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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는 동아시아의 기존 질서가 근본적으로 바뀌어가던 격동기였다. 격동의 핵심은 명청 교체. 14세기 후반 이래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군림한 명明이 신흥 강국 청淸의 도전에 밀려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데 반세기 이상 계속된 명청 교체의 진행 과정 속에서 당사자인 명과 청뿐 아니라 조선, 일본, 몽골 등 인접 국가가 모두 격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본래 명의 지배 아래 있던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주변의 여진족을 아우르기 시작한 것은 1583년이다. 명 중심의 책봉 체제 바깥에 있던 일본이 명을 정복하겠다며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 1592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한 것이 1616년, 후금이 선전포고를 통해 공식적으로 명에 도전을 선언한 것이 1618년이고, 이후 명과의 대결에서 연전연승하던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제국 성립을 선포한 뒤 곧바로 조선 침략에 나선 것이 1636년이었다. 결국 명이 멸망하고 산해관을 통과한 청이 북경을 접수한 것은 불과 8년 뒤인 1644년이다.

 

명의 쇠락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다. 명이 멸망하고 27년이 지난 뒤에, 강소(江蘇) 무석(無錫) 사람인 계육기計六奇는 그가 저술한 『명계북략(明季北略)』의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명조明朝가 천하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① 외부의 강적(여진족의 위협), ② 내부의 농민반란, ③ 자연재해의 유행, ④ 정부의 무능력이다. 이들 요인 중에서 계육기는 재해와 농민반란의 상호관계를 특히 강조했다.

『하버드 중국사 원.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명의 쇠락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선, 1572년 황위에 올라 1620년에 사망한 만력제(신종)의 통치 시대로 돌아가 보자.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과 달리, 명의 쇠락이 만력제의 결함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만력 연간에 발생한 두 차례의 환경 위기가 그러한 큰 그림에 해당한다.

1586~1588년에 발생한 첫 번째 ‘만력의 늪’은 정권 자체를 마비시켰다. 그 늪은 사회 재난의 새로운 기준이 될 정도로 엄청난 환경 차원의 ‘붕괴’였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이 재난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이는 1580년대 초반부터 장거정이 시행했던 국가재정에 관한 개혁 덕분이었다. …… 그리하여 장거정이 1582년 사망할 때 국고에는 은이 넘쳐났다. 이렇게 보유한 자금 덕분에 만력제의 조정은 1587년 폭풍처럼 밀어닥친 자연재해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다.

……

20년이 지난 1615년, 두 번째 ‘만력의 늪’이 발생했다. 이번 늪이 있기 2년 전부터 북부 중국 전역에서 홍수가 지속되었고, 2년째 되던 해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추워졌다. …… 1616년 후반기에 기근은 북부중국에서 양쯔강 유역으로 파급되었고, 이어서 광동성을 덮쳤다. 최악의 사태는 1618년 이전에 종결되었지만, 이후에도 만력제의 마지막 2년 동안 가뭄과 메뚜기 떼의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

만력 연간의 기근으로 고통 받은 이들은 명나라 뿐만이 아니었다. 이 시기 북부 중국을 강타한 가뭄은 요동으로도 확산되었다. 요동은 이후에 만주로 알려진 만리장성의 동쪽 끝 부분에 해당한다. 바로 이곳에서 여진족의 지도자 누르하치가 여진족과 몽골족 사이에 전례없이 폭넓은 동맹관계를 형성해냈고, 이 동맹은 1636년 마침내 ‘만주’라는 새로운 민족의 칭호를 탄생시켰다.

※ 17세기 위기 – 소빙하기(소빙기) 절정 : http://yellow.kr/blog/?p=939

 

 

1592년 일본의 조선 침공은 명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침공은 몽골의 위협이라는 그늘에 숨어 세력을 키워 온 만주 건주위가 드러내 놓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동아시아는 더 이상 명나라와 몽골이 아니라 만주와 일본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으로 바뀌어 갔다. 조선은 1592년부터 1636년까지 40년 남짓의 기간 동안 일본에 얻어맞고 명에 시달리고 청에 차이는 최악의 시간을 겪어야만 했다.

 

누르하치가 태어났을 무렵의 여진 부족은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해서여진(海西女眞) 4부, 명과 조선의 영향이 강한 압록강 북쪽의 건주여진(建洲女眞) 5부, 그리고 두만강 북쪽의 야인여진(野人女眞) 4부 등 13개 세력으로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즉, 임진왜란 이전의 만주 지역은 마키아벨리의 이탈리아처럼 내부 세력이 상호 적대하고 프랑스 · 스페인 등의 강력한 외부 세력이 이러한 적대를 조장하는 상황이었다. 건주여진 5부족은 누르하치가 1583년에 군대를 일으켜 1589년 정월까지 모든 부를 굴복시키고 통합하였다.

 

누르하치의 굴기는 임진왜란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한다. 요동 지역에 있던 명군 대부분이 조선으로 출전하면서 생긴 명의 통제력 약화와 1593년 해서여진을 중심으로 한 9부 연합군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누르하치는 사실상 만주 지역의 패자로 떠올랐다.

 

잇따른 승전을 통해 인구와 영토가 늘어나고 자신감이 커지면서 누르하치는 내부 정비에 눈을 돌렸다. 1599년 만주 문자를 창제하고, 1603년에는 허투아라에 흥경노성興京老城이라는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했다. 1615년에는 팔기제八旗制를 정비했다. 누르하치는 이어 1616년 국호를 대금大金,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칭해 독립 국가의 지향을 드러냈다.

※ 이 무렵 여진은 만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만주(manju 滿州)의 어원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지만 문수보살文殊菩薩(불교에서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의 산스크리트어 표기인 मञ्जुश्री (Mañjuśrī, 만주슈리)의 음사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 1616년 당시의 중국판 역사지도

 

당시의 세계사 연표는 :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mhistory4.jsp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중국 – 외교관의 눈으로 보다

–  백범흠 / 늘품플러스 / 2010.04.19

 

일본의 조선 침공은 명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침공은 몽골의 위협이라는 그늘에 숨어 세력을 키워 온 만주 건주위가 드러내 놓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동아시아는 더 이상 명나라와 몽골이 아니라 만주와 일본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으로 바뀌어 갔다.

 

명나라는 몽골의 만주 침공을 막기 위해 요동 이동에 살던 건주위建州衛의 여진족을 강화시키려 했다. 명나라는 요서와 요동 등 만주의 일부지역만 직접 통치하고, 여타 대부분의 지역은 자치상태로 버려두었다. 당시 여진족은 ◇초기 고구려의 중심을 이루던 길림성의 건주여진, ◇부여의 고토故土이던 창춘-하얼빈 지역의 해서여진과 ◇수렵과 어로를 위주로 생활하는 흑룡강 유역의 야인여진으로 3분되어 있었다. 건주여진은 명나라 및 조선과 가까이에 있어 비교적 발달된 문화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생계수단인 수렵과 채취뿐만 아니라 농업에도 종사하고 있었다. 해서여진은 예헤부, 하다부, 호이화부, 우라부 등 4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모두 금나라의 후손을 자처했다.

 

 

예헤부와 하다부가 해서여진의 패권을 놓고 싸웠다. 거란의 후예로 판단되는 예헤부는 몽골에서 이주해온 부족으로 반명의식反明意識이 매우 높았다. 명나라는 하다부를 지원하여 예헤부를 통제하려고 했다. 하다부는 명나라의 지배에 반대하여 봉기한 건주여진 출신 왕고王杲가 도망쳐 오자, 그를 명나라로 넘겨주는 등 철저한 친명親明으로 일관했다. 명나라는 몽골을 의식하여 만주의 여러 부족들을 지원했으나, 그들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몽골의 동진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힘만 갖기를 바랐던 것이다.

……

누르하치의 세력이 통제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커지게 되자 명나라는 누르하치와의 교역을 정지하는 한편, 해서여진 예헤부를 지원하여 누르하치에 맞서게 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압력에 맞서 독립의 자세를 취해 나갔다. 그는 자기 가족을 포함한 만주족에 대한 명나라의 탄압사례를 일일이 열거한 <칠대한七大恨>을 발표하여, 명나라의 탄압에 무력으로 맞설 것임을 공언했다. 그는 새로 통합한 해서여진 하다부의 땅을 집중 개간하는 등 자립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누르하치는 1616년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하고, 수도를 길림성 흥경興京에 두는 한편, 푸순撫順을 공격하여 명나라군 유격(대령) 이영방의 항복을 받아 내었다. 그리고 추격해 온 광녕총병廣寧總兵 장승음의 1만 대군을 대파하였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  한명기 / 서울신문 / 2011~2012

 

女眞은 上古 시기 숙신(肅愼), 말갈(靺鞨) 등으로 불리던 퉁구스 계통의 소수민족이다. 그들의 발상지이자 활동무대는 우리가 보통 만주(滿洲)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中國 동북지방이었다. 滿州란 과연 어떤 곳인가? 많은 韓國人들은 滿州 하면 먼저 高句麗를 떠올린다. 동시에 그곳은 독립운동가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말을 달리던 벌판이기도 하다.

……

이후 19세기까지 滿州에서는 거란(契丹), 여진(女眞), 몽골, 한족(漢族), 그리고 다시 女眞族의 순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滿州를 놓고 일본(日本)과 러시아가 치열한 다툼을 벌였고,1945년 이후에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격전이 벌어진 뒤, 滿州는 中國 땅이 되었다.

 

滿州에서 일어나 대제국 淸을 세운 女眞族은 오늘날의 中國에 커다란 선물을 남겨 주었다. 淸나라가 차지했던 광대한 땅이 고스란히 오늘날 中國의 영토로 계승된 것이다. 明나라 시절, 漢族 지식인들은 女眞族을 야만인이자 ‘금수(禽獸)’라고 멸시했다. 하지만 淸은 1644년 明을 접수한 이래 영토를 확장하여 신장(新疆), 티베트, 내몽골 지역을 자신들의 판도 속으로 집어넣었다. 淸나라의 지배 아래서 中國의 영토는 과거 明나라 시절보다 거의 40% 가까이 불어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1644년 베이징을 접수할 무렵, 女眞族의 인구는 대략 50만, 漢族의 인구는 1억 500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었다. 이후 女眞族은 자신들보다 300배 가까이 많은 한족들을 300년 가까이 지배한다. 좀처럼 믿기 어려운 사실이자, 동시에 女眞族과 淸朝 지배층의 정치적 역량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

1368년 中原에는 다시 漢族 왕조 명(明)이 들어섰다. 중원을 지배했던 몽골족의 원(元)나라는 베이징을 버리고, 北으로 도주하여 고비사막 방면까지 쫓겨갔다. 明은 다시 滿州 쪽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女眞族들을 통제하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한다.

1279년 남송 멸망 이후 거의 백년 만에 중원을 되찾아 한족들의 자존심을 회복한 明의 女眞정책은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女眞族을 통제하되 그들을 너무 강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게 ‘섬세하게’ 길들이는 것이었다. 明은 흩어져 있는 女眞族들 사이에서 과거 아구다와 같은 패자(覇者)가 출현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렇게 되면, 女眞族이 다시 커다란 세력으로 뭉치게 될 것이고 宋나라가 겪었던 ‘끔찍한 경험’을 되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女眞族들을 뿔뿔이 흩어진 상태로 방치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明은 북으로 도망간 몽골의 원나라(보통 北元이라 부름)를 女眞族을 이용하여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明은 몽골을 견제하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식을 고려한 셈이다. 그러려면 女眞族이 어느 정도까지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한마디로 明의 女眞정책은 일종의 ‘딜레마’였다.

明은 고심 끝에 14세기 후반부터 滿州의 女眞族들을 분할지배 방식으로 통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明은 랴오허(遼河)를 기준으로 서쪽, 즉 오늘날 랴오닝성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요동도사(遼東都司)라는 기구를 설치, 지역의 한족들을 직접 통치했다. 그리고 요동도사가 관할하는 산하이관(山海關) 부근부터 관전(寬奠)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변장(邊牆)이라 불리는 담을 쌓았다. 女眞族들은 이 담을 넘어 서쪽으로 올 수 없었다.

랴오허 동쪽, 오늘날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에는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라는 기구를 두어 女眞族을 통치했다. 그 아래에는 위소(衛所)라는 기관을 두어 女眞族 출신을 우두머리로 임명하고 자치를 허용했다. 하지만 위소의 우두머리를 임명할 때나, 女眞族 내부에서 분쟁이 생겼을 때에는 明의 지휘부가 개입했다. 女眞族의 자치를 허용하되, 女眞族 유력자들을 명의 행정체계에 포섭하여 통제하는 전형적인 ‘분할통치(divide and rule)’였다.

 

건국 직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明의 女眞정책은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다.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 기간 동안은 명 내부의 정치가 그런대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6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만력제(萬曆帝)의 정치적 태만과 무능, 그에 더하여 壬辰倭亂과 같은 明 외부의 격변까지 맞물리면서 女眞정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침 이 무렵부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던 누르하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1608년 8월, 조선 조야(朝野)는 ‘누르하치가 배를 만들어 장차 조선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에 긴장했다.1610년(광해군 2) 1월에는 허투알라 지역에 ‘조선이 명과 연합하여 건주여진을 토벌할 것’이며,‘이미 조선의 병마(兵馬)가 압록강변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

광해군이 건주여진을 조선에 비해 ‘열등한 존재’ ‘오랑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의 다른 지식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누르하치와 여진족을 가리켜 ‘노추(老酋)’ ‘견양(犬羊)’ 등 멸칭(蔑稱)으로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의 누르하치에 대한 정책은 유연했다.

‘무식하고 사나운 오랑캐에게 인륜과 이치를 내세워 사사건건 따져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그들을 자극하여 쓸 데 없는 화란을 부르지 말고, 적당히 경제적 욕구를 채워주면서 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

광해군은 누르하치와 관계를 유지하되 모험을 피하려 했다. 또 명과 누르하치 사이의 갈등 속으로 말려드는 것도 있는 힘을 다해 회피하려 시도했다.

임진왜란을 통해 처참한 상처를 입은데다 그 후유증이 채 치유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전란을 만날 경우 망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재위 중반까지만 해도 그같은 노력과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명과 누르하치의 관계가 아직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않았던데다, 광해군 자신이 정치판을 그런대로 잘 이끌었기 때문이다.

……

정보를 수집하고, 기미책을 통해 누르하치를 다독이는 한편, 광해군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군사적 대비책 마련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조총, 화포 등 신무기를 개발,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시 누르하치의 기마대는 철기(鐵騎)라 불릴 정도로 기동력에서 발군이었다. 그 ‘강철 같은 기마대’를 평원에서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성에 들어가 화포를 써서 제압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은 당시의 상식이었다.

광해군은 1613년(광해군 5), 화기도감(火器都監)을 확대개편해 각종 화포를 주조하는 한편, 화약원료인 염초(焰硝) 확보에도 각별히 노력했다.

무기 확보를 위한 광해군의 노력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그의 일본에 대한 태도였다.

그는 일본으로 떠나는 통신사 편에 조총과 장검 등을 구입해 올 것을 지시했다. 일본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萬歲不共之讐)’로 여기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도 일본산 무기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1609년(광해군 1), 주변의 반발을 물리치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누르하치 때문에 서북변(西北邊)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에서 언제까지 일본과 냉랭한 관계를 고집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대외관계에 관한 한 분명한 현실주의자였다.

광해군은 병력을 확보하고 뛰어난 지휘관을 기용하는 데도 노력했다. 병력 확보를 위한 근본대책으로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려 했고, 수시로 무과(武科)를 열었다.

1622년(광해군 14) 이후로는 모든 무과 합격자들을 변방으로 배치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향리에 은거하고 있던 곽재우(郭再祐)를 불러 올려 북병사(北兵使)에 제수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누르하치의 침략으로 도성이 함락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그곳을 ‘최후의 보루’로 여겨 수시로 보수하고 군량을 비축했다.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  진순신 / 전선영 역 / 살림 / 2011.07.29

 

이성량의 주선으로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좌도독, 용호장군의 칭호를 받았다. 칭호뿐만 아니라 은 800냥이라는 세폐도 받았다. 명나라의 힘을 배경으로 하여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통일했다.

건주 5부(部)는 소극소호(蘇克素護), 혼하(渾河), 완안(完顔), 동악(棟鄂), 철진(哲陳)인데, 누르하치는 만력 11년(1583)에 군대를 일으켜 만력 17년(1589) 정월까지 모든 부를 굴복시켰다.

 

이렇게 해서 누르하치는 드디어 북쪽의 해서여진(海西女眞)과 대결했다. 누르하치는 무순, 청하(淸河), 관전(寬甸), 애양(靉陽) 등 네 곳의 관(關)에서 명나라와 활발하게 통상하여 더욱 국력의 내실을 기했다. 한편 해서여진 각 부는 하다부와 예혜부와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때까지 흑룡강 유역에서 나는 진주와 모피는 해서여진이 지배하는 개성(開城)을 경유하여 운반되었다. 그런데 전란 때문에 개성이 폐쇄나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어버렸다.

교역로가 폐쇄되었다 할지라도 상품 유통의 길을 막을 수는 없다. 개성을 경유하지 못한다면 남쪽의 길이 있었다. 누르하치의 통일로 건주는 평온했으므로, 그때까지 개성을 경유하여 해서여진을 윤택하게 했던 모피, 진주, 인삼 등이 건주를 경유하게 되어, 누르하치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누르하치도 적극적으로 이들 상품을 사들였다. 건주에는 각지의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누르하치가 교역으로 얻은 이익은 한 해에 수만 냥에 달했다. 만력 19년(1591)에는 압록강로(鴨綠江路)를 손에 넣었다. 영토를 넓힘으로 해서 백성을 늘림과 동시에 조선과도 교역의 길을 튼 것이다.

……

공포감을 느낀 해서여진족은 변경의 각 집단에게도 호소하여 누르하치가 ‘만주’라고 칭한 괴물을 쳐부수려 했다. 그들이 이전까지 얻고 있던 교역의 이(利)도 어느 틈엔가 만주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개성을 다시 교역지로 삼으려 하면, 만주는 온갖 책략을 사용해서 그것을 저지했다. 이런 녀석을 멋대로 날뛰게 내버려 두었다가는 우리가 당장 굶어죽을 것이라는 격문을 띄웠다.

이렇게 해서 9부의 병사가 모여 만주의 팽창을 저지하기로 했다. 그 가운데 해서 4부가 포함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석백부도 반만주(反滿洲)의 일익을 담당했다. 이 이른바 9부 연합은 만력 21년(1593)의 일이었다. 누르하치는 9부 3만의 무리를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그 연합군에 가담했던 장백산(長白山)의 주사리부(珠舍哩部, 주셔리)와 눌은부(訥殷部, 너연)로 원정하여 그 영토를 모두 합병해 버렸다.

……

조그만 소란이 자꾸만 일어나자, 넌덜머리가 난 명나라는 요동을 조용히 만들기 위해서 영향력이 있는 세력을 양성하려 했다. 그러나 그 세력은 영향력이 너무 강해서는 안 된다. 명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강성해서는 곤란하다. 이성량은 고삐를 쥐고 적당히 조절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와 함께하는 장사가 번창했기 때문에 고삐를 죄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

이성량을 해임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후임자를 얻지 못했다. 이성량은 떠났지만 요동의 군대에는 그의 숨결이 남아 있어서 후임자는 일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만주 제국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누르하치는 충분히 힘을 길렀기 때문에 이성량의 후임자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었다. 이성량 해임 후 10년 동안 요동의 군사 책임자는 차례차례로 교체되어 8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9부 연합군을 격파한 뒤에도 누르하치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해서 4부는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지만, 만주의 힘이 약해지면 화약(和約)이 깨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누르하치는 만주 정권의 힘을 더욱 기르기에 노력했다.

……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일본군이 철병한 이듬해(1599), 해서의 하다부는 결국 만주에 항복했다. 하다부는 예헤부의 사주를 받아 화약을 깨고 만주를 공격했다. 만주는 그것을 격파해 버렸다.

명나라는 이에 대해서 누르하치를 힐문하기 위해 사자를 보냈다. 이웃나라를 함부로 공략한 것을 나무란 것인데, 드디어 누르하치의 만주라는 존재에 공포심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런데 하다부의 어려운 처지에 편승하여 예헤부가 침공을 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해 예헤부를 힐문하라고 요구했지만, 명나라는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명나라는 너무나도 강대해진 누르하치 만주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예헤부를 대항시키는 작전을 취했다. 몽골계인 예헤부는 원래부터 명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누르하치에 대항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용맹한 예헤부밖에 없었다. 똑같이 하다부를 공격했지만, 명나라는 예헤부를 질책하려 들지 않았다.

 

그 무렵, 하다부는 기근 때문에 명나라에 식량의 긴급 수송을 요청했지만, 명나라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하다부는 누르하치에게 전면 항복을 하기로 했다.

이상은 만주 쪽 자료에 의한 해서여진 하다부의 멸망 과정이다.

이로 인해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누르하치와 명나라와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하다부에 이어 후이파부가 멸망했다. 만력 35년(1607)의 일이었다. 일본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고 정권의 귀추가 분명해진 시기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江戶)에서 슨푸(駿府) 성으로 옮긴 해에 해당한다. 그러나 건주를 통일하고 해서 4부 가운데 2부까지 병합한 누르하치 정권이 머지않아 중국 전토를 지배하게 될 줄을 이 시점에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누르하치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라부가 멸망한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인 만력 41년(1613)의 일이었다. 해서여진 4부의 명칭은 모두 지명에 따른 것이고, 성(姓)은 나라(那拉) 씨 였다고 한다. 우라부는 하다부나 예헤부에 비해서 약했지만, 나라 씨의 정통 계보였다. 누르하치의 친정으로, 우라부의 수장인 푸첸타이(布占泰)는 100명도 되지 않는 패잔병들을 데리고 예헤부로 달아났다.

해서 4부 가운데서 남은 것은 예헤부뿐이었다. 예헤부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명나라는 유격(遊擊, 무관의 관직명)인 마시남(馬時楠), 주대기(周大岐) 등에게 화기를 능숙하게 다루도록 훈련된 병사 1천을 주어 구원군으로 보냈다. 원군을 요청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명나라는 지나치게 강해진 만주를 그 이상 방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르하치는 우라부 공격의 여세를 몰아 예헤부로 향했는데, 7성 19새(塞)를 함락하고 일단 물러났다.

만력 44년(1616) 정월, 누르하치는 가한(칸)의 자리에 올랐다. 예헤부의 토멸과 명나라와의 대결은 즉위 후의 문제로 남았다.

……

신흥 누르하치에게 있어서 샤르허의 전투는 실로 커다란 수확을 가져다 주었다. 이 세력의 가장 커다란 고민이 인구 부족에 있었다는 사실은 몇 번이고 이야기했는데, 이 전승으로 말미암아, 예를 들자면 유정 휘하에 있던 조선군이 전원 투항해 왔다. 그만큼 인구가 늘어난 셈이다.

또한 이 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누르하치는 개원과 철령을 탈취했다. 영토를 넓힘과 동시에 그 지역의 주민들까지 손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동족 가운데서 마지막까지 대적했던 예헤부를 이 기회에 평정할 수 있었다.

샤르허의 전투는 명의 만력 47년(1619), 금의 천명 4년 3월의 일이었는데, 예헤부가 평정된 것은 같은 해 8월의 일이었다.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  정두희 / 휴머니스트 / 2007.11.27

 

명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는 1580년대에 이르러 누르하치가 건주여진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583년에 건주자위(建州左衛)의 실권자로 등장한 이후 누르하치는 여러 차례 군사 행동을 통하여 건주위에 소속된 여러 부족을 흡수하였으며, 1589년에는 건주 3위와 그 주변을 모두 아우르고 실제로 건주위통일을 이룩함으로써 명실 공히 만주의 실력자로 떠올랐다.

……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누르하치의 군사적 팽창이 1589년 이후에 멈추어, 임진왜란 기간(1592~1598) 내내 재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589년에 팽창이 일단 멈춘 이유는 건주여진의 통일이 이때 완결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에 누르하치가 왕을 칭한 사실도 건주여진 통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4년 뒤인 1593년에 반(反) 누르하치 동맹을 체결하고 침입한 해서여진(海西女眞)과 몽골의 연합군을 대파하는 큰 전투를 치르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방어 차원의 불가피한 전투였을 뿐이다. 이 전투는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의 테두리를 벗어나 국제무대에서 치른 첫 전투로, 여기서 승리함으로써 누르하치의 입지는 더욱 굳건해졌지만, 이 전투는 선제공격에 의한 전투는 아니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누르하치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적극적인 정복사업에 나서지 않고, 이후 몇 년간 여전히 군사 행동을 자제하였다는 점이다. …… 1593년의 승리 이후 1598년까지 약 5년 동안 누르하치가 수행한 전투는 1595년에 휘발(揮發, 후이파)의 한 성채를 공취한 것과 1598년에 동해여진(東海女眞)의 소규모 부락 두어 개를 복속한 것이 전부였으며, 이들 군사작전은 모두 1천 명 정도의 군대로 가능한, 매우 소규모 작전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휴지기’가 끝난 1599년부터 누르하치는 다시 적극적인 정복사업에 나서 1613년까지 거의 쉴 틈없이 합달(哈達, 하다), 휘발, 오랍(烏拉, 우라), 두만강 유역 동해여진의 여러 부족들, 흑룡강 일대 여러 부족들을 연이어 병합하는 등 엽혁(葉赫, 예허)을 제외한 모든 여진 부족을 통일함으로써, 만주 전역에 걸쳐 최고 실력자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

……

누르하치가 흥기하기 이전 시기 명의 대 여진 정책에 대해서는 이미 다양한 이들의 연구가 있었고,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시작된 명의 쇠락이 왜란을 거치면서 심화되었다는 해석도 있지만, 명의 건주여진 견제 정책이 왜란으로 인해 어떻게 제대로 기능할 수 없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아직 별로 제시된 바 없다. 오히려 최근에는 1570년부터 1610년 사이에 명의 군사력이 재정비되면서 증강되었다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조선의 대 여진 정책도, 주지하듯이, 1467년 조 · 명 연합군의 건주위 정벌을 계기로 조선과 건주여진 사이에는 관계가 끊겼고, 이런 상황은 왜란 발발 당시까지 이미 125년 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16세기 조선의 대 여진 정책이라는 것은 주로 두만강 유역의 동해여진과 번호(藩胡)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지, 건주여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따라서 왜란을 계기로 명과 조선의 건주여진 견제가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는 식의 가설은 강한 설득력이 있음에도 물증의 뒷받침이 거의 없다는 결함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한 · 중 · 일 동아 삼국의 군사력이 한반도에 집결되었던 상황이 과연 누르하치에게 군사 팽창의 ‘호기’를 제공하였는지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당시 세계 최고 전력이었다는 일본군 15만, 그런 일본군을 맞아 싸운 조선군의 우수한 화력(화포 및 함포), 동아시아 최고 강대국인 명의 5만 여 군사 등 줄잡아 20만이 훨씬 넘는 군사력이 한반도에, 다른 말로 건주여진의 남쪽에 집결한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과연 그것을 군사 팽창의 호기로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위기감을 느꼈을까? 조선으로 이동하기 위해 랴오둥을 통과하는 명의 대군을 보며, 누르하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까, 아니면 불안을 느꼈을까?

 

누르하치는 위기와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북쪽에는 해서여진 세력이 아직 건재하고, 서쪽에서는 명군(明軍)이 쏟아져 나오고, 남쪽에는 일본군이 몰려와 있는 상황은 누르하치에게도 비상 국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섣부른 군사 행동을 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해서여진과의 싸움에 전력을 쏟을 상황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누르하치는 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상황에 직면하여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왜란 기간 중에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보이지 않은 까닭은 바로 이러한 국면과 깊이 관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신중한 태도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섣부른 군사 행동을 자제하고 상황을 지켜보며 외교적 방법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는 것이다. 이 기간에 누르하치의 주 관심사는 전쟁이 아니라 외교였다. 왜란이 벌어진 동안에 누르하치는 몽골의 여러 부족 및 해서여진 부족들과 연이어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우선 북쪽 배후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명과의 우호 증진을 꾀하여 조공 사신을 정기적으로 파견하였으며, 1595년에는 용호장군(龍虎將軍)을 제수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방법으로써 외교에 의존하였던 것이다.

……

명과 조선을 차별화한 누르하치의 차등외교는 1607년 무렵까지 그 기조가 유지되었다. 누르하치는 2년 정도 조공을 하지 않다가 1608년에 약8백 명의 조공 사신단을 베이징에 파견하였는데, 그들은 베이징에서 황제가 하사한 은의 양이 적다고 대놓고 불평할 정도로 ‘오만한’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마침 베이징에서 이 상황을 목도한 조선 사신은 서울에 돌아온 후 그들이 중국 조정을 모욕하고 깔보았다고 보고하였다. 이 점은 누르하치가 1608년에 이미 명질서에서 벗어날 준비를 완료하였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그는 이후로 다시 조공하지 않았으며, 1616년에는 후금 건국을 공식 선포함으로써 명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  김시덕 / 메디치미디어/ 2015.04.05

 

12 – 13세기에 금(金)나라를 세웠다가 몽골인에 의해 멸망당한 뒤로, 이 지역의 여진인은 몽골 · 조선 · 명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16세기 당시 여진인은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해서여진(海西女眞) 4부, 명과 조선의 영향이 강한 압록강 북쪽의 건주여진(建洲女眞) 5부, 그리고 두만강 북쪽의 야인여진(野人女眞) 4부 등 13개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동질감이 약하여 서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몽골 · 조선 · 명 등의 주변 세력이 이러한 대립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즉, 임진왜란 이전의 만주 지역은 마키아벨리의 이탈리아처럼 내부 세력이 상호 적대하고 프랑스 · 스페인 등의 강력한 외부 세력이 이러한 적대를 조장하는 상황이었다.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도 비슷한 상황에서 통일 전쟁을 수행했지만, 그가 맞서야 했던 외부 세력은 유럽 이베리아반도에서 온 예수회뿐이었다. 누르하치는 예수회 세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만주에 강력하게 개입하는 몽골 · 조선 · 명 등의 외부 세력과도 맞서야 했기에 노부나가보다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여진인의 전국시대는 몽골 · 조선 · 명 등이 이 지역에 계속 개입하는 한 이어질 터였다. 그러나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빠른 속도로 여진 집단을 합병해나갔고,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의 관심이 유라시아의 해양 세력인 일본으로 가 있는 사이에 그 과정을 거의 완성했다. 말하자면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끝낸 뒤 통일 일본 세력이 한반도를 공격하고, 그 파장으로 만주 지역의 전국시대가 끝나는 연쇄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

『만주실록』권3을 보면, 임진왜란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에 누르하치가 금과 은을 채굴하고 철의 제련을 시작함과 동시에 몽골 문자를 변형하여 만주 문자를 제정함으로써 여진인의 언어생활에 혁신을 가져오고 여진인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칭송한다.

……

…… 어쨌든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훗날 청나라를 세우는 여진인은 누르하치의 가장 큰 업적을 얘기할 때 문자를 제정하여 ‘만주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고, 홍삼 제조법과 광산을 개발함으로써 여진 세계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한 것을 으뜸으로 꼽는다.

……

1580년대에 여진 통일 전쟁을 시작한 누르하치에게 임진왜란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러나 상호 적대적이던 다른 여진 집단은 누르하치에게 정복되기보다는 몽골이나 명나라와 같은 외부의 힘을 빌려 누르하치를 꺾고자 했다. 한반도에서 조선 · 명 연합군과 일본국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던 1593년에, 몽골과의 연계가 강한 해서여진 세력은 코르친(Khorchin) 등의 몽골 세력과 연합하여 누르하치를 공격했다. 일본을 통일하고자 한 오다 노부나가의 기세를 꺾기 위해, 상호 적대하던 세력이 연합하여 노부나가 포위망을 펼친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이 전투에서 승리했고, 건주여진에 이어 여허(葉赫) 집단을 제외한 모든 해서여진도 합병한 뒤에 1603년에 허투알라(興京老城)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제까지 여진을 낮게 평가하던 몽골인 가운데 일부 세력이 이때부터 누르하치와의 연합을 모색하기에 이르렀고, 1593년의 전쟁에서 누르하치에게 졌던 코르친을 포함한 칼카(Kalka) 몽골 세력이 1606년에 그에게 ‘공경스러운 한(쿤둘런 한)’이라는 존호를 바쳤다. 금나라 멸망 이래로 이 지역에 존재한 몽골과 여진의 관계가 처음으로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1598년에 사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 1614~1615년의 오사카 전투를 거치며 일본의 지배자가 됐다. 도쿠가와막부는 히데요시가 무너뜨린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복원하고자 간청과 협박을 섞어서 조선을 설득했는데, 협박 가운데에는 다시 조선을 공격할 수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따라서 조선은 일본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여념이 없었으며, 만주의 상황을 우려했지만 개입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명나라도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이 현실화되자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 따라 해서여진의 잔존세력인 여허를 지원하여 누르하치를 견제했다. 누르하치는 시종 명나라에 저자세를 취해왔으나, 이제 명나라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616년에 여허를 제외한 모든 여진 세력의 유력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금국(後金國) 건국을 선포하고 ‘여러 나라를 기르실 밝은 한’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7세기 대동의 길

–  한명기,문중양 등 / 민음사 / 2014.06.27

 

요컨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에도 조선이 처한 ‘복배수적腹背受敵’의 상황은 재현되었다. 복배수적이란 정면과 배후에 모두 적을 두고 있는 조선의 엄혹한 지정학적 현실을 지칭하는 용어다. 말하자면 남왜南倭가 물러갈 기미를 보이자 이번에는 북로北虜가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1606년 선조가 명에 보낸 주문奏文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신은 성상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곡진히 입었습니다. 신이 늘 감격해 보답하려 하지만 방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남방의 근심이 그치지 않았는데 북방의 경보는 더 다급해졌습니다. 비록 마음을 다해 막으려 하지만 기세가 나뉘고 힘이 약한지라 잿더미 가운데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천지 부모에게 호소하지 않고는 근심을 나라 밖으로 떨쳐 내는 것이 진실로 어렵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채 10년이 되지 않은 시점,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의 위협이 확연히 커져 가는 상황에 대해 조선이 느끼고 있던 위기의식이 생생하다. 위의 기사는 명의 도움을 받아 누르하치의 위협을 견제하려는 조선의 의도를 품고 있는 내용이다. 그와 동시에 당시 조선이 맞닥뜨리고 있던 복배수적의 상황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기도 하다.

……

명은 여진을 어르고 달래면서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나는 여진 부족들을 통제해 아구다와 같은 패자가 다시 등장하는 상황을 막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여진족을 활용해 북방의 강적 몽골을 견제하는 것이다. 그 같은 목적을 달성하려면 여진족을 ‘너무 강하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명은 요동도지휘사사와 누르간도사를 통해 여진 부족들을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동시에 생필품 교역을 통제해 경제적으로도 그들을 장악하려 했다. 당시 여진족은 만주 각지의 교역장에서 인삼, 모피, 진주 등 특산물을 가지고 명 상인과 생필품을 교역했다. 그런데 이 교역에는 명 황제 명의의 칙서를 소지한 여진 부족만 참여할 수 있었다. 칙서가 없거나 그것을 박탈당한 부족은 교역할 수 없었다.

여진족을 지배하려는 명의 정책은 16세기 후반까지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효력을 발휘했다. 만력 연간(1573~1619) 여진족을 통제하는 데 중심 역활을 한 인물은 이여송의 부친인 이성량이었다. 이성량은 전후 30년 동안 요동총병 등으로 재임하면서 여진 세력을 복속시키는 데 수완을 발휘했다. 당시 건주좌위 소속이던 누르하치 집안은 이성량과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과 여진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한창 굴기하던 누르하치의 영향력이 조선에 복속한 여진족을 향해 밀려왔기 때문이다. 1591년 무렵 조선의 국경 지역까지 세력을 뻗쳐 조선에 복속한 여진족을 흡수한 누르하치는 일본군의 북상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조선 조정이 의주로 피란해 있던 1592년 9월, 명의 병부는 요동도사를 통해 ‘누르하치가 왜란으로 곤경에 처한 조선을 돕기 위해 수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겠다’고 제의한 사실을 조선에 전했다. 조선 조정은 누르하치의 제의를 놓고 고민하다가 이를 거절했다. 유성룡 등은 당唐이 안녹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회흘(回紇,위구르)과 토번(吐蕃,티베트) 등에게 청원했다가 화를 입은 고사를 들어 누르하치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데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이 같은 파병 제의를 통해 누르하치의 강성함을 인지하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1595년에도 조선인을 쇄환하겠다면서 통교를 제의했다. 조선은 누르하치의 동향을 명에 통보하는 한편, 이후 누르하치 집단과 사달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선조는 1595년 신충일을 명군 장수와 함께 허투아라에 파견해 그들의 동태를 탐지했다. 당시 신충일이 남긴 견문 보고서가 유명한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이다. 선조는 또 변방의 관리들에게 삼을 캐러 국경을 넘어오는 여진인을 죽이지 말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그들의 월경으로 마찰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건주여진 측에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명군 지휘관들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이미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세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는 누르하치 세력과 충돌하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이었다.

 


하버드 중국사 원.명

–  티모시 브룩 / 조영헌 역 / 너머북스 / 2014.10.30

 

명의 쇠락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선, 1572년 황위에 올라 1620년에 사망한 만력제(신종)의 통치 시대로 돌아가 보자.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과 달리, 명의 쇠락이 만력제의 결함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만력 연간에 발생한 두 차례의 환경 위기가 그러한 큰 그림에 해당한다.

1586~1588년에 발생한 첫 번째 ‘만력의 늪’은 정권 자체를 마비시켰다. 그 늪은 사회 재난의 새로운 기준이 될 정도로 엄청난 환경 차원의 ‘붕괴’였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이 재난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이는 1580년대 초반부터 장거정이 시행했던 국가재정에 관한 개혁 덕분이었다. …… 그리하여 장거정이 1582년 사망할 때 국고에는 은이 넘쳐났다. 이렇게 보유한 자금 덕분에 만력제의 조정은 1587년 폭풍처럼 밀어닥친 자연재해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다.

……

20년이 지난 1615년, 두 번째 ‘만력의 늪’이 발생했다. 이번 늪이 있기 2년 전부터 북부 중국 전역에서 홍수가 지속되었고, 2년째 되던 해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추워졌다. …… 1616년 후반기에 기근은 북부중국에서 양쯔강 유역으로 파급되었고, 이어서 광동성을 덮쳤다. 최악의 사태는 1618년 이전에 종결되었지만, 이후에도 만력제의 마지막 2년 동안 가뭄과 메뚜기 떼의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

만력 연간의 기근으로 고통 받은 이들은 명나라 뿐만이 아니었다. 이 시기 북부 중국을 강타한 가뭄은 요동으로도 확산되었다. 요동은 이후에 만주로 알려진 만리장성의 동쪽 끝 부분에 해당한다. 바로 이곳에서 여진족의 지도자 누르하치가 여진족과 몽골족 사이에 전례없이 폭넓은 동맹관계를 형성해냈고, 이 동맹은 1636년 마침내 ‘만주’라는 새로운 민족의 칭호를 탄생시켰다.

……

원-명을 통털어 숭정제만큼 심각하게 비정상적인 기후를 만났던 황제는 없었다. 통치 첫 해에는 심각한 상황이 제국의 서북쪽에 몰려 있었다. 1628년 어사의 보고에 따르면, 가뭄과 기근이 너무 심각해 섬서성 전체가 재난 지역이었다고 한다. 다음 해에는 기온이 급강하했고 1640년까지 한파가 지속되었다.

중국만 한파를 겪은 것은 아니었다. 1630년대 러시아도 12월부터 2월 사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심각하게 추웠다. 그러다가 1640년에 이르면 겨울마다 매달 극심한 추위가 잇따라 보고되면서 12세기 이래 러시아 역사상 가장 혹독하게 추웠던 10년으로 기록된다. 만주에도 역시 혹독한 추위가 덮쳤다. 여진족이 남쪽으로 진출한 것은 명의 경제력을 노린 측면도 있겠지만, 혹독한 추위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

……

1632년 이후 재해는 더욱 심각해졌다. 1635년, 메뚜기떼가 대규모로 출현했다. 숭정 10년(1637년)에는 전국적인 가뭄이 덮쳤다. 이후 7년에 걸친 가뭄으로 굶주린 사람들은 나무껍질을 벗겨 먹기 시작했고, 급기야 썩은 송장까지 건드리게 되었다.

……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가장 타격을 받은 곳은 정부 조달에 의존했던 북방 지역이었다. …… 조정이 긴축 재정을 운영하면서 군사들과 역참 병졸들에게 돌아갈 보수는 한푼도 없었다. 많은 병사가 주변지역으로 도망쳐 도적질로 간신히 목숨을 이어갔다. …… 1628년 봄, 섬서성을 덮친 가뭄을 계기로 병사들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시작으로 향후 1년간 전국을 뒤덮는 반란이 되풀이되었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황정(荒政)과 왕조교체(王朝交替)

–  김문기(부경대) / 중국사학회 / 2014년

 

명조가 멸망하고 27년이 지난 뒤에, 상주부常州府 무석현無錫縣의 계육기計六奇는 그가 저술한 『명계북략(明季北略)』의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명조明朝가 천하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① 외부의 강적(여진족의 위협), ② 내부의 농민반란, ③ 자연재해의 유행, ④ 정부의 무능력이다. 이들 요인 중에서 계육기는 재해와 농민반란의 상호관계를 특히 강조했다.

가령 유구(流寇,무리 지어 떠돌아다니는 도적)가 소란을 일으켰을 때 백성들이 기근의 근심이 없었다면, 오히려 살아남기를 탐하고 죽기를 두려워하여 성지城池를 굳건히 지켰을 것이니 도적의 형세는 점차로 고립되었으리라. 어찌하랴! 섬서와 하남에 여러 해 동안 대기근이 들고, 산동과 호광에 매년 황재蝗災와 한재旱災가 드니, 궁핍한 백성들이 살아갈 방도가 없어 단지 도적을 따라서 약탈하며 잠시의 죽음을 연장하길 바랐을 뿐이다. 그렇기에 도적이 이르는 곳마다 앞 다투어 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맞이하여 그 무리로 들어갔다. 비록 수령守令일지라도 또한 금할 수 없었으니, 도적의 무리는 날로 많아지고 도적의 세력은 더욱 확대되니, 대란大亂이 이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졌다.

계육기는 명말의 농민반란이 변경의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 병향兵餉을 가파加派하는 등 국가의 가혹한 착취에서 시작되었지만, 이것이 왕조를 무너뜨릴 정도의 대란으로 발전했던 원인은 연이은 재해로 인한 극심한 기근에 있었다고 보았다. 그는 당시의 재해가 대기근으로 발전하지 않았다면 농민반란이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명조의 멸망과정에서 재해의 파괴력을 그 시대를 겪었던 계육기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

명청교체를 바라보는 전통적 시각은 ‘계급투쟁’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의 부패, 관료체제의 붕괴, 농민계급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강조하지만, 재해와 인화(人禍)로 끝내 농민반란을 추동하여 명조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이러한 관점에서 벗어나 각기 다양한 관점들이 제시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전환은 환경사적 관점에서의 접근이다. 페스트가 명조의 멸망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연구도 그 중의 하나이다. 다만 이것은 지엽적인 문제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기후변동이었다. 명청교체가 이루어진 17세기는 ‘지난 1만년 사이에 가장 한랭했던 시기’였다. 바로 소빙기(Little Ice Age)의 기후 변동이 최절정에 달했던 기간으로 ‘지구적인 위기(Global Crisis)’를 초래했다.

’17세기 위기’의 관점에서 명청교체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구미연구자들에 의해 먼저 시도되었다. 환경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국 학자들도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최근에는 명청교체를 아예 ‘생태위기’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17세기의 소빙기 기후변동이 생태를 악화시켜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농민반란을 촉발하여 명조의 멸망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소빙기는 명조의 멸망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한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소빙기의 생태위기를 강조할 때 주의해야할 부분이 있다. 소빙기의 기후변동은 17세기의 전반보다 후반이 훨씬 극심했다. 명조는 이런 생태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했지만, 청조는 오히려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이루었다. 왕조는 교체되었지만 소빙기는 지속되었다. 명조의 멸망이 소빙기 때문이라면, 청조의 성공도 소빙기를 통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재해에 대한 국가의 대응은 양조兩朝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단서일 것이다.

 


여허(예헤)의 마지막 날

–  이훈 / 사람과글 / 2012년 2월 통권 010호

 

명은 지난 2세기 동안 여진을 산산이 분리시켜 관리함으로써 여진의 통합을 막아왔지만, 이 정책은 작동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이는 명 내부의 말기적 혼란상과 임진왜란 등의 외부적 여파로 인해 여진에 대한 견제가 느슨해진 원인도 있고, 누르하치 세력의 확대와 성장이 너무 급속했기 때문에 견제의 시점을 놓쳐버린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은 누르하치 세력의 성장이 심상치 않음을 일찍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조선이 1595년 (선조 28)에 신충일을 누르하치의 도성인 퍼알라에 파견한 것은, 표면상 누르하치의 건주와 통교하기 위한 사절임을 표방했지만, 사실은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하는 여진 정세의 변화를 감지하고 정탐하려는 목적이었다. 신충일은 귀국 후에 <건주기정도기 >를 작성하여 퍼알라의 제반 상황에 대해 조정에 상세히 보고했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가 벌어진 1619년의 후금은 신충일이 정탐한 1595년의 건주와 완전히 다른 국가였다.

그 사이 20여년간 누르하치는 여진 세계의 대부분을 통합했고, 1603년에는 신충일이 다녀갔던 퍼알라에서 인근의 허투알라로 수도를 이전했다. 새로운 수도에는 병합한 각지 여진의 주민을 대거 이주시켜서 병력을 더욱 확충했다. 단순히 규모만 확대된 것이 아니었다. 과거에 여진인이 수렵할 때 10명 정도로 구성하는 임시 조직인 ‘니루 ’를 상설적인 군사조직이자 행정조직으로 재편한 것도 여진사회의 구조를 뒤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새로운 니루는 과거의 수렵조직 니루와 이름만 같을 뿐 성격과 규모는 완전히 달랐다. 규모는 1니루에 장정 3백명으로 확대되었고, 니루의 수장인 니루어전은 니루의 구성원들의 행정, 납세, 군사 활동 등의 전반을 관리했다. 새로운 니루는 과거의 씨족과 촌락을 대체하는 국가의 기간 군사조직이자 행정조직이었다. 니루 약 25개를 총괄하는 조직인 구사 (旗 )는 국가의 최상급 조직이었고, 구사의 수장인 버일러들은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는 최고위 권력자들이었다. 허투알라로 대거 이주된 여진인은 속속 니루로 조직되었다. 최초에 4개였던 구사에 4개의 구사가 증설되어서 총 8개의 구사, 즉 팔기가 완성된 것은 1615년이었다. 30여년 전에는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병사 수가 고작 수십 명이었으나 이제는 만 단위로 병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사르후 전투가 일어나기 수년 전에, 누르하치의 국가는 인류사에서 보기 드물게 군사조직과 행정조직이 일체화된 완벽한 ‘병영국가 ’를 형성하고 있었다.

 

※ 본문 : 사르후 전투

 


천붕지열의 시대 명말청초의 화북사회

–  정병철 / 전남대학교출판부 / 2008.02.20

 

…… 명조는 융경5년(1571) 몽골 오이라트부의 수장 알탄(俺答)을 순의왕(順義王)에 봉하고 강화(講和)하였다. 이로써 몽골세력은 더 이상 명조를 침공하지 않았다. 한편, 일본은 16세기 후반 100여 년의 전국시대의 혼란을 통일하고 집권적인 무사정권의 단초를 열게 되었다. 이로써 ‘가정 대왜구 嘉靖 大倭寇’의 화禍도 거의 종식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부터 동북아에는 새로운 변화가 태동하였다. 포르투갈을 필두로 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의 해양강국이 동아시아 해역으로 진출하여 활발한 무역활동을 하면서 소위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동아시아 바다에는 이들 서구인 외에도 각종 해상세력이 번성하면서 새로운 기운이 넘쳐나게 되었으니, 왕직(王直) · 정지룡(鄭芝龍) 등 중국 동남해안을 거점으로 활동한 거대 밀무역조직, 일본 서부의 여러 대명(大名, 다이묘) 등이 그들이다.

이러한 16세기 동아시아 해상세계의 급변이라는 시운을 타고 통일정권을 창출해낸 일본은 동아시아의 신흥강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통일일본의 총아 풍신수길은 임진왜란을 도발하여 명조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정면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말 동북아에서 발발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세계의 격동의 산물이며 당시 동북아 국제관계를 반영한 국제전쟁이었다.

……

명의 임진왜란 참전은 화북민華北民에게 인적 · 물적인 부담을 가중시켜 민심의 이반을 낳았고, 그 결과 일어난 사건이 만력27년(1599)의 임청민변臨淸民變이었다. 명말 중국은 도시의 민변, 변방의 소수민족 반란뿐 아니라 유적 · 토적반란 등 각종 민중반란이 만연한 가운데, 숭정년간(1628~1644) 만주족의 수 차례의 화북침공으로 화북지방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한편 이러한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민원民怨만 가중시키는 명조에 대한 이반離叛의 기운이 광범하게 퍼졌다. 그 결과 일어난 이자성 · 장헌충 반란 등 미증유의 민중반란은 17세기 중국사회의 모순의 총집결이자 동북아세계 동요의 신호탄이었다.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은 16~17세기 동북아의 격변과 동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국제전이었다. 중국은 이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전쟁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후의 국제관계는 물론 중국 자체도 큰 영향을 겪게 되었다.

중국의 왜란 참전은 그 기간과 참가규모, 그리고 전비소모 등에서 소위 ‘만력삼대정萬歷三大征’ 중에서 영하寧夏의 보바이 반란, 사천의 양응룡楊應龍 반란 보다 비중이 훨씬 더 컸다.(※)  파견 병력으로 요동군은 물론이요, 산서山西 · 산시陕西의 소위 북병北兵, 강남 · 절강 등지의 남병南兵 · 절병浙兵 등이 대거 징발되었으므로 이들 지역의 인력부담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대부분 모병이었으므로 특정지역에서의 병력 징발을 꼭 그 지역의 인적 · 물적부담으로만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원병파견으로 인한 재정지출 또한 대부분 은량銀兩 행태로 이루어졌으니, 이 또한 특정지역의 부담이라기 보다는 중국 전체의 재정부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만력삼대정’의 전쟁비용에 관해, 영하 보바이의 반란 진압에 100만 냥 이상, 사천 양응룡의 반란 진압에 120만여 냥, 임진 · 정유년의 두 차례의 왜란참전 비용이 590만여 냥이었다는 언급이 있다(趙世卿). 한편 위 세 전쟁의 비용으로 각기 200만 냥, 200만여 냥, 780만여 냥이 소모되었다는 지적도 있다(曺于忭).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1609년 광해군일기[중초본] 23권, 광해 1년 12월 19일 병인 6번째기사

함경 감사 장만(張晩)이 치계하기를,

“북병사 이수일(李守一)의 치보를 접수하여 보니 노추(奴酋)의 병마가 지금 수하(水下)에 있으면서 여러 부락을 공략한다고 하는데, 이 적이 이문암(利門巖)을 얻은 뒤부터 동쪽으로 이어진 여러 부락에 위세를 부렸습니다. 지난해에는 번호(藩胡)를 모두 철수시키고 정병 5, 6천 명을 얻어 심복의 군대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또 한 부대의 군사로 멀리 수천 리 밖으로 침입해 들어갔지만 홀온(忽溫) 등지의 오랑캐들이 감히 그들이 떠나고 없는 틈을 엿보지 못하며, 군사들의 날카로운 기세가 지향하는 곳을 감히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서북(西北) 사이의 지역에서 뜻을 얻었음은 대체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앞서는 먼 곳과는 교통하고 가까운 곳은 공격하는 술책을 행하면서 단지 번호만 철수시키고 바닷가의 여러 부락에는 온건한 사신을 보내어 잠시 기미책을 썼다가, 지금에 와서는 군사의 위세로 겁을 주며 또 노략질해 가는데 군사를 얻은 숫자가 틀림없이 번호와 같거나 또는 더 많을 것입니다. 그들의 소굴에서부터 동쪽으로 북해(北海)의 끝까지 모두 그들의 소유가 되었으니 우리 나라 서북 방면의 근심이 이로부터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이 적이 남목(南牧)에 뜻을 둔 지 오래이니, 그들은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킬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훈련되지 않은 군사와 원망하는 백성, 주먹만한 돌로 쌓은 성(城)과 제대로 맞지 않고 어긋나는 기계(器械)로는 아마도 이 적을 당해낼 수 없을 듯합니다. 앞서 방비하는 계책을 조정에서 미리 헤아리고 지휘해야 할 일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서장을 살피건대 북도의 근심거리를 소홀히 할 수 없다. 도 체찰사와 함께 의논하여 무릇 방수(防守)에 관계되는 계책을 십분 강구하여 서둘러 하유(下諭)할 〈일로 비변사에 말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장계의 내용에 깊은 근심과 멀리 염려하는 단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노적(老賊)이 10년 가까이 여러 부락을 아울러 삼켜 모두 복속하게 하였는데, 지금 서로 대항하여 버티면서 감히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은 뒤에 있는 여허(如許), 곁에 있는 해동(海東)·해서(海西) 등 세 곳의 큰 부락입니다. 만약 이 세 부락이 함께 복속된다면 반드시 앞으로는 음흉한 마음을 그만두지 않고 또 우리 나라를 도모하려고 힘쓰면서, 먼저 꼬투리를 잡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깨물어 뜯으면서 일을 일으킬 바탕으로 삼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북쪽 지방의 번호를 철수했다는 말은 단지 하나의 조그마한 근심거리일 뿐입니다. 만포 첨사 김응서(金應瑞)가 【응서가 뒤에 경서(景瑞)로 이름을 고쳤다. 〈기미년 심하(深河)의 전투 때에 부원수로 노적(奴賊)에게 투항하였다.〉 】 보고한 바에 의하면, 우리 나라와 명나라가 장차 합세하여 자기들을 공격하려 한다고 말한다 하니, 그들의 음흉한 모략은 헤아리기 어려우며 처음 볼 때부터 극도로 우려할 만하였습니다. 우리 측에 있는 방비는 성을 쌓거나 못을 파며 군사를 훈련시키거나 군량을 저축하여 전술을 갈고 닦으면서 그들을 기다리는 데 불과한 상황인데, 그러한 우리의 형세마저도 한결같이 약화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금년에는 서도에 크게 흉년이 들었으며 거기에다 앞으로 조사(詔使)의 행차가 있을 예정입니다. 이 적의 발동에 있어서 그 시기와 장소를 미리 헤아리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만약 빨리 발동하여 북쪽에서 출현한다면 그래도 버틸 수 있겠지만, 늦게 발동하여 서쪽으로 출현한다면 우려가 바야흐로 커지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의 방비는 서쪽을 중하게 여겨야 하며 북도가 그 다음인데, 서변(西邊)의 방어는 북방과 비교하여 더욱 허술하니, 조정에서는 이 뜻을 알고 미리 도모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본도에서 청구하는 화약(火藥)·화기(火器)·궁현(弓弦)·어교(魚膠) 등의 물품을 해사(該司)로 하여금 넉넉한 숫자를 들여 보내게 하고, 초봄에 보내주는 방어군을 재촉하여 빨리 들여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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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가 여진 세계를 통일할 의지를 실천에 옮기자,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해서여진의 여허 부족은 명과 몽골 세력 등을 끌어들여 이를 저지하려 했다. 이들 외부 세력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누르하치는, 1618년에 이른바 일곱 가지 원한을 내걸고 명에 선전포고한 뒤 무순(푸순, Fushun, 撫順)을 공격해 점령했다. 이로써 명과의 전면전은 불가피하였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사이 유라시아 동부 지역 정세는 일본과 여진이라는 두 신진 세력이 국내 통일과 대외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을 수행하고, 기존 패권 세력인 조선 · 명 · 몽골 등이 현행 질서를 지키기 위해 이를 저지한 것으로 보인다.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패권을 두고 누르하치 세력과 반누르하치 연합군이 충돌한 것이 바로 1619년의 사르후 전투(싸얼후 전투)이다. 총지휘자 요동경략遼東經略 양호楊鎬는 심양에 지휘부를 두고 검문, 산서, 산동 등지에서 모집한 명나라군과 원수 강홍립姜弘立, 부원수 김경서金景瑞가 통솔하는 조선 원군을 심양, 개원, 철령, 청하, 관전 등 네 개로 나누어 후금의 대본영인 허투알라(興京, 싱징, 赫圖阿砬, Hetuala)로 공격했다. 그리고 병충秉忠, 장승기張承基를 요양遼陽에, 이광영李光榮을 광녕廣寧에 주둔시켜 후방 안전은 물론 협동 작전할 수 있도록 하고, 군수품은 관둔도사管屯都司 왕소훈王紹勛이 책임지도록 했다. 병력은 위키백과 기준으로 명나라 연합군이 10만여명(조선군 1만5000명 ?), 후금이 6만여명이었다.

 

명청교체의 결정적 전투인 사르후(薩爾滸, Sarhu) 전투의 전 과정은 다음과 같이 각개 전투별로 나눌 수 있다.

1. 사르후, 길림애(吉林崖, 자이피안) 전투 : 두송의 서로군

2. 상간하다(상간애, 尚間崖) 전투 : 마림의 북로군

3. 아부달리阿布達裡, 심하 전투深河戰役 : 유정의 동로군과 조선군. 심하 전투를 부차富察 전투라고도 한다.

 

서광계, 황인우黄仁宇 등 사르후전투를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명군이 후금군을 이기는 것은 애초부터 거의 불가능했다. 우선 병력이 매우 적었다. 명군 지휘부는 애초 47만 명을 동원한다고 허풍을 쳤지만 조선과 예허의 지원병을 합쳐도 10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 병력의 대부분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명군의 무기와 장비도 열악했다. 강홍립의 보고에 따르면 유정의 부대는 대포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 화기수들을 들여보내라 닦달할 정도였다. 지휘관들끼리 사이도 좋지 않았고 작전도 엉망이었다. 명군은 병력을 넷으로 나눠 1619년 3월 1일 네 방향에서 일제히 허투아라를 향해 진격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좌익북로군을 이끌던 총병 두송杜松이 약속을 어기고 하루 먼저 출발했다가 싸얼후 산에서 후금군 복병의 역습에 걸려 전멸당한다. 이후 명군의 나머지 병력도 모두 후금군에게 각개격파되고 말았으니, 그중 하나가 심하전투였다. 전공을 탐해 약속을 어긴 두송도 문제였지만,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집중시켜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병력을 넷으로 분산시킨 것이 근본적인 실책이었다. 총사령관인 경략 양호가 네 명의 현장 지휘관들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책임도 컸다.

 

 

사르후 전투의 결과로 명나라는 국력을 크게 상실했으며, 전투에서 주요 전장이었던 자이판과 사르후 지역이 누르하치가 향후 요동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중요한 전초기지로 기능하였다. 2년 후에 누르하치는 8기군을 거느리고 심양과 요양(遼陽)을 점령했다. 1625년 3월, 누르하치는 후금의 도성을 심양으로 옮기고 심양을 ‘성경(盛京)’으로 고쳤다. 이때부터 후금은 명나라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당시의 세계사 연표는 :

* yellow의 세계사 연표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619

 http://yellow.kr/mhistory4.jsp

 

 

– 사르후 전투의 전개과정

 

조선은 15,000여명을 파견해 인명 피해가 7000~8000명에 이르렀다. 광해군의 조선 조정이 명과 후금의 충돌에서 보여준 태도에 대하여는 ‘균형외교'(한명기)라는 긍정적 평가와 ‘기회주의'(오항녕)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중국 (외교관의 눈으로 보다)

–  백범흠 / 늘품플러스 / 2010.04.19

 

누르하치의 세력이 통제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커지게 되자 명나라는 누르하치와의 교역을 정지하는 한편, 해서여진 예헤부를 지원하여 누르하치에 맞서게 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압력에 맞서 독립의 자세를 취해 나갔다. 그는 자기 가족을 포함한 만주족에 대한 명나라의 탄압사례를 일일이 열거한 <칠대한七大恨>을 발표하여, 명나라의 탄압에 무력으로 맞설 것임을 공언했다. 그는 새로 통합한 해서여진 하다부의 땅을 집중 개간하는 등 자립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누르하치는 1616년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하고, 수도를 길림성 흥경興京에 두는 한편, 푸순撫順을 공격하여 명나라군 유격(대령) 이영방의 항복을 받아 내었다. 그리고 추격해 온 광녕총병廣寧總兵 장승음의 1만 대군을 대파하였다.

 

누르하치의 급성장에 전율을 느낀 명나라는 1619년 병부시랑 양호楊鎬를 요동 경략, 즉 요동방면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양호는 요하 동쪽의 심하변瀋河邊에 위치한 심양瀋陽에 주재하면서 누르하치군에 대처해 나갔다. 명나라 조정의 명령에 따라 양호는 12만에 달하는 명나라-해서여진 예헤부-조선 등 3개국 연합군을 4로路로 나누어 누르하치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명나라 조정은 이여송의 동생 이여백李如栢을 부사령관격인 요동 총병에 임명하는 한편, 두송杜松과 왕선王宣, 마림馬林, 유정劉綎으로 하여금 각각 1로를 담당하게 했다. 양호와 유정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하여 일본군과도 싸워 본 경험이 있는 인물들이다. 예헤부가 1만 5천의 병력을 파견하였으며, 조선 광해군이 보낸 1만의 병력도 명나라를 지원했다.

 

 

4로의 장군들 가운데 누르하치를 경시한 두송은 무공武功을 독차지하기 위해 총사령관 양호가 내린 명령을 어기고 약속한 날짜보다 하루 먼저 혼하를 건넜다. 누르하치는 아들 홍타이지와 함께 대군을 휘몰아 심하瀋河 하안河岸의 사르허에서 시커먼 흙비를 정면으로 마주한 두송의 군단을 대파했다. 두송이 거느린 명나라군 3만은 전멸 당했다. 사르허 전투는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르허의 패전 소식을 접한 양호는 이를 이여백과 나머지 3로군 장수들에게 일제히 통지했다. 이는 명나라군의 사기만 떨어뜨렸다. 명나라군은 공포에 떨었다. 마림은 도주하고, 유정은 전사했으며, 이여백은 휘하의 병력이 함몰된 데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총사령관 양호는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남원과 울산 전투에서 대패하는 등 그다지 능력이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참형을 당했다. 만주군은 명나라군을 차례차례로 분산, 고립시킨 후 각개 격파했다. 명나라군은 군율 이완에다가 지나치게 분산 배치되어 있어 만주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유정 휘하의 조선군은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만주군에 투항하였다. 누르하치는 승세를 타고 예헤부도 평정하였다.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  진순신 / 전선영 역 / 살림 / 2011.07.29

 

무순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명나라의 조정도 경악하여 누르하치 토벌을 위해 동원령을 내렸다.

병부시랑인 양호(楊鎬)가 요동 경략(經略)에 임명되어, 사로총지휘(四路總指揮)로 심양(봉천)에 주둔하게 되었다. 명군은 사로(四路)로 나뉘어 누르하치를 공격했다. 사로의 사령관으로 동원된 총병(사단장)과 총병 경험자는 6명이었다.

 

이성량의 아들인 이여백(李如栢)은 퇴역해 있었는데, 이때 특별히 기용되어 요동 총병으로 임명되었다. 원래부터 요동을 잘 알고 있는 무장의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이니 적임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선에서 고니시, 고바야가와와 싸웠던 이여송과는 친형제였다. 그러나 이 일가는 아버지 이성량을 비롯하여 고위 군직에 올랐지만, 야전 사령관으로서 유능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이때의 기용도 실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산해관 총병인 두송(杜松), 보정(保定) 총병인 왕선(王宣), 개원(開原) 총병인 마림(馬林), 요양(遼陽) 총병인 유정(劉綎) 등 사령관들의 면면은 참으로 쟁쟁했다. 유정은 남로(南路)의 사령관으로 그는 조선의 지원군 1만 명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때 명에서 이여송 등의 지원군을 보냈으니, 이번에는 그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그 밖에도 유격인 최일기(崔一琦)가 다른 조선군을 인솔하여 병력을 합치기로 되어 있었다. 한편 북로군인 마림의 휘하에는 해서여진 예헤부의 병사 1만 5천이 포함되어 있었다.

명군은 조선, 예헤부 등의 병사들을 산하에 둔 혼성부대로 그 수는 47만이라 호(號)했다. 호라는 것은, 보통 실제 숫자의 두 배가량이지만, 이때의 명군은 더 적어서 기껏해야 10만 정도였다고 한다. 양호가 누르하치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그 속에서 47만이라 호했던 것이다.

명군은 3월 1일에 각 노(路)의 군을 집결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산해관 총병인 두송이 남보다 먼저 공을 세우려고 예정된 시기보다 일찍 혼하를 건넜다. 두송은 전쟁이란 용맹함만으로 승부가 결정되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단순한 군인에 지나지 않았다. 평소 자신의 몸에 있는 수많은 칼자국을 자랑스럽게 여겨, 무슨 일만 있으면 알몸이 되어 보이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자신의 공적을 위해서라면 부하들의 고생이나 희생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용맹하기는 했지만 사령관으로서는 부적격한 사람이었다.

 

혼하는 물살이 세기 때문에 뗏목이나 배로는 건널 수가 없다. 말을 타고 건너야 하는데, 이 도하 때 이미 많은 장병을 잃었다. 강을 건넌 후, 두송은 2만의 병사를 사르허(薩爾滸)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1만의 병사를 이끌고 계번성(界藩城)으로 향했다. 명군은 정찰을 통해서 누르하치가 계번에 성을 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만 5천 명의 인부가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호위하는 장병은 겨우 400명에 불과했다. 본대는 길림애(吉林崖)라는 곳에 있었다.

공사 중인 계번성을 노리겠다는 두송의 생각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명군의 움직임도 누르하치 쪽에게 정찰을 당하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세운 작전은 아들 홍타이지에게 2기(旗)의 병사를 주어 계번성을 구원케 하는 한편, 자신이 6기(旗) 4만 5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사르허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사르허에 있는 명나라의 본영은 대기하는 부대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방심하고 있었다.

이때도 저녁이 되자 모래바람이 불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 찾아왔다.

이와 같은 커다란 모래바람을 ‘매(霾)’라고 한다.

 

갑자기 크게 매(霾)가 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라고 사서에는 묘사했다.

명군은 너무나도 어두워서 햇불을 밝히고 싸웠다. 누르하치의 6기는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을 공격하는 것이니,

 

쏘아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와 같이 유효한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서 명군은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을 향해 발포했기 때문에 거의 맞지 않았다.

 

총포는 모두 버드나무에 맞았다.

이런 상태였기에 명군의 대패로 끝나고 말았다.

계번성으로 향했던 두송의 1만도, 복병을 만나 고전을 하던 중에 사르허에서 패전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어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게다가 사르허에서 승리한 6기가 가세했으니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총병인 두송은 화살에 맞아 전사했고, 명군은 전멸했다.

 

횡시(橫屍)가 산야를 덮었으며 피는 흘러 도랑을 이루었고, 기치(旗幟), 기계(器械) 그리고 죽은 사종들이 혼하를 덮으며 흘러 마치 물이 없는 듯했다.

사서는 이 싸움의 참상을 이렇게 적었다.

패전 소식을 접한 양호는 각 군에 격문을 띄웠지만, 그것은 패전에 다시 패전을 더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마림은 도주를 했으며 유정은 전사했다. 이여백 군은 궤멸했고, 그는 일단 도망을 쳤지만 어차피 책임을 추궁당할 것이라고 체념했는지 자살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르허 전투다. 명나라가 쇠망하고 청나라가 흥기하여 그를 대신하게 된 단서가 이 전투에 있었다고 말한다.

……

 

신흥 누르하치에게 있어서 사르허의 전투는 실로 커다란 수확을 가져다 주었다. 이 세력의 가장 커다란 고민이 인구 부족에 있었다는 사실은 몇 번이고 이야기했는데, 이 전승으로 말미암아, 예를 들자면 유정 휘하에 있던 조선군이 전원 투항해 왔다. 그만큼 인구가 늘어난 셈이다.

또한 이 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누르하치는 개원과 철령을 탈취했다. 영토를 넓힘과 동시에 그 지역의 주민들까지 손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동족 가운데서 마지막까지 대적했던 예헤부를 이 기회에 평정할 수 있었다.

 

사르허의 전투는 명의 만력 47년(1619), 금의 천명 4년 3월의 일이었는데, 예헤부가 평정된 것은 같은 해 8월의 일이었다.

명에서는 패전의 최고 책임자인 요동경략 양호가 체포, 투옥되고 그 후임으로 웅정필(熊廷弼)이 기용되었다.

 


천추흥망 – 중화의 황혼 청나라

–  쉬홍씽 / 정대웅 역 / 따뜻한손 / 2010.12.20

 

칠대한을 명분 삼아 출정 결의를 다진 후금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명 왕조의 무순, 동주東州, 마근단馬根單 3성을 함락시키고, 보堡, 대臺, 장莊과 같은 작은 성 500여 곳을 쳐부쉈다. 점령지에서는 제멋대로 방화 살인 약탈을 감행한 뒤 퇴각했다. 이를 기점으로 후금의 군대는 빈번히 출격했고 잇따라 아골관鴉關, 청하성淸河城 등지를 점령했다.

후금은 이로써 명 왕조의 공개적인 적대세력이 되었다. 후금의 궐기는 대명 왕조를 뒤흔들었으며 누르하치에 대한 고답적 정책이 결국 명 왕조 변방의 위협세력으로 성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명 왕조의 사료 『』을 보면 누르하치의 침략에 따른 긴급사태를 맞아 1618년 4월부터 1619년 2월까지 10개월 동안 조정에서 상의하고 대책을 세운 기록만 100여 차례에 달한다. 평균 3일에 한 번 꼴로 명 정부가 얼마나 이 사건에 충격을 받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신종은 긴급히 양호를 총사령관 격인 요동경략으로 삼아 후금토벌을 명하고, 동시에 전국 각지에서 병사와 장군을 모아 접경지역으로 이동시킨 후 병사들의 군량과 급료 조달에 나섰다. 조선에서 파견한 원군을 포함하여 황급히 8만여 병사를 규합했는데 대외적으로는 47만 대군이라고 알려졌다.

……

이 격돌은 사르후 지역에서 가장 격렬하게 벌어졌기에 역사적으로 ‘사르후 전투’라 칭한다. 이 전투로 명나라 군대는 반수 이상의 군사를 잃었으나 후금은 겨우 2천여 병사만을 잃었다.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가 대패하고 후금 군대가 전승한 까닭은 누르하치의 정확한 판단력, 타당한 지휘력과 후금 군대의 승리를 위한 힘의 비축, 상하단결, 사기충천, 용감무쌍한 전투력과 같은 요인 이외에도 명 왕조의 부패, 군사 기강해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명 군대의 직접적인 패인은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적정을 살피지 않고 황급히 출정한 점이다. 명 정부가 후금의 정황을 명확히 알고 대대적으로 토벌하기로 결정한 뒤 후금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후금의 지휘부는 어떠한지 알아야 할 필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명나라 군사의 병력과 지휘부에 대해 매우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을 차례로 집중하는 전략으로 적을 각개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둘째, 임시 징집과 군비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명 정부는 각지에서 군대를 소집하고, 각지에서 노약하고 병든 사병을 많이 모아 임시 변통으로 파병했다. 그리고 요동에 파견된 고위 장령들 가운데에는 적에게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명의 신종 주익균(朱翊均, 만력황제)은 비록 큰 소리로 “대대적으로 토벌하라.”고 명령했으나 그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탐욕스럽고 아둔한 군주였기에 이런 대규모 전쟁을 앞두고 고작 국고에서 필요한 전비의 10분의 1만을 내어놓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턱없이 부족한 군비는 본래부터 낮았던 군대의 사기를 더욱 저하시켰다.

셋째, 장수들이 무능하고 지휘체계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번 전쟁을 지휘한 명군대의 주장 양호는 패전을 밥 먹듯 하는 무능한 장군이었다. 더욱이 늙고 나약한 데다가 고집불통이어서 남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았다. 또한 수하 고위 장령을 지휘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한쪽 편만을 들어 불화를 야기하는 장수였으니, 이런 주장이 어찌 승리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두송과 같은 장수는 맹목적이면서 우쭐대길 좋아하는 인물이어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우고자 망령되게 말했다. “나는 누르하치를 생포하여 다른 사람과 전공을 나눠 갖지 아니할 것이다.” 그는 약정한 시간을 어기고 앞당겨 출정했다가 적진 깊이 잠입한 나머지 고립되어 후금 군사에게 포위 섬멸을 당했으며, 결과적으로 명 군대 전체 전선의 붕괴를 초래했다.

사르후 대첩은 명 왕조 때 여진 귀족세력이 자발적으로 출격한 유일한 전투였다. 이 전투는 쌍방의 역량 비교에 있어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명 왕조는 능동적 세력에서 피동적 세력으로 바뀌어 이로부터 줄곧 수세에 몰리며 얻어맞는 처지가 되었다. 누르하치의 후금 정권은 이 전투를 통해 요동분쟁의 주도권을 획득했고, 머지않아 요서遼西와 심양의 많은 지역을 점령한다. 후금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세력 확장에 따라 신속하게 확대 발전했다. 더욱이 군사력에 있어서는 이미 명 왕조보다 우위였고, 후금의 정치기구 역시 하루가 다르게 완비됐다. 이러한 모든 환경은 누르하치의 구미를 더욱 당기게 했고, 중원을 병탄하겠다는 야심 역시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1621년 누르하치는 요양遼陽으로 천도했다. 1625년 누르하치는 또 권위를 앞세워 다수의 의견을 물리치고 심양으로 천도했다. 이로부터 심양은 후금의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후금은 이와 같은 군사 경제상의 장점을 갖춘 심양을 몽골, 조선과 중원의 드넓은 지역을 공격하는 전초기지로 삼았다.

 


사르후 전투

–  이훈 / 사람과글 / 2012년 2월 통권 10호

 

사르후 전투의 전 과정은 각개 전투별로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사르후, 기린산 전투

3월 1일 두송의 서로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두송은 혼하를 건너 사르후를 점령하고 1만여 명의 병력을 배치한 후,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후금군을 추격하여 다시 혼하를 건너 자이피얀을 공격했다. 자이피얀의 후금 부대는 후방의 기린 산으로 후퇴했고, 두송은 기린 산을 공격했다. 누르하치가 허투알라의 주력군을 이끌고 사르후와 기린 산이 보이는 구러에 도착한 것은 그 날 저녁 무렵이었다. 누르하치보다 먼저 도착한 대버일러 다이샨과 버일러들은 기린 산에 고립된 후금군을 구원하기 위해 기병 1천 명을 파견한 상태였다. 누르하치는 야음을 이용하여 사르후를 공격했다. 8기 가운데 사르후 공격에 6기가 동원되었고, 나머지 2기는 자이피얀의 명군을 감시했다. 후금군의 야습을 받은 사르후의 명군은 궤멸되었다. 후금군은 곧바로 사르후를 공격했던 6기와 자이피얀의 감시를 맡았던 2기, 기린 산의 부대로 세 방향에서 두송의 부대를 공격했다. 자이피얀의 명군은 궤멸되었고 두송 등의 장수들도 전사했다. 허투알라, 사르후, 자이피얀으로 이어지는 작전지역을 단 하루 만에 이동하며 공격을 전개한 후금의 기동력과 신속한 정보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2. 샹기얀 하다, 피여푼산 전투

두송의 군이 궤멸된 무렵, 마림의 북로군은 샹기얀 하다에 도착해 있었다. 2일에 서로군의 궤멸 소식을 들은 마림은 상기얀 하다에 강력한 포진을 구축했고, 潘宗顔이 지휘하는 북로군의 제2부대는 가까운 피여푼 산에 진영을 구축했다. 후금의 다이샨은 300명을 이끌고 출발하여 마림 군의 강력한 진영을 보고 누르하치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누르하치는 1천명의 병사로 와훈 오모에 주둔하던 명 서로군의 전차부대 2천을 궤멸시키고, 즉시 상기얀 하다로 달려왔다. 양군이 격돌했고 전투는 혼전에 빠졌으나, 결국 속속 도착한 후금의 부대들이 즉시 참전하면서 명군은 붕괴되었다. 마림 군은 패주하면서 추격하는 후금군에게 학살당했다. 피여푼에 주둔한 반종안의 부대는 참전의 시기를 놓쳤고, 마림 군을 붕괴시킨 누르하치 군이 예봉을 돌리자 바로 섬멸 당했다. 여허 군은 개원 남쪽의 中固城까지 내려온 상태였지만, 이 패전 소식을 듣고 철수하고 말았다.

 

3. 압달리 언덕, 심하 전투

누르하치는 명의 서로군과 북로군을 궤멸시킨 후, 전군을 허투알라(흥경)로 철수시켜 남로군의 북상에 대비했다. 남로군은 유정의 본대가 앞서 진군하고, 康應乾의 부대와 조선군이 뒤따랐다. 유정의 부대는 2일에 동고에서 후금의 니루어전 토보오가 이끄는 500명과 교전하여 50명을 죽이고 진격해나갔다. 후금의 다르한 히야가 이끄는 선발대는 토보오의 잔여병을 흡수한 뒤, 와르카시 숲에 매복하고 유정의 부대가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유정의 부대는 10시경 다이샨이 이끄는 후금의 주력군과 만났고, 조금 후퇴하여 압달리 언덕에 포진했다. 이때부터 후금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다이샨과 홍타이지가 이끄는 두 주력군이 압달리 언덕을 양면 공격했고, 후방에서는 다르한 히야가 습격했다.

명군은 삼면의 공격을 맞아 전멸했고, 유정도 전사했다. 남로군의 본대를 전멸시킨 후금군은 푸차 들판으로 진격하여 남로군의 후위대인 강응건과 조선군을 공격했다. 강응건은 도주하고 조선군은 전투 끝에 투항했다.

 

※ 본문 : 만주족 이야기 – 사르후 전투

 


17세기 – 대동의 길

–  한명기,문중양 등 / 민음사 / 2014.06.27

 

…… 급기야 1618년 누르하치는 이른바 일곱 가지 원한을 내걸고 명에 선전포고한 뒤 무순을 공격해 점령했다. 무순의 성주 이영방李永芳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않고 후금군에 투항했다. 무순은 본래 여진족이 명 상인들과 교역을 벌이던 요충지였다. 그처럼 중요한 지역을 공격했다는 것은 누르하치가 작심하고 명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선 것을 의미했다.

 

무순이 함락되고 이영방이 투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명 내부는 들끓었다. 신료들은 누르하치를 제압하고 요동을 방어하기 위한 갖가지 대책을 황제에게 상주했다. 명은 누르하치의 근거지인 허투아라를 공격하기 위해 원정군 동원에 착수하는 한편, 해서여진의 예허부와 조선에도 병력을 동원해 자신들의 원정에 동참하라고 요구했다. 명은 조선의 파병을 요구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자신들이 “망해 가던 조선을 다시 살려주었다.”라는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1618년 윤 4월, 명의 병부시랑 왕가수汪可受가 조선에 보내온 격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건주의 소추(小醜, 보잘것없는 오랑캐)가 바닷가 연안의 좁은 땅을 근거지로 삼아 보잘것없는 여러 추장을 선동해 대대로 입은 국은國恩을 잊고 감히 쥐새끼처럼 엿보는 일을 은밀히 도모해 왔습니다. …… 이에 황상皇上께서 크게 노하시어 기필코 섬멸할 계책을 정해 사방의 정예병을 동원해 6월에 작전을 시작하려 하시는데 군량이 산처럼 쌓이고 군대의 사기가 우레와 같으니 저 오랑캐의 운명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나라를 세운 250여 년 동안 조선은 줄곧 보호를 받아왔습니다. 왕년에 조선이 왜노倭奴의 변란을 겪자마자 본조에서 즉시 10만 군사를 파견해 몇 년 동안 사력을 다해 왜노를 쓸어 버렸는데, 이는 조선이 대대로 충성을 바쳐 온 만큼 왕에게 계속 기업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수만 병력을 일으켜 노추를 협공하면 반드시 승리를 거둘텐데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왕께서 본조에 보답하는 길이자 나라에 무궁한 복을 안겨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 격문이 도착하는 즉시 왕께서는 신하들과 토의하신 뒤 빨리 군병을 정돈해 대기하다가 기일에 맞춰 나아가 토벌하는 데 실수가 없도록 하십시오.

 

격문에서 드러나듯이 명은 조선을 이용해 누르하치를 제압하려 했다. 전형적인 이이제이책이었다. 명의 급사중 관응진官應震은 조선과 예허에서 병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예 두 나라를 순이順夷라고 지칭했다. ‘고분고분한 오랑캐’라는 뜻이다. 명이 이처럼 여진과는 또 다른 ‘오랑캐’ 조선과 예허에 ‘아쉬운 소리’를 한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 명은 ‘중화’의 위상에 걸맞는 군사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군사력의 바탕이 되는 재정이 휘청거렸기 때문이다. 명은 후금 방어에 들어가는 국방비가 총 세입의 절반 가까이나 되는 상황에서 증세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백성의 고통이 커졌다. 실제로 명은 1618년 4월 무순이 함락된 직후부터 병력 동원에 나섰지만 몇 개월이 지나도 10만 명을 채우지 못했다. 이 같은 처지에서 조선에 대한 원병 요청은 절박한 것이었다.

……

명의 압박과 대다수 신료의 채근 속에서도 파병을 회피하려 한 광해군의 시도는 명군 경략(총사령관) 양호楊鎬에 의해 무산되었다. 정유재란에 참전해 조선의 내부 사정에 밝은 그는 “조선이 재조지은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익한 외교 문서만 왕복시키고 있다.”라고 질타한 뒤 병력을 파견하라고 겁박했다. 1619년 광해군은 결국 1만 50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가 이끄는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넌 뒤 명군 총병 유정劉綎의 휘하에 배속되었다. 유정 등 명군 지휘관들은 조선군이 사세를 관망하면서 전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지나 않을까 몹시 우려했다. 그들 가운데는 심지어 강홍립 등에게 칼을 빼들고 빨리 전진하라고 재촉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명군 지휘부의 채근과 성화에 떠밀린 조선군은 입고 있던 군장을 벗어던지거나 운반하던 군량을 포기한 채 명군을 따라가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

명군 지휘부의 압박에 떠밀려 허투아라를 향해 전진하던 조선군은 1619년 심하深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후금군에게 참패하고 강홍립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투항했다. 일찍이 일본인 학자 다가와 고조田川孝三가 “광해군은 애초부터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려 후금군에게 투항하라고 지시했다.”라고 주장한 이래 ‘조선군의 고의적인 항복’은 정설처럼 알려져 왔다. 하지만 심하전투 당시 조선군의 인명 피해가 7000~8000명에 이르렀다는 『광해군 일기』의 기록을 고려하면 이 주장을 온전히 믿기는 쉽지 않다. 애초부터 항복할 계획이었다면 수천 명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인조반정 이후 심광세를 비롯한 서인들 가운데는 ‘광해군과 그를 추종하는 신하들이 오랑캐에게 출병 기일을 누설하는 바람에 명군이 원정을 망치고 궁극에는 요동 전체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주장을 부연하면 ‘강홍립과 광해군 때문에 명이 망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원정군의 주체가 명군이었다는 사실, 명군의 전력이나 작전 능력이 형편없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하면 이 같은 주장은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중국에서는 심하전투를 포함해 허투아라를 공략하려던 명군이 참패한 일련의 전투를 보통 싸얼후전투라고 부른다. 그런데 서광계, 황인우黄仁宇 등 싸얼후전투를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명군이 후금군을 이기는 것은 애초부터 거의 불가능했다. 우선 병력이 매우 적었다. 명군 지휘부는 애초 47만 명을 동원한다고 허풍을 쳤지만 조선과 예허의 지원병을 합쳐도 10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 병력의 대부분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명군의 무기와 장비도 열악했다. 강홍립의 보고에 따르면 유정의 부대는 대포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 화기수들을 들여보내라 닦달할 정도였다. 지휘관들끼리 사이도 좋지 않았고 작전도 엉망이었다. 명군은 병력을 넷으로 나눠 1619년 3월 1일 네 방향에서 일제히 허투아라를 향해 진격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좌익북로군을 이끌던 총병 두송杜松이 약속을 어기고 하루 먼저 출발했다가 싸얼후 산에서 후금군 복병의 역습에 걸려 전멸당한다. 이후 명군의 나머지 병력도 모두 후금군에게 각개격파되고 말았으니, 그중 하나가 심하전투였다. 전공을 탐해 약속을 어긴 두송도 문제였지만,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집중시켜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병력을 넷으로 분산시킨 것이 근본적인 실책이었다. 총사령관인 경략 양호가 네 명의 현장 지휘관들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책임도 컸다.

이 같은 실상을 염두에 두고 서광계는 명군이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고 단언했고, 황인우는 명군은 그저 후금군이 실수를 저지르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더 나아가 ‘싸얼후 패전은 황제의 태만함, 격렬한 당쟁, 환관의 발호, 재정의 고갈 등 당시 명이 안고 있던 구조적이고 총체적인 문제점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조선군은 결국 이처럼 ‘준비되지 않은’ 명군 지휘부의 강요와 닦달에 떠밀려 군량 보급로도 확보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행군하다가 후금군의 기습을 받아야 했던 셈이다.

싸얼후전투, 나아가 심하전투의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 이후 심광세 등이 패전의 모든 책임을 강홍립과 광해군에게 돌린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변(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 정권을 전복시킨 것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실제로 심하전투 이후 후금의 위세는 더욱 커졌다. 후금은 1621년 요동을 완전히 점령했다. 이제 북경과 가까운 요서까지 후금군의 위협에 노출되자 다급해진 명은 ‘배후 거점’ 조선을 더 확실하게 끌어들이려 했다. 1621년 6월, 요동 경략 웅정필熊廷弼은 삼방포치책三方布置策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내놓았다. 광녕 등지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고, 천진과 산동의 수군을 이용하고, 조선을 시켜 압록강 부근에서 후금을 견제한다는 전략이었다. 수세에 처할수록 조선을 이이제이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명의 욕구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해 명은 감군어사 양지원을 조선에 보내 다시 원병을 파견하라고 요구했다. 광해군은 확답을 피하며 요구를 따르지 않았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  김시덕 / 메디치미디어/ 2015.04.05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패권을 두고 누르하치 세력과 반누르하치 연합군이 충돌한 것이 1619년의 사르후 전투다. 잘 알려져 있듯이, 후금과 명이라는 양대 세력의 충돌에서 중립을 유지하고자 한 광해군은 조선군에 소극적인 대응을 명했다. …… 전투 중에 포로가 된 강홍립은, 조선군이 자발적으로 이 전투에 참전한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갚기 위해 할 수 없이 온 것이라고 변명했다. 누르하치의 일대기인 『만주실록』권5에는 강홍립의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우리 병사들이 이 전쟁에 원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왜자국(倭字國, 일본)이 우리 조선을 공격하여 토지와 성을 모두 약탈했었습니다. 그 환란(患亂)에 대명(大明)의 군사가 우리를 도와 왜자를 물리쳤습니다. 그 보답이라고 우리를 데리러 왔습니다. 당신들이 살려준다 하면 우리는 투항하겠습니다. 우리 병사들이 대명의 군대에 합류하여 간 자들을 당신들이 모두 죽였습니다. 우리의 이 영(營)에는 조선인뿐입니다. 대명의 한 유격(遊擊) 관원과 그를 따라온 병사들뿐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잡아 당신들에게 보내겠습니다.

 

누르하치는 명이나 몽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충돌할 요소가 적은 조선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

자신에 적대한 모든 세력과의 충돌에서 대승을 거둔 누르하치는 이제 랴오둥반도로 세력을 확장코자 했다. 사르후 전투 후에 조선에 유화적인 자세를 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몽골 세력에도 친근한 언사로 접근했다. 그는 당시 몽골에서 가장 강력했던 차하르 몽골의 릭단 칸(Ligdan Khan)에게 1620년에 편지를 보내, “대명과 조선 두 나라는 말이 다를 뿐이지 입은 옷과 머리 모양은 하나같아서 같은 나라처럼 삽니다. 만주와 몽골 우리 두 나라도 말이 다를 뿐이지 입은 옷과 머리 모양은 하나같습니다”라고 몽골을 회유한다(『만주실록』권6). 명과 조선이 언어는 다르지만 문화적으로 하나인 것처럼, 만주와 몽골 역시 언어는 달라도 문화적으로 동일하니 힘을 합치자는 것이었다. 이 밖의 여러 기록에서도 누르하치 등 만주인 집권층은 자신들의 인종적 · 문화적 동질성을 몽골인에게서 추구했으며, 조선은 여진인과는 무관한 존재로 인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힘

–  오항녕 / 사람과글 / 2012년 2월 통권 10호

 

광해군은 처음에는 파병에 반대했다. 명의 요청이 “아직 황제 칙서가 아니”라는 이유였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내내 광해군의 정책을 후원했던 이이첨은 이 사안과 관련해서 광해군과 의견이 달랐다. 광해군은 ‘국내의 형편’을 들어 파병을 미루든지, 아니면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파병할 때도 이런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조선이 억지로 참전한 것이며, 후금과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전하라’고 밀지를 내렸다는 설은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명군 지휘부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노력하라’고 한 점을 보면, 밀지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전쟁에 임하는 광해군의 태도는 밀지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강홍립에게 내린 하유에서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심하 전투 후에 강홍립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강홍립 등이 직명을 써서 장계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배동관령背東關嶺에 도착해 먼저 후금의 역관(胡譯) 하서국河瑞國을 보내어 후금에게 비밀리에 알리기를. ‘비록 명나라에게 재촉을 당해 여기까지 오기는 했으나 항상 진지의 후면에 있어서 접전하지 않을 계획이다.’고 했기 때문에 전투에 패한 후에도 서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만일 화친이 속히 이루어진다면 신들은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강홍립은 명이 압박해 참전했을 뿐이지 싸움은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고, 전투에 패한 뒤에도 잘 지내고 있다고 보고했다. 후금과 화친이 이루어진다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전달했다. 밀지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위의 광해군의 하유, 강홍립의 장계에 이어 후금에서 온 국서國書에서도 이런 논조는 이어진다.

 

너희 조선이 군대를 일으켜 명을 도와 우리를 친 것에 대해, 우리는 너희가 이번에 온 것은 조선 군대가 원하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바로 명나라 사람들에게 압박을 받아, 일본의 침략 때 너희를 구한 은덕을 갚기 위해 왔을 뿐이리라. …… 이 넓은 천하에 없어야 할 나라가 있겠는가. 어찌 큰 나라만 남고 작은 나라는 모두 멸망해야 하겠는가. 조선의 국왕 너는 우리 두 나라가 평소 원한이나 틈이 없었으니 지금 우리 두 나라가 함께 모의해 명에 대해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이미 명나라를 도왔으니 차마 명을 배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너의 대답을 듣고 싶다.

 

위 국서의 앞부분은 강홍립의 장계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이 국서에서는 강홍립의 항복을 근거로 조선 국왕 광해군에게 명의 편을 들 것인지, 후금의 편을 들 것인지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강홍립의 말에 근거해, 광해군의 태도를 최종 확인받으려는 후금의 국서라고 판단된다.

 

광해군은 줄곧 밖으로는 기미책을, 안으로는 자강책을 추구한 것처럼 말을 했지만, 그의 대후금 정책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심하 전투’에서의 ‘실리주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강홍립의 말처럼 그가 항복한 뒤 후금에서 ‘잘 지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강홍립의 항복으로 전사한 조선 군사가 1만여 명 중 9천 명 정도였다. ‘항복’이라는 ‘실리주의’의 결과치고는 너무나 처참하다.

 


여허(예헤)의 마지막 날

–  이훈 / 사람과글 / 2014년 1월 통권 33호

 

아래에서는 『만주실록』(manju i yargiyan kooli)의 기록을 참고하여 여허(예헤)가 멸망하는 날 사진 속의 저곳에서 벌어진 광경을 그릴 것이다. 『만주실록』은 여허가 멸망하는 최후의 순간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물론 청 황실이 멸망한 여허를 애도하거나 추념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황실 조상들의 전승을 기념하는 데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실록』의 기록이 후금과 여허 사이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며 왜곡없이 사실을 전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이 기록만큼 상세히 이 날의 사실을 전하는 기록도 달리 없다.

 

1619년 음력 8월 19일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의 군대는 수도인 허투알라를 출발하여 해서여진의 마지막 남은 나라인 여허를 공격하는 장도에 올랐다. 동아시아 역사의 향배를 바꾸어 놓은 사르후 전투가 발발하고 끝난지 불과 5개월 정도 후였다.

……

 

※ 본문 : 만주족 이야기 – 여허의 마지막 날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1618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28권, 광해 10년 5월 5일 임진 5번째기사

박홍구(朴弘耉)·유희분(柳希奮)·이상의(李尙毅)·이이첨(李爾瞻)·민형남(閔馨男)·이시언(李時言)·조정(趙挺)·유공량(柳公亮)·이경전(李慶全)·이충(李沖)·심돈(沈惇)·김신국(金藎國)·장만(張晩)·최관(崔瓘)·남근(南瑾)·우치적(禹致績)·권반(權盼) 등이 헌의(獻議)하였다.

“세상 일은 뜻밖의 환란을 당하는 것도 있고 정상적인 도리에 입각해야 할 것도 있는데, 뜻밖의 환란을 당하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지라도 정상적인 도리에 따르는 것을 어찌 폐해서야 되겠습니까. 삼가 성상의 분부를 받들건대 뜻밖의 변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계시는 것이 지극하고도 곡진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중국 조정은 우리에게 있어 부모의 나라로서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가 있는데 지금 외부로부터 수모를 당하여 우리에게 징병을 요청해 왔고 보면 우리의 도리를 살펴볼 때 어떻게 달려가 응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병농(兵農)을 구분하지 않아 본래 미리부터 양성해 놓은 군졸도 없는 데다가 거듭 결단이 난 뒤끝에 이제 겨우 상처를 씻고 일어나는 판에 쇠약한 군졸들을 다그쳐 중국 군사를 도와 싸우게 한다면, 정벌하는 데에는 아무 보탬이 없고 우리 나라를 지키는 데에 해만 있을 것이며, 기타 갖가지로 우려할 만한 일이 발생하게 되리라는 것을 신들도 어찌 모르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국적으로 말하면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고 사적인 정리(情理)로 말하더라도 꼭 보답해야 할 의리가 있는 만큼 이쪽으로 보나 저쪽으로 보나 단연코 응원하지 않아서는 안될 입장입니다.

만약 우리 세력이 약하다는 생각만으로 꺼리는 기색을 보였다가 중국 조정에서 대의(大義)에 입각해 책망하여 어찌할 수 없게 된 뒤에야 응원하러 간다면 그 뒤에 져야 할 책임을 면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뒷날 혹시라도 위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장차 무슨 면목으로 중국 조정에 구원을 요청하겠습니까.

따라서 지금의 계책으로는, 급히 서둘러 군병을 뽑아서 미리 단속해 두었다가 작전 일자를 듣는 대로 약속 장소에 집결시켜 아침에 명령하면 저녁에 출동할 수 있는 것처럼 해두고 칙유가 도착하는 날 행군하여 달려가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칙유가 내려오지 않는다면 어찌 자문(咨文)을 보내 왔다는 이유만으로 지레 앞서서 강을 건널 수야 있겠습니까.

그리고 양 경략(楊經略)은 우리 나라의 사정을 익숙히 알고 있는 만큼 경략이 나온 뒤에 혹 주선해주는 일이 없지도 않을 것이니 경략이 기꺼이 허락해 주기만 한다면 그런 다행이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사(王師)가 연합해서 정벌할 것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인데, 만약 경략이 주선해서 정지시켜 주리라는 가능성만 믿고서 미리 대비하고 있지 않다가 만에 하나 칙유가 빨리 내려와 작전 일자가 매우 급박하여 창졸간에 미처 조발(調發)해 보내지 못할 경우, 그때 당할 후회막급의 엄청난 걱정거리들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수어(守禦)할 방략으로는, 우선 군병을 조발해서 강변 일대를 파수하게 하여 빈 틈을 타서 몰려 들어올 걱정에 대비토록 하고, 현재 있는 군량을 한데 모아 군량 조달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한편, 양호(兩湖)의 정예병을 선발해 두었다가 형세를 살펴 진퇴시키며 계속 응원할 계책을 삼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삼가 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1618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27권, 광해 10년 윤4월 26일 갑신 12번째기사

왕이 징병(徵兵)하여 들여보내는 일의 편부(便否)에 대해서 2품(品) 이상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비변사가 명패(名牌)를 내주기를 청한 뒤 회의하여 그 내용을 봉(封)해서 들였다. 【이때 왕이 징병을 요청해 온 일에 응하고 싶지 않아 누차 비국에 분부하여, 요동(遼東)·광령(廣寧)의 각 아문에 자문(咨文)을 보내 저지해 보도록 하였는데, 묘당에서 의견을 고집하며 따르지 않자 조정의 의논을 널리 거두라고 명한 것이었다. 이에 2품 이상이 아뢰면서 목소리를 합쳐 같은 내용으로 청하였으니, 비록 간사한 원흉(元兇)이라 하더라도 대의(大義)를 범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윤휘(尹暉)가 앞장 서서 보내면 안된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황중윤(黃中允)·조찬한(趙纘韓)·이위경(李偉卿)·임연(任兗)의 무리는 왕의 의중을 탐색하여 아첨하려고 속임수로 가득 찬 도리에 어긋나는 말로 공공연히 헌의(獻議)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끝내는 기미년 전역(戰役)에서, 역관(譯官)을 보내 오랑캐와 통하고는 두 원수(元帥)가 투항하게 되는 결과를 빚게끔 하고 말았다. 안으로는 군모(君母)를 감금하고 밖으로는 황명(皇命)을 거부하여 삼강(三綱)이 끊어지고 말았는데 〈이러고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라 하겠다.〉 】

 

 

1618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28권, 광해 10년 5월 5일 임진 5번째기사

박자흥이 의논드렸다.

“징병(徵兵)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본래 묘당에서 훌륭하게 헤아리고 있을 것이니 신이 감히 섣불리 의논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나름대로 살펴보건대, 노추(老酋)가 처음에 용호장(龍虎將)으로 있을 때는 그 세력이 미미했는데 건주(建州)의 왕으로 봉(封)함을 받은 뒤부터는 세력이 점점 커져 동쪽으로 홀온(忽溫)을 병탄하고 북쪽으로 몽고(蒙古)와 혼인관계를 맺는가 하면 서쪽으로 여허(如許)를 위협하는 등 이미 세력이 극도로 팽창되었습니다.

시험삼아 호서(胡書)를 가지고 말해 보건대 처음에는 녹봉(祿俸)과 담비 값을 요구하는 데 불과할 뿐이었으나 지금 와서는 중국 조정을 남조(南朝)라고 하면서 얼굴을 바꾸고 땅을 쟁탈하려고까지 하고 있으며 곧바로 또 조위총(趙位寵) 의 일을 제기하여 우리 나라를 유혹하며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자를 알지 못하는 오랑캐가 위총에 대한 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여튼 남조는 중국을 가리키고 위총은 우리 나라를 말하는데 이미 중국을 범했고 보면 우리 나라의 변경을 침범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노추가 이미 1만 병력을 채웠는데 장창(長槍)과 화기(火器)를 사용하고 있다 합니다. 여기에 또 중국의 기교까지 겸비했으니 만약 불행히도 요광(遼廣)을 지키기 어렵게 된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장차 어떻게 계책을 할 것입니까. 그리고 가령 노추가 서북 지방을 침범해 온다면 중국 조정에 위급함을 고하여 구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지금은 속히 요역(徭役)을 견감(蠲減)하고 정비하는 데 정신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며, 부적합한 수령이나 변장(邊將)은 갈아버리고 미비된 성지(城池)와 기계들을 조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회자(回咨)를 보내면서 ‘우리 나라의 존망은 중국 조정에 달려 있다. 부득이 노추를 토벌하게 된다면 어찌 감히 우리 나라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대기하지 않겠는가. 다만 원래부터 우리 나라의 병력은 너무나도 취약한 데다 야전(野戰)을 더욱 못하는 단점이 있으니, 만에 하나 전쟁 마당에 나서서 먼저 움직이면 천위(天威)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다. 또 우리 나라의 서북 일대는 노추의 소굴과 서로 맞닿아 있는데 국경에 병마를 주둔시켜 놓고 기각의 형세를 펼쳐 보인다면 그 소문을 듣고 오랑캐가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감히 모든 힘을 기울여 천위에 맞서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면 징병을 요구한 일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뒷날 할 말이 또한 있게 될 것입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裁決)하소서.”

 

 

1618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28권, 광해 10년 5월 29일 병진 3번째기사

평안도 절도사 김경서(金景瑞)가 장계하기를,

“만포 첨사(滿浦僉使) 장후완(蔣後琬)이 치보(馳報)하기를 ‘이번 5월 16일에 말을 탄 호인(胡人) 12명이 국경 건너편에 와서 통사(通事)를 부르기에 즉시 통사를 시켜 물어보게 하였더니 갖고 온 문서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가져다가 겉봉을 보건대 「조선 국왕은 뜯어보라.」고 제목을 달았기에 너무나도 한심해서 통사를 시켜 개유(開諭)하기를 「우리 나라는 너희 장수와는 사체가 같지 않다. 예전부터 문서를 서로 통하는 규례(規例)를 보면 곧장 조정에 전달하는 예(禮)가 없으니 받아들이기가 무척 곤란하다.」고 하면서 반복해서 타이르고 전후의 문서를 모두 내주었더니 차호(差胡)가 말하기를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서 편지를 갖고 나왔을 뿐이다. 사체가 그러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구박하며 되돌려 준다는 것이 형세상 어렵기에 우선 호관(胡館)에 머물게 하고 엄한 말로 타이르는 한편 술과 고기를 후하게 대접해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 뒤에 여진 훈도(女眞訓導) 방응두(房應斗)와 향통사(鄕通事) 하세국(河世國) 등을 시켜 오랑캐의 내부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차호가 대답하기를 「우리가 바야흐로 군대를 모아 중국 장수와 싸우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서로들 드나들다 보면 군기(軍機)가 누설되는 폐단이 없지 않겠기에 일체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다. 이번에 군대를 일으키게 된 것은 요동(遼東)에서 우리 장수의 조부(祖父)를 죽였고 또 여허성(如許城) 안에 중국 장수를 보내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지켰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동안 이를 원망하며 수년 간 군사를 훈련시켜 오다가 지난 4월 15일에 우리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무순(撫順) 등 4진(鎭)을 한꺼번에 격멸하였다. 그런 뒤에 한 곳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노획한 우마(牛馬)·포물(布物)·궁전(弓箭) 및 포로로 잡은 중국인을 점검해 보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무순을 지키던 장수는 투항해서 생포되었는데, 우리 장수의 막내딸을 그에게 시집보내 현재 우리 성안에서 같이 살게 하고 있다. 또 5월 그믐이나 6월 초승께 여허에 가서 격파한 뒤에 그대로 요동과 광령(廣寧)으로 향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나 날씨가 무덥고 장맛비가 오는 데다 수목이 울창하기 때문에 현재 확정짓지는 못하고 있다. 포로로 잡힌 중국인 1천여 명은 즉각 머리를 깎고 우리 복장을 갖추게 한 뒤 선봉으로 삼고 있다. 조선은 우리 조정과 신의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만약 요동에서 조선에 청병(請兵)할 경우에는 회령(會寧)·삼수(三水)·만포(滿浦) 등의 곳에 우리 장수가 한 부대의 병마를 보내 공격하도록 할 것이다. 조선은 우리 장수와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으니 삼가 강토나 지키면서 군대를 일으키지 말도록 하라.…….」 하기에, 대답하기를 「중국 조정이 2백 년 동안 쌓아온 국력을 가지고 너희 소추(小酋)를 상대하는 것은 태산으로 계란을 누르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외국을 불러 구조를 청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문답하는 사이에 어투가 매우 거칠었습니다. 그런데 관(關)에 들어올 때 성에 비치된 기계의 허실을 유심히 살피는 듯하였습니다. 호서(胡書) 본문은 호관(胡館)에 놔두고 등서하여 올려보냅니다.’ 하였습니다.

대개 이 적이 중국 조정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우리 나라에 글을 보내 이해 관계를 따지게까지 하고 있으니 더욱 통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가 침략해 올 염려가 중국 조정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변경 역시 어느 때 침략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군사 대비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미 뽑은 황연도(黃延道)의 군병은 숙천(肅川) 등 지역에 내보내 주둔시키고, 본도 군병의 경우는 방어사(防禦使)와 조방장(助防將) 등을 본도 수령으로 겸차(兼差)시킨 뒤 각각 병력을 인솔하고 맡은 지역에 가 주둔케 하면서 조련하며 변방의 사태에 대비하다가 즉각 달려가 구원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와 함께 도내의 물력(物力)이 여유있는 고을 및 강변의 수령도 무반(武班)으로 바꿔 차임한 뒤 군병을 단속하고 있다가 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는 대로 달려가 구원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방비책이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호서(胡書)를 잇달아 두 번이나 위에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보면 필시 뜻밖의 환란이 있게 될 것인데, 호인(胡人)에 대한 방비책으로는 성을 지키며 청야(淸野)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강변 일대를 말하건대 강계(江界)·만포(滿浦)·창성(昌城)·삭주(朔州)·의주(義州) 등 약간의 성이 있을 뿐이고 그 나머지는 성이라고 해야 한 길 남짓한데 불과하고 해자(垓字)라고 해야 몇 자를 넘지 않으니 결코 들어가서 수비하기가 어렵습니다. 내지(內地)의 용강(龍岡)·안주(安州)·평양(平壤)의 성들은 모두 지킬 만한 곳입니다만 이미 오래 전부터 폐기된 상태에 있어 창졸간에 수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영변(寧邊)의 한 성만은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사면의 산이 높아 사수(死守)할 만한 곳인 데도 오래도록 수리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데, 수선해 쌓자면 적이 이르기 전에 백성이 먼저 농사를 망치고 말 것입니다. 군병을 뽑아 내보내 주둔시키는 일과 성들을 수축하는 일 등에 대해 묘당을 시켜 비변사에 계하해서 속히 지휘하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이번의 호서 및 만포에서 문답한 이야기는 흉참하기 그지없습니다. 심지어는 7종(宗)이 고뇌하며 한스럽게 여겨 중국 조정과 원수를 맺었다고 하면서 끝에 가서는 하늘이 말없이 도와주시어 뜻을 이루도록 해 주었다고 하는 등 한편으로는 뜻을 얻은 것을 과시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변방을 겁주고 있습니다. 또 이번에 온 호인의 행동이 거친 것 또한 전일에 비할 바가 아닌 것으로서 침범당할 근심이 오늘날 박두했으니 본도의 일을 속히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황연도의 군병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이미 부대별로 들어가 방어하도록 분부하셨는데, 주둔할 곳에 대해서는 순찰사와 자세히 의논하여 진퇴해야 하겠습니다. 방어사와 조방장을 수령으로 겸차(兼差)하는 일과 도내의 수령을 무반으로 바꿔 임명하는 일은 조정에서 알아서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안주성의 수비에 대한 일은 본사에서 ‘하유하시어 제때에 수리를 해서 꼭 지킬 수 있도록 하라.’고 청한 결과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곽산(郭山)의 성은 안주와 멀지 않아 성원(聲援)할 수 있고 형세가 가장 좋으니 먼저 수축해야 할 것입니다. 또 평양과 영변 등 지역은 백성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예전부터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의논이 한두 번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도의 근본이 되는 지역을 또한 헛되이 버려둘 수는 없으니 도내의 물력을 참작해서 혹시라도 세월만 보내며 고식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추진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개 흉봉(兇鋒)이 일단 중국 조정으로 돌입한만큼 다음에는 우리 나라로 군대를 돌릴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이 점을 십분 유념해 정비해 둠으로써 뒷날 적기(賊騎)로 하여금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감사에게 아울러 행이(行移)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1618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31권, 광해 10년 8월 5일 신유 4번째기사

의주 부윤이, 노적이 청하보(淸河堡)를 함락시켰다고 치계하였다.

 

 

1619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36권, 광해 11년 1월 9일 계사 1번째기사

비변사에 전교하였다.

“도원수 이하가 적의 소굴을 정벌하러 들어가고 난 뒤에는 순변사만으로 방어해야 하므로 군대를 거느리는 데에 허술한 점이 많을 것이다. 방비에 관계된 제반사를 다시 요리하여 지시하고, 함경 남북도를 방비하는 계책도 착실히 계획하여 급히 지시하라.”

 

 

1619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38권, 광해 11년 3월 2일 을유 2번째기사

원수의 군대가 심하(深河) 지방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치계하였다.

“신은 도독을 따라 중영(中營)에, 김경서(金敬瑞)는 우영(右營)에 있으면서 대열을 지은 채로 30리 가량 행군하여 심하 방면에 도착했는데 오랑캐의 목책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적의 기병 3백여 명이 와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 유격(喬遊擊)과 유길룡(劉吉龍) 등이 일시에 진격하자 적은 패하여 달아났는데, 중국 군대가 추격하여 매우 많은 적병을 죽였습니다. 패한 적의 기병 1백여 명이 궁지에 몰려 산으로 올라가자 홍립이 독부(督府)의 분부를 받들어 중영의 장수 문희성(文希聖)으로 하여금 진격하게 하였고, 경서도 우영의 정예병을 이끌고 추격하였습니다. 그런데 희성이 화살에 맞아 손을 다치고 군사들도 다쳤으므로 신이 중영의 안여눌(安汝訥)과 수하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산위로 전진하고 희성의 군사들은 영으로 내려가서 쉬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군관 노의남(盧毅男), 가량장(架梁將) 김흡(金洽), 별대장(別隊將) 한응룡(韓應龍) 등으로 하여금 화병(火兵)을 거느리고 육박전을 하게 하였는데, 오랑캐가 화살을 빗발같이 쏘아댔으므로 싸우다가 후퇴하고 싸우다가는 후퇴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김흡이 용감하게 돌입하자 적은 퇴각하여 깎아지른 벼랑에 숨어서 나와서 쏘다가 다시 숨곤 하였는데 절벽이 깎아지른 듯하여 발을 디딜 수 없어서 공격해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나무에 의지한 채로 서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활·화살·조총을 어지럽게 마구 발사하는 가운에 죽은 자가 태반이었는데, 중국인들은 앞을 다투어 적의 머리를 베었으나 우리 병사들은 힘써 응전할 뿐이었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에야 신이 징을 쳐서 병사들을 퇴각시켰습니다. 어쨌거나 군대에 현재 양식이 없어 근심이 눈앞에 닥쳤으니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1619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38권, 광해 11년 3월 3일 병술 3번째기사

비밀리에 비변사에 전교하였다.

“중국의 동쪽 방면의 군대가 매우 약하여 오직 우리 나라 군대만을 믿고 있다고 하니, 원수의 장계를 보고 나는 한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당초에 내가 염려했던 것이 바로 오늘과 같은 근심이 생겨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군대도 이렇게 약하다고 하는데 훈련도 받지 않은 나약한 우리 나라의 군사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이렇게 나약한 군사들을 호랑이 굴로 몰아대었으니 전쟁에 지는 것만으로 끝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 나라에 말할 수 없는 근심이 닥쳐올 것인데, 본사는 이 점을 생각하고 있는가?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은 오직 영건을 정지시키는 것만을 첫번째 급무로 여기고 있는데, 영건을 중지하기만 하면 노추(奴酋)의 머리를 효시하고 그의 뜰을 쟁기질할 수 있겠는가. 임금이 지금 물과 불 속에 빠져 있는데 신하된 자가 위태로운 곳에 그대로 있으라고 힘써 권하니, 이것이 과연 신하의 의리란 말인가. 경박한 젊은 무리들이야 국가의 구례(舊例)를 제대로 모르니 나무랄 것도 없다 치더라도 나이가 지긋한 재신(宰臣)들조차도 임금의 위태로움을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할 뿐 명을 받들어 거처를 옮기려는 뜻이 없으니, 우리 나라의 인심이 각박하다고 할 만하다. 지금 이후로 영건하는 일에 대하여 다시는 말하지 말고, 마무리를 잘 지을 수 있는 계책을 여러 가지로 강구하여 조속히 해결해 나가도록 하라.”

 

 

1619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38권, 광해 11년 3월 12일 을미 1번째기사

평안 감사가 치계하기를,

“중국 대군(大軍)과 우리 삼영(三營)의 군대가 4일 삼하(三河)에서 크게 패전하였습니다. 이 때 유격 교일기(喬一琦)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선두에서 행군하였고, 도독이 중간에 있었으며 뒤이어 우리 나라 좌·우영이 전진하였고, 원수는 중영(中營)을 거느리고 뒤에 있었습니다. 적은 패한 개철(開鐵)·무순(撫順) 두 방면의 군대를 회군(回軍)하여 동쪽으로 나와 산골짜기에 군사를 잠복시켜 두고 있었는데, 교 유격이 〈앞장서 가다가〉 갑자기 【부거(富車) 지방에서 노추(奴酋)의 복병을】 만나 전군이 패하고 혼자만 겨우 살아났습니다. 도독이 선봉 군대가 불리한 것을 보고 군사들을 독촉하고 전진해 다가갔으나, 적의 대군이 갑자기 이르러 산과 들판을 가득 메우고 철기(鐵騎)가 마구 돌격해 와서 그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구 깔아 뭉개고 죽여대는 바람에 전군이 다 죽었고, 도독 이하 장관들은 화약포 위에 앉아서 불을 질러 자살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좌영의 장수 김응하(金應河)가 뒤를 이어 전진하여 들판에 포진하고 말을 막는 나무를 설치하였으나 군사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습니다. 적이 승세를 타고 육박해 오자 응하는 화포를 일제히 쏘도록 명했는데, 적의 기병 중에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재차 진격하였다가 재차 후퇴하는 순간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어닥쳐 먼지와 모래로 천지가 캄캄해졌고, 화약이 날아가고 불이 꺼져서 화포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적이 철기로 짓밟아대는 바람에 좌영의 군대가 마침내 패하여 거의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응하는 혼자서 큰 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번갈아 쏘았는데, 시위를 당기는 족족 명중시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적은 감히 다가갈 수가 없자 뒤쪽에서 찔렀는데, 철창이 가슴을 관통했는데도 그는 잡은 활을 놓지 않아 오랑캐조차도 감탄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약 이같은 자가 두어 명만 있었다면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하고는, ‘의류 장군(依柳將軍)’ 이라고 불렀습니다. 우영의 군대는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모두 섬멸되었고, 원수는 중영을 거느리고 산으로 올라가 험준한 곳에 의거했으나, 형세가 고립되고 약한데다가 병졸들은 이틀 동안이나 먹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적이 무리를 다 동원하여 일제히 포위해오자 병졸들은 필시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분개하여 싸우려 하였는데, 적이 우리 나라의 오랑캐말 역관인 하서국(河瑞國)을 불러 강화를 하고 무장을 풀자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경서(金景瑞)가 먼저 오랑캐 진영으로 가서 약속을 하고 돌아왔는데 또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와서 맹세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중국의 패잔병 수백 명이 언덕에다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적이 우리 군대에다 대고 ‘너희 진영에 있는 중국인을 모두 내보내라.’고 소리치고, 또 ‘중국 진영에 있는 조선인을 모두 돌려보내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때 교 유격이 아군에게 와서 몸을 숨기려고 하다가 우리 나라가 오랑캐와 강화를 맺으려는 것을 보고는 즉시 태도가 달라져 작은 쪽지에다 글을 써서 자신의 가정(家丁)에게 주면서 요동에 있는 그의 아들에게 전하라고 하고는 즉시 활시위로 목을 매었는데, 우리 나라의 장수가 구해내자 낭떠러지로 몸을 던져 죽고 말았습니다. 홍립 등이 중국 군사를 다 찾아내어 오랑캐 진영으로 보내자 적은 그들을 마구 때려서 죽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홍립은 편복(便服) 차림으로, 경서는 투구와 갑옷을 벗어 〈오랑캐 깃발 아래에 세워 두고〉 오랑캐 진영으로 갔는데, 적은 홍립과 경서로 하여금 삼군(三軍)을 타일러 갑옷을 벗고 와서 항복하게 하였습니다.

백(白)씨 성을 가진 호남(湖南)의 무사가 이민환(李民寏)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항복할 뜻을 이미 정했다면 공은 막부의 계책에 참여했었으면서 어찌하여 군막으로 나아가 대의로써 꾸짖지 않았는가. 그렇게 해서 두 원수를 목베어 삼군을 격려하여 한 번 싸우다가 죽는 것이 노추에게 무릎을 꿇어 천하 만세의 욕이 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였지만, 민환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부하 장수 이일원(李一元)·안여눌(安汝訥)·문희성(文希聖)·박난영(朴蘭英)·정응정(鄭應井)·김원복(金元福)·오신남(吳信男) 등과 함께 제각기 거느린 군졸과 말을 인솔하여 무기를 버리고 갑옷을 벗은 채로 오랑캐 진영으로 가서 항복했는데, 적은 홍립과 경서와 장수들로 하여금 군졸들을 거느리고 앞장서게 하고 적병으로 둘러싼 채로 노추(奴酋)의 목책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노추는 홍립과 경서만 목책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그밖의 장수와 군사들은 모두 성밖에 두고 감시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 싸움에 개철 총병(開鐵摠兵) 두송(杜松)이 공을 탐내어 경솔히 전진하는 바람에 전군이 패몰함으로써 적병이 동쪽 방면에 전념하게 되어 끝내는 사방의 군대가 모두 패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후 오랑캐에게 잡혔던 장수와 군사들이 대부분 달아나 동쪽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굶주림으로 골짜기에서 뒹굴거나 오랑캐에게 잡혀 거의 다 죽고 돌아온 자는 겨우 수천 명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1619년 광해군일기[중초본] 144권, 광해 11년 9월 3일 임오 3번째기사

치제관(致祭官) 목대흠(睦大欽)을 파견하여 진강(鎭江)으로 가서 총병 유정(劉綎)과 유격(遊擊) 교일기(喬一琦)의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였다.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유 총병과 교 유격은 모두 장렬하게 죽었다. 유 총병은 바로 정유년에 왜적을 정벌할 때의 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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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위기 The Crisis of the Seventeenth Century’ 또는 ‘일반 위기 The General Crisis’라는 용어는 에릭 홉스봄, 휴 트레버-로퍼와 같은 몇몇 역사학자들이 17세기 초에서 18세기 초까지 유럽에서의 광범위한 갈등, 충돌과 불안정의 시기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주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이 글에서는 기후의 관점에서 ’17세기 위기’를 설명하는 자료를 주로 수집하였는데, 기후가 ’17세기 위기’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것은 대략 1970년대 이후로 보면 되겠다.  그 선구자 중의 한명인 엠마뉴엘 르 로이 라두리(Emmanuel Le Roy Ladurie)는 『축제의 시간, 기근의 시대』(1967)에서 소위 ’17세기 위기’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이 문제는 “단순히 당대의 유럽 사회와 경제에 대한 내적인 분석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기후적인 기원을 갖는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나 그 뒤로도 ’17세기 위기론’을 탐구했던 역사학자들은 기후의 관점에서 ’17세기 위기론’을 바라보는데 대체로 인색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유럽사를 둘러싼 ’17세기 위기론’에서 소빙기 문제를 적극 도입하면서 이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제 소빙기 연구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역사인문학에서도 상당히 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 yellow의 세계사 연대표 

 

– IPCC 2차 레포트에 나오는 기온 그래프로 역사적인 사건과는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물론 온난화와 관련하여 논란이 많다.

 

’17세기 위기’ 또는 ‘일반 위기’는 소빙하기(소빙기, Little Ice Age)의 절정기라 보고있는 17세기와 거의 일치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마운더 극소기 Maunder Minimum’라 불리는 태양 흑점이 거의 소멸한 시기인 1645~1715년와 겹친다는 것이다. 소빙하기의 원인이 태양인지 화산인지 해양의 순환 문제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인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아직 소빙하기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소빙하기는 거의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다만 그 정도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거나 시기적으로 차이가 나기도 한다. 소빙하기의 시기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외국에서는 H. H. Lamb은 1190년~1900년을, Brian Fagan은 1300년~1850년을 소빙하기로 간주한다. 그리고 NASA Earth Observatory에서는 3개의 주요 냉각 시기를 1650년, 1770년,1850년 근처를 언급하였다.

 

한국의 경우, 『증보문헌비고』나 『조선왕조실록』 등 고문헌의 천재지변 관련 기사를 통해 소빙하기의 실체를 접근하고 있는 실정인데, 『조선왕조실록』을 분석한 이태진의 경우 1490년~1750년 시기를 소빙하기로, 김연희의 경우(석사 논문)는 제1기(1511~1560년), 제2기(1641년~1740년), 제3기(1781년~1850년)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증보문헌비고』를 분석한 김연옥은 냉량(冷凉)지수를 중심으로 제1기(1551~1650년), 제2기(1701~1750년), 제3기(1801~1900년)으로 구분하였으며, 이 중 1601년~1650년에 가장 극대가 나타나며, 1801년~1900년간에 두 번째 극대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 17세기의 각 나라의 물리적 충돌과 전쟁 등의 대변화

– 30년 전쟁 (1618~1648)

– 신성로마제국의 경제위기 (1619~1623)

– 청교도 혁명 (1640~1660) / 명예 혁명 (1688)

– 명의 이자성의 난 (1641~1644)

– 명이 멸망하고 청 성립 (1644~1662)

– 프롱드의 난 (1648~1653)

– 스페인 왕가에 대한 반란 : 나폴리, 포르투갈, 카탈로니아

–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절정기 및 관련된 여러 충돌들

– 오스만 제국의 수많은 내부 반란들 (특히 1622)

– 러시아 대기근 (1601~1603) / 로마노프 왕조의 등장 (1613)

– 러시아 스텐카 라진의 난 (1670~1671)

– 일본 시마바라의 난(1637~1638)과 쇄국령 공포

– 모리타니 30년전쟁 (1644~1674)

 

우리나라에서는 이 시기에 ‘인조반정(1623)’,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경신 대기근(1670~1671)’, ‘을병 대기근(1695~1696)’ 등의 사건과 극심했던 당쟁이 있었다. 위키백과의 ‘경신 대기근‘을 보면, 조선 현종 재위기간인 경신 대기근(庚辛大飢饉)은 한국사상 전대미문의 기아 사태였으며, 임진왜란 때부터 살아온 늙은이들이 ‘전쟁 때도 이것보다는 나았다’고 생각할 정도의 무지막지한 피해를 입었다. 경신 대기근의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조선 8도 전체의 흉작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으며, 당시 조선 인구의 1200~1400만 명중 30~40만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보았다.

 


기후의 문화사

–  볼프강 베링어 / 안병옥, 이은선 역 / 공감IN / 2010.09.10

 

16세기 말 농업은 중세 온난기가 끝나갈 무렵처럼 이미 한계에 봉착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더 이상 적절한 가격으로 부양할 수 없었다.

……

15세기 말부터 17세기 중엽까지 곡물가격은 몇 배나 상승했다. 이로서 인구성장은 한계에 봉착하는데, 우리는 이와 같은 사회현상을 17세기의 위기라 부른다. 인구감소에는 많은 전쟁과 내전, 그리고 혁명들이 영향을 미쳤지만, 사실상 이 위기는 맬서스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당시의 유럽은 이미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사회였다. 식량결핍과 물가상승이 사회구성원 모두의 빈곤을 초래했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정치적인 균형이 무너지는 결과를 빚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빵의 원료가 되는 곡식을 소유한 사람들과 중간상인들은, 곡물가격의 상승으로 이득을 보았던 계층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엘베강 동쪽의 대지주와 중부유럽 또는 서부유럽의 일부 봉건귀족들을 들 수 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이 종속이론을 유럽의 역사에 적용한 이래 강조되듯이, 사회 전반의 전환은 계층적인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동유럽이나 스페인의 식민지처럼 유럽의 주변부에서 곡물생산을 늘리기 위해 제2차 농노화가 진행되는 동안, 유럽이라는 세계경제의 중심부에서는 상인계급이 정치적 권력집단으로 성장하게 된다. 네덜란드인들의 황금시대는 정확히 유럽대륙의 다른 지역들이 주기적인 기근에 시달리고 있을 때 찾아왔다. 신성로마제국과 이탈리아를 필두로 유럽의 곳곳에서 곡식소유주들과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 양극화가 발생했다. 독일 북부에서 형성된 베서 르네상스(Weser-Renaissance)의 부는 놀랄만한 것이었다. 이는 치솟는 곡물가격과 증가하는 식량수요로 많은 이득을 누렸던 귀족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

사망률의 위기는 단지 흑사병에 의해서만 초래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내성이 약해졌기 때문에 흑사병은 다른 질병들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질병 가운데 유럽에서 전형적인 것으로는 피부병, 헝가리 열병으로 알려진 발진티푸스, 아동들에게 특히 위험한 천연두, 치명적인 설사병인 이질, 홍역과 성홍열을 들 수 있다. 기침이나 백일해를 수반하는 유행성 독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질병이다.

……

치아조사와 유골조사를 통해 밝혀진 체격왜소화 현상은 당시의 영양부족 상태를 알려주는 지표였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사람들의 평균 체격은 지난 2000년 동안 가장 작은 편이었으며, 굳이 비교하자면 14세기 초의 궁핍기와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당시의 기록들은 왜소한 체격과 굶주림, 열병 혹은 선페스트와의 연관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물가폭등이 이어지면서 잔혹한 질병이 발생했다. 특히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은 목숨을 빵 한 조각으로 유지하는 사람들이었다.”

……

기후악화가 초래한 사회구조의 변화는 모든 대륙에서 엇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흉작은 어디서나 높은 발병률과 사망률에 따른 인구 감소를 동반했다. 17세기에는 심지어 중국에서도 인구성장이 지체되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스페인령 필리핀 제도와 네덜란드령 암본(Ambon), 그리고 타이의 인구에 대해서는 믿을만한 통계자료가 존재한다. 17세기초 이들 지역에서는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

많은 자료들은 이 시기에 폭력이 증가했으며, 특히 30년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30년전쟁은 당시 인구의 2/3를 나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당시의 군대는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따라서 전투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의 수는 16세기 말 전염병으로 발생했던 수보다 적은 수준이었다. 약탈하는 병사들, 공격적인 걸인들, 그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범죄자들의 손에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통계적으로 큰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전쟁이 수반하는 폭력과 처형은, 자원 결핍으로 첨예한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갈등에 내몰렸던 시대의 상징이었다. 전쟁과 폭력의 결과는 언제나 잔혹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망률 통계를 지역별로 살펴보면, 전쟁과 폭력보다는 질병에 의한 사망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폭력의 향연 속에서 몰락의 길을 걸었던 중국에 대해서는 별도의 언급이 필요하다. 중국에서도 17세기는 끔찍했던 유럽의 중세 초기와 비견될 정도로 혹독한 재난을 겪었던 시기였다. 1601년 온화한 중국 남서부 지방인 운남(雲南)에 강한 눈보라가 불어 닥쳤으며, 전국이 극심한 한파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추위로 죽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중국농업을 붕괴시킨 것은 한파가 동반한 건조한 기후였다. 1618년부터 1643년까지 지속된 살인적인 기근은 중국인들을 괴롭혔던 최대의 위협이었다. 길가에 누운 채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식인행위가 횡행하고 대규모 이주 과정에서 폭력이 난무했다. 결국 명나라는 이자성(李自成)이 주도했던 농민봉기로 멸망하게 된다. 그런데 명나라의 급격한 몰락은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명나라는 기후조건이 비슷하게 열악했던 300년 전, 몽골의 원나라(1260~1368)가 몰락하면서 권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명나라를 세운 태조(홍무제 주원장, 재위 1368~1399)는 봉기한 농민들의 지도자였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피비린내 나는 내전 끝에 만주왕조, 곧 청나라가 들어섰는데, 청왕조는 1912년까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

서유럽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감은 기후가 나빠졌던 시점에 최고조에 달했다.

……

프리드리히 바텐베르크(Friedrich Battenberg)는 “13세기까지 지속되었던 중세 전성기의 경제 호황은 유대인 공동체와 주거지들의 평화로운 발전을 가능케 했다.”고 주장한다. 14세기 초반 들어 위기가 시작되면서 이른바 ‘속죄양 찾기’가 기승을 부렸으며, 1340년대 말 흑사병의 유행과 함께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도시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말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많은 문제들을 유대인 탓으로 돌렸지만, 날씨는 유대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연현상이었다. 우박, 가뭄, 추위와 유대인 사이에는 어떠한 사상적 연관성도 찾기 힘들다. 문헌은 유대인 박해가 왜 15세기에 드문 현상이 되었으며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해 준다.

……

영국의 역사가 노먼 콘(Norman Cohn)은, 과거에는 유대인들이 감당해야 했던 속죄양 역활을 15세기 이래 마녀들이 넘겨받았다고 믿었던 최초의 인물이다. 마법은 소빙하기의 가장 중대한 범죄였다. 마법은 날씨, 농토의 낮은 생산성, 무자녀, 인위적인 질병 등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14세기에 나타난 사회적 현상으로서 마법의 등장은 시기적으로 소빙하기의 출현과 일치한다. 마녀사냥이 최고조에 달했던 것은 중부유럽에서 소빙하기의 추위가 가장 혹독했던 때였다. 마법은 소빙하기가 끝나고 점차 계몽주의 사고방식이 자리 잡으면서 마침내 형법목록에서 사라졌다.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

–  김문기 / 역사와 경계, 제77집 / 2010.12

 

순치 11년 12월(1655.1~2) 북경에 있던 담천談遷은 고향인 절강성 북부의 바다가 결빙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믿을 수 없었다. 며칠 뒤, 10월(1654.11~12)에 강남에 혹한이 닥쳐 강이 꽁꽁 얼어붙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라며 놀라워했다. 1654~1655년의 겨울 중국에서는 황하黃河와 회수淮水가 얼어붙고 강소성 북부의 바다마저 결빙했다. 강남의 태호太湖와 황포黃浦가 꽁꽁 얼어붙은 이때의 혹한으로 아열대과수인 감귤이 동사했다. 조선에서는 효종 6년(1655) 봄에 강원도 삼척과 강릉의 바닷물이 얼어붙었다. 조선시대 동해가 결빙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로부터 두어 달 후에는 제주도에 큰 눈이 내려 국마國馬 9백여 필이 얼어 죽었다. 흥미로운 것은 비슷한 시기 영국 런던의 템스 강도 얼어붙었다는 사실이다. 템스 강은 1500~1900년의 400년 동안 적어도 23차례의 완전결빙이 있었다. 17세기에만 10차례 얼어붙었는데 1654~1655년의 겨울도 그 하나였다. 당시의 강추위는 북아메리카에서도 확인된다. 뉴일글랜드 지방의 앞 바다는 한 달 동안 얼어 있었다. 담천談遷이 경험했던 겨울의 혹한은 전 지구적인 소빙기(Little Ice Age) 현상의 하나였던 것이다.

……

지난 밀레니엄 동안 인류는 중세온난기(Medieval Warm Period), 소빙기, 지구온난화라는 기후변동을 경험했다. 중세온난기가 전 지구적인 현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소빙기에 대해서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소빙기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17세기가 소빙기의 절정이었음은 분명하다. …… 1970년대에는 유럽사를 둘러싼 ’17세기 위기론’에서 소빙기 문제를 적극 도입하면서 이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최근의 환경사 연구에서 기후변동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소빙기에 대해 단순한 사회경제, 정치적 영역에서 벗어나 문화사의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시도가 나오고 있다. …… 이처럼 영미권에서의 소빙기 연구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역사인문학에서도 상당히 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중국과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소빙기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미흡하고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

마지막으로 구미역사학계에서의 동아시아 소빙기 연구에 대해서 살펴보자. 17세기 동아시아 연구에서 소빙기의 중요성을 먼저 제기했던 것은 이들 영미권의 연구자들이었다. 이것은 “17세기 위기론(Seventeenth-Century Crisis)”의 전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유럽의 ‘일반적 위기(General Crisis)’를 세계적 위기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사례는 매우 중요했다. 영미권의 연구자들은 “17세기 위기론”을 적극 수용하여, 소빙기가 명청교체의 중요한 한 배경이었음을 지적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연구자는 윌리엄 애트웰(William S. Atwell)이다. 그는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은의 유통이 명청교체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중요한 연구를 수행해 왔는데, 최근에는 소빙기 기후변동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지속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명청시대 광동廣東 · 광서廣西지역의 환경사를 연구한 로버트 마르크스(Robert B. Marks)는 소빙기 기후변동이 17세기 이른바 “嶺南”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처럼 동아시아 역사에서 소빙기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것은 구미역사학계였다.

……

<표5>는 북반구의 수목 나이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지난 600년간 가장 한랭했던 30년을 50년을 단위로 분류한 것이다. 지난 600년간 전 지구적으로 가장 한랭했던 30년을 살펴보자. <표5>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7세기에 한랭화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는 사실이다. 총 11년이 집중되어 있다. 특히 17세기 후반은 600년간 가장 한랭했던 30년 중에 7년이 포함되어 있어 당시의 극심한 한랭한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다음은 19세기 전반으로 모두 6년이 있다.

<표5> 지난 600년 동안 하계 한랭화

 세기  총햇수 하계 한랭화 연도 (순위)
 1401 ~ 1450  3  1446(30), 1448(19), 1453(4)
 1451 ~ 1500  1  1495(23)
 1501 ~ 1550  0
 1551 ~ 1600  1  1587(17)
 1601 ~ 1650  4  1601(1), 1641(3), 1642(28), 1643(10)
 1651 ~ 1700  7  1666(12), 1667(27), 1669(16), 1675(8), 1695(6), 1698(9), 1699(11)
 1701 ~ 1750  2  1740(18), 1742(25)
 1751 ~ 1800  1  1783(26)
 1801 ~ 1850  6  1816(2), 1817(5), 1818(22), 1819(29), 1836(21), 1837(15)
 1851 ~ 1900  1  1884(13)
 1901 ~ 1950  3  1912(7), 1968(24), 1978(14)
 1951 ~ 2000  1  1992(20)

 

본 표는 K.R. Briffa et al., Ibid(1998), p450 <Table>의 지난 600년 동안 가장 한랭했던 여름으로 기록되는 30년을 시기별로 재편집했다. 괄호 안의 숫자는 순위이다.

……

곡물교역에서 조선이 명과 청에 보이는 태도는 극명하다. 계갑대기근 때 중강개시를 통해 기근을 구제했던 것은 조선 사대부들에게는 ‘은혜’였다. 그렇기에 1619년과 1628년의 기근 때는 조선이 보다 적극적으로 명과 곡물교역을 추진했다. 이에 반해 청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보였다. 경신대기근 때 끝내 곡물교역을 요청하지 않은 것은 ‘은혜’를 입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을병대기근 때 어쩔 수 없이 곡물을 들여왔지만, 그것은 곧바로 커다란 분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17세기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국가 간의 곡물교역은 그 자체로 기근에 대한 대응력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은 17세기 전반에 있었던 숭정 13~15년의 대기근을 겪으면서 명청교체가 이루어졌다. 명은 끊임없는 기근에 시달리면서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를 이은 청은 이민족 지배라는 불리함을 딛고, ‘강건성세’의 길을 열었다. 17세기 후반의 기후가 전반보다 훨씬 나빴던 점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은 17세기 전반 청에 대량의 곡물을 제공하는 등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지만, 17세기 후반은 1백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대기근을 두 차례 겪었다. 특히 을병대기근 때는 꺼려왔던 청으로부터 곡물을 제공받아야 했다. 이런 면에서 강희제의 해운진제(海運賑濟)는 17세기 소빙기의 기근에 대해 청이 성공적으로 적응한 반면, 조선은 그다지 성공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결론은 다소 단면적이고 거친 부분이 있다. 보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의 기후대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날 한반도는 온대지역에 속한다. 이에 반해 중국은 온대지역 외에도 회수 이남으로 아열대와 열대지역까지 포괄하고 있다. 명청시대 중국의 농업생산력을 화중지역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온대인 화북지역이 잦은 기근에 시달릴 때, 아열대인 화중지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곡물이 긴급하게 수송되어 기근을 구제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소빙기의 관점에서, 기온이 하강할 때 아열대보다 온대지역이 농업생산에 훨씬 불리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런 사실은 17세기 후반 조선이 대기근을 겪게 되었을 때, 중국보다 훨씬 불리한 한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문제는 앞으로 보다 심도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지난 600년 동안 북반구의 여름 한랭화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는 동아시아 기후변동의 지구적인 ‘동시성’을 확인시켜준다. 현저하게 한랭했던 시기들에는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이상저온현상, 흉작, 기근, 폭동, 반란 등이 목격된다. 이러한 동시성을 확인하면 소빙기의 시기구분에 대한 한국, 중국, 일본의 기존 연구들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구사적인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소빙기 기후를 검증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름의 이상저온현상은 17세기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대기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640년대 명말인 崇禎 12~14년의 대기근, 일본의 간에이대기근, 1670년대 현종대의 경신대기근, 일본의 연보延寶대기근, 1690년대 숙종대의 을병대기근, 일본의 원록元祿대기근은 거의 동일한 시기에 발생했다. 이들 기근들은 지구적으로 현저하게 한랭했던 시기에 발생했다는 것에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동시성은 17세기 동아시아 소빙기가 지구적인 기후변동의 일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덕일 [조선 왕을 말하다] 현종 – 경신 대기근

 

16~19세기는 전 세계적인 소빙기였다. 조선에서는 17세기 중·후반 현종 때 기상이변과 재난이 집중되었다. 예송논쟁이 치열했던 한편으로 대동법 논쟁이 거셌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지배 엘리트들은 백성들의 조세를 경감해주고 풍년든 지역의 곡식 일부를 흉년 든 지역으로 직접 보내는 탄력적 운영으로 국가적 재난을 극복하려고 했다.

※ 중앙선데이 120호 / 2009.06.27

 

 

유례를 찾기 힘든 경신 대기근을 맞아 조선은 기민(饑民) 살리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인간의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소빙기(小氷期)의 재앙에 맞서 수도(修道)하는 자세로 재난 극복에 나선 것이다. 그 결과 망국 지경까지 갔던 나라가 되살아났다. 위기를 맞이하고도 당리당략 외엔 관심이 없어 보이는 대한민국 정치권이 되돌아볼 만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

※ 중앙선데이 121호 / 2009.07.05

본문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13137

 


캘리번과 마녀

–  실비아 페데리치 / 황성원, 김민철 역 / 갈무리 / 2011.11.30

 

서유럽에서도 1580년대부터 인구감소가 시작되어 17세기까지 계속되었으며, 인구의 3분의 1을 상실한 독일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와 같은 인구위기는 1345~1348년의 흑사병을 제외하고는 전례가 없는 것이었으며, 그럼에도 그 자체로 무시무시한 통계가 전체 그림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 죽음은 “가난한 사람들”을 공격했다. 페스트나 천연두가 도시를 휩쓸 때 죽은 것은 대체로 부자가 아니라 장인, 날품팔이, 부랑자였다(Kamen 1972:32~33).

……

인구위기와 경제위기는 1620~1630년대에 정점에 이르렀다. 유럽과 식민지 모두 시장이 위축되고, 무역이 중단되고, 실업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발전도상의 자본주의 경제가 붕괴할 가능성도 있었다. 유럽과 식민지의 경제적 통합이 진행되서, 각지의 위기들이 서로를 빠른 속도로 상승 · 확대시키는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최초의 국제적 경제위기였다. 역사가들은 이를 17세기의 ‘일반적 위기 General Crisis‘라 부른다(Kamen 1972:307ff; Hackett Fischer 1966:91).

이런 맥락에서 노동, 인구, 부의 축적의 상호관계가 정치논쟁의 전면에, 그리고 인구정책과 “생권력” 레짐의 최초 성분들을 만들어 내기위한 전략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논쟁에서 “인구조밀도”와 “인구”를 혼동할 정도로 개념 사용이 조잡했다는 점과 국가가 인구증가에 방해가 되는 모든 행동을 무자비하게 처벌했다는 점에 속아서는 안된다. 푸코는 유럽에서 기근이 끝난 18세기에 재생산과 인구증가가 국가적 문제이자 지적 논쟁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그 시기가 18세기가 아닌 16~17세기의 인구위기였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 시기에 “마녀”에 대한 박해가 격렬해진 것과, 출산을 규제하고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주도권을 파괴하기 위해 국가가 새로이 훈육조치들을 도입한 것 또한 “일반적 위기”로 거슬러 올라가 규명해야 한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마르크 블로흐가 언급한 적이 있듯이, “근대 초 유럽에서 농민 반란은 오늘날 산업사회의 파업만큼이나 흔했다”(Parker and Smith 1985). 그러나 16세기 말, 그리고 무엇보다 17세기 전반에 이런 농촌 소요는 전례 없는 규모로 도시 반란과 뒤섞였는데, 이런 반란의 대상은 “고용주”가 아니라 국가 자체였다. 영국 청교도 혁명은 농촌과 도시 반란의 이런 폭발적 결합의 가장 극적인 일화였지만, 거의 모든 유럽 통치자들이 사회적 격변에 직접적으로 충격을 받았고 심각하게 위협을 느꼈다(Parker and Smith 1985: 12ff).

이처럼 체계 전반에 걸쳐 사회 갈등이 첨예해진 것은 앞선 시기 그리고 이 시기에 통치자들 사이의 군사적 갈등이 증폭된 결과였다. 1550년경에서 1640년경 사이에 유럽 열강이 동원한 군인 수는 두 배 늘었고, 1530년에서 1630년 사이에 군인 한 명을 전장에 보내는 비용은 평균 다섯 배 늘었다(Parker and Smith 1985: 14). 이렇게 보호비용이 증가하자 피지배자들에 대한 재정 압박이 크게 증가하였고, 이는 다시 17세기 수많은 반란을 촉발시켰다(Steensgaard 1985: 42~4).

 

이런 보호비용 상승과 더불어, 이데올로기 투쟁도 증폭되었다. 중세 통치체계가 계속해서 무너지자, ‘지역을 통치하는 자가 종교를 결정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리를 따르는 위로부터의 종교혁신과 종교복고(religious restorations)가 결합되어 나타났는데, 이는 둘 다에 대한 대중적 분노와 반역을 불러일으켰다. 통치자들이 종교를 자신들의 상호 권력투쟁 도구로 전환하자, 피지배자들은 나름대로 종교를 통치자에 반대하는 봉기 도구로 전환시켰다.

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통치자들 사이의 군사적 갈등이 증폭되자 그들의 전쟁수단 획득과 피지배자들의 생계가 의존하고 있던 범유럽 교역망이 붕괴하였다. 정치적 관할권역들을 가로질러 재화를 이동하는 데 드는 비용과 위험부담이 극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주요 공급물이 생계수단 제공에서 전쟁수단 제공으로 바뀌었다. 17세기 일반적 위기의 사회적 · 경제적 배경이 되는 방랑의 급격한 악화라는 문제와 “생계위기”에 기여한 것은 인구와 기후 요소보다는 훨씬 더 결정적으로 이런 교역 흐름의 붕괴와 전환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그럴 법해 보인다.

 


하버드 중국사 원.명

–  티모시 브룩 / 조영헌 역 / 너머북스 / 2014.10.30

 

명의 쇠락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선, 1572년 황위에 올라 1620년에 사망한 만력제(신종)의 통치 시대로 돌아가 보자.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과 달리, 명의 쇠락이 만력제의 결함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만력 연간에 발생한 두 차례의 환경 위기가 그러한 큰 그림에 해당한다.

1586~1588년에 발생한 첫 번째 ‘만력의 늪’은 정권 자체를 마비시켰다. 그 늪은 사회 재난의 새로운 기준이 될 정도로 엄청난 환경 차원의 ‘붕괴’였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이 재난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이는 1580년대 초반부터 장거정이 시행했던 국가재정에 관한 개혁 덕분이었다. …… 그리하여 장거정이 1582년 사망할 때 국고에는 은이 넘쳐났다. 이렇게 보유한 자금 덕분에 만력제의 조정은 1587년 폭풍처럼 밀어닥친 자연재해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다.

……

20년이 지난 1615년, 두 번째 ‘만력의 늪’이 발생했다. 이번 늪이 있기 2년 전부터 북부 중국 전역에서 홍수가 지속되었고, 2년째 되던 해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추워졌다. …… 1616년 후반기에 기근은 북부중국에서 양쯔강 유역으로 파급되었고, 이어서 광동성을 덮쳤다. 최악의 사태는 1618년 이전에 종결되었지만, 이후에도 만력제의 마지막 2년 동안 가뭄과 메뚜기 떼의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

만력 연간의 기근으로 고통 받은 이들은 명나라 뿐만이 아니었다. 이 시기 북부 중국을 강타한 가뭄은 요동으로도 확산되었다. 요동은 이후에 만주로 알려진 만리장성의 동쪽 끝 부분에 해당한다. 바로 이곳에서 여진족의 지도자 누르하치가 여진족과 몽골족 사이에 전례없이 폭넓은 동맹관계를 형성해냈고, 이 동맹은 1636년 마침내 ‘만주’라는 새로운 민족의 칭호를 탄생시켰다.

……

원-명을 통털어 숭정제만큼 심각하게 비정상적인 기후를 만났던 황제는 없었다. 통치 첫 해에는 심각한 상황이 제국의 서북쪽에 몰려 있었다. 1628년 어사의 보고에 따르면, 가뭄과 기근이 너무 심각해 섬서성 전체가 재난 지역이었다고 한다. 다음 해에는 기온이 급강하했고 1640년까지 한파가 지속되었다.

중국만 한파를 겪은 것은 아니었다. 1630년대 러시아도 12월부터 2월 사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심각하게 추웠다. 그러다가 1640년에 이르면 겨울마다 매달 극심한 추위가 잇따라 보고되면서 12세기 이래 러시아 역사상 가장 혹독하게 추웠던 10년으로 기록된다. 만주에도 역시 혹독한 추위가 덮쳤다. 여진족이 남쪽으로 진출한 것은 명의 경제력을 노린 측면도 있겠지만, 혹독한 추위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

……

1632년 이후 재해는 더욱 심각해졌다. 1635년, 메뚜기떼가 대규모로 출현했다. 숭정 10년(1637년)에는 전국적인 가뭄이 덮쳤다. 이후 7년에 걸친 가뭄으로 굶주린 사람들은 나무껍질을 벗겨 먹기 시작했고, 급기야 썩은 송장까지 건드리게 되었다.

……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가장 타격을 받은 곳은 정부 조달에 의존했던 북방 지역이었다. …… 조정이 긴축 재정을 운영하면서 군사들과 역참 병졸들에게 돌아갈 보수는 한푼도 없었다. 많은 병사가 주변지역으로 도망쳐 도적질로 간신히 목숨을 이어갔다. …… 1628년 봄, 섬서성을 덮친 가뭄을 계기로 병사들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시작으로 향후 1년간 전국을 뒤덮는 반란이 되풀이되었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황정(荒政)과 왕조교체(王朝交替)

–  김문기(부경대) / 중국사학회 / 2014년

 

명조가 멸망하고 27년이 지난 뒤에, 상주부常州府 무석현無錫縣의 계육기計六奇는 그가 저술한 『명계북략(明季北略)』의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명조明朝가 천하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① 외부의 강적(여진족의 위협), ② 내부의 농민반란, ③ 자연재해의 유행, ④ 정부의 무능력이다. 이들 요인 중에서 계육기는 재해와 농민반란의 상호관계를 특히 강조했다.

가령 유구(流寇,무리 지어 떠돌아다니는 도적)가 소란을 일으켰을 때 백성들이 기근의 근심이 없었다면, 오히려 살아남기를 탐하고 죽기를 두려워하여 성지城池를 굳건히 지켰을 것이니 도적의 형세는 점차로 고립되었으리라. 어찌하랴! 섬서와 하남에 여러 해 동안 대기근이 들고, 산동과 호광에 매년 황재蝗災와 한재旱災가 드니, 궁핍한 백성들이 살아갈 방도가 없어 단지 도적을 따라서 약탈하며 잠시의 죽음을 연장하길 바랐을 뿐이다. 그렇기에 도적이 이르는 곳마다 앞 다투어 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맞이하여 그 무리로 들어갔다. 비록 수령守令일지라도 또한 금할 수 없었으니, 도적의 무리는 날로 많아지고 도적의 세력은 더욱 확대되니, 대란大亂이 이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졌다.

 

계육기는 명말의 농민반란이 변경의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 병향兵餉을 가파加派하는 등 국가의 가혹한 착취에서 시작되었지만, 이것이 왕조를 무너뜨릴 정도의 대란으로 발전했던 원인은 연이은 재해로 인한 극심한 기근에 있었다고 보았다. 그는 당시의 재해가 대기근으로 발전하지 않았다면 농민반란이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명조의 멸망과정에서 재해의 파괴력을 그 시대를 겪었던 계육기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

명청교체를 바라보는 전통적 시각은 ‘계급투쟁’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의 부패, 관료체제의 붕괴, 농민계급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강조하지만, 재해와 인화(人禍)로 끝내 농민반란을 추동하여 명조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이러한 관점에서 벗어나 각기 다양한 관점들이 제시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전환은 환경사적 관점에서의 접근이다. 페스트가 명조의 멸망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연구도 그 중의 하나이다. 다만 이것은 지엽적인 문제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기후변동이었다. 명청교체가 이루어진 17세기는 ‘지난 1만년 사이에 가장 한랭했던 시기’였다. 바로 소빙기(Little Ice Age)의 기후 변동이 최절정에 달했던 기간으로 ‘지구적인 위기(Global Crisis)’를 초래했다.

’17세기 위기’의 관점에서 명청교체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구미연구자들에 의해 먼저 시도되었다. 환경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국 학자들도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최근에는 명청교체를 아예 ‘생태위기’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17세기의 소빙기 기후변동이 생태를 악화시켜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농민반란을 촉발하여 명조의 멸망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소빙기는 명조의 멸망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한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소빙기의 생태위기를 강조할 때 주의해야할 부분이 있다. 소빙기의 기후변동은 17세기의 전반보다 후반이 훨씬 극심했다. 명조는 이런 생태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했지만, 청조는 오히려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이루었다. 왕조는 교체되었지만 소빙기는 지속되었다. 명조의 멸망이 소빙기 때문이라면, 청조의 성공도 소빙기를 통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재해에 대한 국가의 대응은 양조兩朝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단서일 것이다.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  로버트 B. 마르크스 / 윤영호 역 / 코나투스 / 2007.04.13

 

매우 포괄적인 관점에서 지난 1000년 동안 이루어진 인구의 증감에는 세 차례의 커다란 파장을 볼 수 있다. 900년부터 1000년 사이에 시작된 첫 번째 인구증가는 130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1350년대에 발생한 흑사병으로 인해 급격히 퇴조했다. 그 후 1400년대에 또 다시 인구가 증가했지만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감소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1700년대에 시작된 세 번째 인구증가는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2100년대에 그 증가는 멈추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페르낭 브로델

–  김응종 / 살림 / 2006.07.30

 

16세기는 인구 증가의 시대였다. 1500년에서 1600년 사이에 두 배가량 늘어났다. 브로델의 역사 설명체계에서 ‘인구’는 다른 어떠한 문제 이상으로 중요하며, 시대의 척도와 방향을 주는 본질적인 문제였다.

 

독자들은 이 생물학적인 혁명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여러 가지 운명에게 중요한 사실이었다는 점을, 터키인들에 의한 정복이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식민지화 혹은 스페인 제국의 사명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와 같은 인구 증가가 없었더라면 이들 역사의 빛나는 페이지가 씌어질 수 있었을 것인가? 이러한 혁명은 가격혁명보다도 중요한 것으로서, 아메리카로부터의 은의 대량 유입에 앞서서 이 혁명을 설명해준다. 이러한 상승은, 인간이 처음에는 필요한 노동자였다가 다음에는 커다란 부담으로 변해간 시대의 승리와 파국을 동시에 만들어냈다. 1550년부터는 바퀴가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서로 떼밀릴 정도였다. 1600년경 이러한 초과 하중은 발전을 정지시키고 강도 행위와 같은 잠재적인 사회적 위기의 소지를 만들어냈으며, 이로써 17세기의 씁쓸한 장래에는 모든 것이 또는 거의 모든 것이 악화된다.

 


스페인·포르투갈사

–  강석영, 최영수 / 미래엔 / 2005.07.15

 

17세기의 위기는 스페인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위기의 출발점은 스페인보다 전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정치, 사회 및 경제적으로 먼저 발생했다. 특히, 일부 유럽의 위기는 1618년에 30년 전쟁의 발발로부터 시작되었다. 17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 중상주의 정책에 따라 산업 생산의 증대 및 교역의 확대로 서서히 경제 발전의 계기를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국가에서 쇠퇴의 원인은 다양했다. 주요 요인은 정치면에서 절대 군주들의 천문학적인 비용 지출과 기후의 변화에 따른 흉작 및 전염병의 만연에 있었다.

17세기의 스페인 몰락의 요인은 16세기부터 계속된 경제 활동의 쇠퇴와 재정의 결핍, 군사력의 약화 및 스페인 사회의 윤리 및 정신 사조를 이끌어 갈 창조적인 지성의 고갈에 있었다. 따라서, 17세기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자연적인 원인과 정치에 있었다. 자연적인 원인은 전염병과 흉작에 있었다. 아스투리아스 왕가의 정책은 분명히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역대 왕들은 방대한 제국의 영토적 통합을 끝까지 유지하려는 데 최대의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정책의 운용에서 경제적으로 더 이상 막대한 비용을 부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쇠퇴의 징후는 17세기 초부터 인구 및 산물의 감소로 시작되어 이베리아 반도의 고원 지대와 북부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펠리페 3세의 집권 때에는 수확의 증가와 아메리카에서 은의 도착으로 약간 회복의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1627~1628년에 제2의 심각한 위기가 정치와 경제면에서 동시에 발생했다. 그 후, 잠시 회복기를 맞았다가 1640년에 정치적으로 제3차의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그 결과, 1678~1683년에 다시 제4차의 위기를 맞이했다. 당시 스페인의 왕실 행정과 의회는 비효율적으로 운용되고, 플란데스에서의 전투는 국가를 패망의 길로 이끌었다. 결국, 북서 유럽 국가들이 발전의 계기를 맞이할 때 스페인의 농촌은 황폐하고 산업화는 정체되어 있었다.

 

17세기에 인구는 급격히 감소되어 전 세기보다 25~30%가 줄어든 7~8백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이와 같은 인구의 감소 원인은 계속된 전투에 따른 인명 손실, 아메리카로의 이주, 성직자의 증가, 전염병의 만연 및 식량 사정의 악화로 기근과 질병에 따른 사망률의 증가에 있었다. 특히, 전염병인 페스트가 1599~1606년, 1648~1654년 및 1676~1685년에 세 번이나 만연되어 안달루시아와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많은 주민이 희생되었다. 당시 그 지역 도시들에서는 주민의 반 이상을 잃게 되었으나, 부유층은 시골로 피신함으로써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특히, 17세기의 카탈루냐 지역에서는 매 25년 간격으로 4회에 걸쳐 전염병이 발생함으로써 매 세대(世代)마다 큰 영향을 받았다. 인구의 감소는 고원 지대에서도 심각했다. 카스티야는 17세기에 들어 급격히 인구가 감소했다. 전염병은 도시와 농촌을 동시에 폐허화시켰다. 부르고스와 세고비아 등 산업이 발달된 도시들도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다만, 마드리드만이 새 수도로 결정되어 인구가 25만 명으로 증가했다.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

–  김성우 / 역사비평사 / 2001.02.28

 

세번째 시기는 18세기 전반 이후 조선왕조가 종말을 고하는 시기까지 곧 조선후기이다. 이 시기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보이면서 엄청난 인명을 살상한 ‘소빙기’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대민 정책이 새롭게 변모하면서 또다른 사회구조를 만들어간 시기였다. 전체 인구의 1/4 ~ 1/3 가량을 사망에 이르게 한 ’17세기의 위기’ 국면에서 ‘사족士族 우위’ 사회는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국가는 상민층에 대한 사족층의 지배라는 간접지배방식을 더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되었다. 상민층에 대한 국가의 직접지배 기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도 국가는 사족층의 반발과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들의 특권적 지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시기는 사족층의 안정추세가 지난 시기에 이어 지속되는 한편, 상민층의 사회적 성장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출현하는 시기였다. 사족층이 자신들의 사회적 위상에 만족하고 있을 때 새로운 사회경제적 변화추세에 발맞추어 변신에 성공한 상민층의 거센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노론(老論) 일당전제가 확립되면서 다양한 지역적 · 사상적 기반을 가진 사족층의 정치참여가 배제되는가 하면, 일정 정파에 의해 관직이 독점되면서 상부구조의 활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사족층은 밑으로부터 상민층의 도전, 위로부터 노론 일당전제의 압력이라는 양대 외압에 직면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사족층은 이제 더 이상 사회변화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사회변화의 성장을 방해하는 질곡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조선시대 생활사 3

–  한국고문서학회 / 역사비평사 / 2006.03.30

 

이처럼 조선 초기에는 주택의 한두 칸에 온돌방을 설치했으나, 시대가 내려가면서 온돌방의 비중이 점차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6, 17세기에 온돌방이 확대, 보급되는 과정과 원인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명확하게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에 경험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아니었을까? 양대 전란으로 소실된 국가 기관을 다시 건축하고, 공공건물과 민간 주택을 복원 · 신축하는 과정에서 온돌방이 채택됨으로써, 단시간 내에 온돌방이 전국에 확대 · 정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함께 16, 17세기를 거치며 장기간 지속된 지구 저온화 현상도 온돌방의 보급을 촉진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소빙기라고도 하는 당시의 저온화 현상은 지구 전체를 휩쓴 대규모 현상으로, 조선 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시기의 천재지변과 기상재해에 관한 기사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당시 조정에서 자연 재해를 극복하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들이 엿보인다.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장기간 지속된 저온화 현상을 그때까지의 화로 난방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으며, 따라서 온돌방의 보급은 자연스럽게 가속화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 사회에서 온돌방은 위로는 국왕이 거처하는 궁궐부터 아래로는 허름한 초가삼간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초월해 전국적으로 대중화되었고, 오늘날까지 우리의 주된 난방 방식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중남미 문학사

–  김현창 / 민음사 / 1994.02.01

 

17세기는 스페인의 정치적 · 경제적 쇠퇴기로서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 까를로스 2세의 치세는 다음 세기의 부르봉 왕조로 전환하기 위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무기력한 통치기간에 해당된다. 신대륙에 대한 스페인의 무역독점은 군사 · 정치면의 쇠퇴와 함께 위기를 맞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이 추구하던 보호무역정책 역시 자유무역을 통해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늘리려는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의 적개심을 부추겨 위태로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러한 본국의 상황은 식민지에도 영향을 미쳐 쇠퇴 · 위기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쇠퇴의 증상은 인구 감소추세의 지속, 광산업의 커다란 위기, 해안지역에 대한 해적들의 끊임없는 습격, 스페인 본국과의 무역량 감소, 밀수의 증가 등으로 나타났다.

……

경제적인 위기는 여러 가지 복합적 요인에 의해 나타났는데 왕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싸움으로 인한 스페인 본국의 권력 약화, 농업의 몰락, 대토지 소유자의 증가, 노동력의 고갈, 식민지에 대한 무기력한 통치, 기생적인 관료체제 유지가 곧 그것들이다. 하지만 해밀톤 Earl J. Hamilton은 이상에서 열거한 스페인적인 요인들에 치우친 것보다 오히려 식민지 내적 상황에 기인하는 요소를 핵심으로 내세운다. 그는 1640년부터 급격한 하강세를 보였던 금과 은의 채굴량을 들어 광산업의 갑작스런 쇠퇴가 식민지 경제를 위기에 처하게 한 가장 커다란 요인으로 본다. 금 · 은의 고갈과 함께 식료품의 가격과 수요가 급등하고 경제체제 역시 광산업에서 농업과 축산업 위주로 급격한 전환이 이루어졌으며, 노동력의 부족과 대토지 소유자의 증가로 대규모 플랜테이션 경작이 행해지게 되었다. 한편 해적선이나 각국의 무장선에 의한 손해도 적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스페인 본국과의 교역량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미 1596년 드레이크에 의해 놈브레 데 디오스가 점령 · 파괴당했던 경험도 있었지만 해적선에 의한 피해는 더욱 늘어 30% 정도의 막대한 손실과 함께 밀수 증가를 야기시켰고 경제적 위기상황을 가중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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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에 의하면 16세기 서구에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등장 이후 17세기의 네덜란드, 19세기 영국에 이어 20세기 후반 미국이 세계체제의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네덜란드의 헤게모니 구축에 대해서 조사했고 네덜란드가 패권을 잃는 과정과 각각의 세부적인 중요 사건 또는 항목은 따로 정리하겠다.

 

네덜란드의 패권은 “17세기의 일반적 위기”로 알려진 유럽의 정치적 · 사회적 격변의 시기에 형성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한 긴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출현한 공화국은 곧 다른 나라들이 모방하려는 찬양받는 사회관계의 모델이 되었고,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자본주의 국가였다.

 

16세기 전체 시기에 스페인의 힘은 다른 모든 유럽 국가들을 크게 앞질렀다. 그러나 이 힘은 근대 통치체계로의 순탄한 이행을 관리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대신 해체되는 중세 통치체계로부터 합스부르크 황가와 교황이 무엇인가 건질 만한 것을 건져내는 데 사용되었다. 스페인과 프랑스·영국·스웨덴 왕국 등 유럽의 권력투쟁과 체계의 카오스 상황은 네덜란드 헤게모니를 등장시키고 중세 통치체계를 최종적으로 청산시켰다.

 

세계체계분석의 설명을 한 층 더 발전시켰다고 평가받는 조반니 아리기는 그의 『장기 20세기』에서  ‘체계적 축적순환’이라는 논리를 통해 새롭게 등장하는 잠재적 헤게모니 국가가 앞선 축적체제와는 다른 새로운 비용 절감이 가능한 축적 모델을 형성하여, 이를 중심으로 세계경제가 재편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세계헤게모니 질서의 토대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첫 세계 헤게모니인 네덜란드는 ‘보호비용’을 내부적으로 통제함으로써 16세기에서 17세기 초에 세계의 상업을 통제하는 독보적 지위에 섰다. 이를 이어 영국이 자본주의의 중심을 ‘생산’으로 이전시키고 이로서 이른바 ‘산업혁명’에 기반하여 ‘생산비용’을 내부화한 자유무역 제국주의이자 영토 제국주의의 헤게모니를 건립함으로써 19세기를 자신의 헤게모니 시대로 이끌었다. 20세기 들어서면 미국이 ‘거래비용’을 내부화한 ‘법인자본주의’라는 근대 기업형태를 건립하고 ‘뉴딜’의 체제를 전지구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초국적기업에 기반한 ‘탈식민지적’ ‘자유기업’ 세계경제를 건립하여 세계 헤게모니를 계승하였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648

* 관련 글 : 17세기 위기 – 소빙하기(소빙기) 절정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분석

–  이매뉴얼 월러스틴 / 이광근 역 / 당대 / 2005.03.17

 

…… 그러나 국가가 국제영역에 대한 지배를 실현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 매우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하나는 세계경제를 세계제국으로 전화시키는 방식이며, 또 하나는 이른바 헤게모니를 세계체제에서 달성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 그리고 왜 어떤 국가도 근대 세계체제를 하나의 세계제국으로 변모시키지 못하였는지, 그러나 각기 다른 시기에 몇몇 국가는 헤게모니를 달성하였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제국은 전체 세계체제를 관장하는 단일한 정치적 권위가 존재하는 구조를 뜻한다. 지난 500년 동안 이러한 세계제국을 건설하려는 심각한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첫번째 사례는 16세기 찰스5세의 시도이다(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도 추구되었으나 그 정도는 훨씬 약화되었다). 두번째 사례는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시도였으며, 세번째 사례로는 20세기 중반 히틀러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상 세 가지 시도는 모두 강력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모두 격퇴되었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한편 또 다른 세 종류의 패권은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였지만 헤게모니를 달성하였다. 첫번째 사례는 17세기 중반의 연합주(the United Provinces, 오늘날의 네덜란드)였고, 두번째는 19세기 중반의 대영제국(the United Kingdom)이었다. 그리고 세번째는 20세기 중반의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이었다. 이것을 헤게모니라고 지칭할 수 있는 근거는 일정 기간 동안 이 국가들은 국가간 체제의 게임의 룰을 확립할 수 있었고, (생산 · 상업 · 금융 분야에서) 세계경제를 지배하였으며,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면서도 자신들의 뜻을 정치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었고, 세계를 논할 문화적 언어를 공식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

–  지오바니 아리기, 비벌리 J. 실버 / 최홍주 역 / 모티브북 / 2008.10.17

 

우리가 유럽의 주권 국가 체계와 관련하여 네덜란드의 패권을 논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한 이 체계의 공식적인 수립으로 귀결된, 장기간에 걸친 투쟁에서 네덜란드인들이 선도적인 역활을 했기 때문이다.

……

네덜란드의 해상 강점은 이베리아인들의 해군력을 약화시키는 뿐 아니라, 발트 해 연안의 공급품에 대한 네덜란드 연방의 독점적 지배를 확립하고 재생산하는 데에도 중요했다. …… 네덜란드의 발트 해 무역 지배가 과다한 유동성의 근원이었고, 과다한 유동성이 유럽의 권력 투쟁에서 네덜란드가 가진 경쟁 우위의 가장 중요한 단일 근원이었다.

네덜란드 무역의 수익성은 두 가지 주요 상황에 의해 결정되었다. 하나는 치열한 유럽의 권력 투쟁 자체였다. 이 싸움이 육상과 해상에서 더 치열해질수록, 다른 사정이 같다면 발트 해 연안에서 공급되는 곡물과 해군 군수품에 대한 수요와 이 공급품에 대한 독점적 지배로 인해 네덜란드인들에게 생기는 이익도 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합스부르크가(Habsburg家)가 아메리카의 은을 이용하여 유럽에서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무익한 시도에 집착할수록,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적인 네덜란드인들에게 은괴를 쌓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 무역의 수익성을 결정했던 다른 주요 요소는 발트 해 무역에서 거둔 큰 이익을 유동성의 형태로 보유하고, 이 유동성을 이용하여 발트 해에서 지속적으로 경쟁자를 제거하고, 암스테르담을 유럽 중심적 세계 경제의 상업 및 금융 중계 중심지로 만드는 네덜란드인들의 성향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의 이 노력이 성공할수록 발트 해 연안의 공급품뿐 아니라, 그들의 적인 스페인인들이 남미와 북미에서 유럽으로 가져오는 은의 공급에 대해서도 지배를 강화했다. 브로델의 말처럼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발트 해 연안, 양쪽에서 부를 쌓았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간과한다면, 한편의 밀과 다른 한편의 아메리카 은괴가 서로 뗄 수 없는 역활을 한 과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암스테르담을 유럽 중심 세계 경제의 상업 및 금융 중계 중심지로 만든 네덜란드의 성공은 과거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 특히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성취를 더 큰 규모로 다른 체계 환경 속에서 재현한 것이었다. 바이얼리트 바버(Violet Barbour)에 따르면, “한 도시가 현대 국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진짜 무역 · 금융의 제국을 쥐고 있었던” 것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

베스트팔렌 조약은 네덜란드 패권의 정점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스페인에 대항하여 8년 동안 싸워온 네덜란드인들에게 그들의 주권을 최종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부와 힘의 기반이었던, 경쟁하는 국민 국가들로 구성된 유럽 체계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그러나 베스트팔렌 조약은 국가 간 권력 투쟁의 조건도 변화시켰고, 이를 통해 네덜란드 패권의 한계도 드러냈다.

……

네덜란드 패권의 사회적 기초는 “17세기의 일반적 위기”로 알려진 체계 전체에 걸친 정치적 · 사회적 격변의 시기에 형성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한 긴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출현한 공화국은 곧 다른 나라들이 모방하려는 찬양받는 사회관계의 모델이 되었다. “북부 네덜란드는 르네상스식 궁전을 거부한 첫 번째 유럽 국가였는데,” 르네상스식 궁정은 유럽 전역에 걸쳐 호사스럽게 커져 있었고, 매관매직으로 사치를 더하면서 “사회의 몸 속 깊숙이 …… 증식 빨판을 뻗은” 수많은 기생적 관료조직을 낳았다. 네덜란드 공화국을 모방하려는 노력(즉, 군주국의 특색을 없애고 능률화된 중상주의 국가를 지향)은 19세기 후반, 전 유럽에 걸쳐 서로 다른 정도의 성공을 거두며 경주되었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이처럼 네덜란드 상업체계의 범위가 지역적인 것에서 전지구적인 것으로 팽창한 것은 세 가지 연관된 정책의 결합에 의해 추진되고 지탱되었다. 첫번째 정책은 암스테르담을 유럽과 세계상업의 중심 집산지로 변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네덜란드 자본가계급은 암스테르담에 특정 시기 유럽과 세계상업의 가장 전략적인 공급물이던 물품의 보관과 교환을 집중시킴으로써, 유럽 세계경제의 불균형을 조절하고 그로부터 이윤을 끌어내는 전례 없는 이례적 역량을 발전시켰다.

……

그러나 네덜란드인들이 다른 집산지들 또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직접 교환으로부터 암스테르담으로 상품교역의 흐름을 전환시키려는 시도를 위해 꺼내 든 훨씬 더 중요하지만 덜 가시적인 무기는 유동성에 대한 그들의 우월한 통제력이었다. 이 덕에 그들은 그들의 실질적 또는 잠재적 경쟁자들에 대해 수십 년 동안 입찰 선매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듯 그들만이 계속 증가하는 생산자들의 화폐수요를 활용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현금과 선지급의 대가로 저가에 공급물을 얻을 수 있었다(cf. Braudel 1982: 419~20).

이로부터 우리는 네덜란드 자본가계급이 지역적 상업우위로부터 전 지구적 상업우위로 상승하는 것을 촉진하고 지탱시켜 준 축적전략의 두 번째 구성요소로 나아간다. 이 구성요소는 암스테르담을 세계상업의 핵심적 창고일 뿐 아니라 유럽 세계경제의 중심적 화폐시장과 자본시장으로 변환시킨 정책이었다. 이 측면에서 핵심적인 전략적 변화는 암스테르담에 첫 상시적 주식거래소가 개설된 것이었다.

 

암스테르담 거래소(Amsterdam Bourse)가 첫번째 주식시장은 아니었다. 다양한 종류의 주식시장이 15세기에 제노바에서, 라이프치히 정기시에서, 그리고 많은 한자동맹의 도시들에서 흥성하였고, 국가 대주(貸株)거래는 그 훨씬 이전에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서 흥정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증거가 지중해가 주식시장의 요람임을 보여 준다. …… 그러나 암스테르담의 새로움은 그 시장의 거래량과 유동성, 그리고 그 명성, 그리고 거래의 투기적 자유였다”(Braudel 1982: 100~1 / 브로델 1996: 132).

……

암스테르담을 세계상업과 세계금융의 중심적 집산지로 변환시키는 것을 추진한 정책을 보완하고 지탱한 제3의 정책이 없었다면, 이런 팽창의 선순환이 실제 거둔 놀라운 성과를 낳는 것은 물론, 이륙은 더더욱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제3의 정책은 거대한 해외 상업 공간에 대한 배타적 무역과 배타적 주권을 행사하도록 네덜란드 정부가 공인한 대규모 합자회사를 설립한 것이었다. 이런 회사는 이윤과 배당을 거두어 들일 것으로 상정되었을 뿐 아니라, 네덜란드 정부를 대신해 전쟁형성과 국가형성 활동도 수행할 것으로 상정된 기업체들이었다.

……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1600년에 특허장을 받았으며, 다른 영국의 회사들은 그보다 훨씬 더 앞섰다. 그러나 1602년 특허장을 받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는 17세기 전체에 걸쳐서 이런 재생의 최대의 성공자였다. 영국이 그것을 모방하는 데 한 세기가 걸렸고, 그것을 지양하는 데는 그 이상이 걸렸을 정도로 그 성공은 대단했다(Braudel 1982: 449~50).

왜냐하면 네덜란드 공인회사들은 세계를 포괄하는 상업과 고도금융이 암스테르담으로 계속 집중되는 것의 수혜자이자 그 도구였기 때문이다 – 그들이 수혜자였던 것은, 이런 집중화 덕에 그들은 발전단계에 따라 그리고 재운의 변동에 따라, 잉여자본의 처리 또는 획득을 위한 출로나 원천을 포함하여, 자신들의 산출물을 위한 고수익 출로와 자신의 투입물 획득을 위한 저렴한 원천에 대한 특권적 접근권을 허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인회사들은 또한 네덜란드 상업 · 금융망의 전지구적 팽창을 위한 강력한 도구이기도 했으며,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네덜란드인들의 전반적인 축적 전략에서 차지하는 그 역활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 그러나 동인도회사는 시대의 획을 긋는 성공이었고, 그것이 택한 축적 전략 또한 그랬다. 1610~20년경에서 1730~40년경까지 한 세기 이상 동안, 네덜란드 상인계급 상층은 줄곧 유럽 자본주의 엔진의 지도자이자 지배자였다.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  로버트 B. 마르크스 / 윤영호 역 / 코나투스 / 2007.04.13

 

이처럼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여러 국가들의 흥망성쇠가 이어졌다. 16세기 후반 스페인은 점차 세력을 잃기 시작했고 포르투갈도 유럽에서 프랑스나 스페인을 상대하거나 아시아의 해상에서 네덜란드에게 도전하기에는 세력이 너무나 미약해졌다. 유럽에서 최초로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모두 공략하기 위해 무역회사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네덜란드는 프랑스와 영국이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던 17세기에 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절정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상비군을 유지할 만큼 충분한 인력을 갖추지 못했던 네덜란드는 결국 유럽에서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동맹을 맺는다. 18세기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두 국가였다.

……

스스로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의 확장을 자처하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가톨릭세력과 극도로 대립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무역과 전쟁은 긴밀하게 연계된 것으로 여겼다. 161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총독은 이사회가 보내는 편지에 이런 내용을 적었다. “지금까지 경험에 의하면 아시아무역에서는 반드시 병력과 무기를 동원한 보호가 뒤따라야 합니다. …… 따라서 전쟁이 없는 무역은 이루어질 수 없으며 무역이 없는 전쟁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이 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행하여 포르투갈로부터 말라카를 빼앗았고 자바를 점령하여 사탕수수를 생산할 수 있는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중국의 영토이던 대만에도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했다.

 


부의 역사

–  권홍우 / 인물과사상사 / 2008.06.09

 

네덜란드는 운도 좋았다.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유럽의 전반적인 물가상승에서 가장 큰 혜택을 입었다. 주요 품목 가운데서도 가격이 가장 많이 오른 곡물을 안정적으로 생산한 덕분이다. 특히 에스파냐의 곡창 지대인 카스티야 지방에서 1506년 대흉작이 발생해 곡물 가격이 한 해 96%씩 뛰던 16세기 초반 네덜란드에는 돈이 밀려들어왔다.

……

16~17세기 황금기를 구가한 네덜란드를 역사상 최고의 부자나라로 꼽는 이유는 무수히 많다. 한창 때 네덜란드는 서구 세계 선박의 절반 이상을 보유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주요 국가 중에서 부자 순위 2위인 나라보다 국민소득이 두 배 이상 높았던 국가도 네덜란드가 유일하다. 산업보다는 금융, 국내보다는 해외투자에 주력한 탓에 정점에서 하강한 17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해외투자는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에 가까운 약 15억 길더에 달했다. 지구촌 곳곳에 자본을 깔았다는 오늘날 미국의 해외 투자는 국내총생산의 절반에 못 미친다.

……

근대 금융의 모든 것도 네덜란드에서 나왔다. 심지어 투기로 인한 대규모 불황까지 네덜란드가 가장 먼저 겪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극찬한 네덜란드의 번영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 바로 ‘사람’이다.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기에 네덜란드에는 사람이 모여들고 자유의지로 바다를 메웠다.

……

레콘키스타 이후 종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생산과 금융을 담당하는 유대인과 무어인을 내친 스페인과 대조적으로 네덜란드는 종교적 관용을 베푼 덕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유대인이 전혀 차별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술을 지녔거나 지식인인 경우에는 환영까지 받았다.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네덜란드는 유대인뿐 아니라 청어 잡이 일을 위한 독일인 어부에서 종교전쟁인 프랑스의 위그노전쟁과 독일을 중심으로 벌어진 30년 전쟁을 피하려는 신교도와 가톨릭교도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금과 은이 많아야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믿어 귀금속의 유출을 엄격하게 규제했던 시대에 네덜란드는 금과 은의 자유로운 유통과 유출을 허용한 유일한 국가였다.

……

네덜란드의 일본 진출은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직후부터 시작돼 1609년에는 나가사키 지역의 히라도에 상관(무역사무소)을 개설했다.

……

1641년 데지마로 이전한 네덜란드 상관은 1854년 일본의 개항 직후 폐쇄될 때까지 일본의 대유럽 무역을 독점하며 짭짤한 수익을 거뒀다. 일본과 네덜란드 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본부가 있던 자카르타 사이를 오간 선박 수가 213년 동안 707척에 이르렀다. 일본의 주요 수출품은 은으로 일본산 은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도 언급했듯이 네덜란드를 매개로 인도와 중국은 물론 유럽에도 퍼졌다.

……

바로 이 대목을 살펴보면 뚜렷한 흐름 하나를 읽을 수 있다. 유대인의 방랑과 부의 이동 경로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에스파냐를 떠나 머물렀던 포르투갈 · 네덜란드 · 영국이 하나같이 경제적인 번영을 맛봤다는 사실을 우연으로 보기에는 또 하나의 예가 남아 있다. 미국의 유대인이다. 미국 유대인의 주류는 에스파냐에서 가지가 갈라져 나간 네덜란드나 영국의 유대인과 달리 독일과 러시아, 동유럽의 박해를 피해 19세기 말 대규모 이주한 사람들이어서 이동의 동기와 경로를 동일선상에 놓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박해를 받아 자유롭게 생각하고 믿으며 일하기 위해 이동해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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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체제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신성동맹(Holy Alliance)과 4국동맹(Quadruple Alliance, 신성동맹 + 영국)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오스트리아의 재상이었던 메테르니히(Klemens, Furst von Metternich)가 주도했기 때문에 ‘메테르니히 체제’라고도 한다. 크게 보면 영국 헤게모니의 도구로 작동한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빈 체제의 기간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장기 19세기(The long 19th century)’의 첫 번째 기간인 1789년 ~ 1848년의 ‘혁명의 시대(The Age of Revolution)’와 칼 폴라니가 말한 1815년에서 1914년에 걸친 유럽의 ‘100년 평화’와 겹친다. 폴라니에 따르면, ‘100년 평화’의 거의 3분의 1세기 동안인 빈 체제 시기의 적극적인 평화 정책에 이념적 원동력과 강제력 모두를 제공한 것이 바로 “혈연과 신의 은총의 계서제”로 형성된 신성동맹이었다. 신성동맹의 군대는 유럽 전역을 어슬렁거리면서 소수자들을 짓밟아버리고 다수자들을 억눌렀던 것이다.

폴 슈뢰더(Paul W. Schroeder)에 따르면, 당시 유럽의 지배 세력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또 다른 혁명이 아니라 또 다른 전쟁의 발발이었다. 혁명을 막기 위해 평화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전쟁을 막기 위해 평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모두 평화를 원했기에 모두 오스트리아를 도왔다고 했다.

 

빈 체제는 1848년 유럽 혁명으로 붕괴되었다. (1848년 혁명 :

 

프랑스에서는 2월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3월 혁명으로 메테르니히가 실각하였고,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던 중부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입헌정부가 수립되었다. 독일의 영방 국가 대표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통일 문제와 헌법 제정을 협의하였고, 이탈리아에서도 통일운동이 일어났다. 이로써 옛 질서를 유지하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하기 위한 빈 체제는 막을 내렸다.

 

미국의 독립선언에서 나폴레옹 전쟁까지, 국가 간 투쟁과 국가 내 투쟁의 과정에서 베스트팔렌 체계의 원칙, 규범, 규칙이 광범위하게 침해당했다. 특히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아래로부터 반역을 도발하고 위로부터 제국적 지배력을 부과함으로써 유럽 통치자들의 절대적 지배권들을 짓밟았다. 동시에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유럽 대륙 대부분에 걸쳐서 몰수, 봉쇄, 지령경제를 통해 비(非)전투자들의 소유권과 상업의 자유를 침해하였다.

영국은 절대적 지배권들의 침식에 저항하고 베스트팔렌 체계를 복구시키려는 싸움에서 주로 왕조 세력들의 거대한 동맹을 이끌면서 처음으로 헤게모니적이 되었다. 베스트팔렌 체계는 1815년 빈 회의와 뒤이은 1818년 엑스라-샤펠 회의(Congress of Aix-la-Chapelle)와 더불어 성공적으로 복구되었다. 이 시점까지 영국 헤게모니는 네덜란드 헤게모니의 복제판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이 제국을 자임하려는 합스부르크 에스파냐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막 태어나려 하던 국가간 체계를 성공적으로 이끈 것과 마찬가지로, 영국인들은 제국을 자임하려는 나폴레옹 프랑스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막 소멸하려 하던 국가간체계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달리 영국은 계속해서 국가간체계를 지배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계속되는 혁명적 격변이 열어 놓은 새로운 권력 현실에 적합하게 그 국가간체계를 크게 재편하는 일을 맡았다. 그렇게 등장한 체계는 존 갤러거와 로널드 로빈슨이 자유무역 제국주의 – 베스트팔렌 체계를 확장하고 지양한 통치의 체계 – 라 부른 것이었다.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100년 평화’를 가능하게 했던 배경으로 ‘오트 피낭스(high finance)’를 꼽았다. 오트 피낭스는 원래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글로벌 거대 금융자본을 의미하는데, 로스차일드가는 탐욕스러운 자본가였지만 자신의 탐욕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막고 평화체제를 지켜냈다는 것이다. 주로 ‘100년 평화’의 후반기에 나타난 상황이지만 신성동맹 또한 로스차일드의 도움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신성동맹의 특등 동맹국”이라는 당시의 쓴소리도 있었다.

 

빈 체제에서 유럽의 강대국들이 정기적으로 회동해 국제정치 문제를 토의한다고 합의한 것은 유럽 외교사에 있어서 최초의 일이며 획기적인 일이다. 더 나아가 정기적인 회의가 개최되지 않는 시점에서도 서로 유럽의 문제를 상의한다고 약속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이 규정은 국제사회의 조직화를 위한 첫 시도였으며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국제정치의 강대국 중심을 명백히 규정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국제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를 이미 예고한 것이다.

거대한 전환

–  칼 폴라니 / 홍기빈 역 / 길 / 2009.06.30

 

1815년 이후 급작스럽고도 완벽한 변화가 나타났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동과 그 당시 막 일어나고 있던 산업혁명의 물결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평화로운 영리 활동을 전 세계적인 보편적 이익으로 확립하려는 강력한 흐름이 나타났다. 메테르니히는 유럽인들이 원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평화라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 폰 겐츠(Friedrich von Gentz)는 조국을 위한 전쟁을 불사하는 애국자들이야말로 새로운 종류의 야만인들이라고 불렀다. 교권과 속권 모두가 유럽의 탈민족화에 착수했다. 이들의 주장이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당시 처음으로 나타난 국민전이라는 전쟁 형태의 잔혹성 때문이기도 했고 또 당시 많은 나라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움트면서 평화의 가치가 엄청나게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새로운 “평화의 이해”의 담지자들은 보통 그것으로 가장 큰 혜택을 받게 되어 있는 이들, 즉 세습 왕조의 군주들과 봉건 권력자들의 담합체였으니, 이들은 당시 유럽 대륙을 휩쓸고 있었던 호전적 애국주의의 혁명적 물결로 인해 왕실 재산의 위치마저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거의 3분의 1세기 동안 적극적인 평화 정책에 이념적 원동력과 강제력 모두를 제공한 것이 바로 신성동맹이었다. 신성동맹의 군대는 유럽 전역을 어슬렁거리면서 소수자들은 짓밟아버리고 다수자들은 억눌렀던 것이다. 그런데 1846년에서 1871년의 기간-“유럽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웠던 4반세기의 하나”-에 들어오면 그러한 반동 세력은 사그라들었고 산업주의의 힘이 증가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평화의 확립은 좀 더 불안정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보불전쟁이 끝난 뒤의 4반세기 동안 우리는 평화에 대한 이해가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보았는데, 이를 표상하는 것이 바로 유럽 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라는 강력한 실체였다.

……

신성동맹은 이를 달성하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했으며 결국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여러 도구의 도움을 빌리기로 했다. 유럽의 왕들과 귀족들은 국제차원에서 일종의 친족 연대를 형성했고, 로마 교회는 남유럽과 중유럽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에서 가장 천한 신분에 걸쳐(펼쳐진 자신들의 거대한 교회 조직을 통해) 신성동맹을 위해 자발적으로 복무하는 공무원 조직을 제공했다. 혈통과 신의 은총으로 구성된 사회적 위계 서열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 전 유럽의 작은 마을에까지 촘촘히 효력을 미치는 지배 도구를 형성한 것이다. 이제 여기에다 물리력만 갖추어 보충한다면 대륙 전체에 평화를 보장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

지금까지 본 것처럼 ‘백년 평화’의 배경을 제공했던 것은 새로운 경제생활의 조직이었다. 처음 기간에는 나폴레옹 시대의 대격변에서 본 바 있듯이 당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중간 계급이 오히려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혁명 세력이었고, 이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동요(動搖)의 요인과 싸우면서 신성동맹이 그 반동적인 평화를 조직했다. …… 신성동맹 체제 아래에서는 봉건제와 크고 작은 군주들이 가톨릭 교회의 영적 · 물질적 권력의 지원을 얻어 그러한 사회 기관의 역활을 했고, 유럽 협조 체제의 기간 동안에는 국제 금융 그리고 그것과 동맹을 맺은 각국 내의 은행 체제들이 그 역활을 맡았다. 물론 이러한 시대 구분을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는 없다. 1816 ~ 1846년의 30년 평화의 기간에도 이미 영국은 평화로운 영리 활동의 이익을 관철시키려 노력했고, 신성동맹 또한 로스차일드의 도움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베스트팔렌 체계의 본래적 핵을 구성한 바 있는 왕국들과 과두제 국가들의 집단에 새로운 일군의 국가들이 결합하였다. 이 새로운 집단은 주로 신구 제국들로부터 독립하는 데 성공한 재산 소유자들의 민족 공동체가 통치하는 국가들로 구성되었다. 국가 간 관계는 이렇게 해서 군주들의 개인적 이익 · 야심 · 감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민족 공동체들의 집단적 이익 · 야심 · 감정에 좌우되었다.

이런 민족주의의 “민주화”와 더불어 단일 국가, 즉 영국에 전례 없이 세계권력이 집중되었다. 1776 ~ 1848년의 혁명적 격동에서 출현한 확대된 국가간체계 내에서 영국만이 세계 모든 지역의 정치에 관여된 동시에, 더욱 중요하게는 이 대부분 지역에서 지배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전지구적 세력균형의 종복이 아니라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앞선 자본주의 국가들의 목표가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그 시대의 주도적 자본주의 국가에 의해 완전히 실현되었다.

 

전지구적 세력균형을 더욱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영국은 베스트팔렌 조약 때부터 작동해 온 유럽 강국 사이의 느슨한 협상체계를 팽팽하게 만들어 내는 일을 주도했다. 그 결과 출현한 것이 유럽협조체제였는데, 이는 처음부터 주로 대륙의 세력균형을 지배하는 영국의 도구였다. 빈 협약 체결 이후 30여 년간 유럽협조체제는 신성동맹을 형성한 “피와 은총의 계서제”에 비해 유럽 대륙 정치에서 부차적인 역활을 맡았다. 그러나 민주적 민족주의의 압력이 거세져서 신성동맹이 해체되자, 유럽 협조는 곧바로 유럽의 국가 간 관계를 조절하는 주요 도구로 등장했다.

 


세계외교사

–  김용구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6.05.25

 

신성동맹(Holy Alliance, Sainte Alliance)의 기본 구상은 유럽 공법을 기독교의 원칙에 따라 재건하고 기독교의 모든 종파를 통합해 그 위에 국제평화를 이룩하려는 데에 있다. 이런 기본취지만을 본다면 신성동맹은 특이한 조약은 아니다.

그로티우스(H. Grotius)의 핵심 사상도 교파를 초월한 세계 교회주의로 국제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이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은 소박한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해 세계질서를 개편하려고 한 것이며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도 전승국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성동맹은 러시아의 사상과 국제정치적 입장을 대변했기 때문에 유럽 사회에서 문제가 된 것뿐이다.

 

워털루 전투를 끝으로 나폴레옹 전쟁은 종식됐으나 전후의 국제정치 질서를 어떤 원칙으로 재건하느냐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국은 4국 동맹을 형성해 프랑스를 억제한다는 매우 현실정치적인 구상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의 개편안이나 평화안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러시아뿐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에 평화를 다시 찾아 준 구세주로 간주됐으며 방대한 군대가 서유럽에 주둔하고 있어서 절대적인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 알렉산드르는 군주 중의 군주로 추앙되었고 그가 그의 군대와 더불어 귀국하게 되면 서유럽에는 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이 유럽 정가에 팽배하였다.

……

당시 유럽 사회에는 기독교 부흥에 관한 과격한 이론들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런 이론들의 핵심은 자비에 대한 강조, 광범한 국제조직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이 세상에 낙원을 수립해야 된다는 천년 평화설에 대한 집념이었다.

……

빈 회의 결정은 반(反)민족주의적이며 반동적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그 결정들은 당시의 정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반민족주의적인 것은 19세기 초 유럽 사회가 ‘왕위와 제단(祭壇)의 단결’로 형성됐기 때문이다. 유럽 사회에서 정치운동으로서의 민족주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848년 2월 혁명 이후의 일이다. 또 빈 회의 당시 유럽 사회는 기본적으로 농업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어서 빈 회의의 결정은 경제 문제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대부분의 결정들은 거의 국경선에 관련된 것으로 근대국가의 초기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유럽 제국(帝國)을 건설하면서 ‘법 앞의 평등’이라는 근대적인 사상을 전파시켰다. 빈 회의의 결정들은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유럽사회 저변에 파급된 중세질서 저항의식을 도외시하였다. 자유주의 헌법을 요구하는 변혁을 수용할 수 없는 경직된 결정들이었다. 따라서 이미 혁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

유럽협조라고 지칭되는 국제정치현실은 특히 나폴레옹 전쟁 말기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유럽 문제는 유럽 열강의 합의로 해결해야 된다는 국제정치적인 관행이 확고히 성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행을 메테르니히는 ‘동맹’, ‘유럽’의 용어로, 그리고 카슬레이는 ‘연방’(confederacy), ‘대동맹’ 등의 용어로 표현하곤 하였다.

유럽 열강의 협조라는 정치적인 관행은 1815년 11월 20일 4국 동맹 조약 제6조의 규정으로 국제법적인 제도가 되었다. 소위 ‘회의외교’를 정착시킨 이 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 조약의 집행을 원활하게 하고 보장하기 위하여, 그리고 현재 세계의 행복을 위하여 4군주들을 이처럼 밀접히 단합시키고 있는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체약국들은 군주 자신들이 직접 주최하거나 또는 그들 대신들에 의해서, 정기적으로 모임(meetings)을 소집하여 그들의 공동이해를 협의하고 그리고 [이런 정기적인] 모임과 모임 사이에 모든 국가들의 번영을 위하여 또 유럽의 평화유지를 위하여, 가장 유익하다고 간주된 조치들을 고려하는 데 합의한다.

유럽의 강대국들이 정기적으로 회동해 국제정치 문제를 토의한다고 합의한 것은 유럽 외교사에 있어서 최초의 일이며 획기적인 일이다. 더 나아가 정기적인 회의가 개최되지 않는 시점에서도 서로 유럽의 문제를 상의한다고 약속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이 규정은 국제사회의 조직화를 위한 첫 시도였으며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국제정치의 강대국 중심을 명백히 규정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국제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를 이미 예고한 것이다.

 


국제정치학 방법론의 다원성

–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 사회평론 / 2014.04.18

 

세력 균형에서 협조 체제로 – 폴 슈뢰더(Paul W. Schroeder)의 근대 유럽 외교사

– 안두환 /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요약하자면,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은 “짧은 시간에 전쟁과 평화의 끝없는 반복을 초래하며 한 세대의 지도자 집단으로 하여금 학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당연히 역으로 “만약 이러한 학습의 과정이 1814년 이전에 동맹국의 승리로 중단되었다면 어떠한 안정된 평화 체제도 불가능했을 것이며, 이전의 자기파괴적인 국제정치의 법칙과 형태는 지속되었을 것이다.” “알맞은 시간과 계속된 실패에 운이 따랐고”, 이 덕분에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의 네 열강은 이전 세력 균형 체제의 문제를 “간파했고 지혜를 터득했다.” 특히 러시아와 영국은 7년 전쟁 이후 급속히 파괴되었던 매개 정치를 되살리기 위해 각기 자제했고 개입했다. 중동부 유럽을 정치적 평형에 맞추어 되살려 놓은 빈 회의의 결정은 이러한 패권의 선량한 사용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이러한 변화로부터 가장 덕을 많이 본 나라는 오스트리아였지만, 다른 나라가 아니라 오스트리아였기에 유럽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Schroeder 1990e, 15-21; 1994a, 527, 578, 580-581; 2000, 245-246).

1815년 이후를 다루는 책의 나머지는 빈 체제의 작동을 유럽과 근동 지역으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다. 우선 유럽과 관련되어 슈뢰더는 메테르니히 체제외 빈 체제의 관계 설정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여기서 슈뢰더의 주된 비판 대상은 키신저의 『복원된 세계』로 대표되는 근래 수정주의 해석이다. 후자는, 앞서 정리한 바와 같이, 빈 체제를 프랑스 혁명에 따른 변화의 요구를 무참히 짓밟고 구 체제의 영속을 꾀한 반동으로 규정하고 메테르니히 체제에 종속시킨 전통적인 해석을 비판하며 등장했다. 이에 따르면 빈 체제는 “자유와 정의 그리고 진보를 희생했지만 질서와 평화를 복구했기에” 긍정적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대해 슈뢰더는 1815년 이후 대륙의 열강의 지배 세력이 “혁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평화를 추구했다”라는 일반적인 이해는 “사실과 매우 가깝기에 오히려 근저에 있는 진실과 통찰을 가리고 연구자로 하여금 더 깊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에 뻔한 거짓말이나 말도 안되는 왜곡보다 종종 더 해로운 역사의 일보직전의 성과(near miss)중 하나”라고 비판한다. 1815년 이후 유럽의 질서에 대한 모든 논의의 초점은 메테르니히 체제가 아니라 빈 체제에 있어야 한다(Schroeder 1994a, 575-576, 666, 802; 1994c, 148, n. 84).

 

슈뢰더의 논지를 시기순으로 보자면, 첫째, 빈 회의 당시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은 민중의 요구는 매우 미약했다. 왕정 복고를 위해 혁명 정신을 억누를 필요조차 없었다. 둘째, 빈 회의 다음 5년은 “복고의 시대”가 아니라 “회복의 시대”였다. 빈 체제는 모든 유럽의 나라로 하여금 외치가 아니라 내치에 힘을 쏟을 수 있도록 했다. 셋째, 1820년 이래 유럽 전역에서 터진 크고 작은 내란은 빈 체제의 억압이 아니라 개혁의 실패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다. 넷째, “빈 회의 이후 시대의 눈에 띄는 특징은 민중 반란을 근절할 목적으로 연합한 보수주의 정부의 열정과 의지 그리고 냉혹이 아니라”, “대부분의 정부가 보여준 방종과 비효율성이다.” “모든 유럽의 군주는 자신의 국민은 물론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물리력을 사용하기를 극도로 꺼려했다”. 1848년 혁명의 시작도 이와 같았다. 다섯째, 메테르니히 체제가 실용주의에서 반동주의로 본격적으로 이행된 기점은 1848년 혁명의 충격 속에서였다(Schroeder 1994a, 577, 586-628, 666-726; 1962a, 237-266).

정리하자면, 슈뢰더에 따르면, 당시 유럽의 지배 세력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또 다른 혁명이 아니라 또 다른 전쟁의 발발이었다. 혁명을 막기 위해 평화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전쟁을 막기 위해 평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모두 평화를 원했기에 모두 오스트리아를 도왔다. 프랑스는 1820년대 초반 스페인에서, 러시아는 1820년대 중반 이탈리아와 그리스, 그리고 1830년대 초반 독일에서 혁명의 방지가 아니라 평화의 유지를 위해 오스트리아와 협력했다. 유럽에서 오스트리아의 지위와 역활은 의문시되지 않았으며, 이에 슈뢰더는 유럽은 오랫동안 안정될 수 있었다고 결론 내린다(Schroeder 1994a, 606-628, 637-664, 691-709, 712-716).

 


세계사 사전

–  황보종우 / 청아출판사 / 2003.09.01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빈 회의를 중심으로 전쟁처리와 복구를 위한 19세기 전반의 유럽 국제관리 체제. 그 중심은 1814년 쇼몽 조약을 통한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4국 동맹과 1815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세 군주가 체결한 신성동맹이다. 이 체제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이 유럽에 끼친 혼란을 정리하고 군주제를 유지하며 강대국의 세력균형을 통한 안정을 추구하는 복고적 정통주의를 표방하였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수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하여 자유주의 사상과 이탈리아, 독일의 통일운동에 탄압을 가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라틴 아메리카 각국이 독립하고 1830년 7월 혁명, 그리스와 벨기에 독립으로 빈 체제는 약화되었다. 결국 1848년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빈 체제는 무너졌다.

 


개설 철학사

–  中村雄二郞 등 / 백산서당 / 1983

 

1815년 나폴레옹이 결정적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메테르니히가 주도하는 빈 회의가 매듭을 보아 다시 신성동맹이 체결되었다. 이에 유럽 대륙의 국가들은 프랑스 혁명 발발 이전의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의 재현을 지향하는 강력한 반동적 정치 체제로 재편되었다. 즉 세력 균형 정책 위에서 성립되었던 이른바 메테르니히 체제가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고, 독일도 옛날의 상태로 되돌아가 오스트리아를 장(長)으로 하는 독일 연방으로 되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철저히 탄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동 정책도 역사의 톱니 바퀴를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즉 부르주아의 성장, 발전이 기세등등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이미 1770 ~ 1780년 대에 개시되었던 산업혁명이 착실히 진행 중이었으며 그 생산력은 급속한 상승선을 그리고 있었다. 지독한 반동체제 하에 있던 대륙에도 이 산업혁명의 파도가 점점 밀어 닥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1830년에 7월 혁명이 일어나 ‘부르주아의 왕’인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메테르니히 체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7월 왕정 하의 프랑스에서는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부르주아의 자립적 성장이 현저히 억압받고 있던 독일도 40년 대에는 라인 하류지역이 산업혁명의 단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일어나 전 유럽에 파급되었던 이 산업혁명은 고도의 근대적인 공장 생산양식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이에 의해 근대자본주의 · 근대시민사회의 발전은 이른바 정점에 달하게 되었다. 독일 등의 경우에서는 봉건 구세력과의 타협적 색체가 농후했어도, 어쨌든 경제는 물론 정치, 사회전반에 걸쳐 산업 부르주아의 패권이 확립되었다. 사상면에서 이러한 산업 부르주아의 의향을 가장 잘 표명한 것이, 영국에서는 공리주의와 철학적 급진파였으며, 프랑스에서는 실증주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근대시민사회를 발전의 정점으로까지 끌어 올리는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부르주아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적대자를 정면으로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만들어 낸 근대적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다수의 노동자, 프롤레타리아였다. 1832년 유혈혁명이 아닌 ‘합의의 혁명’에 의해 영국의 부르주아가 선거법 개정법안을 쟁취했을 때, 노동자 계급은 그것이 단지 부르주아만의 선거권에 불과한 것을 알고 이에 격분하여 1834년에는 제네스트로, 1836년 부터 1848년까지는 3차에 걸친 차티스트 운동으로 이에 반항했다. 프랑스에서는 1848년의 2월혁명으로, 또한 독일에서는 같은 해 3월 혁명으로 노동자 계급의 모습이 커다랗게 전면에 부각되었다. 물론 이러한 노동자의 제 운동은 조직이나 지도가 아직 미성숙했기 때문에 아무 성과도 거둘 수 없었지만, 거기에서 보여진 노동자의 대립 격화와 빈부의 격차와 확대는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하는 제모순이 현재화된 것으로, 산업혁명을 통해 비로소 명확해진 시대의 추세에 불과했다. 이리하여 이제 근대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회상의 설계가 진지한 시대적 과제로서 부상하게 되었다. 이것은 산업혁명이 얼마쯤 앞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영국에서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이상적 사회상의 구상을 만들어내면서 나타났으며, 다시 후진국 독일의 사상가에서 연결되어 보다 철저한 모습을 지닌 과학적 사회주의로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시민철학의 성과를 그대로 계승하여 다시금 발전시킨 산업 부르주아의 사상으로서 공리주의, 실증주의 철학이 번성하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현존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만과 비판으로부터 새로운 사회상의 설계로 나아가는 사회주의 사상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것이 19세기의 전반을 거의 점하고 있던 산업혁명기의 사상 상황을 개략한 약도이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 리오 휴버먼 / 장상환 옮김 / 책벌레 / 2000.04.15

 

역사책을 읽어 보면 이런저런 왕들의 야망 · 정복 ·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장황하게 이어진다. 그런 책들의 강조점은 완전히 틀렸다. 국왕들의 이야기에 지면을 할애하기보다 왕권의 배후에 있는 진정한 힘, 즉 그 시대의 상인과 금융업자의 이야기에 지면을 할애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로스차일드 2

–  니얼 퍼거슨 / 박지니 역 / 21세기북스 / 2013.03.19

 

1820년대는 정치적으로 복고의 시기였을 뿐 아니라 국가 재정 복원의 시기이기도 했다. 유럽 대륙 전반에 걸쳐 폐위됐던 왕들이 (대부분) 왕좌를 되찾았다. 메테르니히의 지휘 아래 대륙의 열강들은 그 시발점이 어디든 새로운 혁명의 조짐이 보이기라도 하면 힘을 합쳐 완강히 저지했다. 로스차일드가는 물론 이 복고 과정에 돈을 댔다. 그들은 프랑스를 다시 지배하게 된 부르봉 왕가뿐만 아니라 신성동맹의 회원국인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가 과거에는 영국과 네덜란드만 누릴 수 있었던 금리로 채권을 발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덕분에 메테르니히는 수월하게 유럽의 ‘치안’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개입해 나폴리와 스페인에서도 부르봉 왕조를 부활시킨 예가 대표적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신성동맹의 특등 동맹국”이라는 쓴소리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던 셈이다. 로스차일드가 융자한 돈은 메테르니히를 비롯해 영국의 조지 4세와 후에 벨기에의 왕위에 오르는 그의 사위 작센코부르크의 레오폴드까지 당시의 많은 ‘고위 인사들’의 개인 자산을 살찌웠다. 루트비히 뵈르네의 독설처럼, 로스차일드는 “귀족에게 자유를 음해할 힘을 주고, 인민에게는 폭정에 맞서 싸울 용기를 박탈하는 자”요, “자유, 애국심, 명예 그리고 모든 시민적 미덕을 자신의 제단에 희생시키는 공포의 대사제”였다.

……

1930년대 초에는 벨기에, 폴란드 혹은 이탈리아를 두고 곧 전쟁이 터질 듯한 위기의 순간이 여러 차례 있었다. 로스차일드가는 그때마다 ‘평화 중개인’으로 활약할 만큼 유럽 전역을 탄탄히 잇고 있었다. 그들의 비할 데 없이 빠른 통신망 역시 유럽의 주요 정치가들을 위한 속달우편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

…… 당시 사람들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그저 융자를 제한하겠다고 위협해서 유럽의 평화를 지켰다는 이야기에 미혹됐지만, 사실 1830년대에 전쟁이 터지지 않은 것은 다른 정황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로스차일드가가 경제적 수단으로 정치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시점도 분명 있었다. 메테르니히의 호전성은 1832년 잘로몬이 신규 채권 발행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을 때 완전히 꺾였다고는 할 수 없어도 최소한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와 벨기에라는 신생 국가의 탄생도 유럽 열강들이 보증하고 로스차일드가가 발행한 채권 형태로, 말 그대로 로스차일드의 재원으로 인수된 결과물이었다.

……

1861년 6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암셸의 오천 초대를 받아들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자신이 누구의 선례를 따르고 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30년 전 메테르니히 역시 암셸과 “수프를 먹었”고, 그 일은 오스트리아 총리와 로스차일드 가문 사이의 오래 지속될, 상호 호혜적인 우정의 시작이었다. 로스차일드가는 메테르니히의 개인 자산을 (여러 차례 특별한 조건으로) 돌봐주었고, 신속하고 은밀한 외교 소통 채널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 보답으로 메테르니히는 민감한 정치 뉴스를 로스차일드에 건넸고, 가족들이 합스부르크제국의 재정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상류 사회에서도 특권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암셸은 분명 비스마르크와의 관계도 그런 수순을 밟기를 바랐을 것이다.

 


유대인의 역사

–  폴 존슨 / 김한성 역 / 포이에마 / 2014.08.04

 

제임스가 1811년부터 파리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네트워크가 넓어졌다는 뜻이다. 둘째 아들 살로몬 마이어는 1816년에 빈에 지점을 설립했고 넷째 아들 카를 마이어는 1821년에 나폴리에 지점을 세웠다. 1812년에 아버지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가 죽자 맏아들인 암셸 마이어가 프랑크푸르트 지점을 이어받았다. 이 네트워크는 1815년에 막이 오른 새로운 평화 시대의 금융에 안성맞춤이었다. 군대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마련하는 작업은 지폐와 신용 거래에 기초한 국제금융 체제를 만들었고, 이제 각국 정부는 그 체제를 어떤 목적으로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15년부터 1825년까지 10년 동안 이전 한 세기 동안 유통된 것보다 더 많은 유가증권이 유통되었고, 나탄 로스차일드는 런던 최고의 금융 권위자로서 옛 베어링 가문의 자리를 대체했다. 나탄은 라틴아메리카의 변덕스러운 정권과는 거래하지 않고 주로 믿을 수 있는 유럽 독재 국가, 즉 신성동맹으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러시아와 거래했다. 1822년에 나탄은 신성동맹 국가를 위해 막대한 재원을 마련했다. 1818년부터 1832년까지 런던에서 발행된 26개 외국 정부의 공채 중 7개를 나탄이 주관했고, 한번은 연합을 통해 2,100만 파운드, 즉 전체 자금의 39퍼센트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빈에서 로스차일드 가문 사람들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위해 채권을 팔고,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메테르니히를 보좌하고 오스트리아 최초의 철도를 부설했다. 프랑스 최초의 열차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파리에 세운 은행 로스차일드 프레르가 부설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부르봉 왕가 사람, 오를레앙 왕가 지지자, 나폴레옹 지지자에게 자금을 조달했고 벨기에의 새 국왕에게도 자금을 대주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많은 독일 군주를 위해 어음을 유통시켰다. 나폴리에서는 사르데냐, 시칠리아, 교황령을 위해 재원을 마련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총 자산은 1818년에 177만 파운드에서 1828년에 430만 파운드로 늘었고, 1875년에는 3,435만 파운드로 증가했다.

 


화폐전쟁

–  쑹훙빙 / 차혜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07.21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한 후 메테르니히가 주도하는 빈 체계는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긴 평화를 구가했다.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가 점점 쇠락하고 강적으로 둘러싸인 불리한 상황에서도 교묘한 줄타기로 평형을 유지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에 잔존하는 황실의 정통이라는 점을 강하게 호소하며 이웃 나라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끌어들여 신성동맹을 맺음으로써 프랑스의 재기를 막고 러시아의 확장을 견제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꿈틀거리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물결을 억제해 오스트리아 국내의 다민족 분열 세력이 힘을 쓰지 못하게 했다.

……

메테르니히와 겐츠(Gentz)의 적극적인 추천에다 로스차일드와 윌리엄 왕자와의 관계, 그리고 덴마크 왕실과의 긴밀한 비즈니스 관계에 힘입어 살로몬 로스차일드는 드디어 합스부르크의 높은 문턱을 넘었다. 왕실은 고정적으로 살로몬의 은행에서 융자를 받았으며, 살로몬은 빠르게 그들과 한울타리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822년 합스부르크 왕조는 네이선을 제외한 로스차일드 가의 4형제에게 남작의 칭호를 수여했다.

살로몬의 대규모 자금 지원을 등에 업은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여러 분쟁 지역에 ‘평화 수호’라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안 그래도 국력이 날로 쇠약해지는 오스트리아는 더 깊은 채무의 늪에 빠졌고, 살로몬의 금고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다. 1814 ~ 1848년의 유럽은 ‘메테르니히의 시대’로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메테르니히를 움직이는 막후에는 로스차일드은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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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은 전쟁, 인플레이션, 흉작(凶作), 인구 불균형 또는 정부 정책을 비롯한 여러 요인에 의해 야기된 광범위한 식량부족 상황을 말한다. 기근이 발생했을 때의 많은 죽음을 특정 사건이나 특정 대상을 비난하는 단순한 해석은 적절치 않다. 여기에는 문화, 정치, 경제, 작물과 병균, 기후의 역사 뿐만 아니라 지질학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요소가 있다.

 

1800년대 초 아일랜드의 가난하면서도 급격히 증가하는 농촌 인구는 거의 하나의 농작물에 의존하게되었다. 감자만이 아일랜드 소작농들이 영국 지주들에게 수탈당하면서도 가족을 부양할 수있는 식량이 되었다. 저급하게 여겨졌던 감자는 농업에서 놀라운 작물이었지만 전체 인구의 삶을 흔들 정도로 아주 위험한 작물이기도 했다. 때때로 일어나는 감자의 흉작은 1700년대와 1800년대 초 아일랜드를 괴롭혔다. 그리고 1840년대 중반에 곰팡이에 의한 마름병이 아일랜드 전역의 감자를 덮쳤다. 몇 년 동안의 감자 흉작은 전례없는 재앙을 불러왔다. 그리고 아일랜드와 미국 사회는 엄청나게 바뀌었다.

 

좀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기근의 규모를 한 축으로 하고, 빈도수를 한 축으로 하면 기근은 멱함수를 따른다고 볼 수도 있다.(http://yellow.kr/blog/?p=2824 참조) 이 말은 대기근이든 작은 기근이든 비슷한 구조에 의해 발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역사적으로 가장 잉여 농산물이 많은 현재에도 아프리카 등에서 기근은 계속 발생하고 있는데 그 원인을 아일랜드 대기근과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아래의 자료들을 가지고 정리해 보았다.

 

(1) 대기근의 배경

◎ 기후와 토양 그리고 감자

아일랜드의 조그만 국토엔 늪지대와 얕은 호수가 많다. 토양이 산성이라서 나무나 곡식이 잘 자라지 않아 늘 가난 속에서 살아왔다. 기후는 북위 50도나 되는 고위도 지방이지만 멕시코 만류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그러나 비가 자주 내리고 매우 습한 기후를 보인다. 이러한 기후로 인해 토지는 항상 녹색을 띄고있어 아일랜드를 ‘녹색의 나라’라고도 부른다.

영국의 식민지로 가난에 찌들어 있던 아일랜드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감자가 전파되면서부터다. 감자는 1600년 전후 남아메리카에서 도입되어 아일랜드에서는 17세기 후반에 상당한 규모로 재배되었다. 감자는 심어보니 기가 막힌 식품이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아일랜드에서도 엄청난 수확을 거뒀다.

 

감자는 곧 아일랜드의 주 식량이 되었다. 전 국토가 감자밭으로 개간되기 시작했다. 감자는 1690년대에 스코틀랜드인들이 당했던 극심한 기근을 아일랜드인들이 모면하게 해준 귀중한 주식이 되었다. 아일랜드의 감자 재배는 그 뒤 반세기 동안 20배로 늘어났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곡식 가격의 상승은 경작지의 확장과 감자 재배의 절정기였다. 아일랜드 인구의 절반을 넘는 수가 필요한 열량의 4분의 3 이상을 감자에서 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 식민지

사람들이 흔히 잊어버리지만 아일랜드는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식민지였다. 아일랜드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부유한 곳이 될 수 있었지만 800여년의 식민 지배를 겪는 바람에 망해버렸다. 아일랜드의 지위는 식민지 시대의 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그리고 인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중상주의 이론에 따르면 식민지의 목적은 원료와 시장을 공급하고 대도시의 권력자를 영원히 부유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 따라서 아일랜드는 영국의 권력자를 부자로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세계에서 대부분의 식민지처럼 저개발되었을 뿐 아니라 인구가 감소한 몇 안되는 곳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오늘날의 아일랜드는 19세기 초의 인구에 비해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17세기에 들어서자 아일랜드에는 전례 없는 잔혹한 사건이 잇달았다. 1641-53년과 1689-91년 두 차례에 걸친 잉글랜드 내전에서 아일랜드는 철저하게 짓밟혔다. 이러한 상황에 농토마저 남아나지 않았다. 더욱 척박해진 환경과 소작의 대가로 얻은 땅 한 뙈기에 심을 작물로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들이 수탈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감자를 심을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 초 아일랜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빈곤함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것은 정치적 동요, 종교정책의 실수, 인구 증가, 가혹한 지주들과 영국의 그릇된 지배 때문이었다.

1841년 아일랜드인의 2/3 이상이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나머지 1/3의 상태는 형편없었다.

 

◎ 인구

1770년대에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공업화되면서, 또 1800년대에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아일랜드는 엄청나게 많은 감자를 수출할 수 있었다. 곡물가격이 상승하자 감자 경작지 확장이 계속되었다. 일손이 필요해짐에 따라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이 당시 아일랜드 사람들은 유럽 대륙보다 영양상태가 좋았다. 성인이 감자를 하루에 7kg, 여자와 아이들도 5kg 정도를 먹었기 때문이다. 풍부한 식량으로 인해 1700년대에 200만 명이던 인구는 1800년대에는 500만 명으로 늘어났고, 1821년에는 700만 명이 되었다. 대기근 발생 직전인 1845년에는 850만 명에 이르러 인구밀도가 유럽에서 가장 높았다.

아래의 아일랜드 인구 수치는 정확성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영국 정부의 10년 주기 인구 센서스 통계이다.

1821년 – 6,801,827 명

1831년 – 7,767,401 명

1841년 – 8,175,124 명

1851년 – 6,552,385 명

 

 

(2) 대기근의 원인

◎ 감자 마름병

감자 전염병이 아일랜드에서만 발생한 것도 아니다. 미국 농가의 감자밭을 휩쓴 ‘감자 잎마름병’이라는 전염병에 대해 영국 최초의 보도가 나온 시점은 1845년8월16일이다. 첫 보도 이후 각지에서 무수히 많은 보도가 쏟아졌다. 벨기에와 네덜란드, 북부 프랑스와 영국 남동부 지역이 전염지역으로 입에 오르내렸다. 얼마 안 지나 감자 잎 마름병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이 균이 아일랜드를 덮친 것은 1845년 10월이었으며 가을에 수확해 저장해 놓았던 감자들이 썩기 시작하면서 재앙이 닥쳐오고 있음을 알렸다. 밭에 남아 있던 감자들과 저장해 놓았던 감자들이 다 썩어갔다.

 

감자잎마름병이 다시 발생한 것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온난하고 다습한 서쪽 끝 지방에서였다. 1846년 이른 여름이 되자 서풍을 타고 1주일에 80km의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8월 초에는 아일랜드 전역을 휩쓸어 무성했던 감자밭이 하룻밤 사이에 썩어 버렸다. 1846년에 감자 수확량이 4분의 3 이상, 심한 곳은 90%나 감소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이 매우 좁은 땅에서 감자 농사에 전념했기에, 감자 생산이 준다는 것은 식량이 소진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 유럽이 공유한 전염병에서 왜 아일랜드만 극심한 피해를 받았을까.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여건. 덥고 습기가 많은 기후로 전염 속도가 빨랐다. 두 번째로 감자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 밀과 귀리 같은 작물은 대부분 영국으로 반출되고 아일랜드 주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감자 재배에 매달렸다.  세 번째는 영국 식민당국의 뒷북 행정과 식민지에 대한 차별. 번번이 대응 방향을 잘못 잡고 시기를 놓치면서도 문제를 중시하지 않았다.

 

◎ 영국의 정책

감자를 못 쓰게 만든 것은 감자 역병균이었지만 수확 실패를 대기근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아일랜드의 영국 통치자들이 행한 독단적인 자유방임 정책이었다. 1845년 당시 영국은 온통 자유방임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영국 정부는 식민지 아일랜드인들이 게으르고 자립심이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원조를 외면하다시피 했다. 대기근 동안 지원한 구제사업비는 고작 810만 파운드. 몇 년 뒤 크림전쟁에서 지출한 전비의 20%도 안 되는 액수였다. 이런 처사에 아일랜드인은 분노했고 지금까지도 영국인을 증오하고 있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 나가는 마당에서도 곡물 수출을 강행한 계층은 부재 지주. 영국인이나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인 땅 소유주들은 구제보다 자기 몫 챙기기에만 눈을 돌렸다. 심지어 대기근의 틈을 타 소작인들을 쫓아내는 악행도 유행처럼 번졌다.

아일랜드 정치인들이 농민과 주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점도 대기근의 화를 키웠다. 아일랜드는 1801년 영국과 통합 이후 105명을 영국 의회 하원에, 28명을 상원에 보냈으나 따로 놀았다. 1832년부터 1859년 동안 의원의 70%가 지주 또는 지주의 아들이어서 아일랜드 주민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다.

그리고 철옹성 같던 영국의 곡물법은 끊임없는 반곡물법 운동과 참정권 요구,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무너졌다. 반곡물법 운동이 선거법 개정 요구와 맞물려 사회 불만 요소로 자리 잡고 아일랜드의 대기근이 발생, 수십만 아사자가 나오는 상황에 봉착한 로버트 필 수상은 1845년 말부터 생각을 바꿨다. 곡물법을 없애지 않는 한 영국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판단한 그는 폐지론자로 돌아섰다.

 

◎ 영국 지주와 아일랜드 소작농

1846년 서부 밸린그래스에서 한 부재 지주가 군 병력을 동원해 소작농 76가구가 사는 마을을 불 태우는 사건이 일어난 뒤에는 강제 퇴거가 줄을 이었다. 강제 퇴거 이유는 감자 흉작으로 소작료를 내지 못했기 때문. 연간 수입 4파운드 이하인 소작농을 거느린 지주들이 구빈세를 부담해야 한다는 법규 또한 강제 퇴거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세금을 내느니 소작농들을 몰아내 고소득 작물을 재배하는 대농장을 만들겠다는 지주들의 선택으로 약 30만명이 고향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영국인 부재지주 중에서 소작인들을 축출하지 않은 사람은 극소수뿐이었다. 강제 퇴거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처벌하는 법까지 만들 정도로 영국인들은 아일랜드를 괴롭혔다. 지주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만든 밑바닥에는 민족적 우월감과 맬서스주의가 깔려 있었다.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빈민가를 더 좁고 더럽게 만들어 전염병이 돌도록 유인해야 한다’던 경제학자 맬서스식 사고로 영국인들은 ‘열등민족 아일랜드의 불행’을 당연한 귀결로 여겼다.

 

 

(3) 대기근의 결과

1921년, 아일랜드가 독립을 쟁취했을 때 인구가 대기근 이전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잘 말해준다.

 

◎ 백만 명 이상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는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는데, 거기에는 영양 미달의 사람들이 매서운 겨울 추위에 노출되고, 죽 급식소(soup kitchen)와 작업장에서 전염되며, 위험한 공공작업을 수행하는 등 수많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 미국으로의 이주

아일랜드인들은 1700년대부터 노동자, 일꾼, 하인 등으로 미국으로 이주해 왔으나 매우 수가 적었다. 초기 아일랜드 정착민들은 주로 동북부의 대도시에 거주했다. 1820년대부터 ‘이리 운하’를 비롯한 대규모 토목 공사에 많은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동원되기 시작했고 이들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아일랜드 이민자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40년대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을 계기로 수 백만의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이 미국과 캐나다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기근이 끝난 이후에도 많은 수의 아일랜드인들이 가족을 찾아 미국으로 이주해 온다.

아일랜드인들은 주류 사회의 차별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 힘겹게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아일랜드인들은 뉴욕과 보스턴, 시카고 등의 대도시에 거주하여 도시 빈민층을 이루었다. 대부분 영세 소매업과 육체 노동직에 종사한 아일랜드인들은 차별에 맞써 강한 단합력을 자랑했으나 이는 역차별로 작용하여 흑인과 중국계 이민자들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낳기도 했다.

 

단합력으로 이름이 높았던 아일랜드인들은 사회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사회적인 힘을 키워 나갔다. 아일랜드인들의 노력으로 19세기 후반 이후 많은 카톨릭계 학교, 대학교, 자선단체, 공공단체들이 창설되었고 이는 오늘날 미국 카톨릭 교회의 기반이 되고 있다. 또한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은 정치적으로도 단합하여 민주당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보였고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2015 American Community Survey’에 따르면 아일랜드계 미국인 인구는 약 3350만 명이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
–  헨리 홉하우스 / 운후남 옮김 / 세종서적 / 1997.06.01

 

사람들은 ‘감자’를 아일랜드 역사, 특히 1845년 ~ 1846년 사이에 발생했던 대기근과 연관짓곤 한다. 그러나 감자에 관해서 얘기할 때 늘 제기되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의문점들이 있다. 예컨대 다른 서유럽 국가들을 제쳐두고 왜 유독 아일랜드만 감자 재배에 적합했는가? 그리고 실제로 아일랜드가 감자를 경작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는가? 아일랜드는 왜 많은 작물 중에서 감자를 선택했는가? 또 인구는 왜 그렇게 갑자기 증가해서 기근으로 치닫는 상황까지 초래했는가? 영국은 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왜 자유 무역을 채택했는가? 집단 이주 이후 미국의 특수 지역이 아일랜드화(‘미국의 녹색화’라고 일컬어지는) 된 이유는 무엇인가? 아일랜드 대기근의 영향은 영국, 아일랜드, 그리고 미국의 혼란스런 상호 관계에 아직도 남아 있는 형편이다.

……

아일랜드의 지위는 식민지 시대의 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그리고 인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중상주의 이론에 따르면 식민지의 목적은 원료와 시장을 공급하고 대도시의 권력자를 영원히 부유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 따라서 아일랜드는 영국의 권력자를 부자로 만들어야 했다.

……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하자 영국의 통치에서 벗어난 아일랜드는 더욱 더 분열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1620년경 감자의 중요성이 차츰 사람들에게 인지되기 시작했을 때, 아일랜드에는 감자가 들어올 수밖에 모든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즉 열악한 행정, 봉건제도의 부재, 페일 지역 밖에서는 실질적인 곡물 재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점, 가축을 근간으로 한 경제, 토지 소유권이나 지역 분할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던 점, 그리고 사소한 말다툼 · 살인 · 방화 · 폭동에서부터 피비린내나는 반란에 이르는 내전 등이 모두 관련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다.

……

그러나 봉건 제도는 그 자체 내에 이미 인구 조절 기능을 갖고 있었다. 노예가 아닌 농노가 토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곧, 부양해야할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한정된 토지 안에서 해결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일랜드에는 그런 자동 인구 조절 제도가 없었다.

……

따지고 보면 아일랜드 사회의 불안정성은 진정한 봉건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세 시대 전반에 걸쳐 유럽 전역의 봉건 국가에서는 토지, 토지에 사는 사람, 그리고 사람을 부양할 수 있는 토지의 부양력 사이에 나름대로 타당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

1640년 ~ 1660년 사이에 얼마나 많은 아일랜드인이 죽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들은 드로이다(아일랜드 동부 라우스 주의 항구 도시. 크롬웰에 의해 대학살이 자행되었던 곳)에서 크롬웰에 의해 직접, 계획적으로 떼죽음을 당했다. 그들은 물이 새는 배-미국이나 서인도로 수송되는 범죄자들을 익사시키려고 일부러 그렇게 만든-에 탔다가 그대로 익사 당했으며, 일부는 고국에서 굶주려 죽거나 외국에서 열대병으로 죽었다. 유일한 재산인 가축이 몰사되어 죽는 경우도 있었다. 인구는 어느새 절반 가량으로 줄어들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도 연장이며 가축, 토지, 등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어쨌든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감자가 없었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돈이나 다른 생계 수단도 없고 빵을 만들 곡물도 키울 수 없는, 황폐하디 황폐한 늪지대와 산간 지역으로 쫓겨난 이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감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감자를 재배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레이지베드(lazybed)라는 모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레이지베드는 원래 크롬웰이 아일랜드에서 저지른 대학살의 부산물이었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후에 크롬웰이 저지른 그 어떤 파괴보다도 더 큰 피해를 미쳤다. 크롬웰은 눈에 보이는 적이었던 반면, 레이지베드는 믿을 수 없는 친구와 같았다. 그리고 결국 크롬웰이 죽인 수보다 더 많은 아일랜드인을 죽음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레이지베드는 토양에 관계없이 어디서나 만들 수 있다. 땅을 고르게 할 필요도 없고 다른 밭에서는 방해가 되는 돌멩이가 있어도 감자 재배에는 하등 지장이 없다.

……

레이지베드에는 많은 장점이 있었다. 2분의 1 에이커 정도면 ‘정상적인’ 한 가족이 한 해 동안 ‘정상적으로’ 먹고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담을 치지 않아도 가축이 돌아다니며 레이지베드에 피해를 주는 일은 없었다. 군인이나 이웃, 적대적인 다른 부족이나 씨족 등 약탈자들도 레이지베드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감자는 서리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았고 배수도 잘 되었으며 비료 또한 듬뿍 뿌려졌다.

……

18세기 당시만 해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조직적인 곡물 무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유럽 전역이 악천후와 질병에 시달릴 때에도 그들은 캐나다, 라틴 아메리카, 남아프리카, 러시아, 오스트레일리아에 의지할 수가 없었다. 운이 좋을 때-신생국인 미국에 가끔씩 잉여 농산물이 남아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개 지역적인 기근을 완화해줄 수 있는 국제 무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760년 ~ 1840년 사이에 아일랜드(영국 자치령인 노드 아일랜드를 포함한 아일랜드 섬 전체) 인구는 1백50만 명에서 9백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이는 80년 동안 무려 600%가 증가한 꼴이다. 1801년 ~ 1841년 사이에 지금의 에이레(영국 자치령을 제외한 에이레 공화국만을 의미) 인구는 5배로 증가했다. 인구 증가는 영국과는 무관했지만 감자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감자가 없었다면 아일랜드 전역에서 빵으로 끼니를 이을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5백만 명 안팎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은 빵의 원료가 되는 곡물이 전세계적으로 부족한 시기였다. 덕분에 아일랜드는 비싼 가격에 곡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1760년 ~ 1840년 사이에 유럽의 곡물 가격(임금 대비)은 전체적으로 2배 가량 치솟았으며, 그 결과 아일랜드는 평상시에도 1백만 ~ 2백만 에이커에서 생산되는 평균 1백만 톤의 곡물을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곡물 수출이 늘어남에 따라 아일랜드 자국 내의 기아 현상이 점점 심화되었다. 불평이 쏟아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국에 식량 부족을 야기시킨 기후가 불가피하게 아일랜드에도 식량 부족을 초래했으며 동시에 가격이 폭등, 수출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아일랜드 통치자들을 과격하게 비판하던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국민이 굶주리고 있는데 곡물을 계속 수출한 것은 치욕스런 일’이라고 목청을 돋우곤 한다. 하지만 그들은 시장이 잉글랜드 · 아일랜드 · 스코틀랜드 · 웨일스 가운데 한 나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시장을 공동으로 이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굶주리고 있던 사람들은 애초에 곡물을 살 돈이 없었다는 점이다.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다음 두 가지로 모아진다. 즉, 흉년이 들었을 때 감자가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현금이 없다는 것도 큰 문제가 되었다. 이것은 모든 자급 경제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아일랜드는 서유럽에서 감자를 주식으로 한 최후의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오늘날 아프리카의 상황이 상상력이 거의 제한되어 있는 제 1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듯이, 당시 영국인들로서는 현금이 통용되지 않은 아일랜드 사회가 너무나 낯설고 놀라웠다.

1845년 ~ 1846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기근이 시작된 아일랜드의 상황은 여러 면에서 매우 독특했다. 지역 주민들이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충분히 외부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여건이라 할지라도, 닥쳐오는 재난을 미리 인식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도저히 기근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아일랜드 기근의 초기 단계에는 대중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서 외부에 원조를 청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때는 이미 때가 너무 늦어서 재난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기근은 1845년 6월~7월 사이의 감자 흉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1825년 ~ 1849년에 이르는 25년간, 그 가운데 14년 동안은 경기 불황이 있었고 최소한 8년 동안은 지역별로 기근이 끊이지 않았다.

이 시기는 1845년 ~ 1846년으로 이어진 대기근이 발생한 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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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으로 볼 때 아일랜드의 기근 사태는 그 후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아일랜드 인구의 절반을 넘는 수가 필요한 열량의 4분의 3 이상을 감자에서 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확이 정상적인 해조차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아일랜드는 확실히 인구가 과밀한 지역이었다.아일랜드가 살아남으려면 기존의 인구가 절반 이상 감소해야 했다. 또한 그렇게 된다 해도 감자 농사가 풍작을 이루고, 기후가 온화하며, 만연해 있는 질병을 퇴치했을 때에만 아일랜드의 생존이 보장될 수 있었다.

……

곡물 조령 반대 운동이 면화 제조업자인 리차드 코브던과 존 브라이트의 지휘하에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1839년 그들은 반곡물법 동맹을 조직, 지주들을 매섭게 비난했다. 지주들은 대부분 충실한 토리당원들이었다. 1845년 당시 아일랜드는 감자 기근이 한창이었으며 영국도 수확량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토리당의 수상인 로버트 필 경은 반곡물법 동맹의 압력을 받아 법령을 보호하던 입장에서 폐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결국 1846년 6월에 밀 관세를 낮추기 시작, 1849년부터는 관세를 완전히 폐지했다.

그러나 코브던과 브라이트의 설득력있는 주장과 필 경의 정치적 방향 전환에도 불구하고 자유 무역만으로는 아일랜드를 도울 수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곡물의 절대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곳이나 잉여 농산물이 없었기 때문에 곡물 조령을 폐지한다 해도 난데없이 곡물 1자루가 더 생긴다거나, 아일랜드 영세 농민들이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돈을 갑자기 갖게 되는 일은 생길 리 없었다.

 

그 다음, 반곡물법 동맹원들은 운동을 진행하는 동안 아일랜드를 언급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아일랜드 문제는 과격하게 동맹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비참한 상황이 영국의 곡물 조령을 철폐하는 데 이용되리라고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게 돌아갔다. 1845년 가을은 ‘곡물 조령을 씻어내려가게 한 비’로 흠뻑 젖어들었다. 조령의 폐지는 웨일스나 스코틀랜드에서는 별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더 나아가 아일랜드에서는 전혀 효력을 미치지 못했다.

……

1845년 당시 일부 영국인들은 이기적이고 편협했으며, 아일랜드 상황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우둔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 말이 옳다면 거기에서는 영국의 수학자인 토마스 로버트 맬서스(1766~1834)의 이론이 성공을 거둔 데 어느 정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만들어진 역사
–  조셉 커민스 / 김수진,송설희 옮김 / 말글빛냄 / 2008.05.07

아일랜드의 역사에서 소위 대기근 또는 대기아라고 불리는 이 재앙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과대평가가 아니다. 다음의 통계가 이 재앙이 미친 영향을 잘 보여준다. 1845년 아일랜드의 인구는 약 8백만 명이었다. 6년이 지난 후 그 인구는 55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약 100만 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으며 150만 명이 주로 영국, 호주,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

아일랜드만큼 기근에 취약한 나라는 없었다. 아일랜드는 남아메리카 페루의 고지대에서 재배되는 이 훌륭한 덩이줄기 작물이 수입된 1590년대부터 감자 하나에 의존하여 살아왔다. 시원하고 습기가 많은 아일랜드의 날씨는 이 작물이 자라기에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사실 감자는 그곳에서 매우 적은 노동력을 가지고도 매우 쉽게 자라 소위 ‘게으른 침대(lazy bed)’에 심겨진다고 말할 정도였다.

……

아일랜드 사람들은 운이 없게도 오직 한 가지 식량 자원을 재배했을 뿐만 아니라 럼퍼라고 불리는 오직 한 종류의 감자만 재배했다. 이 감자는 생산량이 많았지만 마름병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종은 유전학적으로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일 마름병에 의해 소멸되어버릴 수 있었다.

 


아일랜드 대기근
–  피터 그레이 / 장동현 옮김 / 시공사 / 1998.01.15

12세기에 부분적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 아일랜드에서는 전쟁, 반란, 재산몰수가 잇따랐고, 16∼17세기에 영국의 지배력이 확대되면서 아일랜드 공동체의 발전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후 신교도 정복자들이 이주, 정착하게 되었는데, 19세기 초 아일랜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빈곤함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정책의 실수, 정치적 동요, 인구 증가, 가혹한 지주들과 영국의 그릇된 지배 때문이었다. 여기에 유일한 그들의 생계작물이었던 감자 농사의 완전한 실패는 1845∼1851년의 대기근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대기근은 근대 아일랜드의 형성에 주요한 요소로 작용했으며, 19세기 유럽사에서 특이한 인구 통계, 끈질긴 악몽에 시달린 나라라는 독특한 위치를 남겼다.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  노암 촘스키 / 이종인 역 / 시대의 창 / 2005.12.16

 

…… 또 아일랜드의 기근은 경제적 기근이었는데 그 까닭은 아일랜드가 실제로 대기근 중에도 농산물을 영국으로 수출했기 때문입니다. 정치경제의 신성한 원칙에 따라서 그렇게 하도록 강요당했던 것입니다. 만약 영국에 더 좋은 농산물 시장이 있다면 아일랜드 농산물은 마땅히 그곳으로 흘러가야 하는 겁니다. 이 경우 농산물을 아일랜드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은 적절치 못했는데, 그건 시장에 부당하게 개입하는 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일랜드에는 대규모 기근 사태가 발생했고, 미국으로 피난 온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필사적으로 일거리를 찾았으며, 사실상 푼돈을 받고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일랜드의 역사

–  테오 W. 무디, 프랭크 X. 마틴 / 박일우 역 / 한울아카데미 / 2009.09.30

 

20년 이상 지속된 프랑스와의 큰 전쟁으로 야기된 아일랜드 경제에 대한 왜곡을 제외하고도 위험스러운 신호들이 있었다. 곡식의 가격은 전쟁 동안 급속도로 상승했으며, 아일랜드의 초원은 점점 더 피폐해져갔다. 목초지에서 경작지 농업으로의 변화는 더욱 더 많은 노동력을 요구했다. 급속도로 증가하는 인구로 나라 안의 토지에 대한 필요성이 그토록 크지 않았더라면, 임대농민과 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이용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

엄청나게 가난한 주민의 생존은 계속되는 감자 생산에 달려 있었다. 감자 역시 곡류처럼 썩기 쉬워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저장소에 보존할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감자의 수확에 어떤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재앙은 아일랜드가 통제할 수 없을 규모로 발생할 터인데, 이에 대해 영국 정부는 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

부분적인 감자 수확의 실패는 아일랜드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당국은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 다른 측면에서 필 경(Sir Robert Peel)의 구제조치는 즉각적이고 역량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는 성공적이었다.

……

필은 아일랜드의 식량 수출 금지조치를 해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훨씬 더 신중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영국 농부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수입된 곡물에 부과시키는 관세였다. 필은 그들이 일컫는 대로 곡물법(corn laws)을 폐기하기 위한 중대한 결정을 취했다. 농업보호책은 여러 해 동안 영국 정치사에서 뜨거운 논란이 되었으며, 토지를 지닌 계층과 사업가 간의 세력다툼의 상징이 되었다. …… 로드 존 러셀(Lord John Russel)이 이끄는 휘그당(the Whigs) 정부가 출현했다. 정치적 변화는 아일랜드에게는 흉조가 되었는데, 휘그당은 경제제도에 대해 현 시대의 신념들에 훨씬 더 융합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가 지적이고 현대적인 사람들의 신조가 되었던 시대로, 규제를 위한 경제법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익하다고 확신하던 때였다. 찰스 트리벨리언(Charles Trevelyan)은 재무부의 수장으로 구제사업을 통제하던 인물이었는데 이들의 생각에 크게 공감했고, 새로운 재무장관인 찰스 우드(Charles Wood) – 경제에 대한 불간섭을 확고한 신념으로 가진 – 와 뜻이 잘맞았다. 감자 수확이 또다시 실패하자 정부가 이번엔 어떤 것도 구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정을 즉시 내렸는데, 이는 식량의 공급이 사적인 사업으로 남겨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1846년에는 두 번째 감자 수확의 실패가 있었고, 이번에는 철저했다. 극심한 재앙의 전망이 있었지만 정부의 계획에는 어떠한 수정도 없었다. 구제는 공공사업으로 제한했다. 정부는 더 이상 가격을 어중간하게 충족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시세에 따라 정부가 완전히 부담을 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물론 아일랜드 지주들로 하여금 가격을 떠맡도록 강압하는 것이었다. 전체적인 작업의 부담은 아일랜드 직업위원회(the Irish board of works)에 맡겨졌다. 겨울이 시작되었는데, 아마도 삶의 기억 속에서 가장 고달프고 긴 겨울이었을 것이다.

……

새해가 되자 정부는 실패를 시인해야 했는데 직업위원회는 하루에 거의 3만 파운드를 지출했으며, 관리들은 1만 15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1847년 1월 공공사업을 폐쇄하고 직접적인 구제를 확장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러한 결정이 영국 관리들에게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이었나를 깨달아야만 한다. 1834년 영제국의 구빈법 개혁(English poor-law reform)의 기본원칙은 구제가 오로지 작업장에서만 주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규칙으로부터 어떠한 이탈도 생계수단보다 훨씬 더 빠르게 증가하는 인구에 기인한다는 정통적인 신념이었다. 우선 급식소를 설립하여 죽을 무료로 배급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

1847년 2월 아일랜드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폭풍이 불었고 나라는 폭설로 뒤덮였다. 굶는 사람들이 마을에 군집해 있었고, 정부가 폐쇄하기로 한 공공작업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전염성 열병이 아일랜드 전역에 도깨비불처럼 번져나갔다.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는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는데, 거기에는 영양 미달의 사람들이 매서운 겨울 추위에 노출되고, 죽 급식소(soup kitchen)와 작업장에서 전염되며, 위험한 공공작업을 수행하는 등 수많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

1847년의 암담함은 전혀 기근의 끝처럼 보이지 않았다. 감자마름병은 그해 가을에 좀 누그러졌지만 재발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다음해인 1848년 완전한 독성을 지닌 채 돌아왔다. …… 발생한 재앙에 대해 책임을 일단 받아들여야 했던 영국의 장관들은 무정하고 인색하며 독선적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성질은 가령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가 너무나 혐오스럽게 생각했던 바로 그 특성들이며, 그들은 아일랜드 빈민층과 마찬가지로 영국 빈민층에게도 이러한 성질을 많이 드러내보였다.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 웅진싱크빅 / 1998.01.01

 

아일랜드는 대브리튼 섬 왼편에  있는 섬이다. 전통적으로 카톨릭계가 강한 이 지역은  이웃 강국인 영국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수세기 동안 공식적인 독립 왕국을 유지했다.

17세기 말엽 전체 인구의 10%에  불과한 영국 국교도 분파가 영국의 지원에 힘입어 정치 조직을 장악하고 아일랜드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면서, 아일랜드의 절대 다수  카톨릭계는 기본적인 시민권까지 박탈당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일랜드들은 카톨릭 교도들의  권익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본격화하는데, 그것은 영국의 무력 개입의 빌미가 된다.

 

영국은 아일랜드의 전국민적인  저항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하고, 1801년에는 통일  법안을 근거로 아일랜드를 합병한다. 그리하여 대브리튼과 아일랜드 연합 왕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이라는 국가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아일랜드 전체 지역이 영국의 영토였는데, 이 국호는 100년 이상 지속된다.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의 지배하에서  가혹한 박해와 차별을 당해야 했는데, 비극적인  사건 하나가 피지배 민족으로서 아일랜드에서는 1845년에서 51년까지 7년 연속 감자 농사가 흉작을 거듭했다. 주식량원인 감자가  바닥나면서 아일랜드인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극심한 대기근에 빠져들었다. 그기간 동안 전체 800만 명 중에서 100만 명 이상이 아사했고  300만 명 정도가 아메리카 등지로 떠나 버려 인구가 순식간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자였던 영국은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 더러는  아일랜드의 비극을 돈벌이 기회로 보고 곡물을 비싼 가격에 파는 데 몰두했다. 이러한  영국의 야속한 처사가 아일랜드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분노를 남겼음은 물론이다(영국 정부는 1997년 6월,  즉 150년 후에야 대기근을 방치했던 과거를 처음으로 공식 사과하였다).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 유시민 / 푸른나무 / 1992.06.30

 

토마스 로버트 맬더스의 <인구의 원리에 관한 에세이>, 즉 <인구론>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타났다. 이 책은 ‘고드윈과 콩도르세, 기타 저술가의 연구를 논평하면서 장래의 사회 개선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함’이라는 긴 부제를 달고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빈곤은 인구법칙이 내린 불가피한 운명이다

<인구론>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야말로 단순명백한 것이었다. 맬더스는 고드윈과 콩도르세의 고결하지만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사회개혁론을 비판하면서, 인간 사회는 언제나 필연적으로 부유한 소수와 빈곤한 대중으로 나뉠 수 밖에 없으며 대중을 빈곤으로부터 구제하려는 모든 고매한 노력도 결국은 허사가 되거나 오히려 유해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구론>의 곳곳에서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다.

이기심이 아닌 박애정신이 삶의 동기이고, 강압이 아닌 이성에 의해 모든 사악한 성향이 바로잡혀지는…사회라 할지라도, 인간이 원래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적인 법칙 때문에 머지 않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세계와 본질적으로 같은 사회로 타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이것은 자산계급과 노동계급으로 구분되고 이기심이 거대한 기계의 동력인 그런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 재능의 모든 고상한 업적과 좀 더 섬세하고 세련된 감성, 야만과 문명을 구별해 주는 모든 것은 재산권의 확립과 엄격한 이기심의 원리 덕분이다…이 <인구론>의 의의가 오로지 유산계급과 노동계급의 필연성을 증명해 내는 데 있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맬더스는 이기심을 원동력으로 하는 스미드의 자유방임시장 원리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노동의 분업화와 특수화에 의한 생산력 발전이 대중을 빈곤으로부터 구제해 줄 것이라는 스미드의 희망을 그는 냉정하게 부정했다. 그래서 스미드의 경제학은 ‘희망의 과학’이었지만 맬더스의 경제학은 ‘음울한 과학’이 되었다. 그러나 맬더스가 아무 논리적,실증적 근거도 없이 계급적 불평등을 옹호하고 대중에게 가난이라는 숙명을 선고한 것은 아니다. 인류의 암울한 미래에 대한 그의 호언장담은 이른바 ‘인구법칙’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었다.
인구법칙은 중학교 수준의 사회교과서에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맬더스 자신의 설명은 이러했다.

세계 인구의 총수를 1억이라고 가정할 때, 인구는 1, 2, 4, 8, 16, 32, 64, 128, 256의 비율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1,2, 3, 4, 5, 6, 7, 8, 9의 비율로 증가한다. 이렇게 될 경우 2백년 후 인구와 식량의 비율은 259:9, 3백년 후에는 4096:13, 그리고 2천년 후에는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커진다.

이것은 무서운 이론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식량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만약 어떤 시점, 어떤 사회에서 인구가 식량 생산에 비해 현저하게 증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물론 과잉인구가 줄어들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 일이 진행될 것인가? 맬더스의 대답은 명확하다. 전쟁과 살육, 자연재해와 기근, 전염병… 실로 끔찍하고 절망적인 과학이다. 맬더스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종족보존의 본능, 즉 성적욕망의 충족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풍요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야 한다. 인간의 성욕이 포기될 수 없는 본능으로 남아 있는 한 대중의 빈곤과 비참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맬더스의 인구이론이 당시 영국 의회와 지식인들에게 폭탄 같은 충격을 안겨 준 것은, 이것이 막연한 예언이 아니라 과거에 여러 번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을 잘 설명해 주는 현실적인 이론이기 때문이다. 인도와 방글라데시, 아프리카 내륙 국가 등에서 맬더스의 인구법칙은 아직도 위력을 떨치고 있다. TV를 통해 홍수나 가뭄, 전염병과 병충해의 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신음하고 죽어가는 이 지역의 어린이들 모습을 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맬더스의 음울한 과학을 떠올리게 된다.
맬더스 시대에 있었던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아일랜드 대기근’이다. 영연방의 일부인 아일랜드 인구는 1780년부터 급속하게 늘어나 1840년경에는 두 배에 가까운 8백만 명이 되었다. 이같은 인구 증가는 아일랜드 지역의 감자 생산량이 급속히 증가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1845년부터 내리 3년에 걸쳐 아일랜드의 감자밭이 폐허로 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발생한 역병균이 감자를 전멸시켜 버린 것이다. 맬더스가 예언한 최악의 사태는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듯 갑자기 아일랜드를 덮쳤다. 영국 정부로서는 아일랜드 사태가 하나의 골칫거리였다. 곡물 수입을 자유화했으나 가난한 아일랜드 농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구호양곡을 지급하는 것은 사기업의 이익을 침해하여 자유시장의 거래를 마비시킬 ‘위럼성’ 때문에 거부되었고, 공공 구제사업 역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취소되었다. 이렇게 되자 아일랜드의 과잉인구는 모두 굻어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아니면 최후의 탈출구인 아메리카로 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넜다. 이리하여 아일랜드의 문제는 — 당시 재무차관이었던 트리벨리언의 표현을 빌면 —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므로 전능하신 하느님 스스로 손을 써,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또 짐작도 할 수 없었으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치료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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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19세기(The long 19th century)란,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창안한 개념으로 1789년부터 1914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홉스봄은 장기 19세기를 다루는 세 권의 책을 발표하였는데 첫 번째는 혁명의 시대(The Age of Revolution)로, 1789년부터 1848년까지를 포괄한다. 두 번째는 자본의 시대(The Age of Capital)로, 1848년부터 1875년까지를 포괄한다. 마지막은 제국의 시대(The Age of Empire)로, 1875년부터 1914년까지를 포괄한다. 홉스봄(Eric Hobsbawm)은 1848년 혁명을 그의 역저『혁명의 시대』의 종점으로 삼고, 아울러 『자본의 시대』에서의 시작으로 삼고있다.

 

아리기(Giovanni Arrighi)는 영국이 당시의 체계의 카오스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킴으로써 세계헤게모니가 되었다 보았다.

체계 전체에 걸친 반란의 새로운 물결은 대서양을 차지하려는 투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투쟁이 일단 폭발하자, 반란은 영국-프랑스의 경합이 전적으로 새로운 지반들 위에서 재생될 조건들을 만들어 냈으며, 이런 새로운 경합이 끝난 후 반란은 3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1776 ~ 1848년 시기 전체를 놓고 볼때, 두번째 반란의 물결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와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통치자-피지배자 관계를 완전히 변형시켰고, 두번째로 그 변형에 적절하도록 국가간 체계를 완전히 재편한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세계헤게모니(영국의 자유무역 제국주의)를 수립시켰다.

 

 

우선 주로 홉스봄의 『자본의 시대』를 중심으로 1848년 혁명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 정리해 보았다.

 

‘공산주의라는 망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극적인 문장으로 시작되어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속박의 사슬밖에 없다. 그들은 세계를 얻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로 끝나는 『공산당선언』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1848년 2월 24일경에 간행된다. 그리고 그것이 나온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들 예언자들의 희망과 공포는 모두가 당장에라도 실현될 듯이 보였다. 반란으로 프랑스에서 군주제가 무너졌고 공화제가 선포되었다. ‘국민들의 봄'(springtime of people)이라 불리는 1848년의 유럽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1848년 혁명의 원인은 1846년부터 계속된 경제위기와 일부 연관된다. 뿌리가 마르는 감자병이 유행하여 감자 수확은 전무하였고 극심한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죽는 사태가 빈발해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긴장과 불안이 감돌았다. 산업 부문도 농업의 영향을 받아 사업 실패의 급증, 실업, 임금하락 등 불안정이 지속되었다.

 

 

1848년 혁명이 그 전과 그 후에 발생했던 다른 혁명들과 구분되는 것은, 그것이 퍼져나간 속도의 급속함과 지리적 범위의 광대함이다. 전 유럽이 1848년 혁명에 휩쓸려 들어갔고 혁명은 남미로도 퍼져나갔다. 잠재적으로 최초의 전 세계적 혁명이었다.

 

사실 그와 같은 전 대륙적 또는 전 세계적 규모의 폭발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1848년의 혁명은 유럽 대륙의 선진지역과 후진지역 양쪽에 모두 영향을 미쳤던 유일한 혁명이다. 그것은 가장 광범위하게 파급된 혁명이었으나, 또 가장 성공하지 못한 혁명이었다. 유럽에서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구체제는 다시 복귀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공화국의 경우에도, 새로운 체제는 그 체제 자체를 발생시킨 봉기(蜂起)와는 최대한의 거리를 두려고 애쓰고 있었다.

 

1848년 혁명과 더불어 옛 ‘혁명의 시대’의 정치혁명과 산업혁명의 균제성은 깨어지고 그 모습도 변한다. 정치혁명은 후퇴하고, 산업혁명이 앞으로 나선다.

 

 

1848년을 ‘유럽이 전환에 실패한 전환점’의 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과 거리가 멀다. 유럽은 (전환은 했으되) 혁명적으로 전환하지는 않았던 것 뿐이다. 유럽이 혁명적으로 전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의 해만이 홀로 덩그렇게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혁명의 해는 하나의 전주곡이기는 해도 오페라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대문(大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문을 통과하는 사람이 다음에 부딪히게 될 풍경의 성격을 짐작할 수있게 해주는 그런 건축양식으로 된 대문이 아니었다.

 

1848년의 ‘세계혁명’은 이데올로기의 파노라마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 전까지는 양대 이데올로기(보수주의 대 자유주의)간의 경쟁이었지만, 바야흐로 오른쪽에는 보수주의자가, 중간에는 자유주의자들이 그리고 왼쪽에는 급진주의자들이 자리잡게 됨으로써, 3대 이데올로기 사이의 투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1848년의 혁명은 구체제와 진보적 세력들의 연합군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아니라 ‘질서’와 ‘사회혁명’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베른슈타인(Bernstein)은 1848년 혁명의 감동적인 내용보다는 그것의 결과에 주목하였다. 1848년 혁명은 영웅적인 것이긴 하였지만 그것이 가져다준 결과는 전혀 영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반혁명을 유발하였고 보수반동의 강화에 기여하였을 뿐이었다. 혁명은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혁명적 노력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혁명이 신화에 불과하며 현실을 이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그것은 혁명의 신앙에 대한 그의 경고였다.

 

1848년 혁명은 부르주아들로 하여금 영구히 혁명세력이 아니게 만들어버렸다. 1848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했지만, 정작 부르주아들은 혁명에서 물러났다. 이와 같은 사태의 발전으로, 이후 유럽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와 반동으로 귀결되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혁명은 자유주의 시대를 만들어냈다고 홉스봄은 분석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을 수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한편으로 혁명이란 위험스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계급적 요구가 혁명 없이도 실현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대는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가 확대되었지만, 정치체제 자체는 보수화되어가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1848년 혁명이 유럽에서의 전반적 혁명으로서는 마지막이 되어버린 상황, 혁명은 패배했고 기존의 지배세력들이 그대로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이 사회를 변화시켰던 이러한 상황, 부르주아들이 결코 지배자로서 등장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질서가 점점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확대로 나아갔던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에 대해 홉스봄은 객관적인 토대의 발전양상, 즉 1850년대의 대호황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1850년대에 들어서서 영국의 면제품 수출물량은 2배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프로이센에서는 신설 주식회사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저렴한 자본과 가격상승에 힘입은 자본주의의 발전은 1853년에 나타났던 곡물가격 상승을 상쇄할 정도로 팽창했다. 유럽은 호황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호황이 야기한 정치적 결과는, 혁명에 흔들리던 정부에게는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었고 혁명가들에게서는 희망을 앗아가버렸다.

 

 

아리기는 ‘공산당선언’ 이후 지금까지 140년 가량의 자본주의 역사를 경제적 호황국면과 불황국면을 고려하면서 1848년에서 1896년, 1896년에서 1948년, 그리고 1948년에서 현재까지 대략 비슷한 기간의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 1848년 유럽의 혁명. 프랑스에서는 2월 24일에 공화제가 선포되었다. 3월 2일에는 남서 독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났고, 3월 6일에는 바이에른, 3월 11일 베를린, 3월 12일 빈, 그 직후에 헝가리, 3월 18일에는 밀라노, 즉 이탈리아(이탈리아에서는 이미 이것과 별개의 반란이 시칠리아 섬을 장악하고 있었다)에서 잇달아 혁명이 일어났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았다.

 


자본의 시대

–  에릭 홉스봄 / 정도영 옮김 / 한길사 / 1998.09.15 (1975)

 

1789년부터 1848년에 이르는 시대는 이중혁명에 지배된 시대였다. 즉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주로 영국에 한정되었던 산업의 일대 변혁, 그리고 프랑스가 관련되고 프랑스 국내에 한정되었던 정치적 변혁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혁명(산업혁명과 정치혁명)은 새로운 사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과연 승리하여 득의양양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사회, 프랑스 역사가들이 말하는 이른바 ‘제패하는 부르주아'(conquering bourgeois)의 사회가 될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 당시의 사람들은 오늘의 우리에 비해 한결 더 불확실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부르주아적 정치사상가들의 등 뒤에는 온건한 자유주의 혁명을 사회적 혁명으로 전화(轉化)시키려는 대중들이 채비를 갖추어 버티고 있었다. 자본주의 기업가의 아래와 주변에는 불만을 안고 자리에서 밀려난 ‘노동빈민’들이 성난 물결같이 들끓고 있었다. 1830년대와 1840년대는 위기의 시대였다. 낙천주의자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그 위기가 몰고올 결과가 꼭 어떤 것이라고 감히 예언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도 1789~1848년의 기간에는 혁명의 그러한 이중성이 이 시기의 역사에 통일성과 균제성(均齊性)을 부여하고 있다. 그 시기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선 쓰기도 쉽고 읽기도 쉽다. 그 까닭은 그 시대의 뚜렷한 테마와 뚜렷한 형태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이다. 또 그 연대적 범위도 우리가 인간사에서 그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뚜렷하고 명확하니 말이다.

이 책의 출발점이 되는 1848년의 혁명과 더불어 옛 균제성은 깨어지고 그 모습도 변한다. 정치혁명은 후퇴하고, 산업혁명이 앞으로 나선다. ‘국민들의 봄'(springtime of people)이라 불리는 저 유명한 1848년은 (거의) 문자 그대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럽 혁명이었다. 그것은 좌익에게는 꿈의 순식간의 실현이었고 우익에게는 악몽이었으니, 코펜하겐에서 팔레르모, 브라쇼브에서 바르셀로나에 이르는 러시아 및 터키 두 제국 서쪽의 유럽 대륙 대부분의 곳에서 낡은 체제들이 거의 때를 같이하여 무너졌다. 이것은 예상도 되었고 예언도 되었던 일이었으니, 그것은 이중혁명의 완성이자 그 논리적 소산이기도 한 듯했다.

혁명은 전 세계에서 빠르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도 – 정치 망명가들은 수년 동안 그렇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 아주 최종적인 실패였다. 이후로 세계의 ‘앞선’ 나라들에서는 1848년 이전에 구상되었던 그런 유의 전반적인 사회혁명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한 사회혁명운동의 중심, 따라서 20세기에 나타날 사회주의 체제 및 공산주의 체제를 위한 사회혁명운동의 중심은 주변적 · 후진적 지역에 자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이 다루는 시기에는 그러한 종류의 혁명운동까지도 일화적(逸話的) · 고대적(古代的), 그리고 그 자체가 ‘미개발적’인 것에 머물렀다. 그리고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급격하고도 광범위한, 언뜻 보아 끝이 없는 확장이 ‘선진국’들에게 정치적으로 (혁명 아닌)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주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프랑스의) 정치혁명을 삼켜버리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역사는 한쪽으로 기운 일방적인 시대의 역사이다. 그것은 첫째로 그리고 주로 산업자본주의적인 세계경제의 거대한 진전의 역사이며, 산업자본주의의 진전이 나타내는 사회질서의 역사,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정당화하고 승인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이념과 신조들, 즉 이성과 과학, 진보와 자유주의를 믿는 이념과 신조의 역사였다. 유럽의 부르주아지들은 그 제도, 공적(公的)인 정치적 지배에 나서는 것을 망설이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시대는 부르주아지의 승리의 시대였다. 이 정도 – 아마도 이 정도에 한하는 것이지만 – 까지는 혁명의 시대가 아주 숨을 거둔 것이 아니었다. 유럽의 중류계급들은 민중에게서 겁을 집어먹었고 계속 그 겁먹은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즉 ‘민주주의’란 여전히 그들에게는 ‘사회주의’에 이르는 확실하고도 신속한 서곡(序曲)이라고밖엔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승리하던 때 승자인 부르주아 계급의 일들을 공식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란, 다름 아닌 지극히 반동적인 프로이센 출신의 한 시골 귀족, 프랑스에서는 사이비 황제, 그리고 영국에서는 대대로 내려오는 귀족적 지주들이었다. 혁명의 공포는 현실적이었고, 그것은 뿌리 깊은 근본적인 불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세계 자본주의의 형성과 전개 – 『자본의 시대』 해제

–  김동택 / 한길사 / 1998.09.15

 

1948년 혁명은 유럽 전역에서 혁명이 발생한 해이자 『공산당선언』이 집필된 해였다. 1848년 혁명이 그 전과 그 후에 발생했던 다른 혁명들과 구분되는 것은, 그것이 퍼져나간 속도의 급속함과 지리적 범위의 광대함이다. 전 유럽이 1848년 혁명에 휩쓸려 들어갔고 혁명은 남미로도 퍼져나갔다.

하지만 1848년 혁명은 가장 확실하게 패배한 혁명이기도 했다. 유럽에서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구체제는 다시 복귀되었다. 홉스봄은 그러나, 혁명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이 일방적으로 패배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혁명은 분명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장했던 요구사항들은 비혁명적인 방식으로 이후 유럽 사회를 변형시켜나갔던 것이다.

 

1848년에 발생했던 혁명들은 여러 측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첫째 모두 성공했으나 또 모두 재빨리 실패했다는 점이며, 둘째 사회혁명을 예상케 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혁명의 특성은 이후 유럽에 두 가지 결정적인 사태발전을 낳게 했다. 전자의 경우 유럽에서는 정치혁명이 후퇴하고 산업혁명이 모든 변화의 동인이 되게끔 한 원인이기도 했는데, 후자의 경우는 부분적으로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게끔 한 원인이기도 했는데,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노동빈민 계급의 급진화가 사회혁명을 야기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구체제의 지배계급들만큼이나 겁을 먹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자들은 그 시점부터 혁명에 대한 반대자로 돌아서게 되었고, 구체제의 지배계급들과 타협하여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따라서 1848년 혁명은 부르주아들로 하여금 영구히 혁명세력이 아니게 만들어버렸다. 1848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했지만, 정작 부르주아들은 혁명에서 물러났다. 이와 같은 사태의 발전으로, 이후 유럽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와 반동으로 귀결되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혁명은 자유주의 시대를 만들어냈다고 홉스봄은 분석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을 수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한편으로 혁명이란 위험스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계급적 요구가 혁명 없이도 실현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대는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가 확대되었지만, 정치체제 자체는 보수화되어가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

홉스봄이 서술하고 있는 『자본의 시대』는 모순투성이의 사회인 것처럼 보인다. 1848년 혁명이 유럽에서의 전반적 혁명으로서는 마지막이 되어버린 상황, 혁명은 패배했고 기존의 지배세력들이 그대로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이 사회를 변화시켰던 이러한 상황, 부르주아들이 결코 지배자로서 등장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질서가 점점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확대로 나아갔던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에 대해 홉스봄은 객관적인 토대의 발전양상, 즉 1850년대의 대호황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1850년대에 들어서서 영국의 면제품 수출물량은 2배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프로이센에서는 신설 주식회사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저렴한 자본과 가격상승에 힘입은 자본주의의 발전은 1853년에 나타났던 곡물가격 상승을 상쇄할 정도로 팽창했다. 유럽은 호황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호황이 야기한 정치적 결과는, 혁명에 흔들리던 정부에게는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었고 혁명가들에게서는 희망을 앗아가버렸다.

 


윌러스틴의 세계체제분석

–  이매뉴얼 윌러스틴 / 당대 / 2005.03.17 (1982)

 

1848년의 ‘세계혁명’은 이 이데올로기의 파노라마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전까지는 양대 이데올로기(보수주의 대 자유주의)간의 경쟁이었지만, 바야흐로 오른쪽에는 보수주의자가, 중간에는 자유주의자들이 그리고 왼쪽에는 급진주의자들이 자리잡게 됨으로써, 3대 이데올로기 사이의 투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1848년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두 가지 사건의 발생이 무엇보다도 핵심적이었다. 한편으로 근대시대 최초의 진정한 ‘사회혁명’이 발생하였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도시노동자들이 지지하는 하나의 운동이 프랑스에서 일정 권력을 획득하였고 이 운동은 메아리가 되어 다른 나라들로 퍼져나갔다. 이 집단의 정치적 지배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음에도, 이 사건은 그동안 권력과 특권을 누리던 집단들을 경악시켰다. 동시에 또 다른 혁명 혹은 일련의 혁명이 발생하였다. 역사가들은 이를 ‘민족들의 봄'(the springtime of the nations)이라고 불렀다. 상당수 국가에서 민족봉기, 민족주의적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들 역시 성공적이지는 못했음에도, 마찬가지로 그동안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들을 경악케 하였다. 이 두 종류의 혁명의 조합은 세계체제가 그 다음 세기와 그 이후까지 겪어야 하는 하나의 패턴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바로 반체제운동이 핵심적인 정치적 행위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1848년 세계혁명의 불길은 갑작스럽게 타올랐지만, 그후 몇 년 동안 강력한 탄압이 뒤따르면서 결국은 진화되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전략, 곧 이데올로기에 관한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하였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분명한 교훈을 끌어낼 수 있었는데, 그들은 40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국무재상(실제로는 외무부장관 격이다)으로 있으면서 유럽의 모든 혁명운동을 질식시키기 위해 고안해 낸 신성동맹(the Holy Alliance)의 배후를 조종하여 왔던 메테르니히와 그와 입장을 같이한 사람들이 추진한 맹목적인 반동전술이 실제로는 생산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볼 때, 메테르니히 일파의 전술은 전통을 보존하거나 질서를 수호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노여움과 분노를 자극하였고 반정부세력들을 조직화시켰으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기존질서를 약화시켰다. 영국은 1848년 이전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급진적 운동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1848년 혁명을 피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국가였다. 보수주의자들은 이에 주목하였고, 마침내 이들은 영국의 이 비밀을 1820~50년에 로버트 필(Sir Robert Peel)이 설파하고 실행한 보수주의 양식으로부터 찾아내었다. 이 보수주의는 급진주의가 장기적으로 발호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시의적절한(하지만 제한된) 양보전술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그후 20여 년 동안 유럽에서는 필의 전술이 ‘계몽된 보수주의’의 형태로 뿌리를 내렸고, 이 ‘계몽된 보수주의’는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번성하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 급진주의자들 역시 1848년 혁명들의 실패로부터 전략적 교훈을 도출해 내고 있었다. 이들은 더 이상 자유주의 세력에 빌붙어 있는 존재로서의 역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1848년 이전까지 급진주의의 주요 원천이었던 자연발생성은 이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연발생적 폭력은 그저 타오르는 불에 종이뭉치를 던지는 행위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 불은 좀더 타오르는 듯하다가 이내 곧 수그러들 따름이었다. 이런 식은 폭력은 결코 오래 가는 연료가 될 수 없었다. …… 급진주의자들은 좀더 효과적인 대안전략을 추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마침내 이 대안을 조직에서 찾아내었다. 곧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조직만이 근본적인 사회변동을 위한 정치적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주의자들 역시 1848년 혁명들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전문가집단에게 의지하는 것의 장점을 설파하는 것만으로는 합리적이고 시의적절한 사회변동을 이끌어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실제로 전문가들의 손에 해결해야 할 사안이 넘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적 영역에서 훨씬 더 능동적으로 활동하여야 했다.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오랜 경쟁자였던 보수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새로이 등장한 급진주의적 경쟁자에 대해서도 동시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만약 자유주의자들 스스로가 정치적 중심으로 표상하기를 바란다면 이는 이들이 내세우는 요구를 ‘중도파적인’ 프로그램을 통해서 제시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으며, 이에 따라 이들의 일련의 전술 또한 일체의 변화에 대해서 반대하는 보수주의와 급진적인 변동을 주장하는 급진주의 사이의 중간쯤에 설정되어야 했다.

 


21세기 자본

–  토마 피케티 / 장경덕 외 역 / 글항아리 / 2014.09.12 (2013)

 

어찌되었든 간에, 1840년대에는 노동소득이 정체되는 가운데 자본은 융성했고 산업 이윤은 늘어났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했기 때문에 당시 어느 누구도 국가 전체를 보는 통계자료를 활용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 사실을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최초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들의 핵심적인 질문은 단순한 것이었다. 반세기 동안의 산업적 성장을 이룬 다음에도 대중의 상황이 여전히 그전처럼 비참하다면, 그리고 8세 미만 어린이들의 공장노동을 금지하는 것이 입법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면, 산업 발전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이 모든 기술 혁신과 이 모든 노역과 인구 이동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기존 경제와 정치 체제의 파산은 명백해 보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장기적인 체제 변화에 관해 알고 싶어했다.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스스로 설정한 과제였다. 그는 1848년 ‘민중의 봄 spring of nations'(그해 봄 전 유럽에 걸쳐 터져나온 혁명들) 직전에 『공산당선언』을 발표했는데, 이 짧고 강력한 텍스트는 그 유명한 “한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 선언은 혁명을 예언하는 서두만큼 유명한 말로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현대의 산업 발전은 부르주아지가 생산을 하고 그 생산물을 전유하는 바로 그 기반을 발밑에서부터 무너뜨린다. 따라서 부르주아지가 생산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꾼들이다. 그들의 파멸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똑같이 필연적인 것이다.

……

…… 사실 그의 주요 결론은 ‘무한 축적의 원리 principle of infinite accumulation’라고 일컬을 만한 것이다. 즉 자본은 계속 축적되면서 갈수록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움직일 수 없는 경향이 있으며, 그 과정에 아무런 자연적 제약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파멸을 예언한 근거다. 자본의 수익률이 끊임없이 감소하거나(그래서 자본축적의 엔진을 꺼뜨리고 자본가들 사이에 격렬한 투쟁을 부르거나) 국민소득 가운데 자본가의 몫이 무한히 증가해(그래서 조만간 노동자들이 단결해 폭동을 일으켜) 결국 자본주의는 최후를 맞는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안정된 사회경제적, 정치적 균형은 불가능하다.

……

이 책의 서장에서 간단히 논한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관찰된 가장 중요한 점은 의심의 여지 없이 1800년에서 1860년에 걸친 산업혁명 초기에 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이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가장 완전하고 이용 가능한 영국의 역사적 연구 자료, 특히 로버트 앨런(장기간의 임금 정체를 ‘엥겔스의 정체 Engels’ pause’라고 이름 붙였던)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35~40퍼센트에서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완성하고 『자본』을 쓰기 시작할 때인 19세기 중반에는 약 45~50퍼센트로 10퍼센트가량 증가했다. …… 그러나 19세기 전반에 국민소득의 10퍼센트가 자본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기간에 경제성장의 가장 많은 몫이 자본가의 이윤으로 돌아간 반면, (객관적으로 형편없었던) 임금은 정체되었기 때문이다. 앨런은 그 원인을 주로 기술 변화로 인한 (생산함수의 구조적 변화를 반영하는) 자본생산성의 증가와 농촌에서 도시로의 노동력의 대이동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장기 20세기

–  조반니 아리기 / 백승욱 역 / 그린비 / 2008.12.25

 

영국이 7년전쟁(1756~1763)에서 승리하였을 때 세계우위를 놓고 프랑스와 벌인 투쟁은 끝이 났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국이 세계헤게모니가 된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세계우위를 놓고 벌인 투쟁이 끝나자, 갈등은 세번째 국면에 돌입했는데, 그 특징은 점점 더 커진 체계의 카오스였다. 17세기 초 연합주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이런 체계의 카오스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킴으로써 헤게모니가 되었다.

……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확실히 체계 전체에 걸친 반란의 새로운 물결은 대서양을 차지하려는 투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투쟁이 일단 폭발하자, 반란은 영국-프랑스의 경합이 전적으로 새로운 지반들 위에서 재생될 조건들을 만들어 냈으며, 이런 새로운 경합이 끝난 후 반란은 3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1776 ~ 1848년 시기 전체를 놓고 볼때, 두번째 반란의 물결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와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통치자-피지배자 관계를 완전히 변형시켰고, 두번째로 그 변형에 적절하도록 국가간 체계를 완전히 재편한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세계헤게모니(영국의 자유무역 제국주의)를 수립시켰다.

이런 반란 물결의 깊은 뿌리는 대서양을 차지하려는 앞선 시기의 투쟁으로 소급되는데, 왜냐하면 그 행위자들이 이 투쟁을 통해 등장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정착자, 대농장 노예들, 그리고 대도시 중간계급이 그들이었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과 함께 식민지에서 반란이 시작되어, 맨 처음 영국을 타격하였다. 프랑스 통치자들은 즉각 이 기회를 이용해 실지회복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는 곧바로 1789년 프랑스혁명의 역습으로 되돌아 왔다. 프랑스혁명으로 터져 나온 에너지는 나폴레옹 하에서 프랑스의 실지회복 노력을 배가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정착자, 노예, 그리고 중간계급의 반란을 일반화시켰다.(cf. Hobsbawm 1962; Wallerstein 1988; Blackburn 1988; Schama 1989)

 


이야기 세계사 2

–  구학서 / 청아출판사 / 2002.12.20

 

1848년은 흔히 ‘혁명의 1년’으로 불린다. 전 유럽에서 정치적인 자유를 쟁취하고 민족 감정을 고양시키기 위해 소요와 혁명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는데, 그 원인은 1846년부터 계속된 경제위기와 일부 연관된다. 뿌리가 마르는 감자병이 유행하여 감자 수확은 전무하였고 극심한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죽는 사태가 빈발해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긴장과 불안이 감돌았다. 산업 부문도 농업의 영향을 받아 사업 실패의 급증, 실업, 임금하락 등 불안정이 지속되었다.

일반 민중은 자연히 자신들이 처한 비참함과 곤궁을 정부가 제대로 배려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경제적 위기가 나타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역사가 자크 들로주는 1848년의 이런 현상을 이렇게 결론 지었다.

“경제 위기가 고조되면서 민중은 기존 지배층에 대한 불만을 넘어서 적개심까지 갖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인이 본질적으로 증오를 품고 무기를 들어 봉기하도록 한 요인은 역시 자유의 결핍이었다.”

 


원치 않은 혁명 1848

–  볼프강 J. 몸젠 / 최호근 옮김 / 푸른역사 / 2006.12.29

 

※  한겨레 서평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83535.html
그런데 ‘원치 않은 혁명, 1848’이라니? 이 표현을 이해하려면 그 이전, 그러니까 1830년 7월 혁명까지 거슬러올라가는 18년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7월 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이 보수적 왕조들로부터 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쟁취한 것이었지만, 그 성공은 하층민중의 광범위한 지지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나 급속한 농업해체와 산업화의 물결은 무산자 계급의 열악한 처지를 극한으로 몰아넣었고, 이들의 전방위적 개혁 요구는 이미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부르주아는 급격한 변혁보다는 체제 내에서의 점진적 개혁을 원했고,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적 사태를 두려워했다. ‘신분제 의회’를 고수하려는 부르주아의 태도는 하층계급의 분노를 샀다.

 

1848년 2월22일, 프랑스의 반체제 지식인들은 보통선거권과 공화정을 요구하는 대중집회를 계획했다. 그러나 집회는 금지됐고, 대규모 항의시위가 겉잡을 수 없을만큼 폭발적 사태로 치달았다. 군대마저 시위대열에 합류하자 결국 ‘국민왕’ 루이 필립은 퇴위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의 승리였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도 바로 이 즈음 발표됐다. 일련의 장밋빛 개혁조치들도 가시화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새 공화정에서도 다수 대표자는 ‘혁명적 변화를 원하지 않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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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혹은 광범위하게 말해서 서구)은 아메리카에서 약탈한 은을 다 쓰게 되자 동아시아 무역에서 정상적인 지불 수단을 상실하게 된다. 이 때문에 부득이하게 아편을 지불 수단으로 바꾸어 사용해 대중국 무역의 적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도전 앞에서 중국 정부는 아편 금지 정책을 실시했다.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중국은 패배한다. 또한 영국과 기타 서양 국가들과 체결한 일련의 불평등조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무역항을 개방하게 된다. 대략 동일한 시기에 일본 또한 미국의 무력 위협으로 쇄국 상태를 끝내고 무역항을 개방한다. 이때부터 근대 자본주의가 대대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글로벌 불균형’이 지적된다. 그러한 면에서 영국과 중국의 아편전쟁도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즉, 대 중국 무역적자 해소를 위해 인도산 아편을 수출한 영국은 자국 내 아편을 금지한 중국과 전면전을 치뤘다. 아편전쟁도 결국은 무역의 이익이 한 쪽으로 치우치는 글로벌 불균형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요즘 ‘화폐전쟁’ 이라는 단어도 흔히 듣는다. 아편전쟁도 일종의 화폐전쟁이란다. 매드허 교수는 “19세기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아편전쟁은 일종의 통화전쟁”이라며 “지금과 달리 무력 대결로 이어졌을 뿐”이라고 소개했다.

현재와 비교하면 차 · 도자기 · 비단 등은 중국에서 생산되는 제조품이고 은은 달러에 비유할 수 있겠다. 영국이 아편을 이용해 은을 회수했다면 앞으로 미국은 무엇을 통해 달러를 회수할 수 있을까?  에너지, 곡물 같은 것일까? 아니면 달러 가치 하락, 중국발 금융위기, 새로운 화폐? …. 무력 충돌이라는 카오스적인 상황?

 

자세히 살펴본다.

 


문명과 바다

–   주경철 / 산처럼 / 2009.03.05

 

금·은·구리로부터 카우리 조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화폐들이 대륙 간 이동을 하면서 근대 세계경제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이때 화폐는 단순히 유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강제로 다른 문명권의 문호를 열고 그곳의 부를 유출시키는 일까지 맡아서 했다. 아메리카에서 산출된 은이 여러 경로를 통해 중국에 유입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유럽은 중국의 비단 · 도자기 · 차와 같은 물품들을 대량 구매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수출품이 부족했으므로 그 차액을 결제해야 하는 문제가 생겨났다. 유럽은 아메리카에서 산출된 은을 중국에 송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와 비슷하게 장기간 중국의 부를 유출시키는 화폐 역할을 한 또 다른 사례로 아편을 들 수 있다. 물론 아편을 두고 화폐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 지역의 생산물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 계속 부를 얻었다는 점에서 아편은 은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아편은 중국으로 수입되어 앵속(罌粟)이라는 이름으로 진통제로 쓰였다. 청나라 때에는 강희연간에 포르투갈 상인들이 매년 200상자 정도의 아편을 들여왔는데, 이때만 해도 아편은 고가의 진통제로서 부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약품이었다. 그러나 1781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대중국무역을 독점하고 인도의 벵골 산 아편을 대량으로 수출하면서 일반인의 아편 흡연이 확산되었다.

 

 

영국이 이처럼 아편을 대량 수출하게 된 것은 중국 차 수입과 관련이 있다. 유럽에서 18세기에 차 수요가 급증하였고 따라서 차 수입 대금으로 거액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지불수단으로 필수적이었던 은을 확보하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유럽 각국에서 아메리카의 사탕수수, 담배 같은 상품들을 많이 수입하게 되어서 이제 이 지역으로도 대금 지불을 해야 했으므로 이전처럼 아메리카의 은을 대량 얻을 수는 없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유럽 상인들은 심각한 결제수단 부족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것을 해결해 준 것이 다름 아닌 아편무역이었다.

 

18~20세기 중에 중국의 아편 수입은 실로 엄청난 규모로 증가했다. 1729~1800년 동안 아편 수입량은 20배 정도 증가했고, 19세기 초에 이르면 중독자가 1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런 정도라면 당시 인구가 3억에 달했던 중국의 사회와 국가를 붕괴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1818년에 값이 싸면서도 강력한 효과를 내는 파트나(Patna) 아편이 개발되면서 문제가 달라졌다. 파트나는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 상품의 한 브랜드로서 캘커타·싱가포르·홍콩·광동을 비롯해서 아시아 전역을 석권하여 150년 동안 아편무역과 동의어로 간주될 정도의 대표적인 상품이 되었다. 1839년 중국의 수입량은 이미 천만 명의 중독자가 사용할 양이었으며, 20세기 초에는 중국에 4천만 명의 중독자가 생겼다.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폐인으로 전락하는 사회문제가 제기된데다가, 막대한 양의 은이 중국 밖으로 유출되어서 심각한 경제문제가 야기되었다.
이미 옹정제(1678~1735) 때 아편의 폐해를 인식하고 일반인의 아편 흡연을 금했었고 그 후 가경연간에는 수차례 아편 수입 금지령을 내린 바 있었지만 밀무역을 통해 아편 유입이 그치지 않았다. 유럽 상인들은 아편을 실은 배를 바다에 정박시키고 중국 상인들이 쾌속선으로 실어 나르는 편법을 썼다. 급기야 도광제는 임칙서(林則徐)를 광동으로 보내 몰수한 아편 상자들을 불태우는 식의 강력한 금지 조치를 취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두 차례의 아편전쟁(1840~42, 1856~60)이 일어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영국인들은 이 전쟁이 ‘아편’ 전쟁이 아니라 무역의 ‘자유’를 위한 전쟁이라고 강변했다. 자신들은 아편을 다만 중국 해안까지 수송했을 뿐이고 중국 선박이 상품을 인수한 다음부터는 자신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가증스러운 주장으로 도덕적 책임을 회피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처럼 뻔뻔스러운 영국의 주장에 동조하는 견해가 의외로 많았다. 미국의 6대 대통령을 지낸 존 퀸시 애덤스는 그 동안 중국이 외국인을 깔보았으며, 서양인들이 황제를 접견할 때 노예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는 고두(叩頭)를 강요하는 중국의 무례함에 대해 영국이 무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전적으로 올바른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모두 사건의 실제를 가리는 거짓에 불과하다. 아편전쟁은 무엇보다도 서구가 주도하는 국제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저해하는 지불수단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아편무역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유해한 상품을 수출하는 대가로 중국의 은을 빨아들인 다음 이를 영국으로 송출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였다. 이 점은 당시의 통계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1836년 인도의 아편 수출은 이 나라의 전체 수출액 가운데 1/3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같은 해에 중국의 아편 수입 액수는 1800만 달러(4백만 파운드)로서 아편무역 연구자인 트로키(Trocki)에 의하면 이는 “단일 품목의 교역 중 19세기에 가장 큰 것”이었다. 그 결과 거액의 은화가 중국에서 외국으로 빠져나갔다. 1814~1850년 사이 1억 5천만 멕시코 탈러(근대에 전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던 은화 종류)가 유출되었는데 이는 중국의 전체 화폐공급량의 11%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이 현상은 20세기 초까지도 지속되었다. 1910년 영국은 대서양 방면에서 1억2천만 파운드의 무역적자를 기록하였으나 이 중 많은 부분을 아시아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인도는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와의 교역에서 4500만 파운드라는 거액의 흑자를 기록하였고, 영국에 대해서 6천만 파운드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도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돈을 끌어온 다음 여기에 자신의 돈까지 더해서 영국에 바치는 일을 한 셈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상품 중 하나가 바로 아편이었다.

 

 

아편무역 하나만으로 영국 제국주의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존립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분명 과장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위기에서 벗어나서 점차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데에 아편이라는 ‘유사 세계화폐’가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분명하다.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  문정인 외 / 연세대학교출판부 / 2006.11.10

 

아편전쟁의 문명사적 의의는 이 전쟁이 동아시아문명과 서구문명 간의 첫 무력충돌이자 동아시아 근대사의 기점이라는 데 있다. 제2장에서 권선홍 박사는 아편전쟁을 다원적 국가관과 국가주권원칙을 근간으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고 열국의 쟁탈을 당연시한 서구문명과 단원적 천하관과 화이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상하차등적이고 위계적인 주종관계를 당연시한 동아시아, 즉 중국 문명 간의 충돌로 파악하고 있다.

권 박사는 아편전쟁의 원인을 일차적으로 경제적 이유에서 찾고 있다. 청대의 중국은 명대의 해금정책을 이어받아 폐쇄적이고 통제적인 대외정책을 통하여 자신들의 통치기반을 굳건히 유지하려했다. 무역의 개방을 광주항구 한 곳으로 제한하고 외국상인들은 관허(官許) 상인조합인 ‘공행(公行)’을 통해서만 무역을 할 수 있는 광동무역제도를 시행하였는 바, 이는 아시아의 무역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영국에게 큰 장애물로 작용했다. 영국은 외교적 노력을 통하여 광동무역제도를 타파하고 광주 이외의 항구에 대한 개항 요구, 그리고 서구식 대외관계수립을 요구하는 등, 무역확대를 꾀했으나 중국의 거부로 실패하게 되면서 중국에 대한 강경책을 고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편 문제는 하나의 도화선을 제공했던 것이다. 청조에 의한 아편수입의 금지와 영국 상인이 보유하고 있던 아편의 압수, 소각은 무역확대를 위하여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영국에게 아주 좋은 구실을 제공하게 되었다.

청조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1842년 8월에 남경조약을 체결하게되고, 그 다음 해에는 영국에 대해 영사재판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동년 10월에는 최혜국대우 조항이 포함된 호문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권 박사는 당시 중국이 영국의 치밀한 계획하에 발발한 아편전쟁에 대하여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일종의 소요사태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여전히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체결한 불평등 조약에 대해서도 단순히 영국인들을 달래주는 유인책으로 생각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반면에 영국인들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 측의 조약 이행태도와 대중국 무역에 대하여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중국 시장의 완전개방과 자국공사의 북경상주 등 더 많은 권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조약을 개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의 조약개정 요구가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자 서구 열강들은 전쟁을 일으킬 구실을 찾다가 마침내 1856년 애로우(Arrow)호 사건을 계기로 영불 연합군은 1856년 12월에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급기야는 불평등 조약의 전형으로 간주되고 있는 텐진조약이 1858년 6월에 체결되었다. 텐진조약의 이행을 둘러 싼 마찰은 결국 영 · 불 연합군의 북경 점령으로 이어졌으며 북경조약의 체결을 통해 타결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권 박사는 중국이 20년이란 기간 동안 두 차례 전쟁에서의 패배와 수도의 함락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고서야 비로소 서구문명기준을 수용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한 아편전쟁은 중국과 서구관계에서의 주도권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대사건으로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질서가 붕괴되는 시발점이었으며, 동시에 단일한 지구국제사회가 형성되어가는 가시적 징표로 작용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아편전쟁은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 근대사의 기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명칭에서는 ‘아편전쟁’ 또는 ‘중(청) · 영 전쟁’ 등으로 논란이 있으며, 성격에서도 대체로 서양학자들은 ‘무역전쟁’으로 간주하는데 반하여 중국학자들은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원인이나 책임귀속 문제 등에서도 적지 않은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

 

그러나 넓게 본다면 아편전쟁의 근본적 원인은 동아시아 · 서유럽문명 간의 충돌에서 찾을 수 있으며, 더 본질적인 원인은 무엇보다 영국(서유럽 열강)의 상업자본주의적 팽창정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아편전쟁에 관하여 동·서 문명권 간의 충돌이란 시각에서 국제관계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제2차 아편전쟁(애로우 전쟁, 영불 연합군 전쟁)은 아편전쟁의 연장으로 볼 수 있기에, 여기서는 같이 다루고자 한다.

중국과 서유럽관계는 대체로 아편전쟁 이전까지는 중국의 주도 시기, 양차 아편전쟁 기간(1840 ~ 1860)은 과도기, 그 이후는 서유럽의 주도 시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과도기의 중국과 서유럽 간의 국제관계를 살펴보려 한다.

……

 

무역확대를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려는 영국에게 마침내 그 구실을 제공한 것이 아편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즉 아편문제는 전쟁의 직접적 원인으로 보이지만, 실은 전쟁의 촉매 내지 도화선이었다고 하겠다.

……

 

아편전쟁은 동아시아 · 서구문명권 간의 첫 무력충돌이자 동아시아 근대사의 기점이었다. 우선, 양대문명권은 국제관계의 기본적인 전제에도 차이가 있었으며, 외교와 무역 관념이나 제도 역시 뚜렷한 대조를 보여 주었다. 예컨대 무역을 하나의 기본적 권리라고 주장하는 서구와, 이를 시혜(施惠)차원에서 인식하는 중국과는 쉽게 봉합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중국과 영국은 양대 문명권의 최정상에 있던 나라로서, 각기 자국 문명에 대한 자부심 역시 매우 컸기에 외교적 타협은 거의 불가능하였다고 하겠다.

둘째, 아편전쟁 이전은 중국 주도시기이며,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광동무역제도였다. 그러나 시일이 흐르면서 서구는 이에 도전하기 시작하였고, 외교적 방법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점차 무력사용이라는 강경한 정책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셋째,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였음에도 이를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전통적 관념과 제도를 고수하려 하였다. 결국 중국의 태도를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더 많은 권익을 얻어내려는 서구와 또 한 차례의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당시 외국공사의 북경상주 문제를 둘러싼 양측 간의 대립은 외교 관념과 제도 나아가 문명기준 간의 충돌이란 성격을 갖는다고 하겠다.

넷째, 중국은 20년이란 시일이 소요되고 두 차례 전쟁에서의 패배 특히 수도가 함락되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서야 비로소 서구문명기준을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즉 1860년 이후 중국은 서구국제사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서구 주도 시기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양차 아편전쟁은 중국(동아시아)과 서구관계에서의 주도권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대사건으로,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질서가 붕괴되는 시발점이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단일한 지구국제사회가 형성되어가는 최종단계이기도 하였다. 즉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 서구적 국제관계의 제반 관념과 규범 · 제도 등이 기존의 것들을 대체하여감으로써 점차 오늘날과 같은 국제사회가 등장하게 된것이다. 이와 같이 아편전쟁은 동아시아는 물론 전세계 국제관계사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라 하겠다.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세계화와 생태학적 관점에서)

–   로버트 B. 마르크스 / 윤영호 역 / 코나투스 / 2007.04.13

 

마침내 영국과 중국은 아편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모든면에서 대단히 흥미로웠는데 특히 두 가지 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영국이 중국과 전쟁을 벌이며 새로운 형태의 전함을 사용한 것과 관계가 있다.

선체를 전부 강철로 만든 최초의 전함 네메시스는 아시아의 강에서 벌일 전투에 대비하여 특별히 설계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포함은 영국 해군이 아닌 동인도회사가 제작했다. 영국 해군은 주력함정으로 목재전함-일부는 증기기관을 사용했다-을 선호했다. 영국이 대서양과 인도양을 장악하면서 그 목재전함은 바다를 지배했다. 영국의 제독들은 증기기관을 사용하는 작은 강철전함이 다른 유럽국가들과 벌일 전투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동인도회사는 새로운 전함을 제작하기 위해 은밀히 리버풀의 버큰헤드 아이언 워크사와 계약했다. 그 전함은 다른 전함들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길이 184피트에 폭 29피트였고 홀수는 고작 5피트에 불과했다. 120마력의 증기기관을 사용한 이 전함의 새로운 특징은 목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전부 강철로 제작했다는 것이다.

동인도회사는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다른 지역에 식민지를 확장하기 위해 강에서 활약할 수 있는 전함의 개발에 큰 관심을 가졌다. 1844년에 출간된 네메시스의 자료에 의하면, 중국과의 전쟁은 그저 평범한 강철증기선에 불과했을 이 새로운 전함의 장점을 시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로 여겨졌다. 중국 해안을 따라 흐르는 수많은 강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사실상 거의 측량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전함을 활용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 희망봉을 거쳐 영국까지 물자와 사람들과 편지를 운송하면서 강철증기선의 속도를 입증하는 데도 관심을 보였다. 더불어 아이언 워크사의 소유주도 영국 해군과 계약을 성사시키려는 목적으로 강철전함의 성능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네메시스는 불과 3개월 만에 건조되어 1840년 후반 중국해안에 도착했다. 이윽고 네메시스는 주장강의 거친 급류와 거센 바람에도 탁월한 성능을 발휘하며 중국의 정크선 몇 척을 격침시켰다. 더욱이 1842년에는 중국 중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상업의 젖줄이던 양쯔강과 대운하의 교차점을 봉쇄하는 데 결정적인 역활을 담당했고 중국 남부의 수도인 난징을 위협하는 데도 크게 공헌했다. 이처럼 철저히 완패를 당한 중국의 통치자들은 영국에게 평화를 요청했다. 1842년 중국과 영국이 체결한 난징조약으로 아편전쟁은 종결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구가 중국을 공략하는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난징조약은 서구의 열강들-미국 포함-이 중국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향후 60년 동안 중국 정부의 주권을 박탈하고 관세를 올리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불평등조약’이었다. 중국은 영국에게 홍콩을 양도했고 아편상인들의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멕시코은화 2100만원을 지불했으며 더 많은 항구를 서구의 열강들에게 개방했다. 1차 아편전쟁으로 아편거래는 합법화되지 않았지만 2차 아편전쟁이 일어나면서 결국 합법화되고 말았다.

비록 1차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중국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유일한 원동력은 아니었지만 네메시스는 1793년 매카트니 경이 중국에서 쫓겨난 이후 불과 40년 사이에 영국에서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상징했다. 네메시스는 산업혁명의 수단-강철과 증기기관-이 전쟁의 수단으로 활용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강철전함은 특히 유럽의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 건설에 크게 공헌했다. 실제로 19세기 유럽의 아시아와 아프리카 진출에 대한 역사는 대부분 이런 주제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한편 영국의 강철 제조업자들은 단지 중국과의 전쟁에만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영국의 인도 식민지정부와 동인도회사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아편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또 유럽국가들의 정부는 전쟁기술을 개발하고 실험하는 데 주력했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아편전쟁이었다. 영국의 면직물 제조업자들은 중국 시장의 개방을 기대하며 적극적으로 전쟁을 촉구했다. 이제 증기기관을 활용하여 기계화에 완전히 성공한 맨체스터의 면직물 제조업자들은 세계의 어떤 국가들보다 싼 가격에 수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자유무역’을 주장하고 나섰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인도식민지정부는 전쟁을 통한 수입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아편전쟁에 투입된 영국군의 3분의 2는 마드라스와 벵골 출신의 인도인들로서 영국이 식민지의 국민들을 전쟁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실제로 프랑스의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언급했다. “마치 영국은 그저 중국과의 전쟁에 활용할 목적으로 인도를 점령한 듯 했다.”

……

 

이 책에서 설명하는 근대세계의 기원에 대한 내용은 중국 경제에서 은 수요가 증가하고 중국과 인도가 초창기 근대세계에서 부와 산업생산의 주요한 근원으로 활약하던 1400년대 초반에서 시작했다. 중국의 은 수요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지금까지 다루었던 여러가지 중대한 사건들을 유발했다. 만약 중국에서 은 수요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세계경제에서 유럽의 역활은 현저히 감소했을 것이라고 말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다. 중국의 은 수요와 신세계의 은 공급이 적절히 맞물리면서 유럽은 아시아의 막대한 물자와 무역망을 확보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19세기 중국은 또 다른 물자의 수요가 발생하면서 세계경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다. 이번에는 중독성이 강한 마약인 아편이었다. 그러나 4세기 전, 은의 경우와 달리 아편의 수입과 소비는 중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더욱이 아편의 수요는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중국 정부가 아닌 무려 4,000만 명에 달하는 중독자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그럼에도 1800년대 중국의 아편 수요는 전 세계적으로 활발한 경제활동을 자극했다.

비록 1차 아편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영국은 중국에서 아편의 공급과 판매를 합법화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국은 식민지로 확보한 홍콩을 중국의 견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운영할 수 있는 전초기지로 활용했다. 그 후 20년 동안 홍콩은 영국 아편무역의 중심지였다. 영국의 무역회사들은 중국의 수많은 중독자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해마다 무려 5만 상자(650만 파운드)에 달하는 아편을 수입했다.

아편이 중국으로 유입되고 중국의 은이 유출되면서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도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의 상선들은 곧장 아시아의 해안으로 진출하여 영국의 상인들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1784년 미국에서 출발한 첫 번째 상선이 중국에 도착했는데, 그 시기는 미국이 독립한 지 불과 1년 후였다. 1800년대 초반 미국도 러셀컴퍼니를 필두로 하여 적극적으로 아편무역에 참여했다. 미국은 주로 터키에서 아편을 생산했고 영국은 인도에서 생산하는 아편을 독점했다. 미국이 아편무역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거두면서 동부해안의 유명한 대학들은 상당한 기부금을 확보했고 보스턴의 피바디 가문과 뉴욕의 루즈벨트 가문은 더 많은 재산을 축적했으며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전화를 발명할 수 있는 자본을 확보했다.

 

2차 아편전쟁-1858~1860, 이 전쟁의 원인이 된 영국 선박의 이름을 따서 애로호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이후 영국은 중국에게 아편판매를 합법화하도록 강요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마약을 판매할 수 있는 더 많은 시장이 개방되었지만 그동안 마약무역의 중심지였던 홍콩은 영국과 미국의 상선들이 곧바로 중국의 항구들로 직행했기 때문에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새로운 아편생산지가 확보되고 시장까지 개방되면서 페르시아, 인도, 중국의 상인들마저 마약무역에 가담했다. 1870년대 중국도 마약거래로 한창 열기를 뿜던 해안의 무역지대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지방을 중심으로 양귀비를 재배하고 아편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수입대체’ 현상은 과거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농민들이 목화를 재배했던 바로 그 지역들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지역들에서 중요한 환금작물이던 양귀비가 더 많은 농지에서 재배되었고 결국 다른 작물들을 재배할 토지가 현저히 감소했다. 그 지역의 농민들은 더 많은 수입을 거두었지만 그만큼 식량공급에 차질이 생길 경우에 발생할 위험부담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1800년대 후반 중국으로 유입되거나 중국 내부에서 생산되는 아편의 양이 엄청난 규모로 증가하면서 중국 인구의 10퍼센트에 달하는 무려 4,000만 명이 아편을 흡연하게 되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 중 절반이 ‘심각한 아편중독자’ 라는 사실이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은 세계에서 생산되는 아편의 95퍼센트를 소비했기 때문에 그 사회적 · 경제적 · 정치적 영향은 불을 보듯 훤한 것이었다. 거의 모든 도시들에는 아편소굴이 있었고 아편의 판매와 사용은 중국인들에게 일상생활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 아편흡연은 상류층의 취미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국민적인 소비품이 되었다. 실제로 20세기 양귀비재배와 아편제조를 통해 중국 정부는 세금을 확보했고 농민들은 현금을 벌어들였다.

이제 인도의 상황과 유럽의 산업화과정을 살펴본 후에 다시 한 번 19세기 중국의 아편소비가 세계경제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는 중국이 스스로 마약의 폐해를 자초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자기 책임이 있다는 사실과 영국이 대포를 앞세워 개방을 강요했고 그 후 중국과 인도가 아편의 소비자와 생산자로서 세계경제에서의 특별한 역활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여기서는 중국의 아편수요와 더불어 인도의 산업구조의 파괴가 영국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막대한 이익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편무역은 세계무역의 전체구조를 역전시킬만큼 엄청난 수익을 창출했다. 15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유럽은 신세계의 은을 기반으로 아시아무역에 접근했고 그 결과 엄청난 양의 은이 인도와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아편은 그 흐름을 역전시키면서 엄청난 양의 은이 영국으로 유입되었다. 역사학자 칼 트로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만약 아편이 없었다면, 아마도 대영제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첫 번째 경기침체는 1857년에 일어났지만 곧바로 경기가 회복되면서 1870년대 초반까지 호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1873년에 시작된 두 번째 경기침체는 1896년까지 지속되었다. 그 20년 동안 영국의 물가는 무려 40퍼센트까지 하락했다.

1870년대까지 대부분의 산업국가들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자유무역을 선호했고 저마다 그 혜택을 충분히 누렸다. 그러나 1873년의 경기침체는 그런 상황을 변화시켰다. 먼저 독일과 이탈리아가 자국의 면직물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올렸고 1890년대에는 프랑스, 미국, 러시아도 차례로 관세장벽을 구축했다. 오직 일본만이 서구와 맺은 불평등 조약 때문에 관세를 올리지 못했다. 새로운 관세장벽의 여파로 영국은 미국과 유럽의 다른 산업국가들에 수출하던 물량이 감소했고, 그로 인해 상당한 국제수지 악화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영국 내부에서도 보호관세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만약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한창 산업화를 시도하던 당시의 세계는 아마도 1930년대 대공황과 잇따른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발생한 배타적인 무역장벽과 같은 심각한 위축기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세계자본주의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숨 막혀 죽을 뻔했던 것이다.

오직 영국만이 아시아, 특히 인도와 중국에서의 아편거래로 엄청난 무역흑자를 올리면서 체제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 이런 엄청난 무역흑자를 바탕으로 영국은 부채-특히 미국과 독일에 대한 부채-를 안정시키면서 자본주의 발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실질적인 측면에서 중국의 아편수요와 영국의 아편무역은 1873년부터 1896년까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침체를 헤쳐나갈 수 있었던 한 가지 요인이었다.

 


금융대국 중국의 탄생

–    전병서 / 밸류앤북스 / 2010.05.03

 

아편전쟁의 원인을 금융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모두 중국정부의 통화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정부는 과도한 은의 집중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중국정부는 과도한 유동성을 해외로 배출해 투자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이를 국가 내부의 전비로 사용해 인플레이션을 자초했다. 치솟는 무역흑자를 그대로 방치하여 과도한 은을 보유함으로써 무역 불균형 시정을 위한 서구열강의 침략을 불러온 것이다. 국제금융시장의 환경을 이해하지 못했고 폐쇄적인 시장과 과도한 유동성의 집중이 결국 서구열강들의 먹잇감이 되는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비관적으로 본다면 현재 중국은 청나라 말기와 상황이 비슷하다.

중국산 제품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선진국 자본주의다. 중국 차를 마실수록 그 맛에 중독되는 것처럼 중국산 공산품에 전 세계가 중독되었다. 18세기에는 비단과 차였던 것이 이제 생활용품으로 바뀌었다. 또 18세기에 영국이 차와 비단 값으로 전 세계에서 모아들여 중국에 준 것이 은이었다면, 지금은 미국이 지불하는 ‘종이 달러’가 은의 역활을 하고 있다.

18세기 아편전쟁의 아픈 기억을 가진 중국으로서는 고민이 많다. ‘은의 덫’에 걸려 나라를 서방에 내준 것 처럼 ‘달러의 덫’에 걸려 국가안전이 다시 위험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2조 4000억 달러의 세계 최대 외환보유고를 안고 고민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돈 많은 중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금융위기다. 중국은 시장이 열려 외부로 자금이 유출되기 시작하면 금융위기가 올 만큼의 돈이 화끈하게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

중국과 일본이 국채를 매각하겠다고 해도 미국이 겉으로는 걱정하는 체하지만 끄떡 않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달러로 묶어놓은 전 세계의 금융망 때문이다. 만약 일본과 중국이 미국 국채를 팔아치운다고 할 때 혹시라도 미국이 같이 죽자고 달러가치를 폭락시켜버리면 세계 최대 달러표시 자산 보유국인 중국과 일본이 가장 크게 타격을 받는다. 달러 기축통화의 지위를 이용해 채권국들을 함부로 도망갈 수 없게 묶어놓은 것이다.

 


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 (전쟁편)

–   류펑 / 김문주 역 / 시그마북스 / 2009.11.05

 

영국에는 1825년과 1837년, 2차례에 걸쳐 경제공황이 발생했다. 그러자 영국은 이 무거운 짐을 벗기 위해 해외에 상품을 투매하거나 해외국가의 자원을 쟁탈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러한 조치는 경제공황의 책임을 다른 곳에 전가시키는 한편 아편전쟁을 촉발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혹자는 “전쟁을 통해 신속히 경제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 주장한다. 하지만 영국은 아편전쟁 이후에도 수차례 경제공황에 시달렸으며, 전쟁은 결코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

 

서기 1825년 이전, 영국에는 일시적으로 공업생산량이 급상승한 적이 있었다. 1825년의 공업생산량은 1820년에 비해 3분의 1가량이나 급증했으며 생철 생산량과 면화 소비량 역시 각각 58%, 39% 가량이나 성장했다. 그러나 국내외 시장의 수요는 아직 공업발전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막 나폴레옹 전쟁에서 벗어난 유럽 대륙은 처참히 파괴된 후로 아직 시장소비량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게다가 흉작까지 드는 바람에 유럽 국가들이 영국 상품을 사들일 여력은 거의 없었다. 영국의 상품수출액(유럽)은 1814년의 2690파운드에서 1825년에 이르러 1460파운드로 급감했다. 미국과 중남미 쪽의 수출액 역시 1815년의 1580파운드에서 1340파운드로 줄어들었다.

때마침 영국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하락하면서 국내시장도 큰 타격을 입었다. 1824년~1825년의 실질임금은 1792년의 고작 5분의 4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생산과 소비의 간극이 커져가면서 드디어 경제는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특히 공업생산과 대외무역 부문의 타격이 가장 커서 약 3,549개 기업이 파산하고 80여 개의 은행이 지급을 중단했다. 잉글랜드은행의 황금비축량은 1824년 3월의 1,390만 파운드에서 1825년 12월에 이르러 120만 파운드로 줄어버렸다. 면화, 양모, 생사 등의 소비량은 기존의 3분의 1로 줄어들었고 석탄소비량 역시 대폭 급감했다.

이렇게 대량생산되는 물건을 소비할 수 없게 되자 영국 지도자들은 소비를 진작시킬 여러 방안을 생각해냈다. 이 중 가장 주요한 대책으로 극동의 중국 등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방법이 논의되었다.

……

 

중국사회는 아편전쟁의 패배, ‘남경조약’을 비롯한 일련의 불평등 조약 체결 등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정치적인 독립을 유지했던 정치체제는 아편전쟁 후에 영토주권마저 빼앗겼고,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경제체제는 서서히 세계자본주의 국가의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로 전락해갔다. 중국은 점차 반식민 반봉건사회가 되었다.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  강재언 / 하우봉 역 / 한길사 / 2003.06.20

 

19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 삼국은 ‘서양의 충격'(western impact)에 크게 흔들렸다. 거기에 어떻게 대응하는냐는 각 나라의 존망을 건 중대 문제였다. 물론 동아시아에 대한 서양의 충격이 19세기에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19세기의 특징은 유럽의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한 대포와 군함, 말하자면 노골적인 무력으로 쇄국체제를 억지로 열고 포교와 무역을 강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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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 이전 청나라는 광둥(광저우)을 서양무역의 유일한 창구로 지정했는데, 그 무역을 거의 독점한 것이 영국의 동인도회사였다.

그런데 1820년대 영국에서는 이제까지 귀족들의 취미였던 차 마시기 풍습이 대중화되어, 막대한 중국차를 수입했다. 영국에는 그것에 상대할 만한 수출품이 없어 수입이 초과됨에 따라 지불해야 할 은이 부족해졌다. 동인도회사는 인도산(産) 아편에 눈을 돌려 사상(私商)을 통해 중국으로 밀수하도록 했다. 그 결과 막대한 양의 중국 은이 유출되었다. 은 유출에 의한 은 가격의 상승이 중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민중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동전의 가치가 떨어졌는데도, 세금은 원칙적으로 은으로 납부해야만 했다. 은 가격의 상승은 그것이 오른 만큼의 세금이 는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흠차대신 임칙서(林則徐, 1785~1850)가 아편을 금지한 것은 중국의 자위권 행사라고 할 수 있지만, 영국의 무력 앞에 그러한 정의는 통하지 않았다. 실은 이 아편전쟁이야말로 청조 붕괴의 전초전이었는데도, 베이징 중추부의 위기의식은 매우 이완되어 있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먼 남쪽 변경 오랑캐와의 분쟁이 생긴 것 정도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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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광저우에서 일어난 애로호 사건(Arrow Incident)이 처음으로 청조의 중추부를 직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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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중국에는 옛날의 강희제(재위 1661~1722) · 옹정제(재위 1723~1735) · 건륭제(재위 1735~1795)와 같은 강력한 군주가 없고, 19세기에 들어와 아편전쟁 · 제2차 아편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어리고 약한 황제가 계속 되었던 점은 같은 시기의 조선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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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중국보다 10년 정도 늦게 1854년에 미일화친 조약(美日和親條約)에 따라 개국했다. 그 전년에 에도 바쿠후에게 개국을 권유했던 미국의 필모어(Millard Fillmore) 대통령의 국서를 전달하기 위해 페리(Matthew C. Perry) 준장이 이끈 미국 군함 4척이 미우라 반도의 우라가항에 입항해 무력적인 압력을 가하고 개국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상조약은 그로부터 4년 후인 1858년에 체결되었고, 같은해 미국에 이어 네덜란드 · 영국 · 러시아 · 프랑스와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른바 안세이 5개국 조약(安政五個國條約)이다. 물론 영사재판권을 포함하는 불평등조약이지만, 다만 무력전쟁에서 패배해서 맺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국과 다르다. 따라서 통상조약의 체결을 4년 동안이나 연장해가면서 교섭 상대인 서양을 연구하고 대서양 외교의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일본으로서는 행운이었다.

또 하나 일본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개국 이전에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를 창구로 하는 네덜란드와의 통상을 통해 난학(蘭學)을 배웠고, 네덜란드 상관장(商館長)이 에도 바쿠후에 제출한 『화란풍설서』(和蘭風說書)로 유럽의 동향과 아편전쟁의 정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이 1842년 청나라는 영국과의 전쟁 그리고 그 전쟁에 패한 결과 난징 조약을, 일본도 미국의 무력적 압력에 굴복해 1854년에 가나가와(神奈川)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그리고 이 대외적인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대책을 세우게 되었다.

대외적 위기에 대한 반응은 중화주의의 완고한 틀에 빠져 있던 청나라에 비해 일본 쪽이 민감했다. 일반적으로 일본사에서 바쿠후 말기의 ‘지사'(志士)라고 하면 양이론자(攘夷論者)를 들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양이를 강행했을 경우에 결과는 어떠했을까. 1863년 사쓰에이 전쟁(薩英戰爭: 일본의 사쓰마 번과 영국의 전쟁), 1864년 영국 · 프랑스 · 미국 · 네덜란드의 연합 함대에 의한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은 그것이 일본의 자멸을 초래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대외 위기에 적절히 대응한 로주 수좌(老中首座)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1819 ~ 1857)야 말로, 한국에서 보면 부러울 정도로 진정한 ‘지사’였다.

그는 1843년 로주(老中 : 바쿠후 최고 관직으로 조선의 정승급에 해당함)가 된 이래 죽을 때까지 14년 동안 외교와 국방을 주재했다. 1844년에 가이보 가카리(海防掛)를 신설해 훌륭한 인재를 기용했고, 1855년에는 나가사키에 가이군 젠슈쇼(海軍傳習所), 1856년에는 반쇼 시라베쇼(蕃書調所, 나중에 도쿄 대학의 전신이 됨)를 만들어 양학 교육에 착수했다. 가이군 젠슈쇼에서 교수는 네덜란드 해군 장병이 담당했고 교련시에는 함선을 사용했으며, 반쇼 시라베쇼의 교수와 조교는 모두 일본인 난학자가 맡았다. 바쿠후 말기의 존왕양이 사상은 바쿠후 타도와 왕정복고의 원동력이 되기는 했지만 메이지 유신 후의 ‘문명개화’ 노선이 성공한 요인은 바쿠후 말기 양학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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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1840년 아편전쟁에 비해, 1860년 영 · 불 연합군이 텐진에서 베이징으로 침입했던 제2차 아편전쟁(애로호 사건)은 조선의 위정자들에게도 대외적 위기의식을 증대시켰다. 대원군의 군주권 강화정책은 대외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쇄국양이책과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제국 (EMPIRE)

–  닐 퍼거슨 / 김종원 역 / 민음사 / 2006.11.30

 

영국 무역(특히 인도 아편 수출)에 중국 항구가 개방되길 원했을 때도, 영국인들은 다시 해군을 파견했다. 물론 1841년과 1856년 아편전쟁은 아편 그 이상의 것을 둘러싼 것이었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는 1841년 전쟁을 또 하나의 미개한 동방의 전제주의에 자유 무역의 이익을 전래하기 위한 십자군 운동으로 묘사했다. 한편 그 충돌을 끝낸 난징조약은 아편을 명백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제2차 아편전쟁(애로호 사건)은 부분적으로는 영국의 위신을 지키는 것 자체가 목적인 싸움이었다. 지브롤터 태생의 유대인이 영국 국민으로서 그의 권리가 그리스 당국에 침해당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리스 항구들이 봉쇄되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821년 이후 중국 당국이 금지한 아편 수출이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는 재정에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면 아편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믿기는 매우 어렵다. 1841년 전쟁의 결과로 홍콩을 획득함으로써 얻은 유일한 실질적인 이익은 그곳이 자딘 매디슨 같은 회사에 아편 밀무역 사업을 위한 기지를 제공했다는 점이었다. 노예 무역을 폐지하기 위해 배치되었던 바로 그 해군이 또한 마약 무역을 확장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은 실로 빅토리아 시대 가치관의 가장 터무니없는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다.

 


신 중화주의

–  윤휘탁 / 푸른역사 / 2006.06.17

 

원래 유가적(儒家的) 전통 문화는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이 동아시아 사회에 침략해 오기까지 동아시아인들의 정신 세계를 지배해온 강력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군림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동 · 서양 간의 힘의 우열이 드러나면서 그 위상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당시 유가적 전통 문화는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한 중화주의 우월감과 사회 내적인 차별 질서를 그 근저에 깔고 있어서 주변 민족 혹은 이질적인 다른 사회에 대해 근원적인 경멸감을 배태하고 있었다. 그 결과 유가적 전통 문화 속에 침잠해 있던 중국인들(‘소小중화주의’를 자처하며 중국 문화 속에 매몰된 조선인들을 포함해서)은, 주변 민족이나 서양 사회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들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가적 전통 문화는 서양 세력의 침략에 직면해서도 서양의 본질과 그들의 객관적인 세계적 위상을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그에 대처할 수 있도록 효율적인 정신적 무기로써 작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격변하는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양육강식의 논리가 위력을 떨치던 근대 사회에서 동아시아 종주국인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것을 계기로,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서양의 우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서양 문화가 급속하게 유입하거나 범람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동아시아 침입과 주도권 장악은 서양인들에게 문화적 우월감을 심어주었고, 서구적으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한 일본인들에게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무한한 긍지로 여길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당시 동아시아 사회의 근대화는 사실상 서구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인들은 서양에 대한 패배감과 열등감 · 분노를 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동 · 서양 간의 문화적 우열감은 급기야 양 지역의 종족적 우열을 고착화시키는 양상으로까지 비화되기 시작하였다.

 


화폐전쟁 3

–  쑹훙빙 / 홍순도 역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07.25

 

그렇다면 청나라 정부의 중앙은행은 어떻게 몰락했는가? 주요 원인은 국제 은행가들이 중국의 본위화폐인 은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본위화폐가 흔들리면 금융 시스템은 바로 마비되고 경제 역시 침체된다. 또한 국가의 정치와 방위 시스템도 와해되며, 급기야 타국의 침략에 맞서 싸울 힘을 잃고 남에게 좌지우지되는 운명을 면치 못한다.

국제 은행가들이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중국의 화폐시스템을 정복해야 했다. 따라서 아편전쟁은 무역전쟁이라기보다 중국 화폐인 은을 독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아편전쟁이 인도, 미국, 아프리카 또는 일본, 한국, 동남아 등지에서 발생하지 않고 유독 중국에서만 발생한 이유도 모두 여기에 있었다.

아편무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중국의 본위화폐인 ‘은’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이 대중국 아편무역을 개시하기 전까지 중국은 국제무역에서 뚜렷한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다. 중국의 찻잎, 도자기, 비단 등 대표적인 3대 특산물은 세계 각지의 시장에 널리 수출돼 큰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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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16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약400년 동안 시장화 수준과 화폐경제의 발전 속도에서 유럽을 한참 앞질렀다. 바로 이 때문에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한 13만3000톤의 은 중 4만8000톤이 결국 중국으로 유입될 수밖에 없었다. 국제무역의 기본 구조를 살펴보면, 국제무역에서 거래되는 상품 대부분이 중국에서 생산된 반면 서구 국가들은 세계의 주요 자원 대부분을 약탈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상품이 물밀듯이 서구 시장에 수출되자 서구의 은은 끊임없이 중국으로 유입됐다.

이처럼 서구의 은이 끊임없이 동방에 흘러들면서 세계 금융 질서는 심각한 불균형에 직면했다.

유럽의 은이 장기간 일방적으로 중국에 유입되면서 급기야 17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유럽에 은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은 가치의 하락과 더불어 대외무역 역시 크게 활기를 잃었다. 1649~1694년까지 유럽의 연 평균 은 유통량은 1558~1649년의 연 평균 유통량보다 무려 50% 이상 감소세를 보였다. 반면 황금 유통량은 50% 가깝게 증가했다.

은의 감소세는 이해가 되는데 황금은 어떻게 유통량이 증가한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7세기 초 황금과 은의 가격 비율은 중국 광주에서 1:5.5~7, 영국에서 1:16이었다. 따라서 유럽의 은은 중국에서 고수익 벌크 화물 구매와 더불어 중국의 금과 바꾸는 데도 사용됐다. 황금과 은의 가격 비율이 2배 이상 나는 차이를 이용해 유럽의 은으로 중국, 일본 및 인도에서 황금을 바꾸면 폭리를 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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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은이 동방으로 유입되는 과정과 아시아의 금이 서구로 흘러드는 과정은 동시에 진행됐다. 그 결과 영국에는 황금, 중국에는 은이 대량으로 비축됐다. 이때 문제의 관건은 금과 은 가운데서 어느 것이 본위화폐의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동서양의 향후 수백 년간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대영제국의 국력이 크게 팽창하면서 1717년에 벌써 금본위제 시행을 위한 토대가 완벽하게 마련됐다. 영국이 법적으로 금본위제를 확립한 것은 1816년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100년 전부터 이미 금본위제를 시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영제국 은행가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런던을 세계 금융 중심지로 삼고 전 세계적으로 금본위제를 실시하여 대영제국이 잉글랜드 은행을 통해 전 세계에 파운드화 신용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구미 선진국들을 금본위제의 핵심 멤버로 삼고 기타 개발도상국들을 파운드화의 속국으로 만들어 전쟁과 폭력을 동원해 이 시스템을 수호하고, 파운드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이용해 전 세계 자원을 최대한 장악하고 지배하고자 했다. 최종적으로는 전 세계의 부와 전 인류를 지배하는 것이 목표였다.

영국이 전 세계에 금본위제를 보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다른 국가의 은본위제를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다. 그중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대적하기 가장 어려운 국가는 바로 중국이었다.

국제 은행가들은 다년간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중국의 은본위제에 치명적 일격을 가할 무기를 발견했으니, 그것은 바로 아편이었다. 그리고 이 전략을 구체적으로 추진한 주체는 바로 동인도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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