번째 요인이다. 시토 수도원이 국경지역에서 토지를 개척하려 했던 것도 토지가 부족해지면서 생긴 현상이며, 십자군 전쟁 역시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기도 했다.

 

십자군 운동의 실패

12세기가 넘어가자 십자군의 인기는 급속도로 떨어졌다. 인구가 이전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하지도 않았고 인적 자원이 풍부하였던 프랑스마저도 십자군에 참여하기보다는 도시로 모여드는 경향을 보였다. 독일에서는 튜튼족 기사들이 프로이센과 폴란드까지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유럽의 인구는 1310년 이후부터 감소하다가 14세기 중엽부터는 노동력이 극심하게 부족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이러한 인구 불균형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다시 회복되었다). 그렇다고 인구가 부족해져서 십자군이 실패했다고 볼 수 만은 없다. 무엇보다 12세기 말부터 십자군 운동을 옹호하는 이론들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파르시팔 Parsifal』의 저자인 볼프라메 폰 에센바하(Wolframe von Eschenbach)는 1210년 경에 『빌레할름 Willehalm』에서 십자군 문제를 다루었는데, 이 저술은 12세기 중엽에 썼던 『롤랑의 노래 Rolandslied』와는 다른 논조를 보였다.

『롤랑의 노래』에서는 십자군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짐승처럼 살해되는 이교도들을 보며 행복하게 노래하였던 것에 비해, 『빌레할름』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부인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라센 여인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이교도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장을 서슴없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십자군이 12세기 이후로 세력을 확장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난 이유도 십자군의 숫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고 첫 10년 동안, 즉 1095~1105년 사이에 약 1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성지(Holy Land)로 갔으나 그들은 자녀를 거의 낳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크족들의 아이들은 오래 살지 못했고, 특히 남자들의 사망률이 높았다. 이때문에 동방지역에 정착했던 프랑크족의 이주민들은 한두 세대가 지나자 다 죽고 사라졌던 것 같다. 12세기에 제2, 제3의 이주물결이 몰아닥쳤으나 이들 역시 10명에 1명 꼴로 죽었다. …… 기독교인들이 식민지 국가로 이주하여 이곳을 적극적으로 발달시키려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던 운송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당시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교회가 이민자를 도울 수도 있었으나, 불행히도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십자군

–  토머스 F. 매든 / 권영주 역 / 루비박스 / 2005.05.30

 

흔히 중동 사람들은 오래전 과거의 일도 잊지 않으며 십자군은 서구에서는 잊혀진 과거가 되었을지 몰라도 중동 지방에서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고들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겨우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 십자군을 가리키는 말 ‘하르브 알 살리브(Harb al-Salib)’는 19세기 중반에 비로소 생겼으며, 아랍에서 처음으로 십자군에 관한 역사가 써진 것은 1899년의 일이었다.

서양인들에게는 중동 사람들이 최근에야 비로소 십자군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뜻밖일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어떻게 기독교도들이 수백 년간 그들에 맞서 벌인 거룩한 전쟁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는가? 그러나 십자군은 유럽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어도 이슬람에게는 지극히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이슬람교도들은 전통적으로 이슬람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 벌어지는 일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이교도와 벌인 다른 전쟁들이나 십자군이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십자군은 어차피 실패했으므로 의미도 없었다. 18세기에는 중동에서 십자군에 대해 들어본 이슬람교도를 찾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심지어 19세기에 와서도 오로지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십자군을 알고 있었다. 이슬람의 장대한 역사에서 십자군은 조금도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 이슬람의 인식이 달라졌다. 십자군이 처음으로 이슬람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사실상 십자군에 대한 이슬람의 기억은 만들어진 기억, 사건이 발생하고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존재하게 된 기억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앞서 보았듯이, 오스만 제국이 함락된 후 유럽의 식민 열강이 중동을 지배하게 되면서 그들은 중세의 맥락으로 이해한 십자군의 개념을 중동에 들여왔다.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은 책과 식민 교육을 통해 이슬람 세계에 십자군을 가르치며 그것이 중동에 문명을 가져다주기 위한 영웅적인 전쟁이라고 가르쳤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  아민 말루프 / 김미선 역 / 아침이슬 / 2002.04.27

 

이 책은 지극히 간단한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십자군을 보고, 겪었고, 기록을 한 ‘다른 편’의 이야기를 적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른 편은 곧 아랍이다.

아랍 사람들은 십자군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프랑크인들의 전쟁 내지는 침략이라고 말한다. 프랑크인들(les Francs)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바는 지역, 저자들,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Faranj, Faranjat, Ifranj, Ifranjat …… 이 명칭들을 하나로 묶는 뜻에서 나는 좀 더 단순한 형태를 골랐다. 오늘날 서유럽인들을 가장 대중적으로 부르는 말로, 특히 프랑스인들을 지칭하는 프랑코(Franj)다.

……

겉으로는 아랍 세계가 눈부신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였다. 서유럽인들이 연이은 침공으로 이슬람이 뻗어 나가는 것을 억제할 생각이었다면 그 결과는 완전히 반대로 나타났다. 무슬림들은 프랑크 국가들의 2세기에 걸친 동방 식민 지배를 완전히 뿌리뽑는 데 그치지 않고, 오스만 투르크의 깃발 아래 서유럽을 정복하러 다시 나설 만큼 세력을 회복한 것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그들의 손에 떨어진다. 1529년에는 오스만 투르크 기병들이 베네치아 코앞까지 몰려왔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겉모습일 뿐이다. 역사라는 가늠자로 보자면 상반된 관찰도 필요한 법이다. 십자군 전쟁 동안 에스파냐에서 이라크에 이르는 아랍 세계는 아직은 지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가장 앞선 문명의 보고였다. 그러나 나중에 세계의 중심은 결정적으로 서쪽으로 옮겨진다. 여기에는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것일까?  과연 십자군이 서유럽에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으며-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아랍 문명에는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을까?  물론 전혀 그릇된 판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판단이 약간의 수정을 요한다는 점이다. 아랍인들은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분명한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프랑크인들이라는 존재가 그것을 드러나게 했고 더 악화시켰을지는 모르지만 그 결함을 창출한 장본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9세기에 들어서면서 예언자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을 잃었다. 실제로 그들을 통치했던 지배자들은 하나같이 이방인들이었다. 2세기에 걸친 프랑크인들의 점령 기간을 통틀어 연이어 등장한 그 많은 통치자들 중에 진짜 아랍 사람이 누가 있던가?  연대기 저자들, 카디들, 소국의 왕들-이븐 암마르, 이븐 문키드 등- 그리고 무능한 칼리프들을 보라. 앞장서서 프랑크인들과 싸웠던 실권자들-장기, 누르 알 딘, 쿠투즈, 바이바르스, 칼라운-은 투르크족이었다. 알 아흐달은 아르메니아 출신이었고, 시르쿠, 살라딘, 알 아딜, 알 카밀은 쿠르드족이었다. 물론 이들이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아랍에 동화된 인물들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1134년에 술탄 마수드가 칼리프 알 무스타르시드와 회담할 때 통역관을 대동해야 했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그 일족이 80여 년이나 다스렸지만 셀주크 왕은 아랍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던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또 있다. 아랍이나 지중해 문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수많은 유목민 전사들이 정기적으로 군대의 지배층에 편입되곤 했다. 자신들의 땅에 들어온 외국인들에게 지배당하고, 압박받았으며, 우롱당했던 아랍인들은 7세기에 벌써 꽃피기 시작한 그들의 문화적 부흥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 프랑크인들이 들어올 즈음에 그들은 이미 과거에 얻은 것에 만족하며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었다. 비록 이 새로운 침입자들에 비한다면 그들은 거의 전 영역에서 앞서 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쇠락은 시작되고 있었다.

 

첫 번째 결함과도 상관 있는 아랍인들의 두 번째 ‘결함’은 확실한 제도를 구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동방으로 들어오던 무렵 프랑크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국가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 예루살렘만 보아도 권력의 계승이 대체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왕국의 평의회가 단일 군주의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성직자의 역활도 인정받고 있었다. 무슬림의 나라에서는 그러한 장치가 없었다. 군주가 죽으면 항시 그 권력이 위협당했으며, 무슬림 국가치고 계승 전쟁에 휘말리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그 책임을 국가의 존립 자체를 불안하게 한 연이은 침공 탓으로 돌려야 할까? 아니면 아랍인들 자신을 비롯해 투르크나 몽골 같은 유목민 출신 민족이 이 지역을 다스렸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까?

 


십자군 전쟁

–  W.B. 바틀릿 / 서미석 역 / 2004.01.10

 

옮긴이의 글

 

십자군은 단순히 종교전쟁인가. 아니다. 그렇게 단편적이기보다는, 당시의 상황으로 모든 요인들이 맞물려 빚어진 총체적인 드라마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 사회적으로 살펴보면, 봉건시대가 점차 정착하면서 봉토를 물려받을 수 없는 장자 이외의 아들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스스로 개척해야 했으므로 해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호전적인 전사계급들의 개인적인 전쟁으로 성직 계급과 일반 대중들은 그들의 무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전사들의 교전 무대를 유럽 내부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돌리고자 하는 사회계층의 바람과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고자 하는 교황의 야욕이 적절하게 일치했다.

둘째, 종교적으로는, 힘겨운 삶을 영위하고 있던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 떠돌이 수도승들이 성지 예루살렘에 대해 환상을 품게 만들었으며, 교황은 십자군에 참가하는 전사들에게 전폭적인 대사(大赦)를 베풂으로써 이교도에 대한 살인 행위를 정당화시켜주었다.

 

셋째, 경제적인 면에서는, 무역으로 번성하기 시작하던 이탈리아 도시들은 동방으로 눈을 돌려 시장과 교역 규모를 확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미 축적된 부로 인해 대규모 원정에 드는 막대한 자원의 조달도 가능했다. 일단 이렇게 유럽의 내부적인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다.

이제 마지막이면서도 제일 중요한 한 가지 요인이 남았다. 그것은 바로, 이미 11세기에 아랍 중심의 동질성이 무너진 상황에서 이방인인 투르크족이 용병으로서 아랍을 실질적으로 지배함으로써 빚어진 이슬람 세계의 내부갈등과 분열된 팔레스타인 지역의 혼란이었다. 거기에 남의 힘을 빌어서라도 잃어버린 제국의 영토를 되찾고 싶어하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마지막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이렇듯이 모두 한 배 위에서 동상이몽을 꿈꾸는 사람들의 원정이었으므로 십자군의 불순한 이상은 곧 쉽사리 타락하는 것이 당연했다.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라면 신의는 애초에 내팽개쳤고, 언제든 적과의 동침도 가능했으며, 같은 종교의 뿌리에서 나온 다른 종파의 사람들에게 칼을 겨누면서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 있을 수 없었다.

 


철학 역사를 만나다

–  안광복 / 웅진지식하우스 / 2005.12.20

 

십자군이 제1차 원정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이슬람 세계의 무지와 분열이 큰 역활을 했다. 사실, 대다수 무슬림은 십자군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에 그들은 십자군의 침입을 그 당시 흔했던 영토 분쟁 정도로만 여겼다고 한다. 무슬림은 기독교도들이 자신들에게 신앙적 적대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당시는 이슬람 국가의 왕들이 여느 이웃 국가들에게 하듯, 다른 이슬람 국가를 치기 위해 기독교 국가에 동맹을 청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십자군 전쟁은 서로 피 터지게 치고받는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전쟁을 정당화해 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처음부터 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싸우는 과정에서 상대를 ‘신앙의 적’으로 만들어 갔다. 기독교에 대항하여 성전, 곧 지하드를 펼쳐야 한다는 생각은 살라 웃딘(살라딘) 대왕(1137~1193,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체계화되었다.

……

십자군은 분명 사상 운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서양 역사에 그 어떤 사상보다도 큰 정신적 영향을 끼쳤다.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어 식민지를 개척하던 유럽 국가들은 자신을 새로운 십자군으로 여겼다. 야만적이고 잔혹한 이교도의 땅에 기독교 문명을 전파한다는 사명감은 그들의 탐욕을 정당화시켜 주곤 했다.

……

십자군 전쟁은 문화와 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이슬람권 세계는 성서의 권위에 짓눌려 학문 발전이 정체되어 있던 유럽에 비해 훨씬 발전된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수많은 선진 문물이 전쟁과 함께 아랍에서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대수학(algebra), 알코올(alcool), 설탕(sucre) 등의 말들은 모두 아랍어에서 왔다. 아랍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특히 철학적으로도 십자군 전쟁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동안 유럽에서는 잊혀졌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전쟁과 함께 다시 유럽으로 전해 온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체계적으로 기독교 신학에 녹아들어, 이후 교회의 위상과 체계를 재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개설철학사

–  中村雄二郞 외 / 우리기획 옮김 / 백산서당 / 1983

 

십자군이라는 사건은 서구사(西歐史)의 내부에서 본다면, 가톨릭 ‘교권’의 신장과 그에 의거한 서구 세계의 중세적 ‘통일’에서 나타난 것이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서구 세계의 ‘반격’ 개시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까지 이슬람 세계의 ‘진격’에 의하여 지리적으로는 자기의 일부에 속하는 스페인까지도 상실했던 서구 세계는 간신히 이 시점에서 내부적인 ‘통일’을 달성하여 ‘반격’으로 전화轉化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게르만 기사들의 전통적인 상무정신(尙武精神)도 이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교적인 사상과 융합하여 가톨릭 교회의 이념과 일치를 보아, 중세적 정신의 정화라고 불리는 ‘기사도’로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십자군은 동시에 중세적 ‘통일’을 내부에서 해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 점에 관해서는 여기에서 상세히 서술할 여유는 없고, 단지 그 결과로서 생긴 사상적 · 문화적 영향에 관해서만 살펴보도록하자. 즉 십자군 운동의 결과, 콘스탄티노플과 서구 사이에 학문과 예술상의 교류가 촉진되었으나, 이것은 이 때까지 주로 아라비아어로 번역된 각 문헌을 통하여 해오던 고대 그리스의 사상 · 문화의 재발견을 곧바로 그리스어 원전을 통하여 행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서구 세계가 사상적 · 문화적으로도 이 때까지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의존 관계에서 벗어나 지적인 ‘반격’으로 돌아서는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

이와 같은 이슬람 세계로부터의 지적 충격은 그리스도교 사상을 중핵으로 한 서구 세계의 정신적 전통에 커다란 동요를 불러 일으켰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그리스 · 로마적인 합리주의 사상이 그리스도교의 정통 사상에 커다란 위험이 되리라 생각하고 그것을 탄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사상의 지적 ‘진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는 신사상 가운데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합리주의적 성격을 가진 아베로에스(이븐 루슈드, 1126~1198)의 아랍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까지도 서구 세계에 침투하기에 이르렀다. 역사가 크리스토퍼 도오슨은 “사실상 이 시대(12~13세기)에 서구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를 말하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교도가 아니라 스페인의 이슬람 교도인 아베로에스 바로 그였다”(『중세기의 종교』)라고 말한다. 아베로에스는 종교와 철학 · 과학, 신앙과 이성 간의 관계를 명확히 하였다. 즉 그는 계시(啓示)에 의한 진리와 이성에 의한 진리를 구분함으로써 훗날 나타난 ‘이중 진리설(二重眞理說)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또 세계는 영원하며 개인은 죽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아베로에스의 학설은 그리스도교 사상 내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중세 사상의 한 전형인 ‘스콜라 철학’을 완성시킨 토마스 아퀴나스는 바로 이와 같은 사상적 상황에서 출발하여 아랍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의 대결을 통하여 그 사상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에 의한 ‘스콜라 철학’의 형성은 한 편에 있어서는 이슬람 사상을 매개로 한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과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결합이라는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다른 면에 있어서는 이슬람 사상의 ‘진격’에 대한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사상적 ‘반격’의 개시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지중해 문명의 바다를 가다

–  박상진 / 한길사 / 2005.11.25

 

9세기 말에 들어서도 이슬람의 지중해 제해권 우위는 계속되었다. 890년경 이슬람 함대는 프로방스 지방에 기지를 구축하여, 마르세유와 니스 등을 장악하였고, 서부 알프스까지 진격하여 순례자들과 교역 상인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9세기 중엽부터는 노르만 왕국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남부 유럽 해안 지대와 지중해 내륙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이후 2세기 동안의 침략과 약탈은 이슬람 세력보다는 노르만을 비롯한 유럽의 신흥 변방 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서유럽 역사는 기독교 세계의 피해를 이슬람군의 약탈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문학과 영웅담을 통해 극화시키고 반복하여 과장함으로써 비난과 적대감을 증폭시켰다. 이는 결국 11세기 이슬람에 대항한 기독교 세계의 십자군 결성의 감정적 토대가 되었다.

……

십자군 전쟁은 외관상으로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의 충돌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서구와 동방이 전방위적으로 만나면서 낙후된 서구가 동방의 선진문화에 커다란 자극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향료와 진귀한 상품들은 물론, 오렌지 · 레몬 · 커피 · 설탕 · 면화 등과 그 재배법이 유럽에 소개되었고, 비잔티움과 소아시아, 무슬림 에스파냐 등지의 의복과 패션, 일상 생활 방식까지 중세 유럽 사회에 범람하던 것도 이 시기였는데 대학자이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이기도 한 알베르투스가 1245년 아랍 복장을 입고 파리에 도착하는 해프닝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아랍 복장은 이교도의 상징이나 유행이 아니라, 학자의 품위와 신분을 상징하는 표현이었고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 무슬림들은 철학자와 동의어로 여겨질 정도였다.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교양

–  존 라이트외 / 박상은 역 / 이지북 / 2005.06.10

 

11세기에는 이탈리아에서, 12세기에는 네덜란드에서 자치 공동체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에따라 도시 거주자는 모두 치안판사에게 복종하고 평화 유지와 자유를 지킬 것을 맹세했다. 또 도시생활을 소생시켜 중세도시를 자치 길드 연합으로 만들었다. 길드는 직인과 상인이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결성한 연합체였다. 서유럽 도시에서 정기적으로 열린 장시는 무역의 재확립을 자극했고, 지중해에서는 이탈리아 도시(특히 베니스와 제노아)가 서구를 비잔티움이나 근동의 이슬람국가에 연결했다. 역설적이게도 십자군 원정이 이슬람 세계와의 교역을 자극했고,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는 13세기에 중국과 서아시아를 잇는 비단길을 통해 교역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었다.(빌렘Willem van Ruysbroeck, 마르코 폴로Marco Polo, 오도리크Odoric da Pordenone 및 이븐 바투다Ibn Battuta와 같은 선교사, 상인, 지리학자가 13세기 중엽 이후로 유명한 여행을 계속한 것을 보면 이 무역로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동아시아의 향료나 섬과 인도에서 나는 물산은 모두 바닷길로 페르시아 만과 홍해에 이르렀고, 거기서부터는 육로로 레반트Levant에 있는 도시와 유럽으로 전해졌다.

파리, 볼로냐, 살레르노 및 옥스퍼드와 같은 유럽의 상업 교회 도시에서는 대학이 세워졌고, 대학에서는 그리스와 아랍의 학문이 카롤링거 왕조에서 세운 학교의 기독교 전통과 합쳐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철학이 기독교 용어로 재해석되어, 스콜라 철학이 법학, 철학, 신학 및 과학에 영향을 미쳤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보나벤투라Bonaventure, 로저 베이컨Roger Bacon 및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와 같은 13세기의 유명한 학자들은 모두 새로 생긴 교단인 프란체스코 교단과 도미니크 교단의 멤버였다. 복음에 따라 청빈한 생활을 하고 이단과의 싸움에 몸을 바치는 그들은 대학의 발달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유럽의 팽창이라는 첫 자극이 이러한 사회 · 문화 · 종교적 제도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늘어난 인구를 부양케하는 산림 개간이나 농경지 개간과 같은 새로운 경제적 동기에 힘입은 것이었다. 또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스페인을 다시 정복하거나 튜턴족 기사들이 프러시아와 리보니아Livonia를 정복하거나 리투아니아를 개종(1386년 이후)시킨 것과 같이 변방의 영토를 종교 · 정치적으로 확고히 유럽화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문명의 교류와 충돌

–  교재편찬위원회 / 계명대학교출판부 / 2008.02.15

 

(3) 십자군운동의 영향과 역사적 의의

 

일반적 영향

십자군전쟁은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성골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제대로 무장하지 못한데다 훈련도 받지 못한 병사들이 다수를 차지한 것, 당시의 교통통신 수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먼 지역으로 원정한 것, 국왕과 대영주들로 구성된 지휘부의 갈등이 심했던 것, 상업적 전쟁으로 변질 된 것 등을 실패의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십자군전쟁은 성지 탈환이라는 당초의 목적달성에 실패한데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업적 성격의 전쟁으로 변질되어 십자군이란 이름이 무색할 지경이었지만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효력은 서서히 나타났으되 바로 중세의 문을 닫고 근대의 문을 열게 했다.

 

경제적, 정치적 영향

십자군운동은 지중해를 다시 유럽인의 활동무대로 바꾸었다. 비잔티움-소아시아 항로나 베네치아, 제노바, 마르세유 등을 통해 지중해를 왕래한 십자군과 함께 각종의 군수물자가 대량으로 운송되었고 그로 인해 지중해는 다시 유럽인들의 교역로로 부활했다. 그리고 지중해무역은 그 무렵 등장하기 시작한 유럽의 내륙 시장들과 함께 유럽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켜 결국은 유럽을 초기 상업자본주의적 사회로 이끌었다.

사실 십자군들은 귀금속이나 동방물산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몇 배 혹은 십 수배의 이윤을 남기는 동방물산에 대한 서유럽인의 관심은 비록 2,3백년 뒤의 일이지만 콜럼부스의 아메리카대륙으로의 항해가 잘 말해준다. 콜럼부스로 하여금 대서양 횡단이라는 모험을 하게 한 것도 바로 동방물산에 대한 관심이었다.

상업의 부활은 토지에 의지한 봉건세력을 서서히 몰락으로 이끌었다. 다수의 기사들은 물론 영주들이 십자군전쟁에 참전하여 입은 인적, 물적 손실도 봉건체제의 붕괴를 촉진했다. 반면 봉건세력의 몰락은 군주들로 하여금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군주들은 상공시민과 제휴하는 일방 봉건귀족을 억압하면서 통치권을 강화해갔다. 그 모든 것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그런 정치적 변화는 결국 17세기의 절대주의로 이어졌다.

 

종교적 영향

십자군은 주된 목적인 성지회복에 실패했지만 교황청의 권위를 신장시키는 일에도 결국은 실패했다. 제1회 십자군이 그나마 성공했기 때문에 교황의 지위는 일시 고양되었다. 사실 제4회 십자군까지는 동 · 서 교회의 통합이라든가 성지회복이란 대의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인적, 물적 손실이 매우 큰 데다 연이은 실패는 탈선한 4회 십자군과 함께 십자군을 발의한 교황의 권위를 흔들기 시작했다. 십자군의 실패로 깊은 상처를 입은 교황과 교회 앞에는 ‘아비뇽 유수’와 ‘대분열’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화적 영향

십자군전쟁도 여느 전쟁과 동일하게 문화의 교류와 지식의 확대에 기여했다. 물론 고대 이래 문물의 교류는 있어왔지만 십자군운동을 통해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교 중동은 상당히 활발하게 문물을 교류했다. 물론 십자군운동이 문물을 통한 문화의 발전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약탈과 살육이 다반사로 행해진 무자비한 전쟁이었고 따라서 두 세계 사이의 대립과 증오를 크게 증폭시켰다.

십자군과 무슬림의 만남이 반드시 살육과 약탈 일변도로 시종일관한 것은 아니었다. 십자군에 종군한 수도사들이 아랍의 증류법을 배워 위스키를 개발했지만, 서양세계는 십자군을 통해 비잔틴제국과 이슬람제국의 우수한 문화에 접할 수 있었다. 주지하듯이 이슬람제국은 아라비아숫자가 상징하는 수학을 비롯해 화학과 의학, 문학과 예술(특히 건축) 등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비잔틴제국 또한 철학과 신학은 물론 문학과 예술 등에서 창조력을 발휘했다. 특히 비잔틴제국은 고대 그리스의 고전을 보전하고 연구함으로써 인류문화에 이바지했다.

 

십자군전쟁 이후 셀주크 투르크족은 쇠퇴했다. 그들을 몰락으로 이끈 것은 몽골족이지만 십자군도 그들의 쇠망에 일조했다. 셀주크 투르크족은 1101년의 프랑스군과의 싸움 및 1178년의 비잔틴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도 했지만, 1차 십자군과의 싸움에서 패한 이래 여러 전투에서 패했다. 십자군은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 만큼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그들로 하여금 국력을 소모케 하고, 나아가 국가적 통일을 다지고 영토를 넓히는 일에 매진할 수 없게 했다.

십자군이 이슬람세계에 미친 영향을 간략히 정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적어도 초기에는 이슬람 측은 십자군에 대해 거의 무지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비잔틴제국 군대와 십자군을 구분하지 못했고, 또한 십자군이 갖는 종교적 성격도 알지 못했다. 유럽의 전면적 도전에 당황해 했을 뿐 그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그들은 군사적으로 맞설 수 있는 조직을 쉽게 갖추지 못했다.

둘째, 십자군은 그때까지 기독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이었던 무슬림들로 하여금 관용적 태도를 버리게 했다. 결국 성전의식으로 무장한 투르크-아랍 무슬림들 모두 십자군의 지나친 만행에 분노했다. 당연하지만 무슬림들은 십자군전쟁을 겪으면서 기독교도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버렸다. 십자군운동은 그리하여 지중해, 특히 동지중해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첨예한 대립의 장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아틀라스 세계사

–  지오프리 파커 엮음 / 김성환 역 / 2004.12.10

 

<비잔틴 세계>

11세기에 셀주크투르크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이 조성되었다. 1071년, 셀주크투르크가 만지케르트에서 비잔틴군을 격파하자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1081~1118)는 서유럽에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재앙이었다. 왜냐하면 프랑크는 비잔틴을 도와주기보다 소아시아에 자신의 속주를 세우는데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내 비잔틴 영토를 장악하고 있던 노르만족은 그리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베네치아가 이끄는 이탈리아 도시들은 지중해 상권에 대한 자신들의 몫을 늘리는 데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1세기 동안 긴장이 높아 가다가 결국 제4차 십자군 병사들이 1204년에 비잔틴을 점령했다. 그 결과 비잔틴 제국은 붕괴되고 발칸 반도 전역에 걸쳐 라틴 국가들이 건설되었다.

 

<이슬람 세계>

시간이 흐르면서 이슬람 세계는 정치적 통일성을 잃고 수니파와 시아파 왕국들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1055년 셀주크투르크가 바그다드를 차지하고 소아시아 대부분 지역에서 기독교도들을 몰아내자 이슬람은 한층 강화되었다. 12세기 십자군 및 13세기 몽골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서아시아를 계속 장악했으며 선교사와 상인들은 이슬람을 동으로는 말레이시아 · 인도네시아 · 필리핀까지, 남으로는 사하라 이남 국가들과 아프리카 연안의 스와힐리 도시들까지 전파했다.

 


신의 용광로

–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 / 이종인 역 / 책과함께 / 2010.04.23

 

클뤼니 수도회와 여타 수도회의 힘이 교리를 효율적으로 포장하는 능력과 모범적인 행동이라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십자군 기사들의 힘은 오른팔의 완력이었다. 1064년 여름, 3천 명의 노르망디, 프랑스, 이탈리아 기사들은 교황 기병대의 사령관인 몽트뢰유의 기욤과, 아키텐의 대공 기욤 3세의 지휘 아래 피레네의 론세스바예스 산길을 떠들썩하게 통과하여 우에스카 지방의 요새 도시인 바르바스트로(Barbastro, 현재 스페인 아라곤자치지방 우에스카주에 있는 자치시)를 향해 나아갔다. 재물을 빼앗는 약탈자들, 상속 전망이 없는 둘째 아들들, 음울한 동기를 가진 참회자들로 구성된 이 국제 연합군은 알렉산데르 2세 교황(재위 1061~1073년)이 그리스도 메시지를 이교도의 땅에 전하라는 호소에 열렬히 응답하여 조직된 군대였다. 1095년의 제1차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기 한 세대 전, 바르바스트로 포위공격은 로마의 새로운 교황 제국주의자들이 무력을 과시한 사건이었다. 하드리아누스 1세 교황의 후계자들은 카롤링거 왕조의 해체된 잔해 위에 새로운 상부구조를 세우고 있었다. 그 구조에서는 정치력이 라테란 궁전의 성직자들에게 귀속되었는데, 그들의 확고한 목표는 전 세계적으로 단일 종교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11세기의 주된 특징이었다. 알렉산데르 2세와 그의 뒤를 곧 이은 후계자, 힐데브란트(그레고리우스 7세)는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정책은 생전의 샤를마뉴를 크게 당황하게 했을 것이다. 교회는 백작, 왕, 심지어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재위 1056~1106년)의 권위에 도전하는 정책도 세웠다. 그 정책에 따르면 교회 봉사의 반지와 지팡이를 성직자에게 부여하는 권한은 당연히 로마 교황청에 귀속되는 것이었다.

 


서양사 개념어 사전

–  김응종 / 살림 / 2008.07.31

 

예루살렘 지방의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한 전쟁만이 십자군 전쟁인 것은 아니다. 1053년에 교황 레오 9세가 이탈리아 남부의 노르만인들을 상대로 선포한 것도 십자군 전쟁이며,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한 ‘재정복 운동’ 역시 십자군 전쟁이었다. 북유럽에서는 프로이센인들과 리투아니아인들을 상대로 십자군이 조직됐다. 1208년 교황은 프랑스 남부에 있던 이단인 카타르파를 상대로 십자군을 선포했다. 보헤미아의 이단인 후스파도 십자군 전쟁의 대상이었다.

 


<관련 그림>

 

– 1092년의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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